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23호 <책소개> :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에 투신한 혁명가

김남기 ㅣ 한성대학교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를 남겼던 저항적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근무하던 1960년 일본 도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했었다. 구입했던 몇 권의 책들 중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었다.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가 그 책에 끌렸던 이유는 바로 ‘아리랑(Ariran)’이라는 반가운 낱말이 눈에 띄어서였지, 책의 내용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조봉암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를 정도로 부정부패하고 타락했던 이승만 정권은 소위 ‘반공(Anti-Communism)’이라는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일체 부정했었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이거나 혁명에 대한 긍정적 색체가 보이면 그것은 빨갱이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만큼 반공이라는 가치가 강요되고 우선시 되는(혹은 그 모든 악행들이 합리화 되는) 사회였기에 한국전쟁에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가 그 책의 존재를 알기에는 시대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이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 일본의 수도 도쿄였던 것은 시대사적인 흐름에서 너무나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에서 아리랑을 구매하게 된 리영희 선생은 그 책을 읽고 감명 받았다. 그 책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한 혁명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제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카탈로니아 찬가』와 더불어 3대 르포문학 작품인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한 에드가 스노(Edgar Snow)에게는 옌안지구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 하던 당시 미국인 아내 한명이 있었다. 스노의 아내는 님 웨일즈(Nym Wales)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바로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였다. 스노의 아내 헬렌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로 한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 했다. 그녀가 인터뷰한 혁명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이었고, 중국공산당 안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였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김산(Kim San)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장지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1960년대 김산이라는 인물에 매료됐었다. 그것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당시로써는 반공주의에 어긋나는 중국 근현대사와 중국 혁명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2005년에 출간된 아리랑 개정판에는 1991년에 쓴 리영희 선생의 추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추천 글에 따르면 그는 중국 혁명을 공부하면서 김산을 떠올렸고, 본인이 직접 총을 쏘고, 굶고, 쫓기고, 고문당하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만큼 김산을 포함한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김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4년 전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휴학생이었던 나에게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면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에드가 스노의 아내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필독서로 읽어야 한다.”고 충고 및 조언을 해줬고, 그렇게 해서 나 또한 김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가 한참이던 2016년 말 나는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소방서에서 복무하게 됐다. 당시 퇴진 집회가 한참이라 매주 토요일 마다 열심히 나가 집회에 참가했었다. 이와 동시에 나는 소방서에서 복무하면서 체게바라 평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 닥치는 대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24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내가 읽게 된 책은 점차 쌓여갔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리영희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있었다.

내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읽은 것은 2017년이었다. 당시 나는 3교대로 근무하며 1주 주간 그리고 2주는 야간근무를 하며 구급출동에 나갔었는데, 새벽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걸리는 구급출동과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의 아픔 및 고통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난 그때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한 인간으로써 추구했던 사상과 혁명을 위해 실천했던 그들의 행동과 역사에 감동받았었다. 당연히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또한 그런 감동을 나에게 주었고, 그의 남편 스노가 집필한 중국의 붉은 별 또한 그러했다.

COVID-19로 인해 발목이 잡힌 요즘 나는 김산이 일대기를 다룬 책을 다시 펼쳤다. 바로 이원규 작가가 2006년에 집필한 김산 평전이다. 이번에 읽게 된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나에게 과거 리영희 선생이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나 또한 경험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책에서 나온 혁명가 김산을 읽으며 직접 혁명현장에서 총을 쏘는 느낌이었고, 국민당군에게 추적당하며 굶고 쫓기기는 느낌을 받았으며, 일제 형사들에게 고문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김산은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15살의 나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대가로 4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었다. 이후 작은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살던 김산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민족해방에 대한 노력에 감명받아 모스크바로 유학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에 있는 이회영 소유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이후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도 가입했고, 1923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북경에서 의대를 다니며 의학을 전공하기도 했었다.

1926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4.12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자, 1927년과 1928년 그 또한 광주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힘든 전투를 치렀다. 1929년 초에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공산당 지하투쟁에 참가했으며, 국민당측에게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진 뒤 혹독한 고문을 받았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베이징에서 학생과 노동자 시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가 석방되고 난 이후 다른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고, 1931년엔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1932년 김산은 사노 마나부의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레닌의 일생』을 번역하였고, 그해 8월 중국 공산당 하북성위원회가 주도했던 무장봉기에 참여하였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맹목적 봉기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냈다가 트로츠키파로 몰리기도 했었다. 이후 그는 장제스가 만든 반공조직 남의사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졌고, 1933년 7월에 고국으로 압송되기도 했지만, 8월에 석방됐다. 1935년 12월 그는 북경 남쪽 도시 석가장에서 청년학생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대장정 이후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8.1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이끌기도 했으며, 1936년 서안사변 이후 홍군이 거점지로 주둔하고 있는 연안으로 갔다. 그 다음해인 1937년 에드가 스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즉 님 웨일즈를 만났고, 그와의 기나긴 인터뷰를 함으로써 헬렌이 자신의 전기 아리랑을 집필하게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개시 된 이후 홍군에서 소위 일제첩자 밑 반혁명파 그리고 트로츠키파 숙청이 일어나면서 그 또한 캉성(Kang Sheng)에 의해 트로츠키파 내지는 일본첩자로 몰려 처형된다. 1938년 10월 19일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스노의 아내였던 헬렌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에 김산 전기인 『아리랑』을 출간하여 생전에 김산과 약속했던 일을 지켰다. 하지만 이 책도 헬렌의 남편 스노가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이 책도 탄압을 받았다. 1934년 그와 결혼했던 조아평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고영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심의를 공식 요청했고, 이 요청은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의해 심사에 들어갔으며, 1983년 1월 중국공산당은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내린 결론은 결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장명 동지는 김산, 유청화, 이철암, 한국유, 유한평 외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인으로 1905년생이다.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장은 우리 지하당의 북경시위 조직부장 재임시 체포되어 조선으로 보내졌다. 몇 달 뒤 장은 다시 북경에 왔으나 1933년 5월 1일 체포되어 다시 조선으로 보내졌다. 1934년 장은 도 북경에 왔다. 이 기간에 우리 지하당은 그를 트로츠키파나 일번의 특무로 의심하고 그를 조직과의 관계에서 회복시키지 않았다. 1936년 우리 북방국은 그를 연안으로 가도록 소개하였다.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그에 대하여 조사를 실시하고 일본 특무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1. 체포에 관한 문제

여러 차례의 조사에 의하면 장명은 1930년 12월 9일 체포되어 심문 중 시위원회 조직부장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자기는 조선독립당 사람으로 공산당은 동정하나 중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뒤에 증거 부족으로 조선으로 인도되었으며 3년간 중국 입국을 금하는 처분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장명은 비밀리에 중국에 욌으나 1933년 5월 1일 다시 체포되었다. 장은 이번 체포뒤 태도를 바꾸고 ‘나의 고백’이라는 것을 써서 광서인으로 1935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현재의 공산당 정책결정이 절대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고 공산당의 맹목적 정책과 국민당의 대일본 무저항주의 및 대내의 군벌 혼전 국면을 반대하였다.

2. 트로츠키파 가입에 관한 문제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 여부의 문제는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 조사 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1933년 5월 1일 재차 체포 뒤 역적 장문운이 적에게 장명이 트로츠키파라고 진술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사 뒤 장명은 트로츠키파 마계강, 양수이 등과 왕래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양수이는 장은 단지 그들에게 일본 글을 가르쳤을 뿐, 정치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현재 조사된 트로츠키파 인원과 관련 자료에 모두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가를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보건대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3. 일본 특무 참가에 관한 문제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장명의 일본 특무참가 문제를 조사하였다. 당시 보안처 보고에 의하면 ‘이 범인은 일본의 특무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되어 있고, 강생은 ‘위원회 결정에 따라 비밀리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장명의 일본 특무 참가 여부 문제는 장이 두 차례의 체포에서 볼 때 당 조직의 문제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장은 중국에 돌아온 뒤 1931년부터 1936년꺼자 6년간 적극적으로 당과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는 북경 지하당의 조직부장으로서 많은 기층 조직 상황을 이해했으며, 우리의 많은 지하당 책임자와 당원을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당원과 발전된 관계를 유지하여 그가 연안에 가기 전까지 당의 조직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기간 국민당 북경시 공안국과 일본의 주 북경경찰서에 수사 체포된 적이 있다. 이런 설명은 장명이 일본의 특무라는 것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장명 동지는 체포된 뒤 당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조직과 기밀은 누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파 참여와 일본 특무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 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당에 대한 충성은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공헌이 있으므로 그가 장기간 받았던 억울한 누명을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며 그의 당적을 회복시키는 바이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처형된 지 45년 만에 복권된 독립운동가 김산은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혁명가적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김산은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혁명에 몸바친 혁명가였다. 그 또한 일제시절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 활동들을 전개했다. 그랬던 김산이었기에 1937년 그를 만났던 헬렌도 그에게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읽은 김산 평전은 또 다른 점에서 김산을 알 수 있었다. 헬렌이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국민당의 감시와 검열을 피해 의도적으로 틀리게한 서술들과 인터뷰 과정에서 놓쳤던 일부 얘기들이다.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이런 세세한 부분들을 바로잡아줘서 혹시나 잘못알고 있게 될 얘기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헬렌이 집필한 아리랑 그 자체의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혁명가 김산의 생애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3년 전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이번에 더 많이 와 닿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책을 읽으며 과거 리영희 선생이 느꼈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반공주의적 편견과 오만감에 빠져있는 이들은 김산을 그저 빨갱이로 판단하는 저열한 인식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들이 심장이 뜨겁지 않은 냉혈한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일제 시절 조선의 독립과 중국 혁명을 위해 싸웠던 그의 뜨겁고 열정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왜 불의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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