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과학적 사회주의 vs 낭만적 페미니즘

서의윤 | 노동전선 회원

1. 1부-과학적 사회주의 그리고 낭만적 페미니즘

여성론, 아우구스트 베벨 저, 이순예 옮김, 까치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1부에서 다루는 인류 사회 내 생산 양식 및 분배 형태의 변화와 그에 따른 여성의 지위 변화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난다. 이 부분의 가장 큰 성과는 평등한 원시공산제의 모권이 어떤 이유로 부권 중심의 가족 체계로 넘어갔는지를 밝힌 것이다. 즉 현 상태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이 발생하게 된 물질적인 조건들의 변화와 그에 따른 당대의 도덕률이나 혼인 관계의 변화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베벨은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사례를 들어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모권 중심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현재 남성의 자리에 여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과는 아주 다른 가족 체제를 가진 남녀평등 사회였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모간이 제시하는 푸나루아 가족 체계에서는 어머니의 자매들의 자식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들로 인식되었고, 어머니의 형제들의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조카로 나와는 사촌으로 인식되었다. 씨족의 통제권은 여성이 가지고 있어서 제몫을 다 하지 못하는 남자는 추방되어 달가워하지 않는 자신의 씨족으로 돌아가거나 부인의 화를 산 남편은 굶주리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재산이 공유되고 분배가 부의 축적이 아니라 곧 생존이었던 시기의 모습이다. 모권과 부권이 대립하게 된 것은 첫째로 성별에 따른 분업 때문이었다. 그 중 생산 수단에 대해서는 더 접근하기 쉬웠던 쪽은 남성들이었다. 곧 수공업이 농경에서 분리되면서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아내의 여자형제들이나 그 자식들이 아닌 ‘자신의 자식들’에게 상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었고, 자식들이 적법한 상속권을 가진 자신의 자식임을 확신하기 위해서 여성에게 정절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복수혼의 체제에서 남녀의 배타적인 결합과 그 아이들을 자식으로 삼는 형태의 혼인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은 경제적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남성들은 자유로운 혼외 성관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이로써 배타적인 혼인과 함께 매춘이 발생했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재산과 부권의 확립, 성매매의 등장은 함께 일어난 일이었다.

기독교가 등장한 이후에는 여성은 이 세상에 원죄를 심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발생하게 되었던 남녀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피지배자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로 생겨났다. 중세에는 영주의 지배권이 아버지나 남편이 경제적인 이유와 그로부터 발생한 도덕적 관념에 따라 여성에게 요구했던 배타적인 혼인 관계보다 강했다. 그러나 동시에 안정적인 결혼 상태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영주들이 누리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기 때문에 장려되었다. 하지만 영주들의 폭정과 도시의 발달, 유랑 빈민들의 증가, 십자군으로 인한 남녀 수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공인된 관리와 감독 하에 성매매가 급속도로 퍼져갔다. 이는 여성들, 특히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여성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었으나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남성들에게는 자유분방한 기질의 인정과 낭만적인 기사도 정신으로 위장되는 양극의 시기였다. 이후 도시의 발달과 함께 여성들은 수공업 길드에 남성과 똑같이 참여하여 장인이 되고 도제들을 거느렸지만, 수공업이 쇠퇴해가면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경쟁자로 여겼고 다시금 여성의 산업 활동을 금지했다. 결혼은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을 포함한 새로운 가정이 공동체에 경제적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확실해야만 가능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곧 길드로 대표되던 수공업이 몰락하고 공장에서 대량 고용이 일어나면서 다시 여성들은 생산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베벨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이후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해 가면서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했던 핵가족 단위는 붕괴 직전까지 몰리게 되고 임금의 고려 대상은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이 된다.

이렇듯 베벨의 『여성론』에서는 여성차별의 발생이 잉여 생산물과 사유 재산이 낳은 계급의 분화라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등장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여성 억압의 기제는 경제적인 조건들을 바탕으로 한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베벨은 어느 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 구조였던 가부장제를 분리하여 특별히 다루지 않으며 가부장제라는 단어조차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차별의 기원을 태초부터라고 주장하며, 페미니즘이 말하는 가부장제란 여성의 몸과 출산이라는 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태초부터 남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다른 계급인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 구조를 가리킨다. 즉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 자체가 여성 차별을 낳으며 그렇기에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근원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가부장제 역시 역사 속에 있었던 한 사회 구조의 형태가 아니라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 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레드스타킹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원천적인 억압과 계속된 억압을 설명하는 것은, 그 기원을 설명하느라 프로이트 자신도 어쩔 줄 몰라 했던 갑작스러운 가부장제 혁명이 아니라 여성의 생식 생물학이다. 모계제는 남성의 완전한 자기실현을 위하여 가부장제로 가는 한 단계이다. 남성은 여성을 통한 자연숭배에서부터 자연정복으로 나아간다. 비록 여성의 운명이 가부장제 아래에서 상당히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좋은 운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과거의 모든 향수에도 불구하고 모계제가 여성의 근본적인 억압에 대한 대답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록 나중의 가부장제보다 여성에게 조금 더 유리했을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모계제는 가계를 계승하고 재산을 상속하는 다른 수단이고,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것을 허락하지 않는 수단일 뿐이다. 숭배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숭배는 다른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일어날 수 있고 결국 그 머리는 남성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틀어 문화의 모든 단계와 모든 유형에서 여성은 생물학적 기능 때문에 억압되어 왔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 가부장제를 계급 모순을 포함한 모든 문제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며,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가부장제와 계급 갈등을 함께 가져가려고 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태초부터 존재하는 여성 억압 구조인 가부장제를 대전제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비록 그 앞에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붙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적 관점과는 크게 다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를 밝히거나 거기에 역사성을 부여하지 못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몰역사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이렇듯 페미니즘 이론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맑스의 유물론의 언어를 가져다가 비과학적인 전혀 다른 의미로 비틀고 있으며 맑스주의를 포섭하거나 보완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예를 든 『성의 변증법』에서 파이어스톤은 맑스와 엥겔스가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시켰다고 비판하면서 ‘경제적 계급과 달리 성적 계급은 생물학적 현실로부터 직접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남녀의 생식 기능의 차이가 남성 일반이 여성 일반을 지배하는 계급체계를 필연적으로 가져오며, 그러한 결과를 낳는 욕구는 생식 기능의 기본적인 불균형에 따른 성 심리 형성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의 이유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가 계급 자체를 철폐하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 맑스적 분석의 한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성 그 자체를 기초로 하는 유물론적 관점이라는 용어를 제시하고 있을 뿐, 다음과 같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문학적 문구를 제외한 어떤 인용도 하고 있지 않다.

남성은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처음에는 성적 특성이 아닌 이원성의 기호로 세계를 본다. 그러나 동일자로 자신을 확립시킨 남성과는 다르게 여성이 타자의 범주에 처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타자는 여성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남녀 성차별의 원천인 욕구를 낳는 성 심리의 정체를 밝히지도, 그것이 어떻게 ‘유물론적으로’ 각 시대에서 작용하는 지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마치 중세시대 마녀재판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이렇듯 확언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다분히 관념적이고 감성적이며, 그 안에서 언어를 통한 체계화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 3부-미래의 청사진, 남녀 차별의 철폐냐 차이의 해체냐

한 가지 또 중요한 것은 베벨의 『여성론』은 그 시작부터 남녀의 성차와 그에 따른 분업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사유재산이 생기면서 남성들이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생산 수단을 구하고 관리하는 것이 남성들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러한 최초의 분업은 남성과 여성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 차이와 기질의 다름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베벨은 그것을 본래적이며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곧 사회 전체에 잉여적인 생산물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차원의 분업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차원의 변화는 남녀에게 모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안의 관계와 도덕을 변화시킨다. 현재의 불합리한 남녀 관계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대해 설명하는 2부에서도 남녀의 성차에 대한 긍정과 그것이 비참하게 무시될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들이 심지어 임신 중에도 남성들과 서로 겨루듯이 선로공사장에서 무거운 화차를 끈다든가 아니면 건물 지을 때나 석탄과 철망 등을 정선할 때 허드렛 일꾼으로서 생석회와 시멘트를 섞고 무거운 돌짐을 지는 것을 보는 일은 단연코 유쾌한 일이 못 된다. 이때에 이 여성에게서는 여성적인 모든 것이 제거되며 그녀의 여성성 자체가 짓밟히는 것이다. 또 이와는 반대로 남성들이 온갖 잡다한 직종에서 남성성을 박탈당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사회적 착취 및 갈등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우리의 파괴된 사회관계가 사물들의 상태를 뒤엎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성차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을 남녀 차별의 근거로 삼는 현실에 대해서도 눈을 감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베벨은 사회 구조로 인한 남녀 차별 안에서 남성들이 여성의 낮은 지위를 고수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종류의 편견과 통념을 엄중하게 비판한다. 그 상당수는 현대의 우리조차도 너무나 당연해서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로 새로운 인식 전환을 위한 충격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헷갈리지 말아야 할 점은 이렇듯 성차에 대한 인정으로 인해 결론적으로 억압의 본질이 곧 남녀의 성차이며 그래서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베벨은 ‘남녀 사이에 생리적, 심리적으로 서로 다른 상태가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고 하면서도 ‘그렇지만 이 사실이 남녀의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의 근거가 될 수는 결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청사진을 제시한 3부에서 베벨이 말하는 사회주의 사회 속 ‘미래의 여성’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사회의 여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기만적 지배와 착취에 예속되지 않으며 남성에 대해서 자유롭고 남성과 동등하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 교육도 남성과 똑같이 받는다. 단 성과 성적 기능의 차이에 따라 분리교육이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예외를 둘 수 있다. 제반 생활조건이 자연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직되어 있으므로 여성도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마음껏 계발하고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베벨의 주장이 가진 논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맑스주의자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간의 우월성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의 뇌의 무게를 달고 심리학적 구조를 비교하는 것은 부르주아 학자들이나 몰두할 일이고, 역사적 유물론의 지지자들은 각 성이 가진 본래의 특성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각의 개인만이 가장 온전하고 가장 자유로운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그 개인만이 가장 넓은 범위에서 모든 타고난 성향을 계발하고 적용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지지자들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사회 문제와 분리된 어떤 특별한 여성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성의 종속에는 그 이면에 특정한 경제적 요소들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특정들은 부차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경제적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즉 과거 어느 시점에 여성에 대한 지배를 가져온 그 힘들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비로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근본적인 영향과 변화를 줄 수 있다. 즉,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적 생산 노선들을 따라 조직되는 세계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다.

반면에 페미니즘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각각 별개의 계급으로 보고, 여성 계급은 태초부터 자신들을 억압해 온 남성 계급에 맞서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성차, 성 구분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인 이유로 인해 권력의 성적 불균형이 생겼다는 사실을 자연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통제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성격이기 때문에 ‘일시적 독재로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를 요구하듯이, 성적 계급의 철폐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피지배계급(여성)의 봉기와 생식조절에 대한 점유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사회주의의 언어를 가지고 와서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 목적이 경제적 계급 특권의 철폐뿐만 아니라 경제적 계급 구분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듯이, 페미니스트 혁명의 최종 목적은 최초의 페미니스트 운동의 목표와 달리 남성 특권의 철폐뿐만 아니라 성 구분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계급 철폐와 그에 따른 여성 해방 과정이라는 주장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녀가 가지고 있는 성적 본성이 해체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가 도래한다고 해도 여성에 대한 억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정체성 정치를 통해 자칭 사회주의자들까지도 계급과 함께 불합리한 현재의 모든 구분들을 무력화해야만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일환으로 남녀 구분의 철폐를 내세우는 것도 이런 페미니즘이 역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앞서 본 것처럼, 맑스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인간 본성을 선호한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인간 본성 형태보다 더 자유롭게 얻어지며, 인간 본성의 핵심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고려 사항이 현재(와 과거)의 성과 관련된 본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본성이나 성별화된 본성은 어쨌든 이런 자유가 부족할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독특한 인간 본성과 이런 독특한 여성의 본성이 모두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에 관한 사고 자체에 모순이 있다. 여성(과 남성)은 인간이다. 인간은 제한적인 사회 조건으로 정해진 제한된 본성과 자유를 본질로 하는 본성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 정의상 어떤 성별화된 본성도 성별화되지 않은 본성보다 더 제한될 것이다. 그리고 성별화된 본성을 자유롭게 획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절대적 금지는 없지만, 그런 본성을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다는 사고를 거부할 만한 경험적인 근거는 상당히 많아 보인다.

성별이 가진 본성, 즉 그들의 표현으로 성별화된 본성이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그래서 페미니즘이 목표로 하는 유토피아 근처에는 사회적인 성차가 제거되면서 성별에 따른 심리적 성차가 제거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에 따른 인공생식과 사이보그 등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인 정희진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페미니스트로 꼽은 도나 헤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 세계의 피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 오이디푸스 이전의 공생,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비롯하여 부분들을 상위에서 통합해 그 전체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전유하여 얻어지는 유기적 총체성을 향한 유혹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해, 많은 이야기들 끝에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3. 2부-그리고 적나라한 현실과 구체적인 대응의 필요성

베벨 『여성론』의 2부는 유쾌하지 않은 현대의 여성 차별의 현실들을 다루고 있다. 베벨이 보는 인간의 성은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의 한 부분이자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데도 불구하고 은밀함을 위장한 무지와 도덕을 가장한 수치로 가려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건강하게 발달하는데 장애물이 된다.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건강하게 본성의 욕구를 발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편견과 제도에 가로막혀 일탈하기 쉽다. 베벨은 항상 남녀를 구분하여 보지만은 않는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존재를 구성하는 충동을 해소해야 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국가의 기초가 되는 혼인 제도가 그러한 본성에 부합하는 제도인지 아니면 소유 제도에 따른 결과인지를 물으며, 무엇보다 경제적 요인이 혼인, 자녀의 수, 신생아 살해, 이혼, 자살 등에 미치는 영향들을 따져본다. 그러나 남성이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와 제도에 묶여 영향을 받을 때 여성은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받는다. 남성들은 우월한 사회적 지위와 도덕에서의 위치를 가지고 면을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자유로이 성적 욕구도 만족시킬 수 있으나 여성들에게는 엄격한 성적 규칙들이 적용되는 것이다.

중상류층 이상의 사람들에게 오늘 날 결혼은 계산된 경제 행위 중 하나가 되었다. 횡행하는 금전결혼의 한 이유로 베벨은 많은 것이 많은 사람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다는 일반적 인식이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정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경우에 생기는 커다란 고통을 든다. 그러한 박탈감을 단번에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금전결혼인 것이다. 결혼은 결코 이상적이거나 순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치는 지속되고 현실이 가진 괴리는 점점 커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이상을 지키지 못하는 혼인 관계라고 할지라도, 또는 그 보다 더 심한 갈등과 문제가 있을 지라도,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은 쉽지 않다. 특히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생활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반면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비교적 원하는 대로 결혼을 할 수는 있으나 생활고로 인한 갈등에 시달린다. 자녀들은 방치되고 남편은 노동에 지쳐 밖에서 안락을 구하며 아내는 노동에 더해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노동 시장의 싸구려 인력이 되어 직조업 등의 분야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력이 되어가면서, 여성이 남성을 밀어내고 또 그 여성은 유년 노동에게 밀려나는 새로운 산업 사회의 질서가 생겨났다. 베벨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공업과 소량 생산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임을 못 박으며, 여성과 아동 노동 착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특히 교육 분야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대한 강한 저항이나 결혼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매춘, 그리고 여성의 법적 지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남성 중심 사회의 이중 잣대는 학식과 도덕, 보호라는 이름을 쓰고 여성의 경험 반경을 집 안으로 한정해왔다. 경험의 한정은 사고와 감정의 한정을 낳고 그것은 마치 여성의 천성인양 취급되며 사회적인 편견을 만들어냈다.

여성의 지위 면에서 그 진보가 손에 잡힐 정도로 뚜렷해졌고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된 현재까지도, 가사니 가정이니 하면서 여성의 “천직” 운운 하는 소리가 하루도 쉬지 않고 들려온다. 이런 설교는 여성이 보다 고급의 직업영역에서 한자리 차지하려 할 때, 예를 들면 고등교육 분야나 행정관리, 의학계나 법조계, 자연과학 분야 등에 종사하려 할 때 한결 더 높아진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항의가 학식이라는 너울을 쓰고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 또한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결국 교육과 직업, 법적인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은 여성들을 때로는 경쟁자로 보고 때로는 열등한 존재로 보며 때로는 그들의 충분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베벨은 ‘여성의 공적 활동을 반대하는 피상적 구실들은 모두 남녀 관계가 자연스럽게 되어 남녀 사이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반목이 사라지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바벨이 얘기하는 ‘합리적인 사회’에는 남녀 간의 불화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에 대해서 배우며 그것이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솔직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바벨은 ‘우리가 그 어떤 관점에서 출발하든간에 결국은 다음과 같은 문제로 귀착될 것이다. 현대 사회 상태의 근본적인 개혁, 그리고 그것을 통한 남자와 여자의 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사실 이후 3부에서 나오는 사회주의 미래의 청사진과 2부에서 통계를 인용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현실 속의 여성 차별 사이에는 약간의 간극이 있다. 사실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며 일상의 행동을 이끄는 기준이며 또한 가장 난감하고 모호한 것이 이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우리는 제도적 조치와 사회의 변혁이라는 베벨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한쪽 손에 쥐고서도, 다른 한 손에는 여전히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질문을 들고 있다.

4. 남은 과제−흐르는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전근대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 예로 마녀사냥을 들 수 있다. 중세 유럽 사회가 가진 가장 큰 숙제는 기독교의 신과 그 신이 내린 규율에 대항하는 인간적인 고통,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모난 돌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십자군 전쟁으로 신앙은 흔들리고 기독교 기준으로 이단적인 요소들이 민중에게 파고들고 있었고, 떠오르고 있던 세속적인 권력들은 종교의 힘을 무력화하면서도 종교가 가진 상징물들은 그대로 이용하여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다. 말하자면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고 개인들은 무력하게 그 안에서 갈팡질팡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 마녀 사냥은 단순히 광기어린 집단들의 무작위적인 행위가 아니었으며 당연하게도 당시의 사회가 가진 가치관에 따르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자이자 의사였던 빌헬름 아돌프 스크리보니우스는 마녀로 지목된 여성의 손발을 묶어 물속에 던져서 가라앉으면 무죄, 물에 뜨면 유죄를 선고하는 마녀 판정법을 개발하였다. 이 방법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정법으로 큰 호응을 받으면서 널리 퍼졌다. 로마법이 유럽 전역에 퍼지기 전이었던 이 시기에는 주장의 방법인 선서 등에 따라 그 주장의 진위여부가 판단되었고, 재판 역시 판사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형태로 고문도 합법이었다. 교황이 독일 이단 심문관으로 임명한 이들이 쓴 『마녀 잡는 망치Malleus Maleficarum』이라는 문헌도 있어서 절차적 동일성을 갖추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밀고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있었다. 즉, 마녀 사냥은 객관성과 과학성이라는 근대의 가치들이 나오기 전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사고와 공동체 중심적인 도덕률이라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나름의 근거를 내세웠으며 그에 따른 절차와 장치들을 갖춘 당대의 합목적성을 가진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회의 과도기는 곧 안정화되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근대적인 사회로 이어졌다. 마녀사냥이 횡행했던 바로 그 독일에서 칸트와 헤겔이 등장하며 근대 철학의 길이 닦였다. 법적인 면에서도 논리와 증거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법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객관성, 합리성, 체계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세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 ‘죄와 벌’에 대한 기존의 기준은 미신과 광기가 되었고, 새로운 기준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며 그 절차에 있어서 객관성을, 그 판단에 있어서 합리성을 중시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성적으로 세계를 인식하지 않고 유기체적으로 자연에 동화되지 않으며 낭만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종교적인 세계관의 자리에는 과학이 불러온 과학적 세계관이 놓였고 도덕률도 그와 함께 변화하였다. 즉,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요구들에 대응하는 당시 인간과 사회의 가치관과 그 질서 유지를 위한 반복적인 행위, 그리고 그러한 필요에 따라 세계를 보고 분석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그 중 우리는 그 끄트머리에 위치한 맑스의 사상을 좇아 사회의 물질적 토대가 그 사회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틀 안에서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에 집중하여 사고하는 사적 유물론을 통한 여성해방론을 얘기하고자 하면서 그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을 살펴보았다.

페미니즘에서 얘기하는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 인공수정과 사이보그 등 미래 기술, 이성과 논리라는 그들 주장에 따르면 남성 중심적인 현 사고 체제를 벗어나는 새로운 가치 체계의 형성 등 다소 미래 지향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죄적인 성별 모순이라는 이원론과 물질이 아닌 언어유희를 바탕으로 한 이론의 정립, 목적을 먼저 설정한 후 거기에 맞게 거꾸로 짜이는 체계, 그리고 그 실천적인 기준에서 주관적인 정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마녀사냥의 시대, 곧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마녀사냥이 유감이라고 해서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마녀사냥을 하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러한 페미니즘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제목을 달고 맑스주의의 언어를 차용해감으로써 개념의 혼동과 오해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과학적 사고의 결실인 맑스주의 언어를 되찾고 그 동안 활성화되지 못했던 유물론적 관점의 여성해방 운동의 이론과 실천적 기준들을 다시 논의하고 정립해야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특히 미비했던 부분인 맑스주의 여성해방의 실천적 전략들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한편에서는 근대의 산물인 기존의 부르주아 법체계 및 그 바탕이 되는 공화주의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에 더불어 전근대를 소환해 낸 페미니즘이 내세우는 주관적 정서와 낭만적 언어 중심의 실천적 기준들 역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시대를 거슬러 전근대의 언어가 되살아나게 된 사회적인 조건들이 무엇인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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