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계 급

[1]이 글은 상반기 노동전선 정치강좌(2021년 3월 30일) 강의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손호만 | 전교조해고자원직복투위원장

1. 들어가며

1980년 그러니까 이 땅에 민주노조운동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까지‘계급’이란 용어는 노동자, 인민, 민중 등과 함께 금기어에 속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술 한 잔 먹으며 말할 때조차도‘계급’이란 용어는 친구의 눈치를 살피게 했으며 경계심으로 주위를 돌아보게 했다. 행여 같이 일하는 현장 동료들이 주변 가까이에 있을 때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또 길을 걸을 때도 가방 속에 들어있는 책의 제목이나 목차에 계급이란 단어가 없는지 신경을 써야 했다. 조직보안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활동가들은 불심검문에 대비해 더욱 그래야 했다. 이렇듯 이 땅에서 계급이란 용어는 일상적인 사생활에서조차 국가권력을 의식하게 만들며 운동권과 민간인을 구분 짓게 했지만, 덕분에‘계급’의 중단 없는 사용만으로도 이는 곧바로 국가권력과 싸움으로 성격이 규정되며 동시에 ‘변혁운동’확대의 과정이 되도록 했다.

문제는 지금이다. 수십 년간의 국가권력과의 투쟁 성과로‘금기’는 해금되며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지만, ‘해금’된 작금의 현실은 오히려 허탈감과 진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조합원들이 귀담아들을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계급과 변혁’이 언급되는 순간 어느새 표정들이 변한다. 구시대 유물 취급을 한다. 과거 운동을 같이했던 동지들조차 “혁명이 올 것 같냐”“너는 아직도 혁명 타령이냐”고 면박을 준다. ‘교조주의자’‘계급환원론자’‘경제결정론자’ 등등 무차별적인 딱지가 날아든다.

한때 ‘계급’이 가장 뜨거웠었던 시절도 있었다. NL과 PD로 대별되는 변혁노선 논쟁과 사구체 논쟁이 활동가를 넘어 대중의 관심사였던 시절, ‘계급(론)’은 좌우를 가르는 핵심 키워드였다. 어쩌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지식인들이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도 작금 이 땅의 좌파들이 ‘계급’을 논하는 이유는 80~90년대의 유산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 계급론이야말로 변혁노선(혹은 이론)에서 좌파의 정체성을 가르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2007-08년 세계 금융공황 이후 ‘자본론’과 사회 양극화가 다시 소환되고 이에 따라 ‘계급’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지고 있다. 보수 언론들조차 1% 대 99%이라느니 20 대 80의 사회라느니 사회 불평등을 말하고 어설프게 ‘부동산계급’이라는 계급론 저서까지 소개한다.

돌이켜 보면‘계급’이라는 용어는 세계사의 중요시기마다 항상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과정과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혁명과정에서, 중국 및 여타 제3세계 혁명의 과정에서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어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계급 착취’가 존재하는가?” “현대 자본주의는 수정되었다는데 여전히 계급 사회로 볼 수 있는가?”“대체 계급이 없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말로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등에 대해서도 질문들이 계속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140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5년, 동구권이 붕괴한 지 3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이러한 논의에 다시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변혁적 노동운동에서 ‘계급(론)’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지위를 갖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편 최근 몇 년 사이에 전교조 활동과 관련하여 겪었던 당혹스러운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2017년 비정규직노조들과의 연대집회를 이유로 벌어진 전교조 조합원들의 대규모 탈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문재인 쇼’를 계기로 전면화된 학교 비정규직과 전교조 조합원과의 갈등,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노동시장 분절과 양극화에 따른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의 소리.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노조집행 간부들의 모습들. 투쟁 속에서 동고동락을 같이했던 동지들이 갑자기 심각한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절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설득이 어려웠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아픈 상처들은 이 문제들이 계급론과 무관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글은 이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단지 계급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코자 노력하는 이들의 고민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작은 바람일 뿐이다. 또한 계급(론)이라는 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매우 광범하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다. 계급론이란 제목이 붙은 이상 이름에 값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범위가 매우 광범위할 뿐 아니라 계급을 둘러싼 그동안의 첨예한 논쟁을 최소한으로 담기 위해 언급해야 할 것 또한 광범위하다. 나의 이론 능력상의 한계를 감안하여 이글은 민주노조운동의 활동가들이 알아야 할 초보적인 내용으로 꾸며진다. 즉 계급(론)의 기본 개념과 그동안 계급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들에 대한 간단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쓴 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변혁운동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향후 정세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 계급이란 무엇인가

1) ‘계급’에 대한 기본 이해

근대 사회에서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을 발견한 것은 전혀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앞서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이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였으며 또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여러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했습니다. 나 자신이 뭔가 새로운 일을 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입증한 데 있습니다. 첫째, 계급의 존재는 전적으로 생산의 발전에서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규정된다. 둘째,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결된다. 셋째, 이러한 독재는 그 자신, 단지 ‘모든 계급의 철폐와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담당한다.

마르크스 <바이데마이어에게 1852년에 보낸 편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체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생산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관계는 법으로 표현되고 형식화된다),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역할,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처분하는 사회적 부의 크기 및 몫, 그리고 그 부의 취득양식에 의해 구별되는 대규모 집단이다. 계급은 사람들의 집단인데, 그중 한 집단은 특정한 사회경체체제에서 차지하는 상이한 지위로 인해 다른 집단의 노동을 전유할 수 있다.

레닌

계급을 구분하는 기본적 준거는 사회적 생산에서 각 계급이 차지하는 지위 그리고 그 결과 생산수단과 각 계급이 맺는 관계이다.

레닌

LH 부동산투기 문제가 연일 언론을 달구고 있다. 선거 이슈를 삼키며 지지율을 강타하자 이에 화들짝 놀란 문재인 정권은 허둥대며 부동산 대책이란 것을 쏟아내고 있다. 백약이 무효다. 촛불 이후 개혁을 기대하며‘문재인의 공정’을 믿어왔던 노동자·민중들이 배신감과 허탈감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더는 속지 않겠다고 냄비 물 끓듯 난리다. 하지만 작금 지방선거와 내년의 대선이라는 선거 행사는 노동자·민중들로 하여금 부동산 투기와 양극화에 가장 핵심인‘계급’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있다. 또다시 보수끼리의 정치적 대립과 쟁점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왜곡시키고 있다.

노동계급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가 사회학자든 경제학자든 적어도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이론가라면 마르크스를 제외하고서 계급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계급이라는 용어는 흔히 알려져 있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안물이 아니다. 위의 편지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듯 당시 근대 사회에서는 계급이라는 존재와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미 로마 시대에 시민들을 여러 등급으로 분류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바 있고(이것이 용어 사용의 처음이다), 이후 고전 정치경제학이나 공상적 사회주의, 근대 정치사상에서는 계급이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었고, 또 탐구되었다. 단지 마르크스에게서 이 계급 개념이 특권화된 것은 단순히 사회적 불평등의 지표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계급관계이고, 역사발전의 기본 동력을 이루는 것이 계급투쟁[2]노동자의 책 – 용어해설 [계급 階級] 참조.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계급은 인류 사회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도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저작에서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계급에 대해 별도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잘 정식화하여 잘 나타낸 것은 오히려 레닌이다.

레닌의 정의를 중심으로 계급에 대해 정리를 해 보자면, 계급이란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일정 체제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생산수단에 대한 그들의 관계, 그리고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의해 그들이 사회적 부를 수취하는 방식과 그 분량에 의해 구분되는 인간의 큰 집단을 말한다. 계급은 본질에서 정치적, 사회적인 체제에서의 인간의 지위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체제에서의 인간의 지위인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지위의 차이도 본질에서는 경제상의 지위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또한, 경제체제에서의 인간의 지위는 단순히 분배의 대소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단에 의한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즉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가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계급이 구분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면 그 지위로부터 타인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다. 이 착취, 피착취의 관계가 계급의 본질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점에서 특정 사회의 기본적인 계급관계는 모순적이고 적대적이다.[3]계급론, <한국 사회 구성체의 현단계> 2009. 11. 17. 동대신문,

2) 계급의 가장 중심 개념은 ‘착취[4]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 외,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계급 소외 차별』 책갈피, 14쪽. 본 발제문에 인용부호를 하지 않은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이 … Continue reading’다.

마르크스는 인류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사회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관계가 사회에서 부를 생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이 사회관계를 생산관계라고 불렀는데, 생산을 둘러싸고 인간이 맺는 이 인간관계는 본질에서 두 가지의 성격을 갖는다. 첫째,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착취 관계[5]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백과를 찾아보았다. “착취 관계 : 계급 사회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가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에게 그 노동의 … Continue reading’다. 착취는 차별이나 천대의 일종이 아니다. 계급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해야 하고, 그들의 노동 덕분에 소수는 노동의 부담에서 해방된다. 그 소수가 다수에게서 부를 뽑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착취’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원시공산제 사회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항상 착취가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 로마의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 소유주들은 채찍을 휘둘러 노예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다. 자본주의 착취 관계는 모습이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고, 임금으로 가져가는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한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 몫 이상으로 창출하는 가치를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이 잉여가치가 자본가 이윤의 원천이다. 착취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착취 관계의 양쪽에 있는 집단들 사이에 갈등이 내재돼 있다. 많은 사람이 현대사회는 상품의 등가교환에 의해 공정하게 운영되는 사회이므로 착취가 없는 사회라고 말하지만, 상품의 생산과정에 착취가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둘째,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이다. 이는 부를 생산하는 수단을 사회의 어느 집단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느냐는 문제이다. 봉건제하에서 농노들은 토지, 농기구, 가축 같은 생산수단에 어느 정도 긴박되어 있었다. 당시의 착취 관계는 경제적 강제력보다는 영주들의 무력으로 뒷받침됐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수단에 가서 일해야 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착취 관계는 주로 경제적 방식으로 강제된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했다.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누구를 위해 일할지 자본가를 고를 자유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하지 않고 굶어 죽을 자유가 있다. 요컨대 두 가지 질문을 던져 한 사회의 계급 구조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가? 둘째, 누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가? 이런 접근법의 가장 큰 강점은 계급을 관계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학은 계급을 독립적 범주들로 본다. 마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통조림 캔인 것처럼. 반면 마르크스의 관점으로 보면, 계급 간 적대와 계급투쟁의 발생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착취 관계를 둘러싸고 언제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3) 마르크스 ‘계급’의 철학적 이해[6]프란차스 외, 박현우 편역, 『사회계급론』, 12쪽

이론의 기초가 되는 철학으로부터 ‘계급’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마르크스 철학(역사유물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렵고 딱딱한 과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 계급 개념을 좀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싶은 분께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한마디로 사회관계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이다. 계급 이외의 사회관계들은 계급 관계 때문에 조건 지워지는 현상형태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때의 계급은 유물론적 정식에 의해 물질적 생활 과정의 실체인 생산의 사회조직 내에서의 관계 즉 생산관계의 사회적 형태다.

1) 인간은 자기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을 변형시켜야 하는바, 거기서 무엇보다 우선적인 변형은 인간노동에 의한 물질적 실재의 변형이다. 이러한 물질적 실재의 변형은 원자화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화한 사회적 분업 때문에 성취된다. 생산과정들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분업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관계, 즉 생산관계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담당자들이 잉여노동의 수취를 둘러싸고 맺는 관계가 계급관계이다.

2) 자본주의하에서 생산관계는 대립적이고 비대칭적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 집단의 노동력을 잉여가치라는 형태로 착취하기 때문에 대립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들 상호가 서로를 지배하려는 경향 때문에 그러한 대립에서도 반드시 주요한 측면(결정하는 측면, 일반적으로 자존)과 부차적 측면(결정되는 측면, 노동)으로 나누기 때문에 비대칭적이다. 사회계급은 따라서 대립적 본질을 지니고, 서로를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투쟁적 속성을 지닌다.

3) 실재의 생활과정 속에서는 물질적 생활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생활 및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유물론적 입장은 물질적 실재와 비물질적 실재를 모두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단 평면적이고 무차별적인 상호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물질적 변형의 사회적 관계(계급관계)가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입체적이고 차별적으로 그 관계를 인식한다.

4)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하지만, 생산력의 질적 변화는 생산관계의 질적 변화에 의해서만 보증받을 수 있다. 즉 계급투쟁을 통한 생산관계의 변화만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인간 생활의 물질적 결정의 원리와 사회변혁에 있어 계급투쟁의 우위의 원칙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정하는 요소의 변화는 결정되는 요소인 존재조건의 변혁 때문에 가능하다는, 변증법적 관계를 온전하게 성립시키는 것이다. ‘인간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명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4) 막스 베버와 추종자들의 ‘사회학’

현대 사회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막스 베버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을 비판하면서 사회의 계층이 너무 복잡하므로 경제적 결정론으로 다 담아낼 수 없다고 했다. 시장에 의해 규정되는 기능과 직업에 기초한 사회적 분화를 나타내기 위해 계급이라는 경제적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대해서도 중요성을 부여했다. 지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특정한 생활방식에 수반되는 영예와 명성의 요인을 표현해 주며, 권력은 자신의 집단적 의지가 다른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힐 때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하지만 계급을 정의할 때 먼저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주관적 판단이나 희망으로 규정하는 계급의 정의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각자가 규정하는 수 없이 많은 계급의 정의들이 난무할 것이고 이는 과학적인 분석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정의하는 계급은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로의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착취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두 계급은 엄연한 사회적 실체로서 적대적 대립이 불가피하며, 화해 불가능성에 따라 계급투쟁 또한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최근 사회학의 계층이론은 사회적 지위 및 역할 분석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계급’을 신분집단(또는 역할집단)과 동의어로 이해하고 상층 중상층 중하층 등등 등급을 매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그들의 인식은 오히려 베버보다도 더 현실과 동떨어진다. 즉 베버가 계급 분석에서 특정 경제적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보지만, 현대 사회학자들은 단지 정치적 기준이라는 관점 혹은 사회심리적 관점에서 본다. 이들의 계층이론은 사회의 주된 관계라 볼 수 없는 여러 집단과 관계들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며 때문에 사회관계의 구조는 다면적이라고 본다.

베버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학자들은 계급구분을 완전히 부정하며, 또 어떤 학자들은‘계급’이란 용어를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자본주의에서 이미 계급, 계급투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베버에게 있어 계급은 생산관계의 총체에 대한 분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소득과 소득원에 기초한 분배 관계로부터 나온다. 그는 또 상류계급의 구성원이 되려면 부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에 사회분화는 신분을 포함해야 하고 권력 또한 정당과 동일시된다. 어찌하여 계급구조를 계급, 신분 그리고 권력의 관점에서만 분석해야 하는가? 베버 계급이론(계층론)의 이러한 논리적 약점 때문에 베버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로 수정을 가하고 있으나 그 목적은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비판하기 위한 논거를 마련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도 사회의 복잡다양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복잡한 사회구조를 연구하면서 과학적, 체계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사회에 실재하는 존재를 객관화시켜 연구한다. 이에 따라 사회관계에서 생산관계를 가장 중요한 관계로 보며, 계급이 사회적 생산양식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가장 중요한 사회집단으로 강조한다. 그러므로 여타의 사회집단이 아닌 계급이 사회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며,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사회 정치적 발전 방향과 그 결과를 결정한다. 그러나 베버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과학적 원칙들을 무시하고 있다.

3.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여러 비판에 대하여

1)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경제결정론(=경제환원론)인가

생산 관계들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실제적 토대를 형성하며, 그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그것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지운다. […]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도 조만간 변혁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마르크스는 경제적 구조가 토대로서 법적, 정치적 형태와 같은 상부구조를 조건지우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적 토대가 변화하면 이에 따라 거대한 상부구조도 변화한다고 보았다.

국가 형태들과 법률 관계들은 […] 헤겔이 ‘부르주아 사회’라는 이름으로 그 전체를 총괄해서 불렀던 물질적 생활 관계에 근거한다는 것과, 부르주아 사회의 해부학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르크스 <자본론> 서문

우선 경제결정론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겠다. 마르크스가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딱지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물론 후대 마르크스주의자(예를 들어 카우츠키)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주장을 경제결정론 혹은 경제환원론으로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명백한 사실 왜곡 행위이다. 위의 정식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조건 짓는다고 했을 뿐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엥겔스가 잘 표현했다. ‘경제는 전부가 아니다. 궁극적 결정 요인일 뿐이다.’ 사상 · 정치 · 법률 등도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경제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회학자, 역사가, 정치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학자들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필요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7]몰리뉴 맞불63호

그럼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라고 부른 정치·법률·철학·종교·예술 등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경제가 다른 모든 것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가 모종의 기계적이거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른 것들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주로 경제가 다른 것들을 조건 짓거나 그 형태를 좌우한다고 했지 엄밀하게 결정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토마 피케티를 보자.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심각해지는 불평등을 잘 묘사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피케티는 오로지 자산과 소득을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하는데, 그가 제시한 데이터를 자세히 보면 소득불평등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 구조를 대략 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대기에는 전체 인구의 1~2%밖에 안 되는 극소수 부자가 있다. 그들은 사회의 중요한 자본을 대부분 소유한다. 다음으로 전체 인구의 5~10% 정도 되는 놀고먹는 부자들과 고위 경영자층이 있다. 선진국에서 나머지 대다수 인구는 이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난하다. 이런 묘사는 자본주의 계급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소득과 자산 수준에만 집중하므로 진정한 계급 구조를 모호하게 하는 면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을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노동계급 일부이고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다.

1960년대에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을‘노동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노동귀족’들은 집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TV도 있으니 더는 투쟁을 이끌 수 없다고들 했다. 앙드레 고르즈라는 프랑스 사상가는 1968년 초 《노동계급이여, 안녕》이라는 유명한 책을 냈다. 그러나 바로 몇 개월 뒤 프랑스에서 바로 그‘노동귀족’들이 세계 역사상 최대의 총파업을 벌였다. 한편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이 운동을 주도한 때도 있었다. 1890년대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노동자들은 너무 빈곤하고 사기가 낮아서 더는 투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노동 빈곤층이 신노조운동을 일으켜 영국 노동운동의 양상을 바꿔 버렸다. 투쟁이 고조될수록, 처지가 비교적 좋든 비교적 열악하든 노동계급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싸우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8]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 외,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계급 소외 차별』 책갈피, 16쪽~17쪽.

2)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차별을 무시하는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외의 중요한 사회적 경계선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문화적 취향 같은 사소한 것도 있지만, 인종, 성, 성적 지향 같은 훨씬 더 중요한 것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중요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인종과 성에 따라 분열되는 것이 자본가계급의 지배가 유지되는 데 이롭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은 이런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는 데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투쟁이 고조될수록 노동자들은 인종, 성, 성적 지향에 따른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단결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하게 되면 이런 차별의 물질적 토대가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9]위의 책 18쪽

3) 실천 없는 노동계급을 역사의 주체라 할 수 있는가 – 계급의식의 문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비판에는 노동계급이 자동으로 체제에 맞서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주관적인 자기규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이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초창기 저작인 《신성가족》에서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목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객관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이 투쟁에 나서게 하는 객관적 요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사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거의 언제나 모순돼 있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소외되고, 파편화되고, 원자화돼 있다고 느낀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매주 월요일 일터로 내몰리다 보면 스스로가 아주 약하고 초라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이런 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의 이익과 충돌하는 관념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감, 투쟁의 기억,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 같은 것들도 느낀다. 둘 사이의 모순 때문에 노동계급 내에서 보수성이 조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자신을 결속시키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노동자들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자각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하에서 노동계급이 처한 객관적 조건 때문이다.

4.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와 신중간계급

자본주의 사회에는 두 개의 주요 계급이 있다. 하나는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자본가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노동계급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양대 계급 중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은 아니다. 먼저, 노동계급의 범위를 조금 확장해야 한다. 예컨대 노동자들의 자녀처럼 그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노동계급이 착취당하는 정도에 따라 삶이 좌우된다. 병원과 학교 등에서 일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처럼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운영과 [간접적으로] 이윤 창출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대체로 민간부문 노동자들의 처지와 연동돼 있다. 그러므로 그들도 노동계급 다수와 이해관계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외에도 두 부류의 작은 집단이 양대 계급 사이에 끼어 있다. 첫째, 중소기업인, 소상점 주인, 벤처 사업가 등 마르크스가 프티부르주아지라고 부른 독립적 소(小) 소유자 집단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이 집단도 변했다. 오늘날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구실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임금을 받는 노동자 구실을 하는 이중적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프티부르주아지는 양대 계급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스스로 자산을 소유하므로 자본가들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일하므로 노동계급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다. 세계의 많은 농민이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오랫동안 농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집단이었다. 이제는 임금노동자가 농민보다 많지만 그런데도 농민은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사회집단이다. 이런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혁명에 성공하려면, 농민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노동자 혁명으로 농민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서 농민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양대 계급 사이에 끼어 있는 둘째 집단은 흔히‘신중간계급’이라 불린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등장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가들이 직접 작업장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본가들은 자기 대신 작업장을 운영할 특수한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작업장 내에 경영직·관리직 등 관료 계층이 형성됐다. 이 관료층의 최상층은 자본가계급과 섞여들게 된다. 반면 관료층의 최하층은 겉보기에는 노동계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 계층에는 매우 모순된 처지에 있는 온갖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창출하고 체제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산적 구실을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을 더 심하게 쥐어짜고 단속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은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린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의 하층 일부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진다.

5. 노동자계급은 왜 중요한가?

노동자계급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사회의 모든 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생산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의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노동계급 스스로의 해방뿐만 아니라 농민, 도시 빈민, 여성 그리고 약소민족 등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 모든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만이 파업을 통해 사회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보라!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와 변전소의 노동자들이 파업하여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도시의 밤은 암흑으로 변할 것이며 지하철, 버스 등 모든 교통수단이 멈출 것이다. 컴퓨터의 중단으로 모든 건물과 각종 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다. 집마다 전깃불과 냉장고, 냉방·온방 장치 보일러 세탁기의 사용이 중단되어 가정생활이 마비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사회의 모든 것이 마비될 것이다. 이는 이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집단만이 가질 힘이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이 사회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며 집단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세력화가 용이하며, 언제든 사회의 변화 발전을 주도할 잠재력을 가진다. 실제 지난 촛불항쟁에서 한상균 집행부의 민주노총은 그러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잠시나마 보여준 바 있다. 눈을 돌려 세계노동운동사를 보라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은 과학적 사상으로 스스로를 무장시키고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이 사회를 직접 운영한 경험이 있다. 이는 인류 역사 속 피지배계급 중 유일하게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다. 이 또한 여타 계급과 집단이 가질 수 없는 가장 큰 자산이자 잠재력이다. 일상적으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인간 차별을 당해왔고 이 때문에 일상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계급이 노동자계급이다. 이에 돈보다 사람이 존중받고, 억압과 굴종과 차별이 없고, 계급이 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사회. 이러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앞장 설 수 있는 집단 그 집단이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띤 선도적 계급으로서 역사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7. 마무리

계급을 이해하기 위한 보다 많은 관심과 학습이 필요하다. 노동자가‘계급’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노동자 각자가 사회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노동자계급에 부여된 역사적 의무를 다하기 위한 위대한 행렬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게는 지금 우리 운동이 지리멸렬의 위기를 뚫고 질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전교조 법외노조 투쟁 10년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합원들이 각자 자기 노조와 자기 업종과 직종 자기 지역에만 매몰되어 전 세계적 전국적 차원의 노동자계급의 임무와 과제를 보지 못하는 모습에 절망하며 이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의 꿈을 이제는 접어야 하는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투쟁 속에서 얻은 긍정적 깨달음이 더 컸다. 지금까지도 가슴에 가장 크게 남은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냥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승리할 수 없어 보였던 전교조의 법외노조 투쟁이 끝내는 대법 판결에서 승리했다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2013년 박근혜정권에 의해 법외노조 통보를 받았을 때부터 촛불항쟁까지의 우여곡절, 그리고 이후에 겪게 된 수많은 경험이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법외노조 통보를 받은 이후 전교조는 커다란 논란에 휩싸였다. 과연 일개 노조가 서슬 퍼런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맞는지, 박근혜정권에 맞서기로 했지만, 과연 투쟁은 어느 수위에서 할지, ‘퇴진’이라는 두 글자를 넣을지 말지 밤을 새워가며 갑론을박했다. 이런 갑론을박은 세월호 사건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건 등 고비 때마다 반복되었다. 국민의 다수 지지로 당선된 박근혜정부에 일개 노조가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과격한 선도 투쟁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된다. 소나기가 퍼부을 때는 이를 피해갈 줄 아는 슬기로운 전술이 필요하다 등등. 하지만 불과 얼마 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토록 선언문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박근혜 퇴진’구호가 수백만의 구호가 되어 전국을 뒤덮었다. 고담 도시 대구에서조차 5만 명이 결집하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더욱이 대구에서는 불과 얼마 전의 민주노총대구본부 집회에서조차 ‘퇴진’은 고사하고 박근혜 반대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난리를 쳤었다. 5.1절 집회장에서 박근혜 반대를 외쳤다고 노조가 정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조합원이 단상으로 물병을 날렸다. 하지만 그곳 대구에서도 변화는 삽시간에 일어났다. 박근혜가 탄핵되던 날, 그리고 전교조가 대법에서 승리하던 날 해고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정세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운동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결사 항전을 하고 있다. 울산에서 부산에서 서울에서 강원도에서 경기도에서 전국 여기저기서. 대구에선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먹고 튀는 외국 자본 때문에 장기적인 생존권 투쟁을 하고 있다. 승리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가 더욱 절박하게 들린다. 그 어느 때보다 총단결 총투쟁이 요구된다. 하지만 선봉에 서야 할 활동가들, 변혁을 말하며 가장 앞장서 싸웠던 그 동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같은 노동계급 안에서의 갈등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갈등, 업종별 갈등, 정파별 갈등, 또 총단결 총투쟁의 구심이 되어야 할 민주노총의 파행과 잘못된 모습들이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노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 조류들이,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세우며 노동법 개악에 앞장서는 소위‘민주정부’가, 부끄럼 없이 업종이기심을 내세우는‘민주노조’들이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다. 전교조는 누구를 위한 노조냐고, 왜 비정규직 투쟁에 전교조가 나서냐고 대규모 탈퇴를 감행하는 조합원들의 모습도 이 모습과 다르지 않다. 31년 투쟁의 전교조에 대해 누구보다 자부심을 말하던 활동가가 눈물로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이 지금 당장 부딪혀 있는 문제들에 대해 곧바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변혁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마르크스 계급론의 관점으로 돌아가 치열하게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또다시 운동화 끈을 조이자.

<참고 자료>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 외 편집부, 『계급 소외 차별』 책갈피, 2017.

정선영 <마르크스주의 계급론과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 『마르크스21』 제15호, 2016.

이재유『계급』 책세상, 2008.

김하영『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책갈피, 2017.

백철현 <계급은 자연소멸하는가-자율주의 비판(2)>, 『노사과연』 2020.1.1.

조희연『계급과 빈곤』 한울, 1993.

F. V. 콘스탄티노프 김창선 역, 『역사적 유물론』 1987.

녹두편집부『세계철학사3』 녹두, 1985.

나델, 프란차스 외 박현우 편역, 『사회계급론』 백산서당.

S.M.나델 김병호 역, 『계급론(階級論)』 녹두신서 21.

A. 예르마코바, V.라트니코프 김재수 역, 『계급과 계급투쟁』 도서출판 인동.

1 이 글은 상반기 노동전선 정치강좌(2021년 3월 30일) 강의자료를 보완한 것입니다.
2 노동자의 책 – 용어해설 [계급 階級] 참조.
3 계급론, <한국 사회 구성체의 현단계> 2009. 11. 17. 동대신문,
4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 외,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계급 소외 차별』 책갈피, 14쪽. 본 발제문에 인용부호를 하지 않은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이 책에서 가져온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5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백과를 찾아보았다. “착취 관계 : 계급 사회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가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에게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얻는 관계.
6 프란차스 외, 박현우 편역, 『사회계급론』, 12쪽
7 몰리뉴 맞불63호
8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 외, <마르크스주의 계급론> 『계급 소외 차별』 책갈피, 16쪽~17쪽.
9 위의 책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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