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훈 ㅣ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 하였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히틀러에게 아부하며 그를 지지 하였지만 본회퍼 목사는 ‘미친 운전수를 차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면서 강력한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히틀러 암살에 동조하였다는 죄목으로 1945년 4월 9일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 평화주의는 살아남아 간디식 소극적 무저항 운동과 달리 적극적인 반(反)폭력 저항운동으로 제3세계 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된다. 미친 운전수가 버스의 운전대를 잡았다면 그 운전수를 운전석에 내려오게 하는 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지 비명만 지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치광이가 버스 운전대로 아니고 인류 운명의 키를 잡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는 미친 짓의 극한이다. 그나마 그의 맹목과 광신의 영역이 좁기라도 한데,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광증은 지구 공동체를 통째로 공멸로 밀고 갈 수 있다. 규탄하는 것을 넘어 더 적극적인 반대행위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이란 테러 공습은, 공격의 이유가 없고 절차도 없는, 말 그대로 악성 테러다. 이유라는 것이 장차 핵무장을 할 것이라는 주관적 추측이 다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미국과 서방의 입장에 철저한 편향된 기구이다. 지금도 이란에서 핵 감시 활동을 하고 있다. 정말 핵무기가 문제라면 IAEA는 이란이 아니라 아랍지역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졌으면서도 어떤 시찰이나 제제를 받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을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 편향의 국제기구조차도 이란이 핵을 무기화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미국의 십 수개 정보기관을 포괄하는 털시 개버드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도 지속적으로 이란 핵무기 개발은 현실이 아니라 증언했다. 이란의 부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말이다. 오직 가자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네타냐후만이 임박한 위험이라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갓난아이를 죽이는 이유와 같다. 아이라도 ‘성장하면 하마스 전사가 되기 때문에 미리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미친 주장 말이다.
그런데 미국의 이란 공격은 더 황당하다. 트럼프는 이란을 공격하는데 전략무기를 사용했다. 유사 핵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 공격은 당연히 근거가 없는 이른바 예방 선제공격이기에 국제법 위반의 잔혹한 테러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는 전략 무기로 공격하면서 그들은 전쟁선포도 없을 뿐 아니라, 미국 의회에 승인을 배격하여 자기나라 국내법도 어긴다. 명백한 불법도 아니고 무법의 테러 범죄다. 그 과정도 가당치 않다. 이란 미국의 핵협상, 이란 유럽의 핵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외교가 진행 중에 공격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저 양아치 짓이고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상종 못한 패악의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 기만과 배신을 외교거나 자기의 유능한 정치적 술수로 여긴다. 그 천박함이 자랑이니 사회적 통념으로는 그저 사이코패스 속칭 ‘또라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미국 공화당의 종종 쓴다는 이른바 미치광이 외교 전략이다. 문제는 외교에서 미치광이 전법은 그런 척하는 것이지 진짜 미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자기들의 이해득실에 집착하고 다른 상대를 향해 혐오와 증오와 배제를 담은 테러 공격을 하고 있다. 자제와 균형을 잃었다. 이렇게 평화와 존중을 파괴하는 것은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근성에서 나온다. 이에 대한 대응을 2차 세계대전은 잘 보여줬다. 국제적으로는 반 나치연대를 구축하는 것이고, 안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민주주의를 강화확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작년 12월 3일 이후 미치광이를 국정의 운전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것을 세계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전쟁을 막는 정치가 실종됐다. 집권자의 권력 독점이 선을 넘었다. 그것을 독재라 부른다. 정말 민주주의가 필요한 곳은 지금은 이스라엘과 미국이다. 살인자가 살자고 저항하는 이의 저항을 폭력이라는 것을 넘어 아이 여성을 죽이며 ‘나중에 올 위험을 막는’ 자위적 권리라는 네타냐후나, 미국 어떤 평론가에 의하면 “십분 마다 마음을 바꿔 변덕으로 부리는 이와 그에 맹종하는 다섯 명의 바보들이 밀실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트럼프와 그 행정부는 절제나 균형이 없는 진짜 미치광이기에 운전대에서 끌어내려 져야 한다.
2차 대전 직후 만들어진 유엔과 그 질서는 대량학살을 막는 것이고 힘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이유와 절제된 대응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국제질서는 언제나 미국의 패권적 이해와 미국이 옹호하는 이해관계에서 무력화 되거나 파괴됐다. 북한에 대한 집요한 봉쇄와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 옹호는 미국의 힘이 발휘된 대표적인 위선적 이중 잣대의 증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무법의 미국식 국제질서라는 폭압에 한국 사람들은 ‘힘이 최고라며 억울하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의 행위에 대한 어떤 가치 판단도 못하는 한국이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이런 관점이 옳다면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만행을 비판할 수 없다. 미국의 오만과 독주는 견제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바로 말할 수 있다.
강자일수록 그 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과 힘의 행사에 대해 근거를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패악 질일 뿐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이 그렇다. 그런데도 힘에 눈치를 보며 실리나 안전을 따지는 것은 안으로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고 밖으로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데 나치의 당원이 되고 히틀러의 신도가 되는 것이다. 트럼프를 질타하고 네타냐후를 이스라엘의 권좌에서 몰아내는 것은 인류 양심의 방향이자 미국과 이스라엘 스스로의 구원이다. 미국에 필요한 것, 이스라엘에 절실한 것은 그들 안의 전쟁 대신 평화를 말하는 정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폭압자를 몰아내자!
2025.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