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를 위한 이론적 주제들 (2)

신명호 |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 소장[1]본 논문은 2012년 과학기술 공공성 포럼과 2015년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일부를 발췌하였다.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은 … Continue reading

(주제 9)[2](주제 9)는 유명한 Arie Rip의 과학에서의 신용 순환을 제시한다. 최근 논문 [6]의 pp. 65 – 75에서 기술된 과학의 3중 신용 순환에 관한 내용만을 발췌해서 … Continue reading 과학이 일정 정도 발전한 현대 국가에서 과학은 3중의 신용 순환 (credibility cycle)을 통해 작동한다. 1단계는 “평판을 위한 투쟁 (Struggle for reputation)”으로 과학 공동체 구성원의 신용 순환이고, 2단계는 “자금을 위한 투쟁 (Struggle for fundability)”으로 연구개발 예산을 배분하는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의 신용 순환, 3단계는 “관련성과 타당성을 위한 투쟁 (Struggle for relevance & legitimacy)”으로 과학과 사회, 국가 간의 신용 순환이다.

1단계: 과학 공동체 구성원의 신용 순환

자원은 계속 순환된다. 과학 보고서와 논문이 과학적 평판과 신용으로, 그 평판과 신용에 기반하여 획득한 사업비와 재료와 정보에의 접근성으로, 이는 생산적인 연구로 이어지고, 그 연구를 통한 과학 보고서와 논문이 다시 생산됨으로써 순환된다. 1단계 신용 순환에서 각 전환들은 과학 공동체 내에서의 평판과 신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6]).

([6], pp. 66의 Figure 1)

2단계: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의 신용 순환

([6], pp. 68의 Figure 2)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는 양질의 제안서를 받아서 예산을 배분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어도 차기 년도를 위한 예산을 유지할 수 있다.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의 신용 순환은 과학자들의 신용 순환과 결합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자금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연구 제안서를 검토하고 연구회나 펀딩 에이전시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는 스스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예산을 받을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의 공무원이나 위원회 구성원은 언론을 비롯한 대중적인 평가에 민감하다. 다른 정부 부처나 후원자들과 공식적, 비공식적 연결 및 대중을 대상으로 한 확산 등은 이 중간조직을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고려하게 한다.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 과학자 간의 상호의존은 최근에 나타나서 안정화된 현재 시스템의 특징이다. 자금을 위한 투쟁은 제도화되었다. 펀딩 에이전시로부터 자금을 받기 위해 프로젝트 제안서를 제출한다. 때로는 기관 지원금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그 제안서들은 동료평가를 통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과학적 결과물에 대한 기준이 시스템적인 방식으로 평가에 적용될 수 있다 ([6]).

3단계: 과학과 사회, 국가의 신용 순환

([6], pp. 70의 Figure 3)

관련성에 대한 압력은 연구회와 펀딩 에이전시의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럼으로써 과학자들의 신용 순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과학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생산되는 과학 지식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의 결과물, 생산, 과학자의 지위는 사회적 맥락에 결합되어 있고, 국가 예산의 배분은 과학적 결과물에 의해 정당화된다. 자금을 위한 투쟁의 가장 위층에 관련성을 위한 투쟁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적 맥락과 경제발전을 위한 기술혁신 등에의 관련성이 과학에 요구되었다. 명시적으로 임무를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사업단이나 중간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과 펀딩 에이전시들, 정부 부처들이 공모하여 현재 과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통제된 자율성 (directed autonomy)을 만들어냈다. 정당성을 위한 투쟁은 아직 생산적이기 어려운데, 규칙들이 명확하지 않고 주요 주체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신용 순환 자체가 여전히 파편화되어 있거나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6]).

(주제 10) 국가의 연구개발 투자는, 국가가 수행해야 하는 국가전략과 공공정책에 따른 임무지향 패러다임과 과학기술 활동에서 시장기능이 실패하는 영역에서는 국가가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시장실패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국가의 연구개발 투자는 크게 정부 자체의 적극적인 노력을 표현하는 임무지향 패러다임과 민간을 보완하고 지원하는 차원의 시장실패 패러다임의 두 가지 유형에 근거하고 있다 ([1]). 임무지향 패러다임은 공공복리와 사회적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공공정책과 국가전략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기술 활동을 수행하거나 지원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차원의 패러다임이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짐과 동시에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각 정부 부처가 공공정책을 기획하고 관리, 집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전문성과 과학기술 지식의 수준과 범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공공복리나 국가전략과 밀접하게 연관 있는 에너지, 항공우주, 교통, 지구와 땅, 해양, 안전, 방재, 공공보건, 환경, 의료, 농수산업, 식량 등의 분야가 이에 해당한다.

시장실패 패러다임은 과학기술 활동에서 시장기능이 실패하는 영역에서는 정부가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다. 일반적으로 외부성이 강할 때,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높을 때, 정보의 입수가 불가능하거나 왜곡되어 시장신호가 불명확할 때 등 기업 연구기관이 투자하기 어려운 영역에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초연구나 장기연구 투자에 대한 경제적 효과가 먼 미래에 발생할 뿐 아니라 기초과학 연구의 결과를 특허나 지적재산권과 같은 방법으로 보호하거나 독점하기 어려우므로 기초연구 투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적인 이익이 상당히 낮다. 사회 전체로서는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로부터 얻어지는 효과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투자자가 사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경제적 성과가 미약했으므로, 공공 차원에서의 개입 없이는 기업 연구기관이 기초과학연구에 투자하지 않는다. 기초연구의 성과를 활용하는 기술개발과 응용연구 영역에서도 기초연구에서와 같은 시장실패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초연구 결과로부터 즉각적으로 그리고 낮은 비용으로 상업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 수익은 기초연구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이해를 향상시키면서 잠재적인 기술의 응용과 설계를 시험하고 탐색한 후에라야 가능해지므로, 기술혁신은 위험도가 높고, 비용이 많이 들고, 불확실성이 높다. 이처럼 새로운 과학기술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민간기업 차원에서 상당한 투자가 필요한 산업사회와 기초과학 사이의 격차를 메우는 과학 분야의 지원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매개 역할을 하는 학문들에는 학제적 성격의 과학,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기반기술, 매개과학 등이 포함된다. 연구성과 파급 (research spillover)과 기업의 흡수능력 (absorptive capacity) 향상을 목표로 과학 지식을 유지, 관리, 확산시키고 공공적 이용가능성과 신뢰성을 보장해 주는 과학기술 인프라도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과학기술 노동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에서는 부족과 잉여가 항상 존재하게 된다. 과학 지식을 담지하는 과학기술인력의 공급과 유지 역시 과학기술 노동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정부가 시장실패를 보완해야 하는 분야이다 ([33]). 따라서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투자하고 ①-④의 연구분야에서 과학 지식 생산을 지원⋅촉진하고 ⑤와 ⑥의 공적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① 국가전략 혹은 공공정책 목표에 기반한 목적 지향적인 중장기 연구

②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제해결 지향적인 유형의 연구

③ 기초과학연구

④ 산업사회와 기초과학을 연결하는 매개학문 연구

⑤ 과학기술인력의 공급과 유지

⑥ 과학 지식의 유지, 관리, 확산, 공공적 이용가능성,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과학기술 인프라

(주제 11) 과학 공동체의 연구에 대한 국가의 공적 지원은 네 가지 접근법에 기초해 수행되고 있으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민주적 기획과 통제를 위한 정치적⸱제도적 실천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첫 번째 접근법은, 자율적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 공동체는 자기규율 능력이 있으며, 과학 연구를 통해 생산된 지식은 직접 경제적/사회적 목표 달성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2차 대전 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펀딩과 상당한 자유를 부여했다. 짧은 기간 내에 과학은 급격하게 성장해서 고도 산업 사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과학 지식 생산의 자기 촉매적인 성장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되는 과학 예산에 의해서만 유지가능한 것이었는데, 1980년대가 되어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과학이 느리거나 실질적으로는 제로 성장의 ‘안정 상태’에 도달하게 되자, 과학에 대한 경제학적인 접근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또한 과학 연구에 대한 펀딩이 면밀한 감사와 정당화를 필요로 할 정도로 국가 예산 상 큰 비율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자율적 과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효력을 잃고, 과학 연구로부터 사회경제적 혜택을 실현해내기 위해서는 정부가 과학 연구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22,40]).

두 번째 접근법은, 과학자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허용하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연구 윤리에 반영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윤리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나치에 부역한 과학자들의 잔혹 행위가 알려지고 1960년대 유전자 조작 기술이 발전하게 되자 연구 윤리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커졌다. 그 후 대중들이 과학과 유전자 공학에 회의적이 되자 과학자들은 기관별로 윤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는 연구 윤리를 통해 사회적 가치에 신경을 쓴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더 적극적이고 민주적인 외부 개입을 막는 알리바이처럼 기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연방윤리자문위원회와 각 기관별로 설치된 IRB (Institutional Review Board)는, 일반인의 민주적 참여와 정부의 감독을 거부하면서 이러한 알리바이 기능을 제도적으로 승인받아 고착화한 한 사례이다. 이 접근법의 알리바이 기능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연구윤리 자체가 사회적 규범과 제도를 경시하고 과학자 개인의 도덕적 딜레마와 직업적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윤리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22]).

세 번째 접근법은, 앞의 두 접근법이 모두 부적합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자원 배분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과정임을 인정하고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공적 지원을 하는 방법이다. 1970년대 이후 정치와 관료 엘리트들은 과학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갖게 되었다.

– 과학 연구와 공공 목적 사이의 연관 관계는 선형적이지 않고 복잡하며 상호작용적이다.

– 과학 연구는 공공정책 목표를 위해 관리되어야 하는 국가적/지역적 차원의 전략적 주요 활동이다.

– 공공부문 연구와 연구기관은 규모가 커지고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해서 과학 엘리트들에게 맡겨 두고만 있을 수 없다.

– 과학 연구의 결과물은 새로운 산업에서의 기술 개발과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국제 경쟁에서의 전략적 자산이 된다.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이러한 접근법에 근거하여,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을 혁신하고 과학기술 전담 부처 혹은 특정 에이전시 (청 혹은 국)를 설립하고 제시된 방향에 부합되는 연구가 수행될 수 있도록 조종하는 프로그램들을 수립하였다. 과학 정책 입안자들은, 과학 공동체 외부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과와 책임 절차, 자원의 경제적 사용 등을 입증하고 연구의 ‘생산성’과 ‘품질’에 대한 평가를 도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따라 강한 연구평가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들에게서는 연구기관의 계층화, 빈번한 연구 목표 조정과 평판을 얻기 위한 경쟁의 격화, 주류 학과의 표준과 우선순위의 강화, 지적 다양성과 다원주의의 감소 등의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또한 연구의 상업화를 추구하면서, 경제적 이익 추구가 연구 목적과 충돌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지적재산권으로 인해 협력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아지는 등 복잡한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이 접근법은 전형적인 시장실패 유형인 ‘부정적 외부효과와 공공재 공급부족’ 문제와 위계제 실패 유형인 ‘정보 비대칭성에 의한 주인-대리인 문제’를 유발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22,40]). 현재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국가 연구개발 투자에서 세 번째 접근법을 채택하되, 필요에 따라 첫 번째와 두 번째 접근법을 보완적으로 적용한다.

네 번째 접근법은 과학기술 정책 입안 과정과 윤리적 자문/감독이, 공공의 참여와 민주적 대표성의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자율성이라는 주장은 누가 과학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누가 그 비용을 감당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는 전문가 위주 혹은 이익집단 중심의 접근법을 넘어서는 일반인의 공적 참여와 민주적 대표성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 ([22]). 이 접근법은 제안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주제 12) 과학 공동체가 구현해야 할 공공성은, 사회에의 귀속 의무로서 주어지는 책무성과 윤리성의 전제하에서, 사회가 추구해야할 목표로서 주어지는 공공선을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활용해서 구현하는 데 있다.

공공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 (populus)이 공개적인 의사소통의 절차를 통하여 (publizität) 공공복리 (salus publica)를 추구’하는 속성으로 정의된다. 공공성은 인민, 공공복리, 공개성이라는 세 개의 핵심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요소는 독립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되어 있다. 인민은 공개적인 의사소통 과정에 참여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로 공공복리가 귀속되는 주체이며, 공공복리는 공동체 구성원인 인민에게 구체적으로 귀속되는 이익으로 공개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확인되고, 공개성 및 의사소통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민이 참여하는 공공복리를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결국 공공성은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특정한 영역과 분야 혹은 특정한 과업과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주체, 구체화하는 과정, 즉 주장과 합의, 확인과 실현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 지에 대한 기본적 사항까지 내포하고 있는, 개념의 복합체이다 ([4]).

그러므로 공공성은 과학과 기술에 내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공성이 하위 시스템인 과학 공동체에 부과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 공동체가 반드시 보장해야할 기초적 전제 조건으로서의 첫 번째 공공성은 사회가 결정한 공공선[3]해당 집단의 특정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선을 증진시키려 할 때 이러한 선이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동시에 증진되는 경우에만 그 선은 … Continue reading을 과학과 기술의 영역 내에서 실현하는 책무성 (accountability)과 과학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부합되게 하는 윤리성 (ethics)이다. 사회가 과학과 기술에 요구하는 공공성은 바로 이 책무성과 윤리성을 통해서 현실화된다.

(주제 13) 과학 공동체는 1)생태적 파국에 대한 구제, 치유, 회복을 위한 탐구행위이자 갈등 해결과 공생을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2)‘지적 평등’에 기초한 민중의 과학과 기술의 전유라는 두 가지 이념을 과학적 실천과 인식의 도덕적 기초이자 당위적 규범으로 확립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이 진보를 의미하던 시대가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역사와 사회학 연구는 이전의 통념을 부수었다. 전쟁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었고, 19세기 이후 폭발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 생산력 증대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물적 기반을 혁신한 것이 바로 과학과 기술이다. 과학과 기술은 자본주의 착취와 파괴의 역사에서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악마와의 계약’이 되어버린 과학과 기술을 민중의 힘으로 재전유하여 그 해방의 힘을 복원시켜야 하고, 그 의미를 인류의 존재 조건에서부터 다시 정초해야 한다.

일찍이 현대의 산업문명을 비판하며 과학의 전제조건을 제시하고, 과학과 기술이 갖는 의미를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재정립한 일리치 (Ivan Illich)를 따라 ([24]), 과학 공동체의 이념으로 ‘인간조건의 생태적 기초와 근원적 탐구 행위로서의 과학’이라는 관점을 제안한다. 과학과 기술의 전제조건은 인간조건으로부터 비롯되는 생태적인 기초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은 잉태가 되는 순간부터 환경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환경을 파괴해 간다. 여기에서 인간으로부터 기인하는 인간과 환경 사이의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인류가 지구에서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개시한 이래 발생한 생태적 파국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시도에 과학과 기술의 존재 근거가 있다. 즉 과학과 기술은 구제, 치유, 회복을 위한 탐구행위이다. 사물과 환경에 대해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갈등 해결과 공생을 위한 도구를 생산해 내고, 사회적/생태적 필요와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구성해내기 위해 과학과 기술이 필요하다. 단지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인간은 과학적 탐구 행위를 통해 자기존재의 허약함을 치유해 갈 수 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은 그 근거를 탐구 행위에 기초한다. 탐구 행위는 과학 공동체만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개인 각각에게서 복원될 수 있다. 탐구 행위로서의 과학은, 말하는 자와 듣고 이해하는 자 간의 지적 해방과 ‘지능의 평등’에서, 민중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참된 전유 역시 ‘지적 평등’에 대한 사유와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다 ([36]).

(주제 14) 한국 사회에서 과학 공동체는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의 정치적 실천은, 한국 사회 과학 공동체의 이러한 도구적 상황을 타파하고 그 구성원들이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현실화될 수 있다.

한국사회의 과학기술은 전적으로 서구로부터 수입되었다. 선진국의 기술을 소화하고 모방하여 산업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을 육성하였다. 사회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 따라 그 필요와 사회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균형적이고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기술 및 응용기술을 중심으로 국가에 의해 집중적으로 육성되었다. 연구개발 사업과 과제조차도 과학 공동체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국가가 세운 산업화 전략 목표에 따라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 왔고, 그 방식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주어진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만 하면 자신들에게 부과된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과학기술과 민주주의의 문제, 연구개발의 공공성 등은 한국사회의 과학 공동체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지 못한다. 한국사회의 과학 공동체가 형성되던 초창기부터 정초되어진 이러한 타율적 경향은 과학기술자를 경제 성장과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통념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특히, 더 큰 문제는 과학기술자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주체로서의 자각과 책임을 느끼며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파편화되어 스스로가 자신들을 경제성장과 이윤확보의 도구로 간주하는 편협한 과학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은 한국사회 과학 공동체의 도구적 상황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양반지배체제에 봉사하며 물질적 안녕을 보장받고 현실에 안주했던 조선의 중인계급들처럼 오늘날 우리사회의 과학기술자도 현대판 중인계급에 불과하다.

최근에 와서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작용에 대한 비판과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시민사회로부터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핵문제나 환경오염, 군사 무기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유전자 조작 기술, 정보통신기술, 의약품 기술, 인간복제문제, 감시와 통제 수단의 발달, 건강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과학기술자들이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제 15)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 분야의 정치적 실천은, 1)기본적 인권으로서 정보와 지식에 대한 Open Access, 2)공적 지원에 의해 획득된 연구 성과의 사회화와 활용과 분배에 대한 평등한 권리, 3)국회 내 기술평가국 설치와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의 전면적 개혁, 4)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우선순위와 지원, 예산지출 평가에 심의민주주의 절차를 도입, 5)법원의 공익 소송과 심의민주주의 절차의 도입, 6)광역 단위의 참여연구센터의 설치와 운영 이라는 6가지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포함해야 한다.

1. 기본적 인권으로서 정보와 지식에 대한 Open Access

IT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지식기반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지식기반사회는 극소 전자 기술과 컴퓨터 기술을 그 물적 기초로 하며, 코드화된 정보와 지식이 생산력에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의 사회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정보와 지식이 어떠한 생산 설비나 여타 동원 가능한 생산보다 커다란 생산력을 지닐 수 있게 되면서, 정보와 지식은 자본과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방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진 반면, 지적재산권, 특허의 남발, 라이선싱, 과잉가격 책정, 정보 삭제, 불완전한 보전 제도 등으로 정보에 대한 평등하고 공개적인 접근이 차단되는 현상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광범위한 사유화의 위협들 때문에 공공정보, 과학정보, 정부 정보에 대한 국민들의 자유로운 접근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 공유자원의 중요성은 증대하고 불평등한 접근 역시 악화되는 상황에서는 인간에게 힘이 되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보장하지 않고는 비지배 자유의 증진도 안전을 비롯한 기본적 인권의 보장도 불가능하다. 국가의 다양한 연구개발 프로그램과 안전방재, 기후환경, 환경보건에 관련된 정보의 공개, 연구개발 정책과 기획, 연구결과 등에 대한 정보의 공개 없이 국가과학기술시스템에 대한 민주적 견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는 지식과 정보를 공유자원으로 선언하고 지식과 정보의 공유자원에 대한 평등하고 보편적인 Open Access를 헌정적 기본권으로 규정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지식 생산을 촉진하고 효율적으로 지식과 정보 공유자원을 창조, 유지, 관리, 배포할 수 있도록, 정보자유, 정보공개, 지적재산권에 관한 법을 포함한 관련 법규들이 Open Access에 부합되게 제정/개정되어야 한다.

2. 공적 지원에 의해 획득된 연구 성과의 사회화와 활용과 분배에 대한 평등한 권리

국가의 공적 지원에 의해 획득된 정보와 지식, 기술 개발, 연구 결과 등은 공적 자원이자 공유재이다. 연구 성과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형태로 사업화하거나 지적재산권, 기술료, 특허 등의 형태로 지적 자산화 하여 기업에게 이전하는 방식으로만 사회화되고 있다. 사회적 수요와 공적 문제 해결에 연동되거나 활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시장 메커니즘 중심의 성과확산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성과확산 자체도 공적 자산에 대해 특정 기업에 독점적 권한을 부여한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 연구 프로그램의 성과들이 국민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허용할 수 있고 복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적 지원에 의해 획득된 성과의 활용과 분배에 대한 평등한 권리는 국민의 경제적․사회적 기본권의 하나로 선언되어야 한다. 또한 공적 지원의 결과물로 획득된 성과가 시장메커니즘 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화되고 촉진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연구 성과가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수요와 공적 문제 해결에 활용되는 데 대한 인센티브와 보상이 국가과학기술시스템 내에 체계화되어야 한다.

3. 국회 내 기술평가국 설치와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의 전면적 개혁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은 국가가 연구개발 기능을 수행하는 공적 구조이다.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수단은 연구조직과 매개조직에 대한 예산권과 인사권이다. 이 예산권과 인사권을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권력의 배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이 어떤 형태의 공적 구조와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권력의 분산과 견제의 방식이 달라지고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자의적 간섭의 가능성도 변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은, 행정부의 독점적 권력과 입법부의 무능, 연구조직과 매개조직을 정부부처가 직접 통제하는 개입적인 위계제 방식, 연구수행 단위에서의 과도한 경쟁을 촉발하는 예산분배시스템, 각 정부부처의 분파적 이익 추구와 난립, 연구개발 정책/기획/평가의 총체적 실패, 과학 공동체의 자율성 결여와 도구화, 과학 엘리트와 정치인 간의 전근대적 후견 구조, 왜곡된 과학기술노동시장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로 인해, 권력남용, 조직화된 부패 구조의 형성, 연구기획/자원배분/의사결정에서의 비효율성, 비정규직 양산과 연구자의 불안정성, 연구 분야와 주제의 획일화에 따른 연구 다양성 상실, ‘공유지의 비극’을 연상시킬 정도의 과학기술 행정체제의 종합/조정 실패, 연구기획과 평가의 전문성/객관성/공정성/투명성 확보와 연구 품질 확보 실패 등이 발생하고 있다.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입법부의 무능으로 인해, 국가과학기술시스템에 대한 행정부의 독점적 권력이 제어되지 않음으로써 관료들의 자의적 간섭으로 지배가 만연해 있고 국민에 의한 국가과학기술시스템에 대한 민주적 견제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과학기술시스템은 민주적 견제가 작동할 수 있는 공적 구조로 변환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상호권력 전략의 일원으로 입법부에 연구개발 정책과 예산, 프로그램을 평가/감독하며 심의민주주의 절차들을 도입하는 기술평가국을 상설로 설치하여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강화해야 한다. 심의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통해 연구개발 프로그램의 정책수립/기획/관리/평가 과정을 개혁하고, 연구수행 조직에 대한 정부의 자의적 간섭을 방지하여 연구 자율성을 증진시켜야 한다.

4. 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우선순위와 지원, 예산지출 평가에 심의민주주의 절차를 도입

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우선순위와 지원의 문제는 공공복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국가 연구개발 투자 총액을 늘려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과 정권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유행처럼 연구개발 투자가 특정 분야를 번갈아가며 집중되는 현상만 있었을 뿐, 공적 목표에 부합하도록 연구개발 투자와 우선순위를 어떻게 기획하고 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는 없었다. 공공복리를 연구개발 투자 우선순위에 반영하는 것은 필요의 범위와 수준에 대한 수요 조사와 기술-경제의 구조적 네트워크와 과학과 기술의 각 분과 간의 네트워크에 대한 분석, 그 결과와 그에 바탕한 연구개발 투자 결정을 위한 심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추가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시민참여연구센터[4]과학상점 활동을 목표로 2005년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NGO.의 활동을 통해 축적된 자료로부터 확인된, 시민들의 주요 관심 분야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자 한다.

– 안전방재 : 핵 위험, 구조물 안전, 교통/화재 안전, 자연재해와 기상이변, 기후변화 등

– 식품안전 : 유전자조작, 광우병, 환경호르몬, 항생제 내성, 잔류 농약, 식품첨가물 등

– 환경보건 : 공공보건, 의료, 아토피 등 환경성 질환, 유해물질관리, 대기오염, 중금속 오염, 방사능 오염, 조류독감, 의약품 안전성, 석면/나노 등 미세먼지의 위험성, 전자파, 실내 대기환경 등

– 노동안전 : 산업재해, 직업병, 작업장 유해물질, 과로사, 실험실 안전 등

– 토양과 물, 자연 : 지하수 오염, 하천오염, 수질/해양오염, 토양오염, 지질, 하천과 연근해 생태계, 생물다양성 등

– 에너지 : 교통/난방, 에너지 효율성, 원자력, 핵융합, 수소연료전지, 재생/대체 에너지, 지구온난화 등

적어도 국가의 연구개발 투자는 이러한 분야들에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국가의 기술-경제 프로그램은 경제적 기회의 창출과 지역발전, 빈곤문제의 해결, 고용과 복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기술-경제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간에는 경제적 부의 창출과 축적에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형평성의 문제와 더불어 재분배의 과제를 발생시킨다. 국가의 기술-경제 프로그램은 이해관계자들의 심의와 합의가 필요한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연구개발 투자의 우선순위와 지원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심의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방법과 절차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선순위가 결정된 연구개발 투자가 국민들의 필요를 보장함에 있어 충분한 지, 예산 지출의 효율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예산지출의 유형에 형평성이 있는지 등의 항목들도 평가해야 한다. 이와 같이 국가 연구개발 투자 범위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 연구개발 투자의 충분성/효율성/형평성을 만족시키는 지 여부에 대한 민주적 심의는 입법부가 앞서 언급한 기술평가국의 설치와 함께 심의민주주의의 방법과 절차를 도입함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5. 법원의 공익 소송과 심의민주주의 절차의 도입

법원은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도 정치적 책무성을 강화하고, 심의민주주의를 촉진하며, 평등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아직까지 국회에 계류 중인 집단소송법을 더 강화/제정하여 공익 소송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사법부는 공익 관련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원고 적격성’의 범위를 넓혀주고, 사실 확인 과정을 진행하고, 법원이 감독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강제 명령을 내리며, 법원의 명령을 행정부가 실제로 이행하는지 여부를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적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불특정 다수가 피해자이거나, 감독/평가의 실패나 관계 당국의 무지 등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환경문제와 산업재해 등의 소송은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그 피해를 과학적/기술적으로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공익 소송을 통해서 보통 사람이 정부를 법원에 출석시켜 정부의 행동 또는 무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정부에 정치적 책무성을 더 엄격하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법원이 심의민주주의적인 방법과 절차를 도입함으로서, 정부에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시민사회와 소통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면 민주적 견제력은 증진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완전하고 평등한 참여권을 보장해 줄 때 평등을 장려할 수 있다. 법원은 과학과 기술의 영역의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이 평등한 관계 하에서 사회적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법원은 이를 위해 과학과 기술 관련 공익 소송의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 조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사법부가 사법 심사의 영역을 넓히고 공익 소송을 통해 심의민주주의 방법과 절차를 도입함으로써 평등한 시민들 간의 사회적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도구로서 구성된다면,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의 보호와 민주적 견제력의 확보가 가능해 질 것이다 ([20]).

6. 광역 단위의 참여연구센터 설치와 운영

지역사회가 직접적으로 필요로 하는 과학지식과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이자 공개적 접근 및 일차 자료의 해석 창구로서 기능하며, 문제해결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과 역량을 갖춘 전문연구자 그룹을 네트워킹하고 조직화할 수 있도록 지역 단위의 참여연구센터를 설치해야 한다. 이 센터는 제도권 조직들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그리고 과학 공동체와 지역사회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해야 한다.

① 네트워크를 구성/활성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의뢰 받은 문제해결을 위해 시민과 연구자를 지도하는 경험을 갖춘 참여연구센터 코디네이터를 양성한다.

②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생들과 과학기술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계획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자들로 하여금 과학 진실성, 연구윤리와 연구실 안전, 사회적 수요와 공적가치에 따른 연구 기획과 평가, 연구 성과의 공유와 분배, 기술영향평가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자신이 속한 과학 공동체와 전문영역을 성찰할 수 있도록 조직적/제도적으로 의무화한다.

③ 시민들의 삶과 직결된 안전방재, 식품안전, 환경보건, 노동안전, 토양과 물, 자연, 에너지, 기술-경제 프로그램 등의 과학기술 이슈들에 대한 감시와 평가, 과학지식과 정보의 공개와 확산,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 단계에 민주적 절차의 강화와 참여 촉진 등의 활동을 수행한다.

④ 유사한 필요와 문제에 부딪힌 시민사회 영역간의 소통과 교류를 강화하고 사회운동이 직면한 갈등의 해결을 위해 적절한 과학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운동의 역량을 향상시킨다.

마치며

본 논문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를 위해 검토해야할 15가지 이론적 주제를 기술하고 설명하였다. 각 주제들은 추상성의 수준, 개념화 정도, 구체적 대상과 범위, 주제의 연원과 논의 수준 등에서 모두 차이가 있다. 100년이 넘는 동안 많은 학자들이 논쟁한 주제가 있는 동시에 최근 10 ~ 20년 이내에 제시되어 논쟁 중인 연구결과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각 주제들은 과학사회학, 노동사회학, 과학철학, 과학사, 존재론과 인식론, 이데올로기론, 행정학, 정책학 등 과학과 기술이 접합되는 다양한 분야와 하나 이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처럼 각 주제가 다루는 범주와 개념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라 하더라도, 노동계급은 각각의 주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적어도 잠정적인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본 논문에서 제시된 15개 이론적 주제뿐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직면해야하는 더 많은 범주와 개념들을 포함하여 이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는 집단적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투쟁이 진행되는 만큼 함께 강화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는 필연적으로 주체화 과정을 동반할 것이고 이를 담당할 주체는 오로지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형성된다. 즉,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는 다른 측면에서 하나의 정치적 주체 형성 과정이다. 이 경로와 방법에 대한 연구는 추후 과제로 주어진다.

여기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가 반드시 해소해야할 두 가지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고자 한다. 첫째, 과학적 실천과 인식은 본질적으로 운동이다. 과학이 갖는 비판과 해방의 역량을 개방해야 한다. 과학이 종교로부터 벗어났듯이 과학은 철학적 관념론과 이신론(Deism)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관념론은 과학이 극복해야할 마지막 적수이다. 목적론을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하면서 과학적 실천과 인식을 실증주의와 진화주의의 틀 속에 가두려 한다. 관념론은 자본주의의 이론적 이데올로기이다. 노동계급이 과학적 세계관을 갖는 것을 방해하고 “거꾸로 선 세계”인 자본주의의 형이상학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다. 속류 유물론과 기계론 같은 관념론의 아류로서는 과학 이데올로기를 돌파하지 못한다. 철학에서의 당파성은 과학적 세계관을 가로막아 서는 이 관념론을 박살 내기 위한 것이다. 일렌코프가 언급했듯이 개별과학의 구체적인 성과들과 철학⸱논리학⸱인식론의 진전을 종합하는 부단한 체계적 노력만이 확고한 과학적 세계관을 노동계급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맑스가 경제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경제학 비판의 과학을 침입시켰을 때 방출된 해방의 역량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는 반드시 이러한 관념론과의 지난한 투쟁을 거쳐야 한다. 관념론, 이론적 이데올로기를 돌파하고 과학의 비판과 해방의 역량을 개방해야 한다.

둘째, 과학과 기술은 누구의 것인가? 과학과 기술의 탁월성은 논증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의 탁월성은 힘에 의해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종교로부터 벗어나고 종교를 물리친 것은 국가에게 종교보다도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자들을 이겨낸 것이지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아직 종교는 살아있다. 국가는 19세기 후반부터 과학과 기술의 확고한 그리고 전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파이어아벤트([18])가 과학적 아나키즘을 주창하면서 국가와 과학의 분리를 제시했을 때, 비록 그가 이론적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주의 깊게 구분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민중이 과학과 기술을 전유하는 데 국가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가능했다면, 국가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분리시키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국가로부터 분리된 과학과 기술을 민중이 전유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도 국가로부터 분리된 교회는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과학과 기술의 정치화는 국가를 넘어선 과학과 기술, 과학적 실천과 인식의 사회화, 과학적 지식과 결과물의 사회화라는 지점까지 사고해야 하고, 이를 성취해내기 위한 경로와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꺼꾸로 선 세계”를 바로 세우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능하다. 국가에 맡겨진 과학과 기술은 역사가 보아왔듯이 전쟁과 야만을 위한 도구였다. 노동계급이 리바이어던을 길들여서 과학과 기술을 전유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계급투쟁을 넘어서 인류의 미래가 노동계급의 어깨에 달려있는 것이다. 기술 파시즘을 분쇄하고 “꺼꾸로 선 세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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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논문은 2012년 과학기술 공공성 포럼과 2015년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일부를 발췌하였다. 논문에서 주장되는 내용은 과학기술평가예측센터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논문의 분량이 많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첫 번째 파트는 <현장과 광장 2호>에 실었고, 두 번째 파트를 <현장과 광장 3호>에 싣는다.
2 (주제 9)는 유명한 Arie Rip의 과학에서의 신용 순환을 제시한다. 최근 논문 [6]의 pp. 65 – 75에서 기술된 과학의 3중 신용 순환에 관한 내용만을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다. 또한 번역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3중 신용 순환을 설명하는 도식을 그대로 옮긴다. Arie Rip은 과학의 협력적 행위자들이 과학 공동체 내의 평판과 국가의 예산을 매개로 과학적 실천과 인식을 실행시키는 순환적 프로세스와 구조적 접합을 과학의 3중 신용 순환을 통해 설명했다. Arie Rip의 과학의 3중 신용 순환은 과학이 작동하는 조직적, 제도적 형식과 운동을 잘 보여준다.
3 해당 집단의 특정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선을 증진시키려 할 때 이러한 선이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동시에 증진되는 경우에만 그 선은 공공선이 된다. 공공선은 경제학자들이 깨끗한 공기와 국방과 같은 재화에 부여하는 일종의 비배제성을 지닌다. 이때 일부를 위한 증진 없이 개인을 위한 증진이 불가능하다면 부분적인 공공선이 될 것이며, 모두를 위한 증진 없이 개인의 증진이 불가능하다면 완전한 공공선이 된다.
4 과학상점 활동을 목표로 2005년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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