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ㅣ 농민
우리는 결코 깨지지 않을 거 같은 현재의 상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아 한다. 왜 내가, 내 아이가 이런 차별과 배제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야 지금의 구조가 흔들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의 사회 구조와 제도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와 당신들이 침묵했기에 나타난 정치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한국 사회에 보수-진보가 어디 있고, 좌파 – 우파가 어디 있나? 모두 ‘돈’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한국의 ‘좌파’ 이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몫 없는 자’ 들의 삶을 알고 정치했는가 말이다! ‘좌파의 양심’ 소가 웃을 일이다. 이들은 민주화 세력이라는 계급을 만들어 부를 축척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본의 권력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대가리를 숙였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좌파/우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몫을 가진 자와 몫이 없는 자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목숨에 중립이 어디 있는가?
한국 사회는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중립자적 객관성>을 유지하며 사회현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겠다는 “지식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가치 중립>교리에 병적으로 집착하며 자신은 누가 뭐래도 현실정치의 ‘흙탕물’에 절대 섞여 들어가지 않으며 고고하게 “순결한” 학술 자아를 지키며, 중간자적 입장에서 엄밀한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말을 한다. 그럼 한번 따져보자. 이 사회에서 중립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2018년 12월 11일. 김용균이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사망한 채 발견됐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끼인 김용균의 시신은 머리와 목이 분리되었고, 등은 갈라서 타버린 상태였다. 4시간 만에 김용균 시신을 발견한 회사는 김용균의 동료들에게 석탄 자루에 시신을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2021년 300kg 철판에 깔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 노동자 동료들의 병원차를 부르라는 절규에도 회사는 119보다 윗선에 보고가 먼저였다.
이런 현실에 중립은 어디쯤이란 말인가?
자본악귀-임노동착취 관계로 촘촘하게 짜여 “대갈빡에 피 터지도록 싸워야 겨우 생존권 유지하며 살까말까하는” 언제나 내전(civil war) 중인 사람들에게 중간 지대는 어디인가 말이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면 그런 소리 하기 힘든다.
이런 지식인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우기며, 이를 ‘주관적으로’ 독실하게 추구하겠다는, 마치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의 ‘슬픈’ 진정성 같아 우습다. 허나 이 땅의 판박이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듯하다.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가도 병원차를 부르라는 노동자들의 절규에 윗선의 보고가 먼저인 야만은 이런 사고가 조형되어 고착화되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이 말 – 가치중립 객관성 – 이 아주 멋진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식인들이 말하는 가치 중립이라는 것이 학술세뇌의 올가미에 불과한 말이었다.
더 나아가 이는 지식인들과 민중이 ‘접합’하여 일체화되는 <근본모순해결의 정치>로부터 지식인을 분리시키려는, 일종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 즉 아파라트헤이트(Apartheid)식의 <분리시키기>의 변종에 불과하며, 지식인이 결코 민중(의 이해)과 손잡을 수 없게 하는 ‘잠금장치’의 역할이 그 궁극적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급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분리’를 통해 그리고 그로 인한 지식인 본연의 비판성 거세를 통해 사회담론의 장을 장악하여, ‘중립’이라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투명 옷을 걸친 허깨비 지식분자들만이 활보하게 만들자는 속셈인 것이다.
다 때려치우고 사람 목숨에 중립이 어디 있는가?
2 Comments
osta seksinuk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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