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대선과 노동자정치

홍승용 | 현대철학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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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다가옴에 따라 여야 보수 정치권의 사활을 건 권력투쟁이 모든 사회적 관심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기세다. 특히 민주당 경선 한복판에서 불거진 대장동 사건에서는 어떻게 극소수 법조⋅언론⋅정치권력 카르텔이 토건업을 통해 천문학적 부를 개인들 주머니에 쓸어 담아 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50억 클럽과 수백 수천억 불로소득 잔치는 공정이니 정의니 하는 근래의 지배정신을 비웃으며 노동자민중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 그 일부라도 환수했고 앞으로 개발이익 환수를 제도화하겠다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보수 기득권세력의 총궐기에 직면해 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과 불만으로 정권교체를 원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상대후보들의 경쟁력과 제반 조건을 감안할 때 차기 정권은 이재명 정권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검찰 출신 국민의 힘 후보가 정권을 장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공정이나 정의가 어느 분 뒷주머니로 들어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예측 가능성에서 앞서는 이재명 정권은 검찰 및 언론 등 제반분야에서 개혁의 이름 아래 기존의 기득권구조에 크고 작은 칼집을 내며 표를 모아갈 것이다. 환경위기의 압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첨단기술을 앞세우는 생산성 증대를 위해 국가권력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경제영역에 개입할 것도 예상된다. 즉 독점자본주의체제 유지의 효율성을 높이는 조치들이 개혁과 경쟁력의 이름 아래 쏟아져 나올 수 있다. 남북문제나 국제관계에서는 기존의 정책기조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자본주의 틀 안에서 가능한 개혁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노력 여하에 따라 노동자민중의 정치의식에 긍정적 변화를 촉발할 공간이 열릴 수도 있다. 개혁의 성과가 가시화될수록 노동운동의 개량화와 우경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애국을 넘어선 배외주의가 발호할 가능성도 크다.

차기 정권은 몇 가지 난제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사소한 기득권침해에 대해서조차 총력전으로 맞서게 될 극우보수 세력의 저항을 어디까지 극복해갈지 혹은 얼마나 일찍 타협하고 주저앉을지가 관건이다. 이 적대관계는 ‘억강부약이라는 좌성향의 정치철학’과 ‘경쟁력 강화라는 우성향의 경제원리’를 사안별 정책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등장하는 갈등과 해법의 산출 과정 속에도 파고들 것이다.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리는 데에 비례해 우성향이 우세해질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차기 정권의 한계 내에서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대비책을 만들어 낼 것인지도 의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 실질적으로 차기 정권에 별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최대의 관심사다.

이 마지막 관심사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실업 문제다. 얼마 전 언론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 노동자 절반 이상이, 한국의 경우 60% 정도가, 1년 안에 실직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때 실업의 원인은 당연한 듯이 코로나 사태라고 전제된다. 하지만 사실상 코로나 이전에도 대다수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경제성장은 이미 한계치에 접근하고 있었다. AI로 인한 인류의 종말 문제는 SF영역으로 미뤄둔다고 해도, 첨단기술발전을 통해 특별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는 기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것은 코앞의 현실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대와 일반적 이윤율 저하는 맑스의 악의적 가설이 아니라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서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본질적 경향이다. 또 세계적 독점자본 집단들 사이의 경쟁과 생산력의 불균등발전, 이에 따른 과잉투자 및 과잉생산은 생산력 낭비와 주기적 위기를 수시로 초래해 왔다. 자본주의 밑바닥에서 진행되는 이 근본경향은 코로나와 별도로 강력하게 진행 중이다. 이 근본경향이야말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실업 사태의 주원인이며, 코로나는 그 진행속도를 높여놓았다. 코로나 문제가 해소되어도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이 경제를 지배하는 한 실업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자본권력에 고분고분 복종하고 자본증식을 절대명제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해결할 수 없는 근본문제다.

둘째의 근본문제는 국제적인 갈등과 전쟁의 위협이다. 국가권력의 사회통제 기능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비중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전반적으로 커졌다. 그와 아울러 자원⋅시장⋅영향력 등을 둘러싼 국가 간의 분쟁 가능성도 증폭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갈등과 전쟁은 레닌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경쟁적 독점자본 집단들 사이에는 생산력 불균등발전에 따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아직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 또한 일상화되어 있다. 이는 특히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주도권 다툼으로, 이른바 ‘무제한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도권 다툼이 경제 전쟁이나 냉전 수준에 머물지는 불확실하다. 대만 해협, 인도와 중국의 국경지역, 한반도, 혹은 그 밖의 어느 지역에서 시작되는 분쟁이 대규모 군사충돌이나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전으로 발전하여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괴와 인류의 공멸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당연히 한 나라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제국주의단계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위험요인이며, 인류가 자본주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 끊임없이 재연될 것이다.

셋째로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사회가 겪게 될 재앙은 전쟁으로 인한 문명파괴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절제한 자연착취와 파괴, 그 결과인 기후온난화, 이로 인한 기상이변과 해수면 상승은 특히 곡창지대의 급속한 잠식과 식량의 절대부족, 그리고 전세계 빈곤층의 절망스러운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가 비용절감을 위해 태평양 전체의 생태계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은 그다지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근래 폭증하는 자연재해 규모에 비춰보면, 제2, 제3의 후쿠시마로 인해 지옥문이 추가로 열릴 리 없다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차기 정권을 태생적으로 짓누르는 난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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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본주의를 불변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이고 주저앉아 있는 한, 이러한 예상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할 길 없는 인류의 숙명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적 산물이고 그래서 인류의 힘으로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범인류적 위기가 눈앞에서 폭증해갈수록, 자본증식을 절대화하는 전제를 바꾸고 대안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대안사회의 요체는 자본독재 내지 자본권력을 대변하는 기존 정치권력이 그 본성상 해결해낼 수 없는 범인류적 난제들, 즉 대량실업과 극단적 양극화, 환경재앙과 전쟁위기 등을 극복하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물론 대안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착취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드는 자본독재 권력과의 사활을 건 전쟁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자본권력을 상대로 하는 이 전쟁을 수행할 중심 주체는 태생적으로 자본과 적대적 모순관계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OECD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재사망률을 자랑하는 노동후진국만의 특수 상황이 아니다. 또 시초축적 단계나 산업혁명기의 극악한 수탈과 착취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하는 소리도 아니다. 인류 전체가 이미 풍족한 삶을 누릴 만큼 생산력이 발전한 단계에서도 무한증식은 자본의 변함없는 본성이다. 그래서 부의 집중과 상대적 빈곤 내지 양극화의 심화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적 경향이다. 축적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자본이 그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도 필연이다. 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저항이 없으면 대량실업과 절대빈곤의 양산 또한 불가피하다.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저항의 방법은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체인 민주국가, 곧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노동자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근본적으로 제어하고, 이제까지 인류가 역사적으로 이룩해낸 생산력을 자본증식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필요에 부합되게 활용할 수 있는 생산양식을 정착시키는 데에 있다. 또 이때 예상되는 자본독재 권력의 저항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일도 노동자국가의 본질적 과제다. 노동자국가는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하며 소수 지배계급의 독점적 이권을 대변하는 형식적 민주국가가 아니라,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구현하는 실질적 민주국가다. 또 노동자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기존국가의 성격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국가사멸을 향해 나아가는 과도적 국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가는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던 파리코뮌의 민주주의 정신을 오늘의 조건에 맞게 구현해야 할 것이다.[1]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엥겔스의 서문), 346, 355쪽 참조. 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과정 자체도 민주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건설된 노동자국가는 누구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멋대로 갑질할 수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한다. 또 누구도 생존권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연의 부와 인류의 문화유산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를 추구한다. 즉 노동자국가 건설은 인류가 자본독재로 인한 총체적 파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 도약이다.

이때 풍요로움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나 과잉생산 혹은 무절제한 소비 등과 거리가 멀다. 사회가 생산하거나 각자가 소유하는 재화의 양적 증대가 풍요로움을 결정하는 척도가 되는 것도 아니다. 풍요로움의 내용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 열거하자면, 모든 사회구성원의 기본적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물적 토대 확보, 생산력 발전에 따른 노동시간 축소, 소외된 노동 및 착취를 위한 잉여노동을 강요할 수 없는 생산관계,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사회적 정치적 주요 의사결정과정에 배제되지 않고 참여할 권리 보장, 자연환경에 대한 비-착취적 다면적 관계 형성, 인류의 무궁무진한 문화유산들과 자연의 혜택들을 누리고 스스로도 가치 있게 사물을 조형⋅창작할 수 있는 감수능력의 육성 및 발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공간의 확대 및 이런 활동에 대한 상호인정, 각자의 역사적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대한 자각과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능력 발전, 평등원리의 일상화 등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맑스가 󰡔경철초고󰡕나 「고타강령비판」 등에서 암시하는 바처럼, 사적 소유로 인한 소외와 분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인간 본성의 전면적 발전과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사회, 즉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2]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107쪽 참조. 혹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3]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참조.가 구현하려는 바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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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자본독재로 인한 범인류적 파국의 위험을 극복할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에 누구나 동의하고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권력과 이를 대변하는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집단이 필사적으로 그러한 건설운동을 저지하려고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지만 집요하게 전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다. 또 이 전쟁이 한 국가 내에 한정되지 않고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리라는 데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운동의 주역이 되어야 할 절대다수 노동자민중 자신이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원하지도 않고 그 필요성을 의식하지도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주요 원인으로는 우선 현실사회주의운동의 패배를 생각할 수 있다. 소련 및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사회주의는 인류사회에서 영구히 퇴출되었고 자본주의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최후의 사회질서라는 막연한 관념이 노동자민중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되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노동자국가 건설도 이미 패배한 운동을 뒤늦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오늘의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범인류적 위기 극복을 위한 미래의 노동자국가가 패배한 현실사회주의를 그대로 반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 역사적 체험을 모두 버려야 할 이유도 없다. 미래 사회에 부적절한 부분은 비판하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부분은 적극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특정한 사회 형태를 통째로 미래 노동자국가의 모델로 삼는 것보다는, 자본주의 속에서 인류가 이룩해낸 주요 성과들을 포함한 모든 역사적 유산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는 입장에서 그것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재의 실천적 과제에 근거해 주체적으로 미래사회의 모델을 우리 자신이 새로이 구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4]이 경우 변증법의 주요 요소로서 ‘분석과 종합의 통일’을 지적하는 레닌의 주장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 Continue reading

좀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 민주노동당 이래 노동자 진보정치운동에서 특히 선거와 당권 문제를 중심으로 갈등과 분열이 반복됨으로써 제도정치와 관련한 부정적 경험이 누적되어 온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의회주의 너머의 근본대안을 만드는 일이 미진함에 따라 정치활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출세주의나 관료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과 의구심이 싹트는 것도 당연했다. 또 진보정당들이 외연확장을 통해 국회에서 의석 하나라도 늘이려 애쓰는 가운데, 자본에 맞서는 전쟁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중심적 의미를 희석시키고 노동운동을 제반 부문운동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온 이력도 노동자정치의 활력을 잠식해온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 경험에 비춰볼 때 노동자민중이 정치 자체를 불신하고 당이나 국가권력에 대한 논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은 불변적 조건이 아니라 노동자정치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다.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원론적으로 인정하면서 국가권력의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자본독재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분열을 넘어 노동자국가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동시에 관료주의의 위험을 막을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당과 전위의 역할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는 것도 당면과제다. 이때 보통선거에 의한 주요 공직자의 선출과 소환, 공직자의 특권 및 서열의 배제, 오류의 인정과 정보공개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통해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도록 한 파리코뮌을 주요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직접민주주의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것이 현대의 기술발전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전위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노력은 노동자국가 건설에 필수적이다. 전위의 역할은 노동자민중 모두가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실천에 동참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 앞서 나아가는 데에 있다. 이때 레닌의 유서 깊은 표현인 ‘인민의 호민관’을 상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는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전횡과 억압이 드러나는 온갖 현상들을 ‘경찰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종합할 능력’과 ‘프롤레타리아트 해방투쟁의 전세계적,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그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활용할 능력이 있는 인민의 호민관’이 될 것을 요구한다.[5]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호정 역, 박종철출판사 2001, 105-106쪽 참조. 레닌의 다음과 같은 주문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아주 사소할지라도 적들 사이에 나타나는 내분, 다시 말해 여러 나라의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집단이나 유형의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해대립과, 비록 아주 사소할지라도,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유동적이고 믿을 수 없고 제한적일지라도 대중의 투쟁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어떤 기회든지 능숙하게 반드시 이용해야만 한다.”[6]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76쪽. 이하 ‘소아병’으로 약칭함. 조직이나 정파들이 노선차이를 극복하고 노동자국가 건설의 대의에 동참하여 단결하는 과정에서는 전위들의 헌신이 결정적이다. 헌신의 내용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함께 전위로 만들기, 정파와 조직의 주도권이 아니라 노동자정치 전체의 이익에 복무하기, 역할에 맞는 책임을 혼신을 다해 감당할 뿐 아니라 소환에도 기꺼이 응하여 물러날 줄 알기 등일 것이다.

진보정당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성 문제를 회피하고 여러 부문운동들 가운데 하나로 만든 데에는 무엇보다 현실사회주의 패배에 따른 자본독재 극복 전망의 상실이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던 이론들도 일정하게 기여했다. 맑스-레닌주의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을 직시하고 근본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에 맞서 차이를 궁극원리로 내세우거나, 위계질서니 환원론이니 경제주의니 하는 저주의 전문용어들로 각 운동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의 차이를 흐려놓는 형이상학들이 학계와 시민운동 속에 스며들면서, 노동자정치에 대한 채무의식과 기대는 끊임없이 잠식당해왔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피할 길 없는 인간의 조건처럼 받아들이는 숙명론도 노동자민중의 삶 속에 뿌리를 뻗어왔다. 이러한 현상들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기보다 절대적인 조건으로 상정하고 노동자정치를 포기하도록 선동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다시 노동자민중의 숙명론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물론 노동자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해방운동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과 억압을 없애는 해방운동들은 모두 노동자국가 건설의 원동력이다. 노동운동과 노동자정치만으로 불평등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독재에 맞선 전쟁에서 모든 해방운동들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운동이든 자본독재 문제와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관에서 중요성의 비중과 문제해결을 위한 효율적 역량 배치의 선후관계를 빼놓을 수는 없다. ‘약한 고리’나 ‘주요모순’ 개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집약하는 전략적 개념이었다. 물론 하나의 주요모순을 확정하고 이를 해결함으로써 다른 모순들도 쉽게 풀 수 있다는 고전적인 해법이 오늘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면밀히 따져보고, 좀 더 적합한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본독재를 효율적으로 극복하려는 전체 과제 속에서의 전략적 비중을 감안할 때 노동자정치의 중심적 의의는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노동자정치가 자본독재 극복운동의 중심을 이루면서 여타 해방운동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일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고립 분산된 상태로는 어떤 운동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성과밖에 거둘 수 없다. 분열책은 지배자들의 무기이고 단결은 피지배자들의 무기라는 점에서 해방운동에서 연대의 필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안별 필요에 따른 일시적 연대만으로는 자본독재에 맞선 장기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일시적 사안별 연대를 넘어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연대와 운동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국가 건설을 통해 부문별 해방운동들이 얼마나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또 전체 운동 속에서 떠맡을 수 있는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해 공감대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이론을 통해서만 아니라 지금 가능한 연대투쟁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공감대를 넓히는 일은 노동자정치가 떠맡아야 할 과제다.

자본권력의 국제적 성격을 감안하면 연대의 범위는 일국 내에 머물 수 없다. 서로 경쟁하는 제국주의 세력들도 노동자국가들이 건설되면 일치단결하여 노동자국가들을 무너뜨리려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 전쟁에서 제국주의적 자본독재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면 미래의 노동자국가들은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운명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기본원리는 노동자 국제주의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국제주의는 인터내셔널 혹은 코민테른의 해체로 시효를 잃은 과거의 이념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이 국제적 성격을 더해온 것에 비례해 노동자 국제주의의 기반도 넓어지고 있다. 한국 자본이 저개발국들의 저임금 노동자들 덕분에 초과이윤을 뽑아올 때, 또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시달리며 3D업종을 연명시키고 있을 때, 한국노동자들이 자본권력의 편에 서지 않고 외국노동자들 및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경험을 축적해가는 것은 노동자 국제주의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또 이러한 경험의 축적을 발판으로 노동자 국제주의 조직의 부활과 제국주의 자본에 맞선 전략 구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아직 국제주의적 실천은 미흡하다. 국제적 연대에 대한 호소는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괘씸한 짓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에 머물고 정치투쟁을 포기할 때, 노동자계급 내부의 서열과 분열은 물론이고 이주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역시 국익과 집단이익의 이름으로 당연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이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 국제 자본권력과 전쟁을 벌일 경우, 배외주의 및 차별을 극복하고 만국 노동자의 단결을 구현하는 것은 전쟁의 승패가 걸린 문제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동자국가 건설을 노동자민중이 절실히 원하지 않게 만든 근본 원인으로서 한국사회의 제국주의적 성격 증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분단과 한미군사협정, 강제적 사드배치, 친일잔재, 미일에 대한 기술 예속 등 여러 측면에서 식민지적 요소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국가 건설과 별도로도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은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자본권력도 이미 저개발국들에서 저렴한 노동력 등을 활용한 초과이윤을 거두며 앞선 제국주의적 자본권력들과 시장⋅자원⋅영향력 등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생산력과 자본만 아니라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다. 이 점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에서는 한국의 제국주의적 발전과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대응도 필수적이다.

이 경우 레닌이 비판하는 사회배외주의와 노동운동의 우경화 문제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 사회배외주의와 우경화 문제가 심각해지게 되는 과정에서는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을 이용한 노동계급 상층부 매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7]V. I.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2015, 38-39쪽 참조. 매수는 직접적인 뇌물수수나 매관매직에 그치지 않는다. 분할지배의 효과,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사이의 임금격차 구조를 장기적으로 고착시킴으로써 얻은 최대의 효과가 바로 노동운동을 변혁적 정치운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분할지배 자체가 매수와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고소득층 노동자들이 소시민적 생활방식과 살 만큼 산다는 감각을 몸에 익히고, 그들을 본보기로 삼는 저소득층이 경제적 서열사다리의 한 칸이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장시간 노동에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권력은 확고부동한 절대적 지위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고소득층 노동자 가운데 교육과 이데올로기 업무에 종사하는 지식노동자들 절대다수는 자신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자각과 뼈아픈 비판을 감행하지 않는 한, 자본권력의 이익에 부합되는 이데올로기를 미래의 노동자들인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주입하는 일에 목숨줄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먹고 성장한 학생들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보수화되어 정치투쟁을 기피하고 경제주의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물적 조건이 사회 곳곳을 잠식함에 따라 노동자민중은 노동자국가 건설에서 점점 더 멀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물적 조건은 영구불변의 철칙이 아니다. 선진자본주의국들의 전반적 성장둔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평균이윤율 저하 경향은 맑스의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한 피하기 어려운 실제 상황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각별한 기술혁신을 통해 한 동안 특별잉여가치를 뽑아내는 분야들이나 기업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자본증식욕구의 시한부 생명연장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경제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분야별 과잉투자와 과잉생산, 이로 인한 생산력의 낭비 역시 그 규모를 끊임없이 늘여왔다. 이 점에서 고소득층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살 만큼 산다는 감각은 시한부 환각이다. 누구도 첨단 과학기술과 자동화⋅무인화가 초래할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액의 기본소득으로 대량실업의 해일을 막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예측불허의 전쟁위기와 맹렬히 가시화되고 있는 환경재앙 역시 시한부 환각을 언제라도 깰 수 있다. 근본적인 대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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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대선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는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정치와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다.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한 전쟁이 어떤 형식으로 벌어지든,[8]레닌은 미숙한 혁명가들의 경우에 부르주아지가 합법적 투쟁 수단의 분야에서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자주 속이고 우롱했다고 해서 ‘합법적인 … Continue reading) 노동자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 것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조건인데, 대중들의 정치적 관심이 뜨겁게 타오르는 선거공간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노동자국가 건설의 진행도 지체될 것이다. 기존의 선거제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특수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아닌 한, 노동자국가 건설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관심과 동참을 확대하기 위해 선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대선에 대한 주요 입장들 또한 노동자국가 건설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민주노총 선거 이후 현장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전국 노동자 좌파활동가모임’은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에 매몰되는 현실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사회대전환을 위한 정치투쟁 추진을 표명하고 있다. 대전환의 요체는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 청년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난민, 이주민/이주노동자 등에게 차별 없는 평등세상 건설이다. 이를 위해 이 모임은 분산되어 무기력해지고 있는 좌파 활동가들을 다시 결집하여 초심으로 돌아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권력 혹은 현장권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관련 교육사업도 각별히 준비 중인 듯하다. 좌파활동가모임은 특히 양당정치에 빌붙는 기회주의와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또 구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성격을 바꾸어갈 수 있다고 유연한 자세를 취하지만, 대선은 물론 선거 일반과 정당정치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보인다.

좌파활동가모임이 노동자전선 조직 바깥의 활동가들까지 결집하여 정치투쟁의 역량을 키우려는 것은 의미 있는 노력이다. 이로써 좌파 정치조직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노동자국가 건설의 발판을 다지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모임이 계획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노동자민중의 정치의식 발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진보정당들 및 정파들 간의 분열로 귀결된 권력투쟁과, 초라한 선거 결과들에 실망하여 정당정치를 불신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며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권력을 추구하게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당과 국가권력의 문제를 우회하면서 노동자정치운동에 불을 붙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직접적인 정당정치 및 선거참여를 거부하더라도, 자본권력을 대리하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자본독재를 제어할 수 있는 노동자국가 건설의 기본 전망을 제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전망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권력 혹은 현장권력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검토하고 밝혀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러한 검토와 적합한 위상 설정 없이 현장권력이 자립적 지위를 요구하게 되면, 사회대전환을 위한 적극적 전략적 노력이 빈약해지고 대중의 자발성 내지 집단지성 등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쉽다. 이 경우 노동자민중의 자발성 자체도 이미 자본권력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욕구와 개념장치 따위로 오염되어 있다는 난관에 부딪칠 것이다. 이러한 난관은 무정부주의가 초래해온 문제, 즉 자본권력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써야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9]국가라는 무기의 포기는 노동자국가가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사멸하는 현상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V. I. 레닌: 󰡔국가와 혁명󰡕, … Continue reading 또한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표방하면서 좌파활동가라는 자격조건으로 진입장벽을 설정한 것도 거북함을 자아낸다.[10]이러한 거북함 때문에 대중과 지도자를 엄격히 대비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레닌은 ‘변절적 지도자들’을 … Continue reading) 이런 난점들을 일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방법을 마련하면서도, 당과 국가권력, 가까이는 민주노총과 관련한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고 혼신을 다해 책임지고 추진하는 것 아닐까?

최근 가시화되고 있는 노동당과 변혁당의 통합이 노동자정치 발전의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게 될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에 대한 이론적 평가 상의 옳고 그름 문제 혹은 정파적 헤게모니 문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당면 실천과제의 무게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전위의 헌신성이 요구된다. 이 경우 유산에 대한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수용방식, 즉 어떤 모델로부터도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우리의 실천적 요구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정파적 차이들을 상대화할 만한 절대적 공동목표들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이러한 방식은 양당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대중화라는 목표를 정치현실에서 구현하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의 사회주의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도 사회주의를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대중화 운동에 앞서 우선 대중화할 사회주의가 어떤 성격을 띠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비판하며 열거하는 사회주의만 해도 예닐곱 가지가 있다. 20세기에도 현실사회주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치도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했다. 현실사회주의도 각국의 조건에 따라 상당한 차이들을 보인다. 따라서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를 고수하는 것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본질적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양당이 대중화하려는 사회주의의 실제 요소들과 전체적 의미를 과거의 운동 유산들을 비판적⋅분석적으로 파악하고 오늘의 필요와 조건 속에서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는 내용을 통해 종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대중들이 추구할 만한 사회주의의 실질적 요인들을 밝히고 전체상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 원론이나 강령적인 밑그림만 아니라 이를 구현할 세부적인 정책들까지, 실현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대중의 공감대를 만들 수 있도록,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노동당이 핵심 정책의 한 가지로 제시하는 주 ‘30시간노동제’는 과학기술과 생산력 발전에 따른 대량실업, 야만적 산재 및 과로사를 막고 노동자민중의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넓혀 풍요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국공립대학 평준화와 무상교육’ 역시 평등사회로 향한 진일보가 될 것이다. ‘국가공공주택 1000만호 무상 공급’도 무주택자들에게는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 모두에 대해 자본권력과 그 대리자들이 결사항전을 벌일 것은 자명하다. 피할 수 없는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의 절대적 지지다. 이 절대적 지지를 얻는 것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본질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권력은 끊임없이 매수를 통한 분열획책, 이데올로기와 매체⋅제도들을 통한 반복적 협박과 세뇌와 무의식적 체질⋅감각⋅욕구 형성, 과학의 외양을 띠는 사실왜곡과 은폐 등등의 기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이러한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본권력이 만들어내는 제반 혼선에 대응할 고성능의 이론적 무기를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노동자민중이 공유하여 무기로 사용하게 할 조직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새로운 노동자당은 한동안 그러한 이론적 무기 개발과 대중적 공유를 위한 연구⋅교육⋅선전조직의 발전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대선에서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도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앞에 내걸고 당장 몇 표를 얻느냐보다, 얼마나 충실히 대전환의 정책적 이론적 사상적 무기들을 개발하고 공유할 조직적 기반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중경선으로 진보-좌파 단일후보를 만들고 진보-좌파 연대연합정치를 추진하여 거대 양당과 함께 한국사회 정치지형을 3분하는 진보-좌파 진영을 건설하자는 제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진보-좌파 연대연합정치론은 앞의 두 입장 사이의 중간형태라고 할 수 있지만, 논의를 좌파 내지 사회주의에 한정하지 않고 정의당과 진보당에까지 넓히면서,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의 선순환을 기대한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상당 기간 단일정당 형식을 배제하고 현재의 진보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되,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와 좌파 사이의 연대연합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연대연합정치론은 정의당에는 진보정당으로 거듭날 것을, 진보당에는 진보-좌파 내에서의 신뢰 회복을, 좌파에게는 진보와의 연대연합 속에서 독자적 힘을 키울 것을 주문한다.[11]고민택 외: 󰡔2022년 대통령선거와 진보-좌파 정치󰡕, 해방터 2021, 25쪽 이하 참조.

그 동안 정의당이 의석 늘이는 데에 모든 것을 걸고, 특히 진보당은 민주당과 연합하려다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면서 양당 모두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멀어진 이력을 감안할 때, 양당과의 연대연합이 노동자민중정치의 발전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회의감부터 들기도 한다. 그래도 두 당을 진보-좌파 연대연합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양당의 노동자민중적 뿌리를 다시 살려내고 노동자민중정치의 현실적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키우려는 고심의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현재의 진보다원주의를 인정하자는 주장도 진보-좌파 내부에 고착된 분열상태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으리라는 현실 판단의 산물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적 위상을 되살리려는 의도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우선 향후의 당세 확장 등을 염두에 두고 독자적으로 후보를 내놓은 정의당과 진보당이 민주노총의 민중경선에 참여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참여하더라도 향후 자본독재에 맞서는 독자적 노동자민중정치 발전을 위해 기존의 당 성격을 얼마나 바꿔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진보-좌파 연대연합정치론의 장기 구상이 자본독재로 인한 범인류적 위기를 극복할 노동자민중권력의 성장 및 이를 통한 노동자국가 건설을 추진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대 양당과 진보-좌파의 3분할구도를 설정하는 데에 비중을 두는 것은 자본독재 극복을 먼 미래로 미뤄두는 입장의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입장은 대선 이후의 정치과정을 합의하지 않으려는 데에서도,[12]같은 책, 67쪽 참조. 즉 대선을 향후 노동자정치운동의 밑그림을 그리고 발판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래서 진보-좌파 연대연합정치론에서는 역사적 분열의 경험과 오늘의 난관들을 인정하자는 출발 전제의 무게 때문에, 노동자민중정치를 요구하는 자본독재의 객관적 문제 상황이 희석될 뿐 아니라, 지향 목표설정에서 얻을 수 있는 희망의 에너지도 기대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난관 속에서도 민주노총이 단일후보를 세우려 한다면, 한국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잠재력을 믿고, 자본독재 극복의 절박한 필요성을 근거삼아, 노동자국가 건설을 향해 도약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노동자후보’를 세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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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중경선이 성공적으로 의미 있는 과정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다음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즉 노동자후보 선출은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의 일환이어야 한다. 민중경선에 참가하는 정당⋅단체⋅정파 혹은 개인들은 대선을 계기로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관문인 노동자국가의 필요성⋅정당성⋅효용성을 설득력 있게 밝히고, 그 실현을 위한 효율적 정책들을 최대한 세밀하게 개발할 뿐 아니라, 이렇게 개발된 사상적 이론적 무기들을 노동자민중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폭발적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노동자후보는 대선에서 얻게 될 지지율이 아니라 향후 노동자정치 발전의 불씨 역할을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이유를 지닌다고 여겨야 한다. 대선은 정당이나 정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동자민중을 동원하는 일시적 행사가 아니라,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장기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진용을 갖추는 노동자정치의 압축적 발전기간이 되어야 한다.

지젝의 주의주의도 가끔 좋은 교훈을 던진다. “만약 누군가 혁명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혁명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미성숙한’ 시도에서 시작하여 겨냥한 목적 달성의 실패 바로 그 안에서 −거기에 ‘혁명의 교육학’이 있다− ‘정확한’ 순간을 위한 주체적 조건들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를 반추하며 신중하게 분열과 무기력상태를 고착시키기보다, 설혹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압축적 발전의 기회를 활용하는 쪽이 좀 더 낫지 않겠는가. 물론 현명한 활동가들이라면 실패와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도 만들어 공연히 주의주의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국가를 향한 도약을 미루지 말자.

1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엥겔스의 서문), 346, 355쪽 참조.
2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107쪽 참조.
3 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참조.
4 이 경우 변증법의 주요 요소로서 ‘분석과 종합의 통일’을 지적하는 레닌의 주장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논장 1989, 177쪽 참조.
5 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호정 역, 박종철출판사 2001, 105-106쪽 참조.
6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76쪽. 이하 ‘소아병’으로 약칭함.
7 V. I.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2015, 38-39쪽 참조.
8 레닌은 미숙한 혁명가들의 경우에 부르주아지가 합법적 투쟁 수단의 분야에서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자주 속이고 우롱했다고 해서 ‘합법적인 투쟁수단은 기회주의적이요, 비합법적 투쟁수단은 혁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비합법적 투쟁형태를 모든 합법적인 투쟁 형태와 결합시킬 수 없는 혁명가들은 참으로 형편없는 혁명가이다.”(소아병108
9 국가라는 무기의 포기는 노동자국가가 그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사멸하는 현상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역, 돌베게 2015, 108쪽 참조.
10 이러한 거북함 때문에 대중과 지도자를 엄격히 대비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레닌은 ‘변절적 지도자들’을 폭로⋅비판⋅추방하지 않고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지도자들의 독재와 대중들의 독재를 일반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웃길 정도로 터무니없는 짓이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응수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사실 이 간단명료한 문제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견해를 가진 옛 지도자들에 대신하여 지독한 잠꼬대와 허황된 말을 지껄여대는 새 시도자들이(‘지도자를 타도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소아병41
11 고민택 외: 󰡔2022년 대통령선거와 진보-좌파 정치󰡕, 해방터 2021, 25쪽 이하 참조.
12 같은 책, 6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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