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풍요롭고 평등한 사회 -무엇을 할 것인가-

[1]이 글은 2022년 2월 19일 노동전선 동계수련회 강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홍승용 | 현대사상연구소 소장

1

2022년 대선에서 노동자민중 단일후보 추진운동은 무산되었지만 중대한 시대적 요구를 우리의 당면과제로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노동자민중이 당장 겪고 있는 난관들과 코앞에 밀려오는 범인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이제 국가권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 형식적 민주주의 하의 자본독재체제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실질적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노동자민중이 최대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러한 요구이자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선 결과를 떠나 자본독재체제 극복과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물론 노동자민중 다수가 이러한 과제를 뚜렷하게 의식하거나 널리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상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자본주의가 객관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대량실업⋅생태위기⋅제국주의전쟁의 위협 등 근본 문제들을 냉정하게 직시할 때, 또 이 문제들은 무한증식이라는 자본의 원리가 지배하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고 갈수록 더 심각해져 결국 인류의 문명 자체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절감할 때, 무엇보다 자본과 노동의 근본적 적대모순으로 인한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의 고통과 함께 변혁적 잠재력을 감안할 때, 그리고 자본독재 권력에 맞설 현실적 힘으로서 국가권력이 지니는 전략적 의의를 감안할 때, 노동자국가 건설을 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의 중심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을 극복할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노동자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의식에는 아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노동자국가 건설이 패배한 현실사회주의운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또 그래서 또 실패할 것이라는 저주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밑바탕에는 뿌리 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자본권력의 선동이 깔려 있어 그러한 저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객관적 자료들에 근거한 현실사회주의운동의 온당한 평가 및 다양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발판으로, 새로운 노동자국가 건설의 성공을 위해 최선의 길을 찾는 과제는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2

노동자국가 건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조건들이 서로 맞물리며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노동자민중의 절대적 지지와 참여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 자체가 초래하는 자본증식의 한계, 즉 유기적 구성 증대 및 평균이윤율 저하, 이에 따른 극단적 경쟁, 생산의 무정부성과 이로 인한 생산력의 낭비⋅파괴, 그리고 이 문제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노동자민중의 고통과 인류문명 자체의 총체적 위기가 나날이 명확해지고 있다는 객관적 조건을 주시할 필요 있습니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은, 오늘의 노동자 정치운동을 저해하는 제반 조건들, 예컨대 제국주의적 초과이윤을 통한 노동자계급 상층부의 매수효과, 미래 노동자들을 길러내는 초중고 학교들과 대학의 전반적 우경화, 노동운동의 단결을 저해해온 분열책들의 체계화, 이에 따른 서열구조의 체질화, 진보정치운동의 이념적 지표를 흔들어온 탈-노동중심주의 이데올로기 공세 등등을 압도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에 새로이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노동자국가 건설은 자본권력과의 전면전을 전제합니다. 자본권력은 축적의 한계에 따르는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할 뿐 아니라, 모든 물질적 정신적 수단을 동원해 노동자민중의 반-자본주의적 정치운동을 무력화하고자 합니다. 자본권력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민중이 자발적으로 노예의 처지에 머물기를 원함으로써 전쟁을 벌일 필요조차 없게 되는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만들고자 자본은 무엇보다도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을 끊임없이 은폐하려고 협력과 대화를 입에 달고 다니거나, 다양한 차이들, 예컨대 성적, 민족적, 종교적, 지역적 차이들을 갈등관계 내지 적대관계로 변질시켜 현실적 문제들의 자본주의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노동자국가 건설의 불가피성을 웅변해주는 객관적 조건들이 눈앞에 다가와도 자본권력은 이를 노동자민중이 볼 수 없도록 제도교육이나 대중매체 혹은 온갖 조직과 제도들을 이용해 이데올로기의 연막탄을 퍼붓습니다.

따라서 노동자국가 건설에 노동자민중이 동의하고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데올로기의 연막을 걷어내는 기본 작업부터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고 포괄적인 과학적 인식에 근거해 대안체제를 위한 구체적 계획 및 이에 합당한 체계적 사상을 생산하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이 기본 작업의 중심 과제는 이렇게 생산되는 인식과 사상을 검증하고 노동자민중이 널리 공유하여 자본 이데올로기 공세에 적극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조직적 활동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적인 사상으로 만드는 물적 조건에 비춰보면, 오늘날 노동자민중의 변혁적 관점에서 생산⋅공유되는 사상과 이론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비중이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지형과 관련해 꼭 피해야 할 태도는, 오늘의 불리한 상황을 불변조건으로 받아들여 자본독재체제를 절대화하고 노동자국가 건설의 비현실성 내지 불가능성 혹은 불필요성을 선전하는 패배주의입니다. 현재의 지형은 엄연히 계급전쟁의 중간산물인지라 가변적이며, 노동자정치 운동을 포기해도 좋게 해주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노동자정치 운동이 감당하고 해결해 가야 할 주요 문제의 일부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근본 메커니즘 자체에 그 극복 운동의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어 오늘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야 할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 불리한 조건은 자본주의의 근본문제에 대한 과학적 통찰에 근거해 대안 사상과 이론을 생산하고 공유하기 위한 주체적 조직적 노력의 확산이 절실히 필요함을 역설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혁명에서는 혁명의 의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중요하다는 점과 관련해 엥겔스는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이라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 스스로가 변혁 과정에 참여하여, 그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야 하는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2]F. 엥겔스: 「1895년 서문」, K. 맑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33쪽. 이하 ‘서문’으로 … Continue reading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지적은 지금도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3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재앙들에 대한 비판적 과학적 인식과 그 대안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결합함으로써 좀 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비판에는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안적 전망 및 그 실현의 구체적 방법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견해차를 보여 왔고, 이는 단결과 운동의 통일을 어렵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운동의 통일을 위해 본질적인 견해차들을 상호 대질이나 실천적 검증 없이 덮어 두거나 상대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운동의 통일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대안은 소수 집단이나 개인들의 뛰어난 통찰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무에서 새로 창조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기존의 어떤 체제모델을 통째로 받아들인다고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닐 것입니다. 구체적 대안을 만드는 데에는 대안사회에 적합한 인간관 내지 세계관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세부 정책들을 개발하는 상당 기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경우 인류가 지금까지 피와 땀으로 축적해온 무궁무진한 유산들을 분석적⋅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오늘의 실천적 요구 및 자연조건에 합당하게 재구성하는 과정, 이를 위한 체계적이고 치밀하고 광범한 연구와 검증이 전제됩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자본증식 내지 착취의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와 질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은 이 대안사상 및 정책의 생산을 일차적 당면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국가를 통해 구현되어 갈 대안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그 실현의 세부 방안을 당장 내놓을 수는 없지만, 그 요체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제시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평등사회이자, 누구라도 생존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며 인류의 문화유산과 자연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 즉 풍요로운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국가 본연의 역할은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토대를 마련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노동자국가의 기본적인 경제원리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종식시킴으로써 잉여노동의 착취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이로써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자본가들이 독식하며 노동자민중을 절대빈곤의 늪으로 내몰아온 자본주의적 지배관계 역시 설 땅이 없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자동화⋅무인화 추세는 거스를 수 없어 보입니다. 이는 노동력 절약의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뜻하는데, 노동력 절약은 일시적 이윤증대를 위한 대량해고와 극단적 양극화 및 절대빈곤의 양산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보편적인 노동일 단축과 자유롭고 의미 있는 활동공간의 확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본증식을 절대화하는 자본독재체제는 전자를,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노동자국가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국가가 추구할 경제의 본질적 특징을 맑스의 다음 설명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즉 “연합한 생산자들이 자기들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물질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3]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3󰡕,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8, 1041쪽. 이하 ‘자본3’으로 약칭함.이 그것입니다. 맑스는 이러한 합리적 물질대사의 영역을 토대로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 개화될 수 있으며, ‘노동일의 단축은 그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지적합니다.(자본3,1041)

자본독재체제 속에서는 이윤축소를 초래할 노동일 단축에 대해 자본권력이 결사반대하리라는 것도 당연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노동자들조차 생계의 위협 때문에, 혹은 물적 욕구의 실현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감수할 뿐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육⋅의료⋅문화적 주거 등 기초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고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가면 노동일 단축에 굳이 반대할 노동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노동일 단축으로 생기는 자유시간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 활동의 내용은 인류가 축적해온 무궁무진한 문화물들과 특히 생애 전체에 걸친 정규적 비정규적 교육을 바탕으로 풍부해질 것입니다. 정규 교육은 서열체계 속의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공영의 가치를 존중하고 적극 생산할 능력을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식⋅정치의식을 확대하는 인문사회과학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및 창의력을 기르는 예체능활동이 실용과학 못지않게 중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생산되는 상품들에 대한 무제한의 구매 욕구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욕구들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인정과 보상의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꿔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모순과 갈등, 역사 발전,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 삶과 죽음, 해방과 구원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살펴볼 만한 여러 주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와 논의도 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자유의 영역이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노동자국가에서 불평등이 다시 싹을 키울 수 없으려면 합리적 생산방식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물의 합리적 활용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맑스가 제시하는 기본설계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4]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4-3756쪽 참조. 이하 ‘고타’로 … Continue reading 이때 맑스가 자본주의의 모반이 경제적⋅윤리적⋅정신적으로도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와, 자본주의적 폐단이 완전히 극복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를 구분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 있습니다. 그는 낮은 단계에서도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해 잉여가치 착취가 불가능해지지만, 분배 문제에서는 아직 각자가 ‘어떤 형태로 사회에 준 것과 동일한 양의 노동을 다른 형태로 돌려받는’‘자본주의적 등가교환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지적합니다.(고타376) 우리가 건설할 노동자국가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맑스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가 가야할 방향을 원론 차원에서 명시합니다.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고타377)

전반적으로 낮은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을 근거로 계획경제의 실패는 당연하다거나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에 원천적으로 평등과 공존⋅공영의 원리는 작동할 수 없다는 등의 관념을 굳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에 계획수립부터 결과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고 솔직한 근거 자료를 얻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사전에 수요와 공급을 완벽하게 계획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가변적인 사회적 역사적 욕구를 정확한 수치의 문제로 물신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모반을 버리지 못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극복하지 못했던 인간의 자본주의적 속성들을 영원한 인간성으로 전제하는 경향에 빠집니다. 이런 고정관념에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통해 인간의 욕구체계나 지각방식 혹은 윤리의식도 바뀔 수 있다는 유물변증법적 인간관에 근거해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생산양식에서 인간본성이 얼마나 바뀔 것인지는 미지수이지만, 변화를 예상하고 추구해서는 안 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맑스가 지적하듯이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을 통해 노동이 생활수단에 그치지 않고 ‘일차적 생활욕구’가 된다면, 이러한 욕구의 충족은 노예근성의 내면화 결과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풍요로운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또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우려할 수 있는 것처럼 ‘생산력의 성장’이나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게 되는 상태’를 자본주의적 성장 내지 자본증식과 같은 척도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본질은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필요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므로, 맑스가 말하는 ‘생산력의 성장’은 자본주의적 자본증식 과정에서 야기되는 무자비한 착취나 자연파괴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질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기본적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물적 토대 확보, 생산력 발전에 따른 노동일 단축, 누구도 소외된 노동 및 착취를 위한 잉여노동을 강요할 수 없는 생산관계 정착,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사회적 정치적 주요 의사결정과정에 배제되지 않고 참여할 권리 보장, 자연환경에 대한 비-파괴적 다면적 관계 형성, 인류의 무궁무진한 문화유산들과 자연의 혜택들을 누리고 스스로도 가치 있게 사물을 조형⋅창작할 수 있는 감수능력의 육성 및 발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공간들의 확대 및 이런 활동에 대한 상호인정, 각자의 역사적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대한 자각과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능력 발전, 평등원리의 일상화 등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근본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착취 없는 경제체제를 정착⋅발전시키는 것으로 노동자국가의 역할이 끝날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된다고 해서 즉시 자본가들과 자본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국가의 건설이 자본권력과의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노동자국가가 건설된 후에도 자본권력과의 사활을 건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노동자국가는 풍요로운 평등사회로까지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본권력과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노동자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국가 건설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건설 이후에도 자본권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원동력은 노동자민중의 절대적 지지와 동참입니다.

자본권력과의 장구한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노동자국가 건설의 불필요성이나 불가능성 혹은 그 폐해 등을 핑계 삼아 노동자국가 건설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거부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반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국가도 법적 제도적 인적 장치들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특수한 억압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일반적인 억압적 속성을 들먹이며 노동자국가까지 거부하는 것은 현존 자본독재국가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지배관계 혹은 언어도단의 불평등상태를 전략 없이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노동자국가의 폭력성은 자본독재국가의 폭력성과 본질적으로 구분됩니다. 우선 자본독재국가를 포함한 기존의 국가권력은 소수의 지배를 위해 다수를 억압하고자 폭력을 행사하지만, 노동자국가는 소수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 폭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다수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수를 위한 폭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당하고 행사하기도 쉬울 수 있습니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억압을 위한 장치이자 특별한 기구인 ‘국가’는 아직까지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도적 국가로서 더는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임금노예인 다수가 착취자인 소수를 억압하는 일은 이전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고 단순하며 자연적이어서 노예⋅농노⋅임금노동자들의 폭동을 진압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피를 요구할 것이고 인류에게 훨씬 적은 대가의 지불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5]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역, 돌베게 2015, 152-153쪽. 이하 ‘국가’로 약칭함.

이때 한 가지 변수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소수 착취자들은 지배적인 사상⋅감각⋅욕구의 생산자들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흔히 상당수의 피착취자들을 자신의 우군 내지 방관자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수 착취자들을 억압하는 일이 ‘이전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고 단순하며 자연적’인 것이 되려면, 소수 착취자들에게 외견상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피착취 대중의 사상⋅감각⋅욕구 혹은 자발성의 내용을 바꾸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준비작업”[6]F. 엥겔스: 앞의 글, 33쪽. 여기서 엥겔스는 대중의 인식에 강세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인식이 감각과 욕구, 나아가 … Continue reading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때 물론 자본축적의 위기를 비롯한 객관적 조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겠지만, 이 조건에서 조직적 의식적 운동을 통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가는 주체적 요인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레닌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전위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전체 계급, 곧 광범한 대중들이 전위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적어도 전위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고 적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기도 전에, 전위만으로 결전을 치르는 것은 멍청할 뿐만 아니라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다.”[7]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104쪽.

노동자국가가 ‘더 이상 과거의 국가’가 아닌 ‘과도적 국가’라는 레닌의 규정이 뜻하는 바는, 노동자국가가 궁극적으로 국가의 폭력성이 필요하지 않게 된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 곧 국가사멸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면서,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고 그에 따라 인간에 대한 폭력 일반의 필요성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주민의 일부가 다른 일부에게 복종할 필요성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인류는 폭력 없이, 복종 없이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조건들을 준수하는 습관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국가140) 국가사멸 상태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만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정치권력, 즉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국가139) 이 단계는 맑스가 생각한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추구하는 풍요로운 평등사회가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닌은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착취자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서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국가권력, 집중화된 권력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합니다.(국가55-57) 만일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착취자의 반항’을 짧은 기간 안에 억누르고 ‘사회주의적 경제’를 훌륭히 운영하여 ‘합리적 물질대사’를 토대로 ‘자유의 영역’을 충분히 확대할 수 있었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의 반발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국제 자본권력에 맞선 수십 년간의 전쟁에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국가사멸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고 일단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정착시키면서 국가권력 자체가 불필요한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는 노동자국가의 기본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파리코뮌을 모델로 맑스⋅엥겔스⋅레닌은 국가사멸로 향하는 노동자국가가 자본독재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 혹은 그 ‘과도적 국가’로서의 특성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그 요체는 국가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을 ‘절대 확실한 방책들’을 마련하는 데에 있습니다. 파리코뮌이 마련한 방책들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첫째로, 코뮌은 입법, 사법, 교육 등의 모든 직책을 관계자들의 보통선거권에 근거하여 인선하되 동일 관계자들에게 언제라도 자기들의 파견 대표를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리고 둘째로 코뮌은 모든 공무원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 지불하였다.”[8]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 또한 맑스는 “보통선거권을 위계적 서임제로 대체하는 것보다 코뮌의 정신에 더욱 생소한 것은 없을 것”[9]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346쪽. 이하 ‘내전’으로 약칭함.이라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코뮌이 무오류성을 가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밝힙니다. “진정으로 코뮌은 낡은 딱지가 붙은 모든 정부들의 한결같은 속성인 무오류성을 가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코뮌은 자신의 언행을 공개하였으며, 공중에게 자신의 모든 결함을 알렸습니다.”(내전355) 정보도 주요 권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코뮌은 자신의 결함까지 공개함으로써 권력의 사회화 내지 근본적 민주화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레닌은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라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이를 대체하는, “좀 더 민주주의적인 국가기구, 즉 무장한 노동자 대중이 모든 인민을 포함하는 민병대를 형성하는 식의 국가기구”를 수립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국가166) 그는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조치들을 보완하여 “누구나 통제와 감독의 기능을 수행하고 누구나 일시적으로 ‘관료’가 되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관료’가 될 수 없게 하는 상태로 즉시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국가183) 또 레닌은 의회를 ‘행정과 입법을 함께 수행하는 활동 단체’로 대체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합니다.(국가192)

레닌은 이러한 조건과 조치들을 통해 국가가 사멸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인민 자체의 다수가 자기들의 억압자를 억압한다면 ‘특수한 억압권력’은 이미 더는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한다. 특권을 가진 소수(특권적 관료와 상비군 장교단)의 특별한 기구들 대신에 다수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민이 국가권력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많은 부분을 담당하면 할수록 이 권력에 대한 필요는 더욱 줄어든다.”(국가82) 이 단계에서 국가가 완전히 사멸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소멸하고 더는 어떠한 계급도 없는(즉 사회적 생산수단을 둘러싼 관계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 전혀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자유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국가151)

국가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을 ‘절대 확실한 방책들’이 위의 조치들로 완전히 다 마련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선 고도의 파괴력과 복잡한 무기체계를 동원하는 현대전을 고려할 때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충분한 논의를 통해 실질적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누구나 일시적으로 관료가 되고, 그래서 누구도 관료가 될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모반’을 지울 수 없는 낮은 단계, 자본권력과의 전쟁이 진행 중인 단계에서는 수많은 제약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오늘의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조건을 감안하여, 노동자국가는 흔히 제기되는 관료주의의 폐단이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하는 독재’ 따위의 비난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드는 ‘절대 확실한 방책들’을 마련하고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책들을 통해 국가사멸의 장기 전망 속에서 노동자민중 내부의 민주주의를 최대한 구현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을 노동자국가의 적극적 주체로 만들고 이들의 절대적 지지와 참여를 공고히 할 수 있다면, 이는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지난한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5

현대의 사상⋅이론 지형은 노동자국가 건설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을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 파악하는 맑스⋅엥겔스⋅레닌의 국가론과 노동중심성 자체를 환원주의라고 낙인찍거나, 당중심 위계구조의 해체를 부르짖거나, 차이들을 절대화하며 현실적 모순들의 중요성을 지워버리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진보운동 속에 뿌리를 내려 왔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국가권력의 성격에 무관심하거나, 전위를 관료와 동일시하며 대중의 자생성에 과도한 의의를 부여하거나, 다양한 억압에 저항하는 각 부문운동들의 상호비중관계,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비중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각각을 자립시키는 등의 양상을 드러냅니다.

국가와 당 혹은 전위를 악마화하는 역사적 근거가 무엇이든, 자본독재체제에 맞서는 전략의 측면에서 국가와 당 혹은 전위의 의의를 온당하게 평가하지 않고는 전쟁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설혹 자생적 대중운동을 통해 변혁의 불씨가 일시적으로 타오르더라도 이를 체제 문제로 전환하여 자본독재체제 극복 운동에 불을 붙일 전략이 작동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그람시가 비판한 수동혁명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이 다양한 사회적 억압의 극복을 주요 과제로 삼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부문별 해방운동들의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그것들을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경우 우선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을 서로 대등한 여러 반자본주의적 부문운동들 가운데 하나(1/n)로 취급하고 각 운동들 사이에 넘나들기 어려운 칸막이를 치려고 한다면 전략적 사고가 활성화되기 어렵습니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객관적 조건에 근거해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노동운동이 떠맡을 수 있는 중심적 역할, 곧 노동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이 여러 부문운동들과의 전략적 결합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각 부문운동들은 그 내적 필요성과 절박성을 이유로 나름 절대적 지위를 요구하기 쉽습니다. 이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피하는 손쉬운 방법을 각 부문운동들에 대등한 정치적 비중을 인정해주고 이를 민주적인 관계라고 자부하는 데에서 찾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부문운동들 간의 긴밀한 상호결합은 물론이고 사안별 느슨한 연대조차 쉽지 않으며, 자본독재체제에 맞서는 전쟁의 효율을 높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결국 각 부문운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에 각 부문운동들의 요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본권력에 대응하는 것은 부문운동들의 자체요구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부문운동들이 이러한 판단을 공유하고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반자본주의운동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참할 경우, 부문운동들의 자발성과 노동중심성 내지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대립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은 부문운동들을 위해 이 동참의 구체적 경로를 명확히 밝히고 그 유효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의무를 지닙니다. 나아가 이러한 관계는 아직 의식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취하지 않고 있는 부문운동들에까지 확장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한 객관적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사회 전체의 풍요 및 평등을 구현코자 하는 점에서, 극소수 자본가들의 증식욕구를 위해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협하고 인류 문명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자본가계급 헤게모니와 달리, 폭발적 확장성을 지닙니다. 그 폭발적 에너지를 노동자국가 건설로 집약하여 실체화하는 것이 노동자정치 운동의 당면과제입니다.

자본독재체제에 맞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들과 사안별로 연대하는 수준을 넘어 유기적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듯이, 노동자정치 운동 내부의 정파적 차이들을 극복해갈 필요성도 절실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립물의 통일, 내재비판, 분석과 종합, 인식의 과정적 성격 등을 중요시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적극 받아들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결투쟁이야말로 노동자민중의 가장 중요한 무기라는 진리의 거울 앞에서 운동주체들이 비판과 검증을 통해 서로를 존경하는 운동문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주요 과제입니다.

단결투쟁에 대한 요구는 일국의 범위에 갇힐 수 없습니다. 일국 차원에서 노동자국가가 건설되어도 자본권력은 제국주의 세력들과 손잡고 노동자국가를 상대로 사활을 걸고 저항할 것이 자명합니다. 이때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할 주역은 국내의 노동자민중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 노동자들과의 연대와 단결투쟁 없이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등과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노동자 국제주의는 극소수 독점자본가들의 자본증식을 위해 인류 문명을 전쟁과 총체적 파국으로 내모는 제국주의에 맞설 최고의 이념적 지표입니다.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은 노동자 국제주의의 성장을 위해 적극 노력할 의무를 떠맡아야 합니다.

오늘날 노동자 국제주의는 자본헤게모니의 그늘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의 토양도 비옥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들과 교통수단의 발달, 자본의 국제적 이동 못지않게 활발한 노동자들의 국제화, 무엇보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공통된 자본의 억압과 착취, 제국주의적 자본독재로 인한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할 대안인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의 확장성 등을 고려할 때, 노동자 국제주의의 성장잠재력은 무궁무진합니다. 외국 노동자정치세력과 국제주의적 연대의 틀을 확장해갈 필요도 있지만, 한국 자본주의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및 저임금 외국노동자들을 통한 초과이윤 착취에 의존하며 제국주의 대열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의 주요 영역으로서 이들과의 연대활동 및 조직적 결합운동을 추진하는 것도 운동의 당면과제입니다.

6

노동당과 변혁당이 결합하여 사회주의 대선후보를 내세운 것에 대해 노동자정치 운동 내부에서도 평가가 나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지지는 희미하고 적대감은 거센 풍토 속에서 사회주의의 대중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노동당이 제시하는 사회주의의 내용이나 방향성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평가기준을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에서 찾으면 좋을 듯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노동당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사회주의적 전망 자체를 최종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보다 노동당이 어떤 발전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당에 대한 관계설정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노동당의 성격이 아직 불확정적이어서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을 통해 구체화되어갈 수 있다고 본다면, 노동당을 노동자정치 운동의 구심점으로 삼고 노동자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이 결집하여 당 내부에서 적극적 비판적 논의를 통해 노동자국가 건설을 위한 사상⋅이론⋅정책을 생산⋅검증하고, 대중적으로 당 조직을 빠른 시일 내에 확대해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경우 조직 확대에 따른 개량화의 위험을 차단할 사상적 이론적 헤게모니 형성이 필수적입니다.

반면에 노동당이 노동자국가 건설에 대해서는 원칙 차원에서 소극적이고, 예컨대 민주적 사회주의나 사민주의처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 내의 한 진보분파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될 경우, 노동자국가 건설 운동은 노동당에 대해 사안에 따라 우호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독자 발전의 경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대안적 이론⋅사상⋅정책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운동 내부의 견해차들을 넘어서고 그 생산의 성과들을 조직적으로 널리 공유함으로써 노동자국가 건설에 적합한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습니다.

절충적으로 한동안 노동당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노동당의 진로 결정에 관여하면서, 또한 독자적으로 노동당 외부에서 노동당이 감당하지 못하는 대안이론⋅사상⋅정책의 생산과 현장실천을 통한 조직 확대를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노동자국가 건설에 적합하도록 노동당의 성격을 적극 규정해가고자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독자적인 조직을 발전시키는 길도 열어둘 수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상의 정치적 역사적 의의를 즉각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경로를 택하든 그에 따르는 문제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선택의 순간에는 종종 면밀한 예측으로 해소되지 않고 뜻밖의 성공 혹은 실패의 오욕과 희생으로 채워야 할 허공이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의 경로들에서는 곧장 어떤 성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아니라, 노동자국가 건설에 헌신하는 운동주체들의 무제한적 노고를 요구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단결을 전제로 한다면, 운동의 성패는 대체로 이 노고에 비례할 것입니다.

1 이 글은 2022년 2월 19일 노동전선 동계수련회 강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2 F. 엥겔스: 「1895년 서문」, K. 맑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33쪽. 이하 ‘서문’으로 약칭함.
3 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3󰡕,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8, 1041쪽. 이하 ‘자본3’으로 약칭함.
4 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4-3756쪽 참조. 이하 ‘고타’로 약칭함.
5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역, 돌베게 2015, 152-153쪽. 이하 ‘국가’로 약칭함.
6 F. 엥겔스: 앞의 글, 33쪽. 여기서 엥겔스는 대중의 인식에 강세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인식이 감각과 욕구, 나아가 행동으로까지 전환되기 위한 조건을 조직적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7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104쪽.
8 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
9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346쪽. 이하 ‘내전’으로 약칭함.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연구> 자본주의 붕괴와 이행 문제

다음 글

<참고자료> 『자본론』 제2권 해설(서설)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