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윤리적인 아름다움, 쇼스타코비치

송재혁 | 전교조 법외노조 탄압 해고-복직자

러시아의 베토벤

주여,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위 문구는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가 자신의 책상머리에 붙여두었던 기도문이라고 한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가 쓴 ‘평온을 비는 기도’로 알려진 이 기도문은 러시아의 현대사를 관통해 살면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소련의 베토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했던 쇼스타코비치가 일생에 걸쳐 갈구했던 덕목이자 처세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러시아 1차 혁명의 다음 해인 1906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17년 10월 혁명 당시 광장의 인파를 직접 목격했고, 스탈린 시대에 늘 죽음의 위협을 견디며 살다가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고 소련 음악계를 대표하는 거물로서 영광을 누리다 1975년 8월 9일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생애가 곧 소련의 현대사였다. 더군다나 그의 음악 세계는 베토벤에 비견될 정도로 넓고 깊다. 가히 ‘소비에트 연방의 베토벤’으로 일컬어질 만한 삶과 음악이다.

혁명음악인가, 반공음악인가

‘땡전뉴스’ 시대에 어떻게든 세상을 바꿔보고자 노력했던 사람 중에는 쇼스타코비치라는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교향곡들은 1980년대 한국에서 몰래 테이프로 복사되어 손에서 손으로, 이불 속에서 이불 속으로 전해졌던 ‘혁명 음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으로서 ‘혁명’이라는 표제로 알려졌던 5번 교향곡이 한국에서 초연된 것은 박정희가 살아있던 1979년 6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과 뉴욕필하모니의 내한 공연에서였다. 뿐만아니라 필자가 중학교를 다니던 1982년에는 서울시향에 의해서도 연주되었다. 당시 학교 앞 이발소에서 신문을 들춰보다가 그 공연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바, 당시 지휘자는 드미트리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였다. 아버지 사후인 1981년 서구로 망명하여 아버지가 남긴 악보를 들고서 전 세계를 돌며 지휘를 할 때 한국에도 들렀던 것이다. 그 연주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귀순용사 이벤트에서 ‘반공 음악’으로 연주된 셈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라디오에서도 소련 악단이 연주한 5번 교향곡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교향곡 2번 ‘10월혁명에 바침’, 3번 ‘메이데이’, 7번 ‘레닌그라드’, 11번 ‘1905년’, 12번 ‘1917’년’, 교향시 ‘10월 혁명’,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칸타타 ‘태양은 우리 모국 위에 빛난다’와 같은 작품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여하튼 암흑의 시대에 한쪽에서는 ‘혁명 음악’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반공 음악’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수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접하다 보면 그의 음악 세계를 이념적으로 단정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음악에서는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의 코드를 은밀하게 숨겨 놓았는가 하면, 다른 음악에서는 체제를 대놓고 직선적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 때문에 파시즘의 기운이 늘 유령처럼 배회하는 한국 사회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짜릿한 경험이 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의 나라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온전히 읽어낸다는 것은 아직도 지적인 모험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남긴 음악의 많은 분량이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공동체성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그의 음악과 생애가 20세기를 뒤흔든 현실 사회주의 역사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을 소련의 역사와 떼어내어 생각하기란 어렵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은 지극히 추상적인 예술이어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음악에 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성악이 없는 기악곡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내용적 차원에서 리얼리즘이 생동하고 있으므로 기악곡조차 사회적이다. 서구에서는 12음 기법의 창시자 아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이후 음악의 형식면에서 급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작풍은 비교적 보수적이어서 잘 이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고 움직이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을 열광케 한다. 한없이 풍부한 음악적 아이디어는 음악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면서 어느덧 지고한 감성과 도덕적 각성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 쇼스타코비치는 지난 호의 「노동자를 위한 음악」에서 소개했던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만큼 대중적이고 친절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음악에 다가가려는 노동자‧민중에게는 보기 드문 감동을 안겨준다. 시대의 현실과 당대의 아픔을 오롯이 끌어안아 승화된 경지로 끌어올렸기에 그의 작품에 담긴 예술미는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작품 대부분을 합법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분단 모순과 계급 모순으로 인해 이리저리 뒤틀려 암울하기 짝이 없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적의 음악’으로 간주되었고 그것을 듣는 것은 이적 행위로 여겨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야 독주곡에서 영화음악에까지 걸쳐있는 그의 방대한 작품들을 모두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위험한’ 교향곡들도 연주회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유독 음악에 관대한 정책 때문인지 다른 문화 부문에 비해 좀 더 일찍 ‘허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민중이 민주화를 위해 흘린 피와 땀이 없었다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에서 쇼스타코비치는 한국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다. 그래도 갈 길이 더 남아 있다. 냉전적 사고의 그늘이 엷어졌더라도 집단 무의식에 레드 콤플렉스가 조금이라도 작동하는 한, 그의 몇몇 작품은 여전히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모든 문예 작품과 모든 사상서를 자유롭게 향유하고 담론화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머릿속에서 상상된 것조차 검열하고 단죄하는 비인간적인 사회, 허용되는 것만 상상해야 하는 후진적인 사회에서 진보는 없고 답보만 있을 뿐이다.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2번 ‘1917년’이 한국에서 초연되었던 게 2003년이다. 17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더 개방적으로 변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에도 대법원은 교사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교단에서 몰아냈다.

『증언』과 진실 사이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예프와 더불어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종주국 소비에트 연방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과거 냉전 시대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프로파간다 음악이어서 위험하므로 배척해야 하거나, 혹은 진보적인 이상을 듬뿍 담은 진실 된 음악으로서 반드시 몰래 들어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은밀하게 회자되었다. 어느 경우이건 사회주의 음악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소련에서 망명한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 사후인 1979년 미국에서 『증언』이라는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을 출간하자 쇼스타코비치는 본격적으로 반공주의자로 포장된다. 『증언』의 진실성에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음에도,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주의에 억눌려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요에 의해 체제가 요구하는 음악을 억지로 써내곤 했던 불운하고 유약한 음악가라는 시각이 득세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은 진정성이 없는 가짜라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까지 살았지만,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두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로 쇼스타코비치의 전체를 규정해버리는 편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전기 영화 ‘증언(Testimony)’
(토니 팔머 감독 , 1988년)

현실 사회주의 정부들이 몰락하고 냉전의 베일에 싸였던 비밀문서들이 해금되면서 소련의 과거가 새롭게 드러났다. 이와 함께 반공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입장에서도 소련 사회는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회주의란 모름지기 민주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하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권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비판은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입장에서 가하는 소련 비판과는 관점과 입장이 다른 것이다. 여하튼 냉전 체제가 허물어지고 돈이 안장에 앉아 인간을 몰고 가는 시스템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시대를 거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삶 또한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었던 작품들이 여과 없이 공개되고 향유되자 섣부른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주목하면서 그를 신중하게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제 적성음악으로 간주되어 감상이 불가능했던 작품들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분류하고 감상해도 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한편 내면적인 고백으로 점철된 수많은 작품을 들으면서 그의 방대한 음악 세계를 간단히 몇 마디로 규정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이 기본적으로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작품마다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에는 특유의 음울함과 해학이 있으며, 서늘하고 그로테스크한 음색과 선율에서 스며 나오는 독특한 정서는 수수께끼처럼 오묘하다. 그의 음악처럼 그의 삶 또한 수수께끼다. 그는 말수가 적고 어떤 입장에도 잘 동의해주었으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삶의 태도를 취하면서 음악에는 뭔가 드러내거나 숨겨두었다. 그는 어떤 작곡가였고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보편적인 주제까지 고민하게 된다. 음악과 사회, 음악과 정치, 개인과 사회는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마저 던져진다. 탈정치의 순수 예술론으로 모든 논란을 간단히 피해갈 수도 있겠지만, 비정치적인 태도 또한 하나의 정치적인 입장에 불과할 뿐이기에 음악 해석의 절대적 원칙이 될 수는 없다.

음악이 아니라 혼돈?

쇼스타코비치는 남들처럼 망명의 기회들을 이용하지 않고 소련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그의 예술의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혁명 초기에 러시아의 문화계에서 새로운 사조들이 넘칠 때 청년 쇼스타코비치는 작곡계의 기린아로 성장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그는 크게 두 번의 위기를 겪게 된다.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1934년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지만 1936년 이 공연을 본 스탈린의 분노를 사게 된다. 정부 기관지 ‘프라우다’가 이 오페라를 “음악이라기보다는 혼돈”이라고 비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어서 발표한 교향곡 4번은 공연 연습이 중단되었고 그 초연은 스탈린 사후인 1961년으로 미루어지게 된다. 4번 교향곡의 1악장은 찢어지는 듯한 괴성으로 시작하는데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가 연상된다. 스산하게 잦아드는 4악장의 마지막에서는 어떠한 혁명적인 기상도 느낄 수 없다. 당의 비판으로 위기에 몰린 그가 반성의 의미로 내놓은 작품이 대표작으로 알려진 5번 교향곡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1942년 나치의 봉쇄 작전으로 위기에 처한 자신의 고향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로 조국에서 인정받은 것은 물론 1942년 7월 ‘TIME’지 표지의 모델이 될 정도로 외국에서도 인기를 누리지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종전 후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베토벤 교향곡 9번 ‘코랄’과 같은 기념비적인 걸작이 기대되었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교향곡 9번은 이러한 기대와 한참 동떨어진 모양으로 나왔다. 작품의 규모도 작거니와 이 작품에서 나치즘과 싸워 이긴 러시아의 영광을 찾기란 어려웠다. 서유럽에서 도입된 형식주의적 사상과의 투쟁을 내세운 1948년 즈다노프 비판이 대두했고 그는 이를 정면으로 감당해야 했다. 예술에 있어 사회주의성을 편협하게 강요했던 1936년과 1948년의 강력한 조치는 그의 작풍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야 그의 음악은 비로소 자기 길을 찾게 된다.

소비에트 혁명 초기에 예술계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쳤고 진보적인 기법이 광범위하게 실험되었는데, 쇼스타코비치 역시 아방가르드적이고 혁신적인 음악 기법을 즐겨 시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들으면 이후 작품들에 비해 더 전위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스탈린 시대가 등장하면서 예술 정책은 보수화되었다. 예술뿐 아니라 전 사회를 포위하는 강력한 통제 시스템은 전쟁 이후에도 존속하면서 화석화된 권력층을 형성했고 시스템에 대한 비판 시스템은 부재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 경직된 사회는 결국 외부 자본주의권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붕괴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소련의 파국은 내부에서 자초한 측면이 분명 있다.

5번 교향곡

보통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5번 교향곡은 첫 번째 시련, 즉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등에 대한 당국의 호된 비판 덕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른바 형식주의, 엘리트주의, 아방가르드 경향을 청산하고 대중적으로 이해되기 쉽고 간결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경향으로 돌아섰음을 선언하기 위해 화답으로 내어놓은 것이다. 1937년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에 지휘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에 의해 초연되어서 ‘혁명’이라는 제목이 따라 다니게 되었나보다. 초연이 큰 성공을 거두어 엄청나게 긴 박수가 있었다고 하나, 이 곡을 ‘혁명’과 연결하기에는 분명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어두운 그림자도 여기저기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암울한 체제에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이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곡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3악장은 분명 슬픈 정조로 뒤덮여 있으며 심지어 흐느끼는 부분도 있다.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는 그의 8번 교향곡 3악장과 더불어 5번 교향곡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데, 실제로는 실패했던 봉기를 승리로 표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5번 교향곡 4악장의 피날레가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희망찬 전진 끝에 혁명의 승리에 도달하는 이 부분은 지극히 벅찬 환희로 가득해야 함에도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독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케겔(Herbert Kegel)은 이 부분이 뭔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1986년 라이프치히 방송 교향악단과 남긴 실황녹음에서 악보에도 없는 ‘튜블러 벨’(종소리 나는 악기)까지 동원한다. 이후 동독 몰락과 통독 이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지휘자 케겔은 1990년 스스로 권총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쇼스타코비치는 5번 교향곡으로 혁명 20주년을 경축했는가, 아니면 당의 비판을 교묘하게 비웃었는가? 진실은 무덤 속의 작곡자 본인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 뽕짝

그의 음악 중에는 매우 친근한 것들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아마도 ‘재즈모음곡’의 ‘왈츠’일 것이다. 3박자의 뽕짝 풍인 이 곡은 실제로 막걸리잔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면서 흥얼거려도 자연스럽다. 실제로 어떤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그렇게 해 봤는데 우리 정서와 잘 맞는다. 한국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와 ‘올드 보이’에 삽입되어서 더 친근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재즈풍과 왈츠풍의 음악을 많이 썼다. ‘로망스’도 인기 있는 작품이다. 이 곡의 출처는 1955년 발표한 영화 ‘The Gadfly(등에, 쇠파리)’에 붙인 영화음악으로, 원래 제목은 ‘청춘’이다. 그런데 사랑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감상적인 곡이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곡조차 혁명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한 혁명가가 지배 계급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가축에 들붙어 괴롭히는 ‘쇠파리(등에)’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그의 고뇌를 담은 곡이 바로 이 ‘로망스’라고 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쉽고 서정적인 선율을 이 곡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기품 있는 멜로디 라인이 인상적이다.

‘축전 서곡’에도 모순 없는 천진한 기쁨이 넘친다. 소비에트 혁명 30주년인 1947년에 작곡되었다는 설과 혁명 37주년을 기념해 1954년에 작곡했다는 설이 있다. 여하튼 소비에트의 위업을 찬양하는 매우 밝은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고 어떤 그늘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우리 공연장에서도 이 곡이 심심치 않게 연주되는 아이러니가 즐거운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 대해 “힘겨운 전쟁을 체험하고, 적에게 짓밟힌 조국을 부흥시키려는 한 남자의 감정을 그리고 싶었다,” “신 5개년 계획 재건 사업에 대한 열광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관변 음악 같지만, 민중이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써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빛나는 곡이다. 기본적으로 온음계를 사용하여 귀에 쉽게 들어온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로도 사용되었다.

레닌그라드

작곡가 본인은 대표작으로 알려진 5번 교향곡보다 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더 아꼈다고 한다. 자신이 소방수로서 참전했던 ‘대조국전쟁’ 중에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하다가 후방으로 이동해 완성했다. 이 곡은 전쟁 중인 레닌그라드에서도 연주되었다고 한다. 1942년 10월 9일 전선에서 전투 중인 단원들이 총을 놓고 필하모니 홀에 모여 연주했고 연주회장은 청중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또한 대형 스피커를 통해 레닌그라드 전역에 중계하여 그 소리를 독일군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악장에서는 집요한 북소리와 반복되는 음형으로 나치의 침략을 오랜 시간 동안 묘사하는데,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거대한 크레센도(crescendo)로 되어 있다. 이 곡의 백미는 4악장이다. 소련 민중의 결사 항전의 의지, 또는 전쟁에서 생존하려는 절박한 몸부림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에는 승리에의 예감을 거쳐 같은 음고로 된 4개의 음이 “딴딴딴딴-” 하고 처절하게 반복되는데 이 부분에서 베토벤의 유명한 ‘운명’의 동기가 연상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 지휘, 소련 국립 교향악단 1978년 실황 녹음(Melodiya-Scribendum)

‘레닌그라드’는 음악이 만들어진 현실의 조건과 음악이 담은 내용성이 성공적으로 맞닿은 리얼리즘 음악의 전형이다. 엄청난 희생 끝에 나치를 물리친 사회주의 소련의 힘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 음악을 통해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온다. 역사가들이 말하듯, 당시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처절한 사투로 버텨주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세계를 더 많이 망가뜨렸을 것이다. 한편,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민중들의 처절한 몸부림도 이 곡에서 읽혀진다. 국가 간의 전쟁이란 결국 지배계급의 욕망을 위해 민중들의 소중한 생명이 헐값에 동원되는 내부의 전쟁에 다름 아니며, 전쟁은 국가가 수행하는 규모가 큰 테러이자 범죄행위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전쟁과 승리의 다이내믹한 음악적 도식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 2부작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 앙드레 끌뤼땅스 지휘, 프랑스 국립 라디오 방송 관현악단, 1958년 파리에서 쇼스타코비치 입회 하에 녹음(TESTAMENT)

에이젠슈타인이 남긴 영화 ‘10월 혁명’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끊임없이 흐른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이 혁명적 이미지로 넘치기 때문에 음악과 영상은 매우 조화롭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1957년 발표한 교향곡 11번 ‘1905년’과 교향곡 12번 ‘1917년’으로 그려냈다. 이 두 작품은 그가 반공주의자였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큰 당혹감과 곤혹스러움을 안겨줄 것이다. 리얼리즘의 걸작인 이 두 작품은 그야말로 음으로 쓴 역사 다큐멘터리다.

교향곡 11번의 1악장 ‘동궁 앞 광장’에 이은, 2악장 ‘1월 9일 (피의 일요일)’에서는 영상보다 강렬한 음악의 힘에 놀라게 된다. 동궁전을 향해 청원행진을 계속하는 무방비 상태의 민중에게 황제의 군대가 일제 사격을 가한다. 악의 근원이 황제의 시스템인데 그 시스템 내에서 황제의 자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민중은 이 살육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훈을 주는 역사적 장면이다. 이 잔혹한 현장이 무자비한 음의 폭력으로 묘사되다가 북소리가 일순간 정지하고 괴기스러운 정적이 흐른다. 이 2악장을 반복해 듣는 것은 ‘피의 일요일’을 여흥으로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음을 통해 역사의 교훈으로 새기려는 것이기에 도덕적이다. 이어지는 3악장 ‘영원한 기억’은 불의에 저항하다 희생된 수많은 민중에게 바쳐지는 진혼곡이다. 후반에서 몹시 고양되는 부분과 이어지는 팀파니의 연타 부분은 저항의 민중사에 공감하는 사람에게 가슴을 치는 충격을 줄 것이다. 4악장에는 씩씩한 혁명가요들이 등장한다. 우리 군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유사한 선율이 반복되기도 한다. 1차 러시아 혁명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 제임스 디프리스트 지휘, 헬싱키 필하모니(1988, DELOS)

실패로 인한 슬픔을 잉글리쉬 호른이 연주하고 나면, 장래의 투쟁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힘찬 경종의 울림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 부분은 미완의 혁명이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는, 미래에 대한 여지를 강하게 남기는 부분으로, 참으로 무서운 경종 소리와 그 잔향의 여운으로 마무리된다.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4악장의 제목은 ‘경종’이다. 4악장의 끝부분은 나태한 우리의 이성에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11번 교향곡은 러시아혁명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올해 40주년을 맞은 5.18 민중항쟁, 33주년을 맞은 6월 민주항쟁 등, 지배자들의 폭력에 짓밟힌 희생과 이에 맞선 값진 저항의 역사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영문도 모르고 숨져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에서의 수많은 생명을 추모하거나 전쟁과 폭정에 의해 희생된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이 곡이 연주된다면 진정한 맥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교향곡에서 쇼스타코비치는 혁명가요들을 많이 사용했다. ‘죄수의 노래, 들어주오!’, ‘동지는 쓰러지지 않는다’, ‘압제자들이여! 격노하라!’, ‘바르샤바 노동가’, ‘밤은 어두워’, ‘오오! 황제, 우리들의 아버지여’, ‘모자를 벗자’, ‘희생당한 당신은 영웅이었다’, ‘안녕, 자유여’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임을 위한 행진곡’, ‘파업전야’,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와 같은 곡들이 교향곡의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 셈이다.

그는 11번 교향곡을 195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초연하였고, 1958년에 이 작품으로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60년 9월에는 공산당에 가입하고 이어서 러시아 10월 혁명을 다룬 교향곡 12번 ‘1917년’을 쓴다. 이 작품은 11번에 비해 직접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악상이 조금 부족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뛰어난 작품이다. 2003년 가을에 소련 출신의 드미트리 키타옌코와 KBS 교향악단이 12번 교향곡을 한국 초연했다. 2003년에서야 이 곡이 예술의전당에서 처음 연주된다는 사실 자체가 희극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서 조심스럽고 어색하게 나오는 청중의 박수 소리는 또 하나의 희극이었다. 11번 교향곡도 2005년 11월 말에 같은 연주자에 의해 한국에서 초연되는데 2년 사이에 세상이 변했는지 혁명 교향곡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당시 KBS 교향악단은 무자비한 구조조정이 완수된 서울시향에 이어 독립법인화 논의가 진행되던 시점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단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결되고 긴장된 모습으로 이 곡의 폭발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었는데, 마치 자신들의 분노를 11번 교향곡 연주로 표출하는 것 같았다.

구자범 지휘, 군산시향 연주회 ‘100년의 비밀’ 포스터(2017.3.16.)

‘사고’와 ‘연주’의 경계

2017년은 10월 혁명 100주년, 윤이상 탄생 100주년, 박정희 출생 100주년이었다. 뭔가 떠들썩할 것 같았던 한 해가 아쉬울 정도로 허전하게 지나버리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재조명의 불빛은 희미하기만 하고, 윤이상의 음악은 공연장에서 예년보다 홀대받았으며, 아버지 왕국의 재건을 시도한 딸은 옥에 갇힌 채, 역사 개념 가득한 한 해가 몰역사적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자본 대신 노동자‧농민이 주인 되는 꿈, 보편과 특수를 조화시켜 모국의 음악을 충만케 하는 꿈, 다카키 마사오를 조국 근대화의 영웅으로 부활시키려는 꿈은 각기 꿈으로만 남은 채 2017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 해에 있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의 연주회만이 위안으로 남았다. 휴대전화번호조차 1917번인 구자범 지휘자는 혁명 100주년을 놓치지 않고 3월 16일 군산 예술의전당에서 군산시립교향악단과 함께 ‘100년의 비밀’이라는 음악회를 열었다. 연주회 포스터의 ‘1917’ 숫자는 참으로 재미있는 도안이었다. 숫자 안에 작은 글씨로 ‘100’, ‘1917’, ‘구자범’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 ‘1917년’ 1악장 ‘혁명의 페트로그라드’의 첫 테마

이 날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 ‘1917년’에는 지휘자의 개성 있는 곡 해석이 묻어 있었다. 1악장 ‘혁명의 페트로그라드’는 출발부터 대단히 무겁고 각별했다. 저음현의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첫 테마와 도입부는 처연하고 구슬프게 연주되기도 하고 단호하고 저돌적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구 지휘자는 이 부분에서 민중의 절절한 요구와 술렁이는 동요, 그리고 저항으로의 결집을 함축하여 꾹꾹 누르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연주 도중에 우리 악기 징과 비슷한 모양을 한 탐탐(tamtam, gong)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불상사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 ‘1917년’. 오간 두르얀(Ogan Durjan)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동독, 1967년, Philips)

발생했다. 나중에 지휘자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리허설 중 지휘자는 탐탐 연주자에게 최대한 과격한 연주를 주문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 중 악기를 너무 힘차게 연주해서 넘어진 것이다. 레닌과 함께 봉기를 준비하던 볼셰비키는 10월 24일 사각형입니다. 군함 ‘오로라’의 호포를 신호 삼아 행동에 돌입하여 무혈혁명을 달성했는데, 이것을 묘사한 부분, 즉 3악장 ‘오로라’에서 4악장 ‘인류의 새벽’으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탐탐이 넘어졌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연주 사고’라기보다는 낡은 시대의 몰락과 새 시대의 개벽을 극적으로 표현한 ‘의도되지 않은 연주’라 하겠다. 연주회 후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던 중 그 탐탐 연주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참으로 절묘한 연주이자 의미 깊은 사고였다”며 위로해드렸다.

파시즘의 희생자에게 바침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개, 현악사중주곡을 15개 썼는데, 현악사중주 중에서 몇 곡은 루돌프 바르샤이(Rudolf Barshai)에 의해 편곡되어 ‘실내 교향곡’으로 만들어졌다. 현악사중주 8번(1960년) 또한 ‘실내교향곡’으로 편곡되었다. 이 곡에 붙은 ‘전쟁과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상기하여’라는 부제가 쇼스타코비치의 본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서 사랑 받는 작품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악극(Musikdrama)’에 사용된 시도 동기(Leitmotiv)와 비슷한 기법이 사용되었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특정한 음악을 사용한 것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이나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과 더불어, “문어대가리”가 출현할 때마다 섬뜩하게 흘러나온 음악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을 편곡한 실내교향곡의 4악장의 첫부분이다. 4악장에서는 날카로운 현에 의한 인상적인 임팩트에 이어 비올라가 비 오듯 절절하게 눈물을 흘린다.

루돌프 바르샤이가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을 편곡한 ‘실내교향곡’. 주하 캉가스 지휘, 오스트로보스니안 체임버 오케스트라(2001년, BIS)

1악장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라는 이름의 이니셜에서 따 온 ‘레-미플랫-도-시’ 주제로 시작한다. 같은 선율이 조성을 비껴가며 유령처럼 반복된다. 5악장의 마지막도 같은 선율로 조용히 마무리되는 수미쌍관식 구성이다. 이 주제는 교향곡 10번, 첼로협주곡 1번 등에도 등장하는데, 책에서 읽고도 쇼스타코비치라는 이름과 이 모티브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를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독일어에서의 음정 기호를 대입해야 비밀이 풀린다.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의 독일식 표기는 ‘Dmitri Schostakowitsch’이고 이니셜은 ‘D-S-C-H’가 된다. 이를 음정으로 옮길 때, ‘S’는 ‘Es(=E♭=미♭)’음에 대응하며, ‘H’는 ‘B(=시)’음의 독일어 계명이다. 비교적 내성적인 작품들에 숨겨 놓은 이 음악 암호는 거대한 전체에 짓눌린 한 개인의 독특한 자기 배려 방식이었을 것이다. 전쟁 후 1945년 내어놓은 9번 교향곡으로 또 한 차례 소련 당국의 호된 비판을 받게 되자 이후 8년 동안 교향곡을 일체 발표하지 않았다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마자 내어놓은 작품이 교향곡 10번이다. 1악장은 칠흑같이 어둡고 끝 모를 아픔이 배어있다. 2악장은 그야말로 얄짤없는 외부 압력을 표상하는데, 교향곡 8번 3악장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4악장에 이르러서야 어둠 속에서 살포시 빛이 고개를 내민다. 10번 교향곡에서 ‘D-S-C-H’ 주제는 장난스럽게 사용되기도 하며 마침내 우렁찬 금관으로 폭발한다. 마치 “나 쇼스타코비치는 건재하다!”라고 포효하는 듯하다. 이어서 새가 날아가듯 가볍고 쾌활한 분위기로 곡이 끝난다.

바흐 모티브, B♭-A-C-B natural
쇼스타코비치 DSCH 모티브, D-Es(=E♭)-C-B(=H)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 지휘,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영국 로열 앨버트홀 실황 녹음(1968년 8월 21일, BBC 레코딩, ICA)

그의 15개 교향곡 중에서 가장 내성적인 것 중 하나인 10번 교향곡은 많은 녹음이 있는데,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와 소련 국립 교향악단의 1968년 8월 21일 실황 녹음은 모노 녹음이지만 엄청난 긴장감이 넘친다. ‘프라하의 봄’을 우려한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다음 날 영국의 로열 앨버트홀에서 있었던 연주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음반을 틀면 구호의 연호와 야유 소리가 한동안 들린다.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에게 들려주며 무슨 말인지 판독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연주가 시작되고 나니 소란은 잦아드는데, 연주가 끝나면 항의 군중이 퇴장한 이후인지 박수 갈채만 들린다. 이 곡이 비록 스탈린이 죽은 후에 발표되었지만 그의 독재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체코 침공 직후 영국에서 소련 악단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10번을 어떤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1956부터 작곡하여 1957년 발표한 교향곡 11번 ‘1905년’도 1956년 헝가리 혁명을 탱크로 무너뜨린 소련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작곡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교향곡 2번 ‘10월혁명에 바침’, 3번 ‘메이데이’, 13번 ‘바비 야르’, 교향시 ‘10월 혁명’, 관현악곡 ‘스테판 라친의 처형’,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그 밖의 관현악 가곡과 수많은 영화 음악들 또한 완성도 높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이다. 그 밖에 사회적 사건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뛰어난 작품들 또한 매우 많다. 1933년 발표된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것은 쇼스타코비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트럼펫이 조성을 살짝 이탈하면서 흥얼거리는 부분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 복잡하고 미묘한 리듬,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곡조는 여러 장르에 걸친 방대한 작품들 속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

책을 코로 읽을 수 없듯이 음악을 눈으로 들을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쇼스타코비치를 이해하려면 문헌을 탐독하기 전에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세계를 깊고 넓게 조망한 놀라운 자료가 2015년 혜성같이 등장했다. 교향곡 15곡과 협주곡 6곡을 망라한 영상물이다.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유서 깊은 마린스키 극장 관현악단‧합창단이 2013년과 2014년에 파리의 ‘살 플레옐(Salle Pleyel)’에서 펼친 탁월한 연주를 담았다. 이 자료의 가장 큰 장점은 유럽에서 제작되었지만 한글자막이 있다는 것이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실시간으로 가사를 이해해야 온전한 감동이 보장되는 것은 당연하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에는 성악이 등장하는 곡들이 있으며 그 텍스트에는 혁명이나 유태인 문제, 그리고 삶의 부조리가 담겨 있다. 이들의 러시아어 가사를 우리말로 완역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이 영상물은 한글자막만으로도 크나큰 가치를 지닌다. 노동자 혁명을 단호하게 외치는 가사를 여과 없이 자막으로 접하는 즐거움은 각별하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이 클래식을 많이 듣는 주요 국가로 등장하면서 유럽에서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과 협주곡 전집 영상.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마린스키 극장 관현악단과 합창단(2013~2014년, Arthaus, 블루레이, DVD)

수년 전부터 영상물에 한글자막을 넣기 시작했다. 매 작품 연주 전에 배치된 지휘자 게르기예프의 육성 해설이나 다큐멘터리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A Man of Many Faces)’ 또한 한글자막 처리되어 있다. 클래식 영상물로서 이렇게 훌륭한 자료는 일찍이 없었다. DVD와 블루레이 두 가지 포맷으로 나와 있다.

혁명과 휴머니스트

“모든 언어가 멈췄을 때 음악 한 줄기가 남았다.” MBC 해직 PD인 이채훈 음악 칼럼니스트가 올해 4월에 낸 저서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의 부제로 달린 문구다.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다룰 때 쇼스타코비치는 약방에 감초 격으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고 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과거의 은밀한 연인이었던 쇼스타코비치를 다시 만나 보고픈 사람은 이제 더이상 이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볼륨을 최고로 올리고 쏟아지는 소리의 폭포 속으로 뛰어들어 그가 말하고자 한 진실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다 보면, 좌우를 가르는 기존의 좌표를 넘어선 어떤 지평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쇼스타코비치는 누구인가? 반공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회주의자인가? 오늘도 그의 음악을 들으며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토니 팔머가 감독한 1988년 쇼스타코비치 전기 영화 ‘증언(Testimony)’은 편향적 시각이 지배하지만,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하는 쇼스타코비치가 영화의 마지막에 남기는 독백에는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이제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말기를. 부디 음악만……” 인권을 억압하고 사람을 도구화하고 예술을 수단화하는 사회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가 가짜 사회를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음악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의 음악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쇼스타코비치가 연주될 때 소련 민중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반복되는 시대적 억압 속에 살아가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그 감동의 기원은 공동체성에 있다.

‘혁명’이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정치적 격변 이상의 그 무엇이다. 음악이 미리 획득한 아름다운 이상향을 동경하는 사람에게, 현실의 부조리와 비참함을 진정으로 넘어서기를 갈구하는 사람에게, ‘혁명’이란 단어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의 어떤 낭만적 표상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딛고 이상을 향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음악 속에 변증법적으로 실현했다. 고뇌를 넘어 환희에 도달하기도 했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지향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 베토벤의 변증법은 가시적인 형식미를 갖추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변증법은 보다 은밀한 내용성을 갖추었다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현실의 과제와 맞부딪치면서 형성되었기에 이미 사적 차원을 넘어섰고, 사회의 공동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큰 공감과 연대 정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서 경험하는 아름다움은 그래서 ‘윤리적’이라고 할 만하다.

쇼스타코비치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구자범 지휘자와 광주시립교향악단이 2010년 4월 3일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한 ‘혁명’이라는 제목의 음악회를 위해 프로그램북에 썼던 글의 마지막 단락을 지금도 그대로 가져올 수 밖에 없다.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그의 음악은 자신을 휴머니스트로 불러 달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우선하는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휴머니스트로서, 현실의 벽을 넘어서려는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올봄 어느 날 ‘전교조 법외노조 직권 취소’를 호소하는 청와대 앞 피케팅 시위를 마친 후 동지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 식당에 걸려 있는 액자의 문구를 읽다 보니 퍼뜩 쇼스타코비치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예술가는 사슬에 매여 춤추는 자이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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