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양준호 |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칼 맑스가 프랑스혁명사를 정치학적으로 다룬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그의 저작에서, 변증법론자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역사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덧붙인 명언 중 명언이다. 맑스는 이 문구를 구사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삼촌’ 나폴레옹의 반동적 쿠데타가 ‘조카’에 의해 반복되는 모습을 이른바 ‘소극(笑劇)’으로 희화화해낼 수 있었다.

비극이 반복되면 희극이 된다는 것. 이전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를 밀어붙이면서 국민 앞에 내건 여러 약속들을 그 스스로가 부정했던 것처럼, 지금 정권이 촛불 앞에 맹세했던 가치들은 모조리 자기부정되어 이젠 적대하고 있는 나라와의 지소미아를 무슨 조건부를 내걸며 연장해버린 것 역시, 비극을 넘어선 희대의 희극이다. 게다가 한미일 전문가들의 대부분이 지소미아 연장은 잘 한 것이라 칭찬했다며 자랑하는, 이 희극은 관객의 무료함까지 달래며 공연되는 경쟁력(?)까지 갖춘 소극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사가 그랬듯, 희극은 주인공 혼자서만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역사를 부활시킨 건 대통령 혼자만이 아니다. ‘촉새’ 유시민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은 물론이고, 신자유주의의 병폐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거나, 그 이념을 되레 숭상했거나, 나아가 비극의 부활을 막지 못한 김상조 등의 군상들 모두가 사실 희극의 출연자들이다. 지금도 뻘 짓이나 해대는, 정의당도 포함한 야당 역시 물론이다.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그 탁월한 통찰로 바라본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역사는 지금 우리 눈 앞의 ‘비아그라 헬조선’과 너무나 닮아 있다. 삼촌의 이름을 걸고 집권한 다음 쿠데타로 황제가 되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 노무현의 이름을 걸고 노빠들의 지지를 얻은 뒤 촛불에 의해 어부지리로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은 쌍둥이에 가까울 정도로 닮은 꼴이다.

보나파르트가, 경제적으로 지극히 궁핍했던, 허나 프랑스 내부에서 독자적인 계급으로 발전하지 못 했던 소농민들의 지지로 집권했던 것처럼, 문재인 역시 자본가 계급은 물론이거와 계급의식은커녕 민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노동자, 농민, 영세업자들과 같은 이른바 서민 대중의 ‘역설적인’ 지지로 집권하였다. 해서, 지금 우리 눈 앞의 희극은 바로 ‘공동 연출’의 소산이지, 문재인 혼자서의 뻘짓이 아니다.

권력을 장악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자신을 지지해준 영세 분할지 농민들의 요청을 배신하고 공화정의 가면 뒤에 숨어 ‘희극적’이게도 황제의 길을 걸었다. 촛불 앞에서 정의, 공정, 재벌개혁, 노동존중을 거품 물어 제끼다가, 지금은 촛불을 노골적으로 배신하고 정의와 공정을 어긴 사람을 법무부장관으로 밀어붙여 이 나라를 둘로 쪼개버리고, 되레 도가 지나친 친재벌 기조를 고수하며 노동탄압을 이제 서슴없이 저지르는 문재인 정권의 ‘희극적인’ 반동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 눈 앞엔 희극을 넘어 그야말로 유치하고 아둔한 삼류 지소미아 코미디극이 상영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시공을 초월한 ‘희극’과 ‘비극’의 반복은 계급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우리 대다수 민중의 ‘무능력’이 불러온 것임을 인정하자. 계급적으로 조직되는 것의 방법론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대중이 계급의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는 정반대의 정치 선택을 계속하는 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 하면서도 정작 선거에선 재벌, 부자 편드는 제도권 정당에 표를 던지는 한, 우리 노동자 서민 대중은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농락당했던 19세기 프랑스 소농민의 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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