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회주의〉 오늘의 사회주의

홍승용 | 현대사상연구소

[1]이글은 2019년 11월 27일 노동전선 정치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을 다듬은 것이다.

1.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기의 여러 부류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흔히 알려진 공상적 사회주의부터,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나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만 아니라 독일의 ‘진정한 사회주의’, 기독교적 사회주의, 심지어 봉건적 사회주의까지 온갖 이데올로기 및 운동들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흔들며 대중들을 현혹했다.[2]K. 맑스/ F. 엥겔스: 「공산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4, 422쪽 참조. 이하 ‘선언’으로 … Continue reading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과 유착되었던 독일 파시스트당의 공식명칭도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이었다. 이들 ‘사회주의’의 공통은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근본적으로 건드리지 않고,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폐해를 부분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구호들을 내세움으로써, 혹은 자본주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채 자본주의 이전 사회로 돌아가자고 호소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거나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적 소유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없애 버리는 것이고, 계급 대립들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을 폐지하는 것이며, 현존의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3]K. 맑스/ F. 엥겔스: 「동맹에 보내는 중앙 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2󰡕, 최인호 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 Continue reading

레닌 역시 노동력 판매의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데에 머물지 않고 “무산자로 하여금 유산계급에게 자신을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그 같은 사회체제를 종식”[4]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호정 역, 박종철출판사 2001, 74쪽. 이하 ‘무엇’으로 약칭함.하고자 한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는 계급지배 장치로서의 국가와 더불어 지배관계 자체가 소멸한 평등사회이자, 이제까지 인류가 이룩한 생산력과 문화유산에 근거해 이성적으로 건설될 풍요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현실사회주의는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다른 궤도를 달려왔지만, 맑스 엥겔스 레닌이 추구한 사회, 즉 지배관계 및 국가 자체를 소멸시켜가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한 사회에 이르지 못하고 자본과의 전쟁에서 일단 패배했다. 그렇다고 소련 등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다고 단정하며 그 유산들을 모두 폐기하자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태도는 아닐 듯하다.[5]물론 그렇게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 Continue reading 그런데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는 동구권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고,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과 운동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즉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의 기세가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끝없는 범사회적 저주와 의기양양한 자본예찬 분위기에 압도당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동안의 전지구적 차원의 생산력발전을 통해 노동자 민중도 전반적으로 일정한 물질적 풍요를 맛볼 수 있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그로 인해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로 인해 고통을 겪는 노동자 민중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조차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보다 “자본주의에 어떻게 가장 잘 적응할 것인가”[6]B. 까갈리쯔끼: 󰡔소련 단일체제의 와해󰡕, 김남섭 역, 창작과비평사 1993, 20쪽.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진지하게 말하기는 진보운동 내부에서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즉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자국가 등은 그동안 사어나 금기어처럼 취급되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자본주의에 적응하며 살 만큼 살 수 있는 조건 역시 늘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과학기술 혁신과 생산력의 눈부신 발전은 본질적으로 자본의 효율적 증식을 위한 것이며, 노동자 민중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관심과 별로 관계없어 보인다. 자본의 무한 증식 본성을 감안할 때, 근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장기화된 성장둔화 내지 마이너스 성장에서 확인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이나 부문별로 끊임없이 재연되는 중복투자⋅과잉생산으로 인한 자본축적 위기는 필히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되리라고 예상해야 할 것이다. AI와 5G 등을 활용한 첨단 자동화 기술은 대량해고를 예고하고 있는데, 정규직이라고 해서 안전지대에 머물 수는 없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개척⋅확대를 위해 제국들 간에 벌어지는 환율⋅관세⋅무역전쟁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군사충돌로까지 고조될 수 있다.[7]미국과 러시아의 중거리 핵전력조약(INF) 폐기에 따른 군비증강,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국가에 대한 열망, 중국과 인도,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 … Continue reading

양극화 심화, 부와 가난의 대물림, 축적 위기의 전가로 인한 대량해고 내지 노동조건 악화의 가능성 혹은 필연성 증대, 전쟁을 통한 전면적 파국 위협 등등,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머무는 한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 근본 난제들로 인해, 자본주의를 넘어서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욕구와 변혁운동은 마냥 잠들어 있을 수 없다. 자본독재에 고분고분 따를 때 1%를 위한 낙원과 99%를 위한 지옥, 결국 모두를 위한 지옥이 눈앞에 닥쳐오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8]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과 일본정부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후처리방식에서도 자본논리가 결정적 역할을 해왔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을 통해 … Continue reading 우리는 오늘의 엄청난 생산력으로 그러한 지옥을 만들어낼 자본독재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고 있을 것인지, 자본독재를 넘어서 누구나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와 있다. 한 세기 전 룩셈부르크가 던진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물음이 다시 절실해졌다. 자본주의 자체가 사회주의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부활하고 있다.

2.

우리에게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인간이 단지 제반 조건의 산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만들어가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유물변증법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이런저런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지배관계를 바꿀 수 없다고 믿는 망상에 빠져 있다면, 지금과 다른 사회체제를 꿈꾸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망상이 어느새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얼마 전 조국의 언행에서 사회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시민단체 ‘청년전태일’ 회원들은 항의표시로 공정⋅정의⋅희망‘사다리’를 들고 조국과 만났다. 그런데 항의는 순식간에 사다리를 걷어차지 말아달라는 소심한 간청으로 변질되었고, 그들의 항의 속에 사다리구조 자체를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9]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130415&section=sc38&section2=사회,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56867 그들은 무한경쟁과 견고한 서열과 차별로 노동자 민중을 분열시켜온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삶의 선험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여야 구분조차 별 의미 없는 친재벌 보수 정치세력이 정치판을 결정하고, 그 대안이 되어야 할 정치세력도 자본주의의 견고성 앞에서 위축된 채 부분적 개량조차 힘겨워하는 풍토를 감안하면, 젊은이들이 평등사회를 외쳐주길 기대하는 것은 아마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환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성 있는 대안정치⋅대안운동의 부재를 뼈아프게 증언한 셈이다.

정치판만 아니라 진보학계에서도 자본주의 너머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에 어떻게 가장 잘 적응할 것’인지 궁리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으로 굳어지는 추세다. 이제는 “프롤레타리아의 동냥주머니를 깃발 삼아 손에 들고”(선언422) 흔드는 일조차 촌스럽고 부끄럽다고 느낄 줄 아는 것이 세련된 이론 감각의 자질처럼 되었다. 세련된 이론 감각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를 1/n로 줄여놓거나, 혹은 0/n으로 만들어 숨겨놓을 줄 아는 감각이다. 거의 모든 심각한 담론이 돈 문제로 귀결되는데도 노동자의 계급감각⋅계급의식을 향해 경제주의니 환원론이니 본질론이니 하는 저주의 주술을 구사할 줄 아는 감각이다. 온갖 차별들에 맞선 투쟁, 특히 모순과 적대를 ‘차이의 긍정’이라는 구호로 덮어버리면서, 차이를 궁극의 제일원리로 정립할 줄 아는 감각이기도 하다. 이런 감각을 갖춘 이데올로그들은 오늘날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제반 현상들, 예컨대 노동자 민중 내부의 분열상태, 계급의식의 희석, 욕구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복합적 궁핍’[10]맑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번영기에도 노동자들은 ‘복합적 궁핍’, 즉 “과로와 때 이른 죽음, 기계로 전락, … Continue reading의 고착화, 청년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확대와 학생운동의 위축 등을 근본적으로 자본권력의 솜씨 좋은 계급투쟁 성과와 무관한 자연상태처럼 보고, 무엇보다 이러한 현상들을 체제변혁에 대한 관심을 버려도 좋게 해주는 알리바이로 삼고자 한다. 한 마디로 현실 문제의 본질을 제반 연관 속에서 구체적⋅역동적⋅실천적으로 파악하는 유물변증법적 사유방법을 천시한다.[11]루카치가 파편화되고 정태적이며 방관적인 사고방식 혹은 사물화된 의식에 맞서 제시하는 총체성의 관점은 유물변증법의 핵심을 이룬다. … Continue reading 그들의 ‘진보적’ 이론에서 사회주의가 차지할 자리는 별로 없을 듯하다. 진보가 실질적 보수의 알리바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변증법의 혁명적 성격을 역설하는 맑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12]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1󰡕,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19쪽 참조.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고자 한다. 인간이 원리상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면, 지배관계 자체를 소멸시켜야 할 이유도 별로 없을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자유와 마찬가지로 평등의 가치를 공공연히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평등을 중요시하기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오늘까지의 불평등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 처해 있는 조건에 따라 능력과 자질, 욕구, 성취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근거해 평등주의를 거부하고, ‘각자의 분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이데올로기는 얼마든지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등을 옹호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도 현재의 차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악용되는 데에 반대한다. 또한 인간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비하면 특정 조건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적절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잠재력을 사회 곳곳에서 얼마든지 유용하고 의미 있는 형태로 발현시킬 수 있다고 전제한다. 물론 현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욕망구조, 미감, 도덕감각, 자발성 등도 주체를 포함한 사회적 조건들의 산물이며, 조건들의 변화를 통해 바꿔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13]󰡔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오감의 도야는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산물”(경철101)임을 환기시킨다. 또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 Continue reading 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지적 문화적 권력 차원의 불평등은 자유의 실질적 성격을 직접 규정하며 따라서 평등과 분리된 자유란 공허한 구호라고 본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인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리코뮌이 취했던 주요조치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코뮌은 두 가지 절대 확실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첫째로, 코뮌은 입법, 사법, 교육 등의 모든 직책을 관계자들의 보통선거권에 근거하여 인선하되 동일 관계자들에게 언제라도 자기들의 파견 대표를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둘째로 코뮌은 모든 공무원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 지불하였다.[14]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

맑스는 아예 “보통선거권을 위계적 서임제로 대체하는 것보다 코뮌의 정신에 더욱 생소한 것은 없을 것”[15]K. 맑스: 「프랑스 내전」, 같은 책, 346쪽. 이하 ‘내전’으로 약칭함.이라고 못 박는다. 이 원론적 지적을 존중한다면, 사회주의 운동에서 권력서열을 따지는 것은 코뮌의 정신과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다. 맑스는 코뮌이 무오류성을 가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진정으로 코뮌은 낡은 딱지가 붙은 모든 정부들의 한결같은 속성인 무오류성을 가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코뮌은 자신의 언행을 공개하였으며, 공중에게 자신의 모든 결함을 알렸습니다.”(내전355) 정보도 주요 권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코뮌은 자신의 결함까지 공개함으로써 평등주의에 입각한 권력의 사회화 내지 근본적 민주화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파리코뮌에서는 평등주의적 인간관이 근본적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사회주의 못지않게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천차만별의 내용을 포장하는 데에 쓰여 왔다. 유신독재의 별칭이 한국적 민주주의이기도 했다. 여러 정치가나 정치학자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규정해왔다. 혼선을 피하는 데에는 민주주의를 말 그대로, 즉 ‘민중을 주인으로 삼는’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사회라면 당연히 민중이 주인인 사회, 1%가 99%를 개돼지 취급할 수 없는 사회라야 할 것이다. 절대다수 국민이 노동자와 그 가족인 오늘날 이들이 주인인 민주국가가 노동자국가가 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그만큼 민주적이지 못한 셈이다. 그에 반해 자본권력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어중간한 형식적 민주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16]레닌은 엥겔스를 끌어들여 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관계를 지적한다. “엥겔스는 민주공화국에서 ‘부는 자신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한층 더 … Continue reading

근본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은,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을 자본독재로부터 해방하는 운동, 곧 사회주의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점과 관련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레닌의 현실적 판단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차지하는 부르주아지의 지위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혁명의 수행에서 불철저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으로서 차지하는 그 위치 때문에 일관되게 민주주의적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두려울 정도로 강화시키는 민주주의적 진보를 겁내어 후퇴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쇠사슬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전세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17]V. I. 레닌: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술󰡕, 오영민 역, 녹진 1988, 51쪽.

그런데 현실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개개인들은 쇠사슬 외에도 잃을 것을 조금 가지고 있거나 많이 기대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심지어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기도 한다. 소수 자본가들이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 없이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대중의 자발성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고 보고 전위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가 제시하는 전위의 역할은 사회주의운동에서 늘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전횡과 억압−그것이 어디에서 발생하건, 어떤 계급, 계층에 관계된 것이건 상관없이−이 드러나는 온갖 현상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을 경찰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종합할 능력이 있는, 또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과 민주주의적 요구를 표명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해방투쟁의 전세계적,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활용할 능력이 있는 그런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주장해도 충분치 않다.(무엇105-106)[18]인용문에서 ‘전횡과 억압이 드러나는 온갖 현상’,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라는 구절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소하기는커녕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전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대중의 자발성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 없는 사회주의운동은 성립되지 않는다. 전위의 주요 역할은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안내함으로써, 자발성의 성격을 바꿔가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적 의식을 갖춘 자발성, 변혁적 자발성의 형성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들은 늘 자신의 실질적 권익에 부합되게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부단한 충돌을 몸으로 겪어내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발성의 형식을 취하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주체들이다. 그러한 과정에 개입하는 전위의 업무는 헌신에 기초하는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이때 전위가 심각한 과오로 대중의 신뢰를 잃어서도 안 되겠지만, 특히 자발성 형식을 무리하게 혹은 무례하게 침해할 경우, 이는 예외 없이 억압으로 받아들여지고 운동에 대한 반발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또 다른 지배관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하는 독재’ 따위의 출현에 대한 우려가 전위의 선의나 헌신과 운동의 중간성과들을 수포로 돌려놓기 쉽다.

반면에 전위들이 대중의 자발성을 변혁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써 대중들 자신이 풍부하게 전위의 자질을 갖춰가고, 전위와 공감하며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만큼 사회주의운동도 발전할 것이다. 따라서 전위 각자가 맡아야 할 주요과제에는 자신이 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위로 만드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로써 사회주의운동은 전위의 이름으로 소수 운동엘리트들이 대중을 가르치려 든다거나 당이나 관료 혹은 개인이 대중을 지배한다는 따위의 부정적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해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지배관계에 의해 강력히 규정되는 대중의 자발성을 절대화하여[19]룩셈부르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진실로 혁명운동이 범한 오류는 가장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 Continue reading 전략의 부재상태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만, 운동과정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적극 실천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20]레닌도 룩셈부르크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 자체를 절대화하기보다 전략적 관점에서 중요시한다고 … Continue reading

4.

사회주의운동의 전략에서 국가는 핵심문제다. 국가 문제를 건너뛰고 예컨대 직접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당장 구현하자는 이야기는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성은 소련 등의 현실사회주의사회를 자본주의사회였다고 규정하는 김수행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를 붕괴시키는 이 엄청난 ‘수탈자의 수탈’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미 존재하는,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만천하에 사실로써 인정하는 것뿐이므로, 국회 의장이 방망이를 한 번만 치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미래7)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등의 문제에서 되풀이하여 경험하는 바와 같이, 자본권력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어떤 조치도 고분고분 받아들지 않고 그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인다. 자본주의가 임종의 문턱에 와 있더라도 자본권력은 끝까지 버틸 것이다. 이러한 저항을 제압하지 않고는 평등사회를 구현할 수 없다. 노동자국가는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할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노동자국가 건설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구현이자, 사회주의사회 곧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가는 일차 관문이다. 이를 통해서만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이성적으로 제어하고, 경제를 인간의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의 토대건설이라는 사용가치 중심의 활동으로 전환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우리가 원한다고 간단히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조차 노동자국가를 꿈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국가 건설에는 지난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노동자 민중들부터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공감해야 한다.[21]21대 총선 준비과정에서 비례민주당이 민중당과 녹색당을 우롱하고 배제한 사건이, 보수여당에 대한 환상을 깨고 근본적 대안을 찾도록 진보운동을 … Continue reading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작동방식, 그에 내재하는 모순들과 닥쳐올 위기를 자본의 관점이 아닌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대안인 사회주의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전폭적 공감대가 광범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이 광범한 공감대는 그러한 미래상에 도달하는 현실적 방안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준비과정에는 자본의 논리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폭넓은 연구와 그 결과를 공유하는 조직적 효과적 선전 활동이 포함된다.[22]오늘날 노동운동 쪽의 입장을 옹호하는 여론형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850년에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에 호소하는 글에서 … Continue reading 또 이 공유과정은 노동운동을 넘어선 제반 부문별 해방운동들과의 유기적 관계 형성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 노동운동과 부문운동들 간의 엄격한 칸막이를 제거하고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려면, 각 부문운동들이 변혁운동과 갖는 실제관계와, 부문운동들의 성과를 위한 변혁운동의 필요성을 명확히 밝혀 공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준비과정들은 모두 자본권력과의 사활을 건 전쟁의 일환이다. 성공적인 준비과정을 통해 노동자국가가 수립된 후에도 이 전쟁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노동자국가는 파리코뮌이나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의 운명을 되풀이할 것이다. 이때 패배를 두려워하면 운동은 시작하기도 어렵겠지만, 패배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노력하는 것은 운동주체들의 당연한 과제다.

한편 오늘의 독점자본이 국제자본과 한 덩어리로 유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노동자국가 건설은 국제자본과의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하는 것도 준비과정에서 빠질 수 없다. 현시점에서 미래 전략을 구체화할 수는 없지만, 원론적으로 노동자국제주의에 입각한 전지구적 차원의 사회주의 건설을 추구할 필요성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국제주의는 인터내셔널과 함께 사멸한 과거의 유령이 아니다. 국제적인 자본축적위기에 따른 제국주의적 긴장이 폭증하고 야만과 파국이 눈앞에 닥쳐오는 데에 비례해 노동자국제주의는 그 대안으로서 절실히 필요해질 것이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을 계기로 삼성⋅현대⋅SK⋅LG 등의 뛰어난 기술력이 한국사회의 구세주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중국의 기술력 역시 한국재벌들의 기술력을 언제라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을 대신해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베트남과 인도 등 동남아 국가들의 저임금 노동력이 언제까지 초과이윤의 제물이 될 것인지도 미지수다. 자본이 신봉하는 패권주의적 경쟁력 절대주의로는 끝없는 갈등⋅위기⋅불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오히려 그 기술력 발전 수준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인류를 향해 지옥문이 입을 벌리고 있다. 국가와 민족 간의 평등과 호혜를 지향하는 노동자국제주의는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제어하고 그 지옥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아직 이 ‘최선’은 걸음마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우리는 그 성장잠재력을 주목하고 그 강력한 구현을 위해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노동자국가의 구체적 모습을 세부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은 명확하다. 현대의 생산력 발전에 적합한 수준으로 노동일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주택⋅의료⋅교육 등의 기본생활조건을 사회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미 독일은 하루4시간 노동제의 첫발을 떼었고 핀란드는 정부 차원에서 주 24시간 노동제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가난한 여러 나라들도 대학교육까지 무료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원과 환경문제를 감안할 때 농업은 첨단산업으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른 노동력 절약은 잉여가치의 증대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풍요로운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산업구조의 이러한 변화는 자본증식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척도로 삼는 경제체제에서만 가능해질 것이다. 한편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동등하게 그 전쟁에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생활에서 배제”(국가148)되지 않는 것, “전체 주민대중이 모든 국가업무와 자본주의의 폐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복잡한 문제에 진정으로 동등하게 전반적으로 참가”[23]V. I. 레닌: 「P. 키에프스키(Y. 피아타코프)에 대한 회답)」,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앞의 책, 230쪽.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국가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노동자국가가 구현하는 민주주의, 즉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할 수 없게 된 상태는, 궁극적으로 지배관계와 더불어 국가 자체가 필요 없게 되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이러한 상태를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사적소유의 근본적 지양, 모든 인간적 감성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 자기실현을 내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사회적 양성, 단순한 유용성 차원이 아닌 자체목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및 인간 파악,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 인간⋅자연⋅산업의 역사를 대립관계가 아닌 인간화된 자연 내지 자연화된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이나 사적소유의 지양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에 의한 인간 산출 및 인간을 위한 자연 생성으로 이해된 세계사 등등이다.(경철103-107)

사회주의사회의 미래 모습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경제 쪽에 좀 더 비중을 둔 형태로 제시되기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24]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맑스의 이러한 원론적 구상은 오늘의 사회주의운동에서도 장기적인 지향점으로서 추구할 만할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사회주의사회의 실제 모습은 아직 열려 있다.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과 문화유산을 우리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다듬으며 어떤 식으로 나누며 누려갈 것이냐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맑스나 엥겔스 혹은 레닌의 문헌들을 검토하는 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것이다. 오늘의 사회주의운동을 구체화하는 과정 속에는 인류가 자본독재와의 장기적인 전쟁과정에서 치른 희생들에 대한 기억도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오늘 사회주의운동의 최대당면 과제는 노동자국가 건설, 즉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향하는 일차 관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이다.

1 이글은 2019년 11월 27일 노동전선 정치학 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을 다듬은 것이다.
2 K. 맑스/ F. 엥겔스: 「공산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4, 422쪽 참조. 이하 ‘선언’으로 약칭함.
3 K. 맑스/ F. 엥겔스: 「동맹에 보내는 중앙 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2󰡕, 최인호 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119쪽. 이하 ‘호소’로 약칭함.
4 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호정 역, 박종철출판사 2001, 74쪽. 이하 ‘무엇’으로 약칭함.
5 물론 그렇게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론󰡕을 조금만 읽었더라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김수행: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한울 2012, 4쪽. 이하 ‘미래’로 약칭함.
6 B. 까갈리쯔끼: 󰡔소련 단일체제의 와해󰡕, 김남섭 역, 창작과비평사 1993, 20쪽.
7 미국과 러시아의 중거리 핵전력조약(INF) 폐기에 따른 군비증강,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국가에 대한 열망, 중국과 인도,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 등은 제국주의 전쟁의 전야를 연상시킨다. 그 밑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불균등한 발전에 따른 시장 재분할 문제가 깔려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미국 중심의 단일 ‘제국’ 체제라는 구상보다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이 좀 더 설득력 있다고 여겨진다.
8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과 일본정부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후처리방식에서도 자본논리가 결정적 역할을 해왔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을 통해 전지구적 재앙의 문이 열리는 한 가지 방식을 목격하고 있다.
9 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130415&section=sc38&section2=사회,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56867
10 맑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번영기에도 노동자들은 ‘복합적 궁핍’, 즉 “과로와 때 이른 죽음, 기계로 전락, 노동자의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집적되어 가는 자본의 노예, 새로운 경쟁, 노동자 일부의 아사 또는 거지로의 전락” 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18-19쪽. 이하 ‘경철’로 약칭함. 노년기의 맑스와 엥겔스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한 노동자 상층부의 매수와 귀족화 현상을 비판하며, 레닌은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을 통한 노동자 상층부의 매수가 이미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로 확산되었음을 지적한다. V. I.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2015, 38-39, 138, 142, 163-164쪽 등 참조. 오늘의 한국 노동자계급의 보수화 현상 앞에서는 ‘복합적 궁핍’ 및 매수 문제에 대한 각성이 불가피해 보인다.
11 루카치가 파편화되고 정태적이며 방관적인 사고방식 혹은 사물화된 의식에 맞서 제시하는 총체성의 관점은 유물변증법의 핵심을 이룬다. “총체성이라는 범주의 지배야말로 과학에 있어서 혁명적 원리의 담지자이다.” G.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조만영 역, 거름 1986, 85쪽.
12 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1󰡕,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19쪽 참조.
13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오감의 도야는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산물”(경철101)임을 환기시킨다. 또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1857)에서 사회적 대상적 조건과 주체적 욕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비가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욕구는 대상에 대한 감지를 통해 창출된다. 예술대상은−다른 모든 생산물과 마찬가지로−예술 감각이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공중을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 K.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김호균 역, 그린비 2007, 61-62쪽. 이로써 맑스는 주체적 욕구를 분석⋅조절⋅구성 불가능한 것으로 절대화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나아가 대중의 욕구를 규정하기 위한 주체의 적극적 운동을 부추긴다.
14 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
15 K. 맑스: 「프랑스 내전」, 같은 책, 346쪽. 이하 ‘내전’으로 약칭함.
16 레닌은 엥겔스를 끌어들여 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관계를 지적한다. “엥겔스는 민주공화국에서 ‘부는 자신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한층 더 확실히 행사한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으로는 ‘관리들을 직접 매수하는’ 방식으로(미국의 경우),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 방식으로(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역, 돌베게 2015, 38쪽. 이하 ‘국가’로 약칭함.
17 V. I. 레닌: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술󰡕, 오영민 역, 녹진 1988, 51쪽.
18 인용문에서 ‘전횡과 억압이 드러나는 온갖 현상’,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라는 구절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소하기는커녕 사회적으로 비중이 큰 사안들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유효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 룩셈부르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진실로 혁명운동이 범한 오류는 가장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이로써 그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중의 자발성에 과도하게 의지한고 여겨진다. R.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저작집󰡕, 편집부 역, 도서출판 풀무질 2002, 143쪽.
20 레닌도 룩셈부르크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레닌은 민주주의 자체를 절대화하기보다 전략적 관점에서 중요시한다고 여겨진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1)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 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승리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 수도, 또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V. I. 레닌: 「맑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편집부 편, 도서출판 벼리 1989, 279쪽.
21 21대 총선 준비과정에서 비례민주당이 민중당과 녹색당을 우롱하고 배제한 사건이, 보수여당에 대한 환상을 깨고 근본적 대안을 찾도록 진보운동을 단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2 오늘날 노동운동 쪽의 입장을 옹호하는 여론형성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850년에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에 호소하는 글에서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무장 및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한다.(호소122)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고 사회적 의사결정의 향배와 이에 따른 지배관계의 성격을 바꾸는 과정이라고 볼 때, 오늘날의 전쟁에서 여론전⋅이데올로기전쟁의 결정적인 의미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공중파나 종편만 아니라 SNS, 유투브, 인터넷 댓글 등에서의 적극적 여론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3 V. I. 레닌: 「P. 키에프스키(Y. 피아타코프)에 대한 회답)」,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앞의 책, 230쪽.
24 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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