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57호 9-3 반전활동가의 시선에서 본 영화 ≪오펜하이머≫

번역 ㅣ 김의진 (대학생)

2023년 극장가의 흥행작 <오펜하이머>는 비호감 주인공에도 불구하고 잠자리에 쉽게 들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반핵 메세지를 던지는 영화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영화 <오펜하이머>는 1조 7천억 달러를 들여 전 인류를 멸절시킬 수 있는 신형 핵무기를 수십 년 동안 만들기로 작정한 워싱턴의 모든 정객들과 인간군상들이 미국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앞에서 꼭 보아야 할 영화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하고도 미국의 핵무장ㅡ워싱턴 정치인들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서 가열차게 이루어지고 있는ㅡ을 지지할 수 있는 부류는 전 지구적인 ‘데스위시’를 갈망하거나, 핵 ‘현대화’ 계약의 달인인 군수계약업체 노스롭 그루먼에게 매수된 이들밖에 없다. 민중들이 아무리 분노에 가득 찬 나머지 들고 일어난다고 해도, 영화 오펜하이머가 1980년대의 열기에 뒤이은 제2차 핵 동결 운동을 촉발한다고 해도, 미 의회와 백악관은 핵무기 비축량을 늘리기 위해 고혈을 최대한 짜낼 것이다.

미 의회와 백악관은 해상 핵추진 순항미사일과 2단계 방사능 폭발 중력 폭탄, 장거리 타격 폭격기를 배치하고, 중서부 지하 핵 미사일 400기를 신형 대륙간 탄도 미사일 600기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신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센티넬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보다 20배나 강력한 탄두를 1기당 최대 3개까지 탑재할 수 있으며, 3일동안 20만 명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야망과 의심, 회한, 좌절의 감정선을 넘나든 과학자이자, 성실하지 못한 바람둥이자, 신념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은 아일랜드의 배우 실리안 머피가 맡았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이나 러시아가 암호를 해독하기 전에 끔찍한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뉴멕시코주 로스 알라모스의 아름다운 사막의 비밀기지에 은거한 과학자들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한다.

옛된 머리를 한 아이들이 핵공격 대비 모의훈련을 할 때 책상 아래로 대피했던 1950년대를 방불케 하는 장면에서, 과학자들은 트리니티 핵실험 도중 눈을 보호하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와 고글을 착용한다. 해당 실험은 미국 남서부의 원주민들―이후 방사능 낙진으로 암에 걸리게 되는―에게 어떠한 통보도 없이 진행된 최초의 핵실험이었다. 해당 실험은 트루먼 대통령이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9,000파운드 가량의 우라늄 폭탄을 B-29 폭격기에 탑재할 것을 명령하기 전에 일어난 실험이었다. 트리니티 핵실험은 영화에서 거침없고 오만한 인물로 묘사되며, 현대 핵무기의 원형(prototype)이자, 두 번째로 제작된 플루토늄 폭탄인 ‘팻 보이’의 나가사키 투하를 명령했던 바로 그 트루먼의 면전에서 일어났다.

비록 3시간에 걸친 지루한 인내심 테스트로 느껴질 수 있더라도, 영화의 역사적 통찰력과 직감적인 이미지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라이벌 레슬리 그로브스 중장을 빼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다는 단점을 보완한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출은 연단에 선 오펜하이머에 대한 박수와 찬사와 죄책감에 휩싸인 과학자의 흑백 환영이, 핵폭탄으로 산산조각난 영혼과 해골로 변한 인간군상들이 잿더미로 변한 살점이 폭발음과 두근거리는 발소리, 죽음의 행진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장면이다.

더욱이 충격적인 것은 “일본인 희생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일본인 원폭 희생자들이 스크린에 조명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희생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삶과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이 스크린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관객들의 질문이다. 희생자들은 단지 오펜하이머의 렌즈를 통해 불타는 잔해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얼굴 없는 유령으로, 피부가 벗겨지고 뼈에서 살이 떨어져나가고, 몸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으로만 보일 뿐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 희생자를 생략한 것은 영화 제작자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역사가와 진실 전달자의 관점에서는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감독은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 위해 초호화 할리우드 영화 제작을 우선시하기보다, 공포가 실재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폭격으로 불타는 일본인들의 모습과 실제 항공 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어쩔 수 없이 투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끈질긴 신화를 깨뜨리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항복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체면만큼 유지하기를 바랬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알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사능으로 초토화하고, 머나먼 도시들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에게 미국이 세계를 파괴할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흑백으로 찍힌 비공개 청문회의 모든 장면들에서 우리는 오펜하이머가 소련과의 군비 통제 협상을 추진하는 것을 막기로 작정한 나머지, 공산당 및 좌익 노동조합과 영화 주인공(오펜하이머)의 부르주아적 화환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던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애인과 애정을 나눈 것을 구실로 핵 개발의 영웅을 십자가에 못박은 반공주의적 정치인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매카시 일당이 오펜하이머의 보안 접근 권한을 박탈했을 때 과학이 정치와 분리될 수 있는지, 과학과 과학자 개인의 연구 결과가 분리될 수 있는지에 관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알 게 뭐냐’는 식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감성이 메마르지 않은 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사고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보안 접근 권한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오펜하이머≫는 당대 시대상을 관통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이다. 또 다른 시선에서, ‘데스 마치’(죽음의 행진)를 반대한 주인공의 시선에 입각하여 제작됐다면 보다 강력하고 가공할 만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영화에서 잠시 모습을 비춘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연못을 멀직히 바라보며 운명에 대해 경고한다.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원자폭탄 연구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로비를 벌였으나 추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반대한 바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맨해튼 프로젝트 시카고 연구소의 수석 물리학자 레오 실라드가 작성한 탄원서를 트루먼에게 제시하지 말 것을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에게 요구했던 과학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트루먼은 원자폭탄 투하를 멈춰라”라는 취지의 탄원서에 서명한 70명의 과학자 중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손살같이 지나간 장면인 만큼, 관객들이 영화 속 청원서에 대한 언급을 놓쳤을 수도 있겠다.

만약 신중하고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고, 깨어있지 않다면 현재를, 또 다른 핵전쟁 홀로코스트를 예방하기 위한 지금 이 순간을 놓칠 수 있다. 지구의 80억 인구 중 50억이 검게 그을은 버섯구름에 휩싸인 채 핵이 터진 직후에 바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수 달에 걸처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나갈 수도 있다.

백악관과 의회의 다수는 1억 4300만 명이 거주하며 195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고, 6천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와의 제3차 세계대전을 꿈꾸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와의 대리전에 끊임없이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워싱턴포스트의 논객들과 같은 이들에게, 휴전 요구를 거부하는 고위직 정치인들에게 영화 ≪오펜하이머≫는 현실부정과 혼란, 미국예외주의의 바다에서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핵무기 최초 사용 반대 켐페인에도 불구하고 바이든의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는 동맹국의 이해관계가 침해당할 경우 핵무기 사용을 허가한 전임자 트럼프의 행보를 방불케 한다.

코드핑크(CODEPINK)의 활동가들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영화관을 나오는 관람객들을 실천의 현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조직의 회원으로 가입시키기 위해, 평화구축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F-35 공군기의 실전 투입을 막기 위해, 중국이 미국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우크라이나평화연대(Peace in Ukraine Coalition)와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소위 “핵 현대화 계획”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내부적으로 긴급한 문제들을 등한시하는 군사주의의 광기를 폭로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제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국에 대한 전쟁 준비를 멈추기 위해, 선제 핵 타격을 금지할 수 있는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의 군축 관련 조항을 준수하기 위해, 미국에 맞서 UN 핵무기금지조약(TPNW) 서명에 연대하기 위해 전쟁중단과 평화회담을 요구할 시간이다.

UN 핵무기금지조약(TPNW)은 핵확산의 제창자 나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의 개발과 배치 및 활용을 금지하기 위해 모인 95개국 당사자들이 서명했다.

오펜하이머와 달리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인류를 곧 다가올 절멸에서 구할 수 있는 선택을.

출처 : https://mltoday.com/film-review-oppenhe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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