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오늘을 찾고, 오늘부터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자!
– 김진숙 지도위원 교육을 다녀와서
이효정 l 노동자투젱
‘꽝!’
한 조그마한 여자가 있는 힘껏 왼쪽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여러분!!!!!!!!!!!”
그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오나! 몇 년 묵은 시커먼 나랏미 꽁보리밥에 꼬추 장아찌를 우걱우걱 씹어먹던 천 명의 노동자들은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불그락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익히 아는 몇 십 명의 노동자들은 냅다 외쳤다.
“와 부르노 진숙아-!”
진숙이, 무명의 비쩍마르고 키도 쪼그만 여자 땜쟁이가 하루아침에 인기스타가 된 날이었다. 그 자리에서 밥 먹던 노동자 천 명에 쥐 삼 천마리, 도합 사천의 생명이 일거에 진숙이 이름을 가슴에 새겼으니 말이다.
그녀는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눈도 질끈 감았다가 부릅떴다가 하며 목이 터져라, 하지만 매우 유창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현장에서 그렇게 밤낮없이 휴일 없이 그렇게 뺑이 쳐서 받는 월급 십삼만 사천 원! 거기서 뗀 조합비를 모아 모아 우리 노동조합에서는 어디에 쓰시는지 압니까!”
평소 그녀를 안다는 노동자 수십 명에 진숙이 이름이 가슴에 꽂힌 수백 명은 이구동성으로 숟가락을 쳐들고 외쳤다.
“모른다!!!!!!!”
“우리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회사에 통근 타려고 천 원 씩이나 내는데 왜 자리를 안 줍니까. 사무직들이 차를 타면 우리는 왜 일어나서 비켜줘야 합니까! 이게 맞는 겁니까!”
“틀렸다!!!!!!!”
진숙이의 질문이 거듭될수록 생활관은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땀이 범벅이 되도록 작업을 하고 왔지만 아직 흘릴 땀이 그렇게나 남았는가. 다들 납기를 맞춘답시고 일요일도 없이 일한 게 육 개월이다. 거의 죽기 직전이 될 만도 한데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밥도 먹다 만 채로 진숙이의 연설에 추임새를 넣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새 도시락은 어디 패대기들을 쳐놨다. 아이고 아까워라. 맛대가리야 지랄 맞게도 없지만 노동자들은 필사적으로 다 먹고야 마는 밥이었다. 이것도 뒷전으로 한다니 이건 완전 혁명적인 상황이다. 아, 지랄 맞게 맛도 없는 도시락, 뭐가 아깝냐고? 진짜로 감옥에 콩밥만도 못한 도시락이지만 다들 코 박고 퍼먹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라면도 없다), 둘은 이딴 밥도 내 돈으로 사 먹는 거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저년 잡아라!!!!!”
거의 난동 격으로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쫒아 올라온 관리자 십수 명 중 가장 인상 드럽게 생긴 새끼였다. 생활관 한 가운데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진숙이를 향해 온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쭈욱 뻗어 삿대질하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쫄따구들은 진숙이를 향해 돌진했다.
“저것들 쥑여라아아!!!!!!!!!!!”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숯검댕이 눈썹에 쌍커풀도 진하고 피부는 뭔 소가죽 매냥 두꺼운듯한 40대 남성 노동자가 벌떡 일어나 차돌 같은 맨주먹을 말아쥐고 침이 섞인 밥알을 그들에게 대포 마냥 쏴대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와아아아아!!!!!”
누구 할 것 없이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야이 씨발러마, 너 오늘 잘 걸렸다, 너는 오늘 뒈졌다, 나한테 잡히기만 해봐라, 너 이 새끼 일로와, 니는 제삿날이야, 한 발짝만 움직여봐 다리 몽댕이를 그냥 분질러버리겠어 등등등…’ 노동자들은 성깔 한번 지대로 보여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저마다 분노를 터트리며 그것들을 잡으려 했다.
‘*됐다’
사태 파악이 빠른 그 관리자 새끼는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대 쳐맞기 전에 도망갔다. 쫄따구들은 잊지 않고 철수시켰다. 많은 노동자들은 가는 넘 뒷덜미를 확 잡아채고 싶지만 그냥 물병이나 집어 던지고 가래침을 뱉으며 그들을 보내줬다.
“와아아아아!!!!!!!!!”
노동자들은 사측에 대한 분노와 그동안 당한 착취에 대한 억울함, 그들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했다는 얼떨떨함과, 짜릿한 해방감, 그리고 용감한 진숙이에게 감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진숙이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 그러나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인간임을, 처음으로 느끼며 짜릿한 쾌감이 뱃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진숙이도 아저씨들과 함께 환호성을 치며 연신 박수치고, 등 두드림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 길로 진숙이는 한진중공업의 첫, 민주 대의원으로 뽑혔다.
아, 그런 진숙이를 나는 오늘 처음 만났다. 진숙이라니? 어느새 머리가 허옇게 쇠고 장기가 다섯 개나 없는 육십이 넘은 동지가 내 앞에 서 계셨다.
목소리는 확실히 목에서 나오나보다. 장기가 다섯 개가 없어도 저리 쩌렁쩌렁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의식은 확실히 뇌의 영역인가보다. 장기가 다섯 개가 없어도 저리 기억과, 감정과, 표현이 정확하신 걸 보면. 대공분실에서 쳐맞은 흉터가 등 위에 아직 선명해도, 그 흉터보다 동지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했다. 나는 진숙 동지의 흡입력이 엄청난 입담에 빠져들어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그 시절의 투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시간을 듣고 나서 3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에 합병증까지 겹친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돌보며 부모에 대해, 건강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는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걸었다. 안부를 묻고 일상 얘기들도 나눈 뒤 집에 거의 다 왔는데도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두 개 사서 먹으면서 감정을 정리해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맥주를 한 모금, 두 모금 삼킬수록 내겐 괴로움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이 감정은 뭘까… 내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지엠과 한화 에어로에 현장신문을 배포하러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지 못할 것 같은 찝찝함이었다. 사실 그 실체를 파악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써도, 처음엔 약간 모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쓰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한참 행방불명이었던 내 괴로움과 외로움의 근원은, 아마도, 나도 진숙이처럼 살고 싶다는 데서 비롯하는 것 같다. 또, 87년을 지나오면서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정당 하나 없는 한국의 현실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투쟁할 이유가 천지삐까리인 이 세상에서, 정말 진숙이처럼 동지들과 함께 온몸을 던져 저항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아깝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현재는 내 삶이 다 쓰이지 못하고 아깝게 길바닥에 흘려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스스로 투쟁을 하고 있다기 보다는 온 힘 다해 투쟁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아, 그렇다고 나는 진숙이처럼 87년 시대에 살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때는 수많은 선배 동지들이 그 몫을 하면서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겨주셨다. 그 다음이 문제다. 오늘, 바로 우리 시대에서 진숙이와 동료들처럼. 아니, 그 동지들의 투쟁에서 최고의 교훈들을 체득해서 더 나아가는 투쟁을 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몫을 하지 못할 때, 허리가 끊긴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자본가들은 경제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을 봉건적 노예의식에서 극우 파시즘으로까지 필사적으로 이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상황을 보면 가슴이 타들어간다. 우리 지역 노동자 운동의 상황을 보면 가슴이 타들어간다. 무슨 대단한 요구를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게 아니다. 이제 혁명의 시대는 끝났네, 대한민국 살기 좋아졌네, 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 못하네, 조합주의네 어쩌네, 나는 그런 주장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무슨 노동자들이 사회정의구현의 도덕적인 짐을 지고 옳은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변화무쌍하게 살아가고 있고, 필요하면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검색도 해보고 강연도 들으러 가면서 곧 잘 습득한다. 항상 노동자들은 무한한 실천력을 갖고 있고, 항상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상을 받아들일 포용력이 가슴 밑바닥에 용솟음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수 십 년 전과 변화한 건 사실이다. 자본의 치밀하고 세련된 노무관리로 어느새 현장은 노동자들간의 유대감이랄게 많이 사라졌다. 동질감, 공감대, 공분… 이런 게 가장 밑바탕에서 우리를 묶어주는 기둥인데 이젠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다. 87년에 노동자들이 저리 투쟁했으니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한 발 양보하면서 더욱 세련된 반격을 준비해 오늘날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사회주의 운동의 역할은 뭘까? 나는 87년에만 사회주의가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더욱 중요하다. 왜냐면 호시절도 잠깐이고 심지어 호시절에도 노동자들은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운동의 최선봉이기도 하지만,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를 뚫고 노동자들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핵심적인 운동가들을 성장시켜내는 게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고 사회주의 운동의 존재 이유다. 그런 생각을 하자면 처음에는 결연함이 피어오르고, 이내 괴롭고 외로움이 쓸려 온다.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 맑스-레닌 물 좀 먹었다는 사람들 중 심심찮은 경우, 언제나 자신들이 최선봉으로써 기능하기를 학수고대한다.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따를 거라며 언젠가 노동자들이 자신을 모시러 와 지도해달라고 부탁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최선봉에 서려는 헌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배운 게 있다면, 최선봉으로 기능하려면 최후의 보루를 구축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거다. 최후의 보루만이 결국 결전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진지, 오히려 비축식량과 탄약이 조금씩 늘어나고, 수시로 요새를 보강하며 병사들이 끊임없이 격전을 대비한 훈련을 하며 사기를 드높이는 곳. 그렇게 준비된 부대만이 결국 최후의 승리를 이끈다. 노동자운동이 다 무너진 자리에 몇 몇의 완강한 사회주의자들이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은가? 장렬하게 전사할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전사하고 나면 그 다음 전망은 누가 얘기할 것인가? 많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87년 노동자들의 대중투쟁 덕으로 아직도 연명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거라면, 노동운동이 후퇴하는 시대에, 사회가 민주화되는 시대에, 전체적인 부의 양이 늘어나는 시대에, 그런데도 전반적으로 경기는 후퇴하는 시대에 역할을 해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좌절하고 회의적인 상황에서, 우리 덕택에 보다 투사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얻는 자신감, 그와 함께 따라오는 투쟁적인 신념을 얻었다고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과정속에서 스스로의 감동으로 사회주의적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최선봉과 최후의 보루는 동의어일까 반의어일까?
확실한 동의어다!
진정 모범을 만들어야 한다. 87년의 진숙이가 삼천 동지들과 온몸으로 투쟁했다. 당장에 그런 멋진 투쟁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시대가 쥐어주는 운동의 과제를 집요하고 집념있게 수행해낼 때, 미래에 또 다른 진숙이가, 또 다른 삼천 투사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 길에 내가 무명용사가 되던 흙이 되어 거름이 되던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있어 그들이 태어난다면 기쁘게 부서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는 오늘이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오늘의 운동을 하고 싶은 밤이다. 제발, 한 명의 동지라도 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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