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9): 토대의 결정력과 상부구조의 적극성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대립 관계라고 단언하면서, 증오의 정치와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할 해법으로 다당제를 내세우는 흐름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의석수를 늘이고자 정치공학적 계산에 몰두하는 한,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동조할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진단과 해법은 문제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장기적으로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민족과 국가를 통째로 제국주의세력의 제물로 바치고, 노동자민중을 빈곤과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독재권력을 증오하지 않으면서 어떤 정치를 하자는 것인가. 증오 자체가 아니라 증오의 내용이 문제 아닌가.[1]풍자문학을 다루면서 루카치는 혁명계급의 ‘신성한 증오’가 ‘언제나 실제의, 근본적인, 뿌리에까지 도달하는 혁명의 효율적인 수단이었다’고 … Continue reading 거대 양당의 대립 관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자본독재 내부 분파들 사이의 대립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노동자민중의 현실적 비중에 합당한 만큼 거대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 아닌가. 진영논리를 거부하기에 앞서 그 진영이라는 것들이 어떤 진영인지, 노동자민중 진영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먼저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는 정치조직이나 이념 등의 상부구조가 계급관계를 비롯한 경제적 토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지는 토대-상부구조론이 전제된다. 즉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에 적합하지 못하며, 따라서 토대에 적합해지도록 바뀔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토대-상부구조론은 물론이고 토대, 특히 계급관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유행병처럼 퍼져왔다. 이런 풍토 속에서 토대-상부구조론을 이론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생산력주의’, ‘경제주의’, ‘계급환원론’ 등 경멸적 언사들이 자본독재를 지키는 보조장치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 언사들의 주요 역할은 현실적 갈등들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강조하면서, 자본독재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이 떠맡는 중심적 비중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현상도 지난 30여 년간의 토대변화, 즉 사회주의의 퇴조 및 한국 자본의 성장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 자본주의적 토대는 노동자민중의 사고방식만 아니라 무의식적 욕구와 감각까지 자본독재의 필요에 적합하도록, 즉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단결을 미리 차단하고 분할통치에 유리하도록 성형하는 결정적 조건이 되어 왔다. 노동자계급 상층부, 특히 그 이데올로그들을 매수하기에 충분할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또 이들이 끊임없이 생산하고 전파하는 상부구조들의 효능을 통해, 노동자민중 자신도 자본에 의한 서열체계에 적응하며 각자도생하는 생존방식을 생득적 유전자처럼 몸에 새겨 왔다.

그렇다고 해서 신좌파 이론가들이 비판하는 ‘일차원적 사회’ 혹은 ‘관리되는 사회’가 한국사회에 이미 도래한 것은 아니다.[2]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관리되는 사회’의 본질은 피지배자들이 지배관계를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않을뿐더러 지배받는 … Continue reading 한국의 자본권력은 노동자민중이 ‘살 만큼 산다’는 환각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지배받기를 스스로 원할 만큼 성장의 결실을 적절히 나누지 않았다. 오히려 독식을 통해 토대 차원에서 노동과의 적대적 모순을 꾸준히 키워 왔다. 양극화는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심화되고 있다. 또 한국 자본이 노동자민중의 희생을 통하지 않고 축적 한계나 주기적 위기를 돌파할 새로운 길을 찾은 것도 아니다. 그저 급속히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들면서 제국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들을 여타 자본주의 국가들과 공유해왔을 뿐이다. 자동화⋅무인화 등 생산력 증대를 통한 노동력 절약은 노동자민중의 자유시간 확대가 아니라 대량해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자본권력을 대리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이데올로기적 포장도 생략한 채, 노동자민중을 제국주의전쟁의 대량살상과 파괴, 핵재난을 포함한 환경재앙 등 총체적 파국의 한가운데로 당장이라도 밀어넣을 태세다. 이 파국을 저지하고 공존과 공영을 위한 평등사회로 도약하려면, 자본독재의 수명을 필요 이상으로 연장시켜주고 있는 정치적 상부구조를 노동자국가로 대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노동자국가 건설을 통해서만 자본주의적 토대의 종식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경감할 수 있을 것이다.[3]맑스는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더라도 자연적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지만, “그런 발전의 … Continue reading 인류사적 해방전쟁의 긍정적 의의를 자각한다면, 자본독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한 진영논리와 전략전술의 개발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토대 차원의 적대적 모순 및 변혁 가능성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인식이 그 발판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정치운동이 자본독재권력을 압도하는 거대 정치세력으로 발전한다면 이 또한 마다할 까닭이 없다.

2.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론에 따르면, 정치적 상부구조는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의 총체’, 즉 ‘실재적 토대’ 위에 있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규정한다.”[4]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1859년 서문],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7-478쪽. 이하 ‘서문’으로 약칭. 실제로 토대의 결정적 힘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산력주의’나 ‘경제주의’에 대한 비난들은 생산력의 불균등발전으로 인한 제국주의적 갈등이나 자본독재 하의 일상생활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경제논리 앞에서 한없이 옹색해 보인다. 맑스의 세례를 받은 교양인이라면 토대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현실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주석이나 논평을 붙이는 이론들에는 감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혹 그것들이 매우 기발하고 참신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맑스의 잉여가치론과 아울러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통해 사회주의가 과학으로 되었다고 자부하는 엥겔스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할 것이다.(듀링29) 토대-상부구조론이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요체라는 점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 이로써 관념론은 그 최후의 도피처였던 역사 파악에서 추방되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 등장하였다.”(듀링29)

토대-상부구조론이 여기에 머문다면 비변증법적 속류유물론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맑스는 앞의 글에서 상부구조의 다른 측면을 명시한다. 즉 상부구조는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구별해야 하는, “이러한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움의 끝장을 내는(ausfechten)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이기도 한 것이다.(서문478) 여기서 상부구조가 토대 차원의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움의 끝장을 내는’ 영역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 있다. 상부구조는 토대의 수동적 부산물에 머물지 않고, 토대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끝장을 내는’ 적극적 변수로 기능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상부구조의 적극적 성격을 좀 더 명확히 강조한다. “모든 상부구조는 현실을 반영할 뿐 아니라 낡은 토대 혹은 새로운 토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적극적 입장을 취한다. 상부구조가 이 적극적 역할을 포기하면 그것은 이미 상부구조가 아니다.”[5]G. 루카치: [미학논평], 홍승용 역, 문화과학사 1992, 548쪽.

상부구조로서의 노동자정치 및 이와 결합되는 예술⋅철학 등의 이데올로기 형태들은 자본독재라는 낡은 토대를 반대하는 적극적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평가하는 최종 척도는 그것들이 현실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느냐 하는 측면과 아울러 토대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어떻게 끝장내느냐, 자본독재라는 낡은 토대 혹은 풍요로운 평등사회라는 새로운 토대를 옹호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그 적극적 역할에 있다. 토대 차원의 모순과 충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것은 낡은 자본주의적 토대를 유지⋅강화하는 자본주의적 상부구조다. 오늘날 지배적인 이 자본주의적 상부구조에 현혹당하지 않고 그것의 지배적 본질을 비판하는 것도 낡은 토대를 거부하는 노동자정치운동의 주요 역할이다. 토대-상부구조론은 유물변증법적 과학적 현실인식과 적극적 당파성을 결합하며, 진영논리와 증오의 정치까지 원천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그 구체적 의미에 합당하게 대우한다.

3.

토대 차원의 모순과 충돌을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유물변증법은 그러한 모순에 대해 눈을 감으라고 선동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들과 달리 모순의 현실적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모순을 밝히는 이론이 현실적 모순의 원인인 것처럼 관념론적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 맑스는 리카도의 이론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자 캐리의 비난을 소개한다. “캐리가 발견한 것은, 현존하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들이 정식화되어 있는 리카도 등의 이론들이 현실적 경제운동에 관한 생각의 산물이 아니고,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영국과 기타 나라들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실적 적대관계가 리카도 등의 이론의 결과라는 것이었다!”(자본1,767)

이 관념론적 전도의 전통은 아직 살아 있다. 얼마 전 윤석열 정권 타도를 위한 시국미사에서 매우 호소력 있는 시국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그런데 선언문 가운데 분열을 일으키는 사탄의 본질에 대한 대목이 특히 귀에 들어왔다. “남북을 가르고, 여야를 가르고, 동서를 가르고, 남녀를 가르고, 노동자와 사용자를 가르고 그리하여 상대를 적대하게 만듦으로써 권력유지를 꾀하는 분열의 술수”를 단죄하자는 것이 그 훌륭한 선언문의 요지다. 정치권력을 통한 갈라치기의 폐해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노동자와 사용자는 어떤 정치권력이 갈라놓기 전에 이미 자본의 태생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다. 자본주의적 토대를 그대로 놓아둔 채 정권을 바꾼다고 해서, 또 신심을 다해 화합과 평화를 기도한다고 해서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가 현실적으로 해소될 리도 없다. 그런데 양자의 모순을 명시하고 자본독재와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이는 노동자정치운동은 어쩐지 머지않아 ‘사탄아 물러나거라’ 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리카도가 캐리에게 얻어먹은 관념론적 욕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준엄할 듯하다.

이러한 걱정이 나만의 쓸데없는 과민반응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노동자정치운동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권타도운동에 앞장설 뿐 아니라 그 너머까지 준비해야 한다. 지난번과 별로 다르지 않은 ‘촛불정권’을 통해 무지막지한 자본독재를 점잖은 자본독재로 바꾸고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객관적 조건은 충분히 가시화되고 있다. 종말단계에 들어선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근본 위기는 세계화로도 블록화로도 해소되기 어렵다. 노동자민중의 무한한 희생과 인류문명의 파국을 걸고 제국주의적 자본독재권력들이 벌이는 광란의 돈잔치는 이미 끝낼 때가 지났다. 낡은 토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데에는 노동자민중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 현실적 정치력으로 폭발시킬 노동자정치운동의 적극적 역할이 결정적이다.

(2023. 5. 8.)

1 풍자문학을 다루면서 루카치는 혁명계급의 ‘신성한 증오’가 ‘언제나 실제의, 근본적인, 뿌리에까지 도달하는 혁명의 효율적인 수단이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증오와 지배계급의 증오를 현실의 경제적 토대에까지 도달하는 통찰력을 지니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측면에서 구분한다. G. Lukács: Zur Frage der Satire, in: Probleme des Realismus I, Neuwied/ Berlin 1971, 100쪽 이하 참조.
2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관리되는 사회’의 본질은 피지배자들이 지배관계를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않을뿐더러 지배받는 것을 스스로 원하는 데에 있다.
3 맑스는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더라도 자연적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지만, “그런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고 지적한다.(자본1,6) 진통의 단축과 경감을 위한 주체적 노력의 총화가 노동자정치운동일 것이다.
4 K. 맑스: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1859년 서문],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2],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2, 477-478쪽. 이하 ‘서문’으로 약칭.
5 G. 루카치: [미학논평], 홍승용 역, 문화과학사 1992, 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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