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8) : 관념변증법과 유물변증법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자본독재는 다양한 물적 조건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위축시킴으로써 자체의 수명을 연장한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 고용불안, 부에 따른 서열화, 가난의 대물림, 무한경쟁체제 등등이 그 주요 무기다. 자본독재 속에서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조차 ‘살만하다’는 환각을 양산하여 평등사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전망과 의지를 말살하는 데에 쓰인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현실의 근본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무기 삼아 노동자민중 각 개인의 주체적 잠재력 내지 폭발력을 현실적 힘으로 모아내는 조직적 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혁주체의 의식적 조직적 성장 없이는 자본증식의 한계가 명확해지고 파국적 위기가 밀려와도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 건설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주체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주체의 현실적 비중을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왜곡하는 관념론의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현실인식상의 불필요한 혼선과 희생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눈앞에 실재하는 사물들을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주관적 감각 혹은 관념의 산물일 뿐이라고 믿으며 원만하게 일상생활을 해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의 과학과 산업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철학교과서 속에 가두어 놓았고, 사실상 유물론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기 위해 별도의 철학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게 된 듯하다.

그러나 관념론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새로운 어휘들로 재무장한 후 수시로 상식과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휘저어 놓는다. 예컨대 대표적인 관념론자 칸트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 즉 우리는 물자체를 알 수 없고 단지 현상만을 알 수 있다는 주장에 현혹당할 걱정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을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인다. 엥겔스는 헤겔을 끌어들여, “어떤 사물의 모든 속성을 인식한다면 그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칸트의 주장을 논박한다. 나아가 과학의 진보를 통해 칸트 시대에 불가사의했던 사물들을 분석하고 파악할 뿐 아니라 재생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을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를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단언한다.(듀링415-416) 엥겔스의 이러한 비판으로 칸트 인식론의 핵심이 깨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엥겔스가 사물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강조하는 데에 반해, 칸트는 그 인식을 주체적 조건에 의존하는 현상에만 관련짓는 점에서 비판의 초점이 조금 어긋난다. 더구나 ‘어떤 사물의 모든 속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물들의 무궁무진한 속성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에 무한히 접근해갈 뿐이라고 보는 유물변증법적 사고방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물자체를 안다는 것이 곧 어떤 사물의 모든 속성을 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엥겔스의 이러한 비판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인식의 주체적 조건을 개별 경험과 무관한 불변적 인간학적 요인, 즉 선험적 요인들에서 찾음으로써, 상대주의로 직행하지 않고 보편타당한 인식의 가능성을 구해내려 한다. 그런데 그 선험적 요인들이 실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존재’ 혹은 ‘세계사의 산물’이라면 인식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칸트의 논거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무튼 칸트는 현상 개념을 통해 인식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반성에 불을 붙인 셈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혹은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라는 테제로 인식의 주체적 조건을 사회적 토대에서 찾았다. 그 후의 인문학은 권력, 무의식, 언어 등으로까지 인식의 조건에 대한 논의를 확장해 왔다. 유물론도 이러한 반성적 논의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주체적 조건에 의존하는 인식은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인식일 뿐인가? 칸트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의 관념론자들은 그렇다고 믿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텍스트’⋅‘상징계’⋅‘이데올로기’ 등의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순진한 유물론의 독단적 산물이라고 폄하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냉소적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이 번창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물자체와 현상에 대한 인식을 엄격히 구분하는 칸트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 그 해독제는 인식의 개념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을 물질적으로 고스란히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해 일정하게 추상⋅변형⋅재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인식주체의 실천적 필요성이나 인식능력 혹은 인식도구 등과 같은 주체적 조건이 끼어들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인식이든 부분적⋅제한적이고 수정⋅보완⋅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실재 혹은 물자체를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러한 인식과정 속에는 현상적 요소가 원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 속에는 일종의 동어반복이 불필요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유물변증법의 관점에 의거 인식의 불완전성⋅과정성을 인정하는 한에서, 대상 자체⋅실재⋅물자체 등을 인식한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셈이다.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따지며 머리를 혹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혹은 물자체에 대한 인식의 적합성⋅깊이⋅폭 등을 늘이기 위해 고투를 벌이는 것이 유물변증법의 본분이다. 이 과정에서 인식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반성도 칸트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필요는 없다.

2.

맑스는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받아들였다. 이 방법은 자본주의 경제의 세포인 상품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작동방식에 대한 전면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자본론] 전체로 구현된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헤겔에게는 그가 이념이라는 명칭 아래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고 있는 생각하는 과정이 현실세계의 창조자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생각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자본1,19) 맑스는 거꾸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합리적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알튀세르는 모순의 단일성과 복잡성 문제를 중심으로 헤겔 변증법의 구조와 맑스 변증법의 구조를 대조하고 자신의 과잉결정론을 근거로 헤겔 변증법 자체를 단순하다고 보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기하려 든다.[1]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342쪽 참조. 과잉결정론에 대해서는 추후에 검토하기로 한다. 이에 반해 엥겔스는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바로 세움으로써 헤겔 철학의 혁명적 측면이 복구되었다는 관점에서 헤겔의 기본사상을 ‘위대한’ 것으로 평가한다. “위대한 기본사상, 즉 세계는 기성의 완성된 사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총체이며, 여기서는 불변적으로 보이는 사물도, 두뇌에 의하여 구성된 사물의 사유적 모방인 개념도 다 같이 부단히 변화하면서 혹은 발생하며 혹은 소멸한다는 것, 그리고 또 전진적 발전은 모든 외견상의 우연성과 일시적 퇴보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위대한 기본사상은 헤겔 시대 이래 일반의 의식에 깊이 침투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 형태에서는 이를 논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2] F. 엥겔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돌베게 2015, 93쪽. 이하 ‘고전’으로 약칭. 오늘날 ‘전진적 발전’ 혹은 진보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과 수시로 마주칠 수도 있다. 하지만 헤겔 변증법에 대한 알튀세르식의 거부나 마녀사냥보다는, 그 위대한 기본사상을 노동자민중의 의식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려내는 편이 평등사회를 위한 해방전쟁에 훨씬 더 쓸모 있을 것이다.

헤겔의 관념변증법에 대한 비판은 변증법의 개방성 및 폐쇄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도르노는 ‘진리는 전체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상대주의나 실증주의와 대적하기 위한 무기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모든 것을 정신의 산물로 파악하는 헤겔의 관념론 체계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으로 귀결되는데, 주체의 유한성과 대상의 무한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의 상식에 근거해 보면 그러한 동일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궁극적으로 닫힌 변증법이라고 보며, 반면에 유물변증법은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는 관점에서 열린 변증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입문49) 이때 아도르노는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과 조화로 귀결되는 헤겔 철학의 긍정적 측면보다 모순을 강조하는 비판적 측면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입문133) 이에 반해 엥겔스는 헤겔이 보수적인 쪽으로 더 기울어 있었다고 평가한다. 또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과 체계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방법에 강세를 두는 쪽이 헤겔 좌파로, 체계를 강조하는 쪽은 보수파로 발전해 갔다고 보았다.(고전42)

이 경우 체계가 방법과 동떨어진 채 형성될 수는 없었을 터인데, 양자의 모순관계는 어떻게 생겨났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의 방법이 “그 순수한 본질 상태(Wesenheit)로 세워진 건축(Bau) 전체”라고 설명한다.(현상47) 즉 그는 체계 전체와 방법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할 때 헤겔의 체계를 변증법적 방법과 대립시키는 것보다, 관념변증법이 초래하는 폐쇄성 내지 완결성을 비판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또 헤겔 철학의 보수적 측면과 비판적 측면에 대한 평가에서는, 헤겔 철학에 대한 일괄적 평가보다 양 측면으로부터 어느 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더 중요하며, 이때 받아들이는 사람의 실천적 관심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도르노가 헤겔의 비판적 측면을 높이 평가하는 것 못지 않게 엥겔스도 헤겔 철학의 혁명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이데올로기의 탁류 속에는 유물론을 표방하면서 변증법 자체를 관념론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때 맑스주의자였던 콜레티가 그러한 무도한 일을 감행한다. 그는 무한자인 정신이나 신을 참된 존재로 여기는 헤겔 철학이 물질을 사유 속에서만 인정함으로써 비-개념적인 사물의 실재성을 배제한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사유방식을 ‘물질의 변증법’이라고 칭하며 그 궁극 목적은 신의 실현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이 완성한 이 ‘물질의 변증법’을 베끼면서 그 속에 유물론적 입장이 담겨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엥겔스와 그 이후의 모든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유물론’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서 제시하는 것은 ‘절대적 관념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3] L. 콜레티: [맑스주의와 헤겔], 박찬국 역, 인간사랑 1988, 54쪽. 엥겔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바로세운 것이 ‘베끼기’와 ‘오해’로 규정될 수 있다는 데에 놀랄 수밖에 없다. 왜 무한자가 물질이면 안 되고 정신이어야만 하는지도 수수께끼다. 정신이야말로 무한한 물질의 전개과정에 등장한 유한한 존재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콜레티의 논리에 따르자면 유물론과 과학을 위해서는 ‘물질의 변증법’ 내지 변증법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맑스의 이론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제거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성과 혁명성을 결합하는 맑스 이론의 골격을 부수고 과학성에서 혁명성을 뜯어버리는 일이 아닌가.

아도르노도 변증법 자체에 내재하는 관념론적 요소를 인정한다. 즉 변증법적 사유의 대상은 아무 성질도 지니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규정된 것이며, 이 점에서 어떤 대상이든 자체로서 주체와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주관적 요소가 단지 하나의 요소일 뿐 절대화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주체가 객체에 의해 매개된 것처럼 객체 또한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입문321) 이러한 주장은 콜레티의 터무니없는 날조와 한참 거리가 멀며, 주체와 객체의 실제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도 주체와 객체의 매개를 의미하는 ‘논리적 이념의 자연으로 이행’에서 헤겔 철학의 유물론적 성격을 찾는다. “논리적 이념의 자연으로의 이행. 유물론이 거의 손으로 잡힐 것 같다. 엥겔스가 헤겔의 체계는 거꾸로 서 있는 유물론이라고 말한 것은 올바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4]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논장 1989, 191쪽.

관념론의 함정들은 맑스⋅엥겔스⋅레닌 등 유물변증법 이론가들의 선구적인 사상투쟁이나 현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도 소멸하지 않았다. 플라톤이나 버클리 혹은 칸트나 헤겔의 공인된 관념론을 까다롭게 변주해놓은 이론들만 아니라, 엥겔스가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사유, 맑스와 루카치가 밝힌 물신과 사물화된 의식, 확고부동한 제일원리에 의존하는 사고 등등의 산물들도 곳곳에서 비현실적 관념 내지 언어의 올가미들로 우리를 얽어매 놓곤 한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투쟁은 소수 전문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한 관념의 올가미들이 십중팔구는 자본독재의 지배도구라는 점에서, 그것들을 무력화하고 해방의 무기를 개발하는 주체는 노동자민중 자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화급한 당면과제들과 씨름하기 바쁜 와중에 무슨 구름 잡는 철학 타령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구름 잡지 않고 현실문제의 핵심을 짚는 철학은 자본독재에 매수당하지 않은 노동자민중만의 주요 관심사라고 답할 수 있다. 이때 “독일 노동운동이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다”(고전118)라는 엥겔스의 판단을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2023. 5. 1.)

1 L.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342쪽 참조. 과잉결정론에 대해서는 추후에 검토하기로 한다.
2 F. 엥겔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돌베게 2015, 93쪽. 이하 ‘고전’으로 약칭.
3 L. 콜레티: [맑스주의와 헤겔], 박찬국 역, 인간사랑 1988, 54쪽.
4 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논장 1989,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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