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ㅣ 농민
: 도대체 그때 최저임금이 얼마였는데?
군인들 월급 200만원을 얘기하는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했나. 뭐 앞뒤가 맞는 말을 해야지 비판이고 뭐고 할 것이 아닌가? 컹컹 짖는 것도 어느 정도 박자는 맞아야지.
한국 정치의 장에서 정책적 대결과 비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이재명과 윤석열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했던 토론과 논쟁, 비판과 합의의 절차는 유명무실해졌다. 정치가 상품이 되고, 우리 편의 사탕발림은 진실이지만, 저들의 사탕발림은 포퓰리즘이다.라는 악다구니만 들리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어느 대선에서도 노동의 가치가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데에 있다. 급기야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의 입에서 ‘최저임금 보다 낮은 조건에서도 일 할 사람 많다’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왔다. 끊임없는 경쟁만이 유일한 생존방식으로 허용된 사회에서 정치가 자본의 목소리를 최고의 가치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의 이 말은 이제 정치마저도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즉 한국 정치는 그 역할을 상실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공장에서 한 일은 자동알곤용접기계를 보는 일이었다. 이것이 기계화 되기 전에는 남성 노동자가 했고 반자동화가 되었을 때 중소기업에서 병역 특례를 받던 숙력공이 아닌 일반 노동자가 했다. 이것을 자동화 시켜 여성 노동자인 내가 할 수 있었다.
2000년 용접기계 두 대 앞에서 8시간에서 11시간 서서 일하고 받은 임금이 44만원에서 60만원이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다. 잔업을 하기 위해 현장 과장의 성적 농담과 욕지거리도 웃으며 넘겨야 했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임신을 중절하고도 휴가도 낼 수 없어 하혈을 하며 용접기 앞을 지켜야 했다. 자본가들의 착취는 약자에게 더 강화되고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다.
내가 언젠가 이런 글을 올렸을 때 페친 한 분이 도대체 그때 최저시급이 얼마였길래 11시간을 일해서 그 돈을 받느냐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최저시급이 1,865원이었다. 당신들은 그런 최저임금을 알고 있었는가?
2000년대 들어와서도 최저시급이 얼마였는지 관심도 없고, 무조건 너희들은 부지런히 노동하고 기다리면 국가가 다 해줄꺼라고 정치인들은 앵무새처럼 말했다. 노동자들은 기다리라는 말을 믿고 열심히 일했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 믿음을 비웃으며 모든 과실을 자본가와 관료 그리고 이런 자본과 관료를 옹호하던 학자들이 다 쓸어갔다. 그런 도적놈들이 지금 최저시급 ‘일만원’이 나라 경제를 망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윤석열을 ‘나쁜 사람이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 사람들, 안을 어떻게 볼 수 있겠나. 그러나 그들 밖은 보이지 않나? 최저임금 인상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문재인 정부나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조건에서도 일할 사람 많다’는 윤석열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노동에 대해 이토록 뻔뻔한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노동 민중이 계급적 또는 집합적 의식(정치 의식)을 이끌어 내며 정치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한 탓이다.
사람들은 예술이나 과학 이론의 혁신에는 열광하면서도 ‘정치적 변혁’에 대해서는 극도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노동자 정치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가지는 이미지는 바로 이런 공포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 – 정치적인 ‘근본 변화’ 그 자체이다. 노동자들이 외치고 투쟁 하면서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체화하고 있는 노동에 대한 인식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현재 사회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사회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에게 노동자들이 외치는 변화는 기득권의 상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불만과 좌절,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체험되고 있는 극도의 불평등으로 인해 현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에 ‘맞서 ‘우리=노동자’를 정치적으로 구성하고 사회 변혁을 외치는 행위 자체가 무시 무시한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재명을 외치는 사람들이나 윤석열을 외치는 사람들이 결코 노동자 대중의 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불만과 좌절을 읽지 못한다면, 그들의 분노와 접속히지 못한다면 노동자 정치 또는 진보, 사회주의의 대중성은 영원히 요원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실체와 한계를 인지하고 대항 세력으로 그 힘을 뭉쳐야 하며 이 과정에서 대중이 민중으로 전환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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