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5호 8-2 손배소 문제는 법제의 문제 이전에 노동에 대한 시민적 의식의 전환에서 찾아야 한다.

김파란 ㅣ 농민

대우조선 하청 노조의 파업은 손배소 문제를 뒤로 넘기고 잠정 합의되었다. 조선일보는 이것을 두고 시급 9500원 노동자들이 4.5% 시급 인상을 위해 회사에 8천억원의 손해를 줬다고 선동 중이다. 이건 파업 노조의 노동자들에게 손배소 가압류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여론몰이의 시작이다.

페친 이장규 쌤의 말처럼 파업에 따른 손배소” 문제는 개별 노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회에서 법제화할 문제이고, 실제로 법안(이른바 노랑봉투법)도 올라가 있다. 그러나 우린 지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지 않았나? 이건 민주당이 180석 아닌 전체 의석수를 다 가져가도 그들의 선의에 의해 법이 통과될리 만무하다.

동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살펴볼 때, 통치자자 자발적으로 민(인민)을 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말은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민(인민)을 위하는 것만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만 작동한다. ‘자유주의의 기원’을 쓴 이나미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황금기라 불린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이유는 경쟁자인 키몬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키몬은 귀족제를 주장했으며 돈이 많아 사람들을 즐겨 대접하곤 하여 지지자가 많았다. 페리클레스는 재산의 양에서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으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내새워 지지자를 모았다. 또 공금을 이용하여 각종 사업을 일으켰고 일자리를 창출해서 대중의 인기를 모으려 했다.

동양에서 애민사상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했는데 그때는 여러 군주가 난립하여 서로 전쟁을 일삼던 시대로, 각 군주는 얼마나 많은 병사를 확보할 수 있는가로 승리를 점쳤다. 그 병사는 ‘민’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천하를 얻으려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근대 서구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 역시 사회주의자들과의 경쟁에서 더 많은 민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경쟁자가 없으지면 민주주의는 없어지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돈과 권리이 있는 자들의 ‘자유’만 남는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단체로 공장을 점유하는 파업을 통해 압력을 가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약자로서 그 방법밖에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있거나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도 도출된 사회라면 노동자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삶과 목숨을 담보로 지금껏 저런 투쟁을 하겠는가?

이런 노동자들은 파업 후에도 손배소 가압류 소송과 마주할 때 숨통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절규한다. 회사 측은 노동자들에게 심적 고통을 느끼게 하려 노동조합이 아닌 그 조합 개개인에게 소송을 걸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회사측은 파업- 업무방해 형사고발 – 손배 가압류 청구는 하나의 공식이 됐었다. 실제로 노태우 정부 때 회사측에 불법쟁의에 의한 손해에 대해 손배 가압류를 적극 활용해라는 지침이 있기도 했다.

허나 헌법 33조 1항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합법파업’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국제노동기구(ILO)도 2017년 6월 이사회보고서에서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라며 한국 정부에 손배 가압류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고했고, 같은 해 10월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손배 가압류에 대해 “쟁위행위” 참가 노동자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당사자국의 자제와 독립조사를 권고했다. 이런 국제사회의 권고에도 한국 정부와 자본은 지끔껏 노동자들 투쟁에 손배 가압류라는 ‘법’을 어떤 사회적 제재도 받지 않고 휘두르고 있다.

지금껏 노동자들이 받아 낸 아주 작은 권리 하나도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얻어졌지, 통치자나 자본의 선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든 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돈과 권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를 느꼈을 때만 노동대중을 위한 최소한의 법을 만들었다. 원론적인 얘기일 수밖에 없지만 국회에 있는 노란봉투법을 살리는 길은 이 사회에 뿌리 박힌 노동혐오를 부셔 낼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 목소리에 공명하고 같이 연대해 밑바닥의 목소리를 위로 올리는 방법밖에 없다. 정말 지겹게 말하지만 뭐든지 ‘법대로 하라’는 것은 기존 힘의 균형에서 힘의 향방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의 의도를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이걸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래의 목소리가 터져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제도가 바뀌고, 사람들 생각이 바뀌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삶의 방식 모두가 바뀔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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