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인간은 적극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바꾸어갈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이 자명한 가능성이 양날의 칼임을 실감한다. 지구에 낙원을 건설할 수도 있지만, 지구를 당장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생산력과 파괴력을 고려할 때,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엄청난 능력으로도 자본독재체제만은 건드릴 수 없다고 믿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이 망상을 노동자민중의 몸에 새겨넣지 못하면 자본독재체제는 연명할 수 없다. 자본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통해 그러한 망상을 떨쳐내는 것은 곧 노동자민중이 변혁 주체로 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 속의 인간은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산물이기도 하다.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과학의 주요과제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 없이는 오늘의 자본독재가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들을 바꾸고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실천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규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부단한 진전과정에서 우리는 자칫 인간의 활동적 주체적 측면을 망각하고 인간을 단지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 즉 제반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객체로서만 인식함으로써 비실천적 방관적 태도나 숙명론의 유혹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 유혹이 지배자들이 애용하는 무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유혹에 부딪칠 때면 인간 주체를 “운동의 결과이자 동시에 출발점”[1]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97쪽. 이하 ‘경철’로 약칭함. 으로 파악하고 포이어바흐까지의 비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며 ‘실천적 유물론’ 내지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을 연 청년 맑스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아울러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어떤 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쪽을 주체로 보고, 그러한 활동의 대상이 되는 쪽을 객체라고 보는 사고 틀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구분을 인정하더라도 주체와 객체의 실제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인식 차원에 한정해서 보자면, 주체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나 환경 혹은 정치경제체제나 문화물 등만 아니라 주체 자신의 욕구⋅감각⋅의식 등도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인식 도구로 쓰이는 개념이나 기호 혹은 감각방식 등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바로 직전까지 진행된 인식의 결과도 다시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인식 도구들은 특정한 시점에서 개별 인식 주체가 자신의 것으로 써먹기 이전에 이미 제반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오감의 형성은 세계사 전체의 산물”인 것이다.(경철101) 어떤 인식도 이러한 조건들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다. 또한 인식 도구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인식이 진행되는 동안 일정 정도 새로운 성격을 얻기도 한다. 그것들은 인식 주체의 의식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며 의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어휘나 개념을 구사하고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인식 주체 자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며, 이 모두에 앞서 별도로 존재하는 인식 주체는 없다.[2]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직접적인 자의식에서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절대적 대상은 우리에게 … Continue reading 이 점에서 인식 주체는 객체로서의 자신과 구분되면서도 이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를 이룬다. 이처럼 인식 도구들이 주체 자신의 의식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인식 도구들 자체를 대상화하여 비판하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비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럴수록 각자는 지배질서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사고방식⋅감각방식 등에 사로잡혀 자신의 주체적 힘을 망각하고 자발적으로 지배질서에 복종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자신의 인식 도구들에 대한 비판의식은 주체성을 기르기 위한 기본자질이다.
인식 주체 속에 자리 잡은 객관적 요소들을 고려할 때, 또 주체의 인식이 현실 전체 과정의 요소로서 이 과정에 초래하는 변화를 감안할 때,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레닌의 논의방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한다. “유일한 불변성은, 의식과 독립해 존재하며 발전하는 외적 세계의, 인간의 의식(인간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에 의한 반영이다.”(유물론279) 그는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던 먼 옛날에도 물질은 존재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의식과 독립해 있는 물질의 존재를 강조한다. 또한 의식을 지닌 주체적 존재들이 언젠가 사멸할 수도 있고, 그렇더라도 여전히 물질은 존재할 것이다. 레닌의 근본 취지는 마하주의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주관주의를 비판하고 실제 사태를 파악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의식을 가진 주체로서 그 물질 영역에서 시민권을 얻어 활보한다. 레닌이 의식과 독립해 존재하며 발전한다고 보는 ‘외적 세계’에는 온갖 부류의 의식적 주체들이 버글거리는 것이다. 더욱이 주체적 요인을 실제 사태에서 제거할 수 없는 현 시점에서 주체적 요인을 배제하고 실제 사태 자체를 보면 그만큼 실제 사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3]유물론은 칸트가 ‘현상’ 개념으로 던져놓은 숙제, 곧 인식에 섞여 들어가는 주체적 편향들에 대한 비판적 해명작업을 피할 수 없다.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태도를 사물화된 의식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던 루카치는 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주체와 ‘독립해 있는(unabhängig)’ 객관적 사태 혹은 발전법칙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나 상호침투 등에 대해 면밀히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도 주체와 독립해 있다는 객관적 발전법칙 속에 예컨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형성과 조직화 등 주체적 요인들을 계산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4] G. Lukács: Tendenz oder Parteilichkeit? in: Georg Lukács Werke, Bd. 4, Neuwied/ Berlin 1971, 31쪽 참조.
2.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레닌의 논의방식은 실제 사태에 합당한 이야기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탁월한 인식을 실제 사태와 등치하여 최대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는 이데올로기투쟁 행위로서 더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레닌은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이를 독단론이나 이데올로기의 징표로 보기 쉽지만, 그보다는 사태 파악에 대한 절대적 책임의식의 산물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당대 정치현실에서 책임회피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 방식으로는 대중적 설득력을 얻거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주장의 타당성까지 무너뜨리는 효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2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할 필요성에 대한 그의 테제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으로 제출되어 그것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고 볼셰비키 운동에 극심한 혼선이 일어났다면, 그만큼 그의 테제는 틀린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실제 사태를 향한 레닌의 선의까지 악의로 대할 필요는 없다. 주체적 요인을 포함한 실제 사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일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로 레닌은 점근성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이는 실제 사태가 무한하며, 의식을 통한 어떤 반영도 대상과의 완벽한 일치에 도달할 수 없고, 다만 그 무한한 사태 자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라는 실속 있는 이야기다. 현실주의자인 레닌은 칸트처럼 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인간의 인식능력을 비하하지도 않고, 헤겔처럼 주체와 객체가 동일해지는 절대지의 단계에 도달하겠다고 호언장담하지도 않는다. 그는 경험적 인식 주체가 얻어낸 근사치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폄하하지 않고 그에 알맞게 존중하면서, 무궁무진한 현실에 무한히 접근해가는 인식의 과정적 성격을 강조할 뿐이다.(유물론66,163,279,345) 이때 접근이라는 말은 자칫 대상을 고정시켜 놓고 다가간다는 착각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 자체도 시간 속에서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접근과정을 통해 인식 주체의 의식도 변하며, 주체의 변화와 더불어 주체를 포함하는 객체도 다시 변한다. 아울러 인식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단인 실천도 변해갈 수밖에 없으며, 검증의 수단인 실천도 다시 검증에서 면제될 수 없다. 이 전면적 변화의 복합체 앞에서 기죽지 않고 실제 사태의 변화를 따라잡으며 좀 더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인식해감으로써 효과적 개입의 가능성을 넓히고, 또 그러한 인식성과에 근거해 기민하게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변혁적 인식 주체의 역할이다. 이로써 실제 사태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쉽게 포기하는 주의주의의 폐해만 아니라, 과학의 이름으로 주체를 객체의 위치에 주저앉히는 숙명론적 냉소주의의 독소에 대해서도 면역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3.
지젝은 ‘사회현실에 묻혀 있는(embedded)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강조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의 주체 부활에 기여한다. 또 그는 필연적 인과의 그물이라는 관념을 전근대적 신학적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비판하고 ‘현실 그 자체의 존재론적 불완전함’을 내세움으로써, 추상적 숙명론을 타파하고 주체의 활동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무엇보다 그는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근거로 혁명주체 형성의 변증법적 경로에 대해 논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권력장악에 필요한 자질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성급하게’ 권력장악을 시도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순간은 절대 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당한 시기’는 혁명적 주체의 성숙을 전제하는데, 이는 혁명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는 실패로 귀착된 일련의 ‘성급한’ 시도들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5]S.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3, 110-111쪽 참조. 이러한 논리의 효능은 룩셈부르크의 이론만 아니라 레닌과 게바라 등의 실천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혁명적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실 그 자체의 존재론적 불완전함’을 상정하는 지젝의 혁명주체 이론은 필연적 연관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소홀히 하고 주체의 의지에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결단론 내지 주의주의로 기운다. 혁명적 실천의 복잡다단한 변수들, 특히 자본독재체제로 인해 당연시되는 주체들의 고정관념들, 욕구들, 무의식적 변수들만 아니라, 주체들의 폭발적 잠재력, 구체적 가능성, 운동이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효과들 등을 모두 감안하여 전략전술을 짜는 일은 생산양식이나 사회구성체에 기초한 포괄적 정세분석을 넘어서는 과제다. 이 모든 변수들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들의 현실적 중요도를 감안하여 총체적⋅전략적으로 접근할수록 그만큼 실천은 효과적일 것이다. 이 경우 현실의 제반 요인들이 ‘존재론적 불완전’ 상태로 있지 않고, 필연적 인과관계를 지닌다고 상정한다고 해서 추상적 결정론에 빠지거나 주체의 자유공간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6]필연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기로 한다. 엥겔스도 추상적 결정론을 비판하지만 지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그는 프랑스 유물론이 내세우는 추상적 필연성으로는 신학적 자연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하며, ‘공허한 말장난’에 그치는 그러한 필연성이 아니라 원인들의 고리를 추적하는 구체적 과학적 인식을 요구한다.[7]F. 엥갤스: [자연의 변증법], 한승완 외 역, 새길 2012, 222쪽 참조.
이러한 인식의 확대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 주체를 다시 사회적 역사적 조건의 산물, 즉 ‘운동의 결과’로서만 대하면서 결정론적 냉소주의를 퍼뜨리는 사태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변혁 주체들이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임을 실천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다. 자본독재체제를 넘어서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해방적 실천 없이 노동자민중이 주체로 일어서고 존중받을 방법도 없다. 해방적 실천 속에서만 과학의 성과들은 노동자민중을 착취와 통제의 대상으로, 노예로, 개돼지로 만드는 자본권력의 수단에서 노동자민중의 해방 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
(2023. 4. 24.)
주
↑1 |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97쪽. 이하 ‘경철’로 약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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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직접적인 자의식에서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절대적 대상은 우리에게 혹은 즉자로서 절대적 매개”이다.(현상학150) 여기서 ‘우리’는 사정을 꿰뚫어 보는 철학자, ‘즉자로서’는 실제로, ‘매개’는 제반 조건들의 산물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선험적 주체를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라고 이해한다.(부정257) 이 경우 ‘사회’는 ‘사회적 주체’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3 | 유물론은 칸트가 ‘현상’ 개념으로 던져놓은 숙제, 곧 인식에 섞여 들어가는 주체적 편향들에 대한 비판적 해명작업을 피할 수 없다. |
↑4 | G. Lukács: Tendenz oder Parteilichkeit? in: Georg Lukács Werke, Bd. 4, Neuwied/ Berlin 1971, 31쪽 참조. |
↑5 | S.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3, 110-111쪽 참조. |
↑6 | 필연과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기로 한다. |
↑7 | F. 엥갤스: [자연의 변증법], 한승완 외 역, 새길 2012, 222쪽 참조. |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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