〈주장〉이 사회는 왜“국가보안법”을 버리지 못하는가!

김파란 l 농민

: 국가보안법 제정 73년이다

미셀 푸코가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을 해석하면서 문학이라고 하는 정의가 이 ‘저주의 몫’ 또는 ‘저주받은 부분’이라는 이 이상의 정의는 어렵지 않은가? 이런 말을 하는데 문학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멋진 정의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조르주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이라는 책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간단하게나마 알 필요가 있다. 저주의 몫이라는 게 뭐냐? 그 사회가 버린 부분이 있고, 그 버린 부분이 그 사회의 진실을 담고 있는 예술이고 성스러운 그 무엇이라는 거다. 바타이유는 이것을 모든 신성한 것은 그 사회가 버린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럼 그 사회는 그걸 왜 버렸냐? 그래야 그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푸코가 “동일자가 버린 부분이 타자다”라고 철학적으로 잘 설명한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풀자면 사람은 자기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인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하는 것도 자기를 규정하는 강력한 그 무엇이 되지만 내가 버리려고 하는 부분이 나를 더 잘 말해줄 때가 있다. 작가들이 자전적인 소설을 꼭 쓰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걸 한국 사회에 대입시키면 1945년 이후 남한 사회는 이 사회가 되려고 하는 자유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 친미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런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했다. 그럼 바타이유가 말한 한국 사회가 버리려고 하는 것, 즉 한국 사회의 진짜 본질이 있는 것은 뭘까? 바로 반공이다.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 이렇게 하면 미국, 일본하고 한국은 구분이 안 된다. 근데 진짜 한국 사회 특징은 공산주의를 버리는 것, 부정하는 것이다.

이 버리기도 합의한 곳에서 무엇이 나올까? 희생물이 나오게 된다. 사실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로 국가안보에 어떠한 손상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한 사회가 이 정도로 끔찍하게 우경화된 사회가 된 그 핵심은 ‘분단’이고 이것을 실천적으로 수구 기득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든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그러니 국가보안법은 사실 이북과 어떤 문제가 아니라, 남한 사회에 내부의 문제다. 외부인화된 내부의 적을 만들어 소수를 희생양으로 찍어서 나머지는 그 희생양을 보면서 저들이 진짜 적이야…쟤들만 죽이면 사회는 안정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이건 좀 무식하게 말한 지라르의 이론이기도 하다)

그럼 물어보자. 국가가 금기한 것에 순응하고, 이것을 위반한 아니 위반할 수밖에 없는 소수의 사람을 버리고 이 사회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나? 내가 현재 한국 땅에서 학문과 표현 언론의 자유를 떠들며 고상한 말을 하는 대학교수나 문예인들에 대한 혐오감은 그들이 철저하게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모든 금기에 반항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기만적 모습 때문이다.

예컨대 ‘제국의 위안부’ 소송 국면에서 박유하 씨를 옹호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하는 데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책이라는 것을 또는 글이라는 것을 누군가 금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금지하려는 주체를 보면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제국의 위안부’소송의 주체는 국가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책이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도 박유하 교수는 이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이 아닌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이 박유하 씨 책을 위해 쏟은 정성과 연대의 반의반이라도 국가보안법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더라면 이 사회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조국 지지를 외치며 성명서를 내는 각 단체의 면면과 박유하 소송에 이름을 낸 사람들의 면면을 같이 보면 이 사회 주류에 의한 연대와 정의가 얼마나 투명할 정도로 편파적인지 알 수 있다.

철학, 학문, 문학 더 넓게 예술 이런 것들의 존재 증명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위반하면서 자신의 정점을 건드리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철학이라는, 학문은 학문이라는, 문학은 문학이라는 기존 합리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외치는 “노동해방”이 그 예이다. 모든 투쟁은 노동의 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노동에 종속될 수 없음을 알기에 노동해방을 외친다. 바타이유가 평생을 통해 남긴 ‘위반’과 ‘전복’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 철학이나 문학이 아닌 노동계라는 것은 노동은 이론이고 실천행위라는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가 다음(미래)으로 넘어가려면 해방 후 현재까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가두고 있는 이 금기(반공, 국가보안법)를 깨야 한다. 금기의 위반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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