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5.18 40주년 광주 유감

최승원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

# 기억 하나.

어쭙잖게 몇 해 동안 5.18 관련 강연과 답사 안내를 해왔다. 광주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80년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었으니 5.18을 직접 겪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소소했던 그즈음 광주 밖에서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특히나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의 심층 인터뷰에서 5.18이 나의 내면에 생각보다 깊이 영향 미쳤음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비슷한 연배이거나, 연배가 있는 분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신다. 당신들도 젊은 시간을 건너오며 비슷한 미안함과 다짐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기억 둘.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이 중부지역 어느 곳이었다. 96년쯤이었을까? 지역의 몇 개 학교가 모여 망월동 순례를 가기로 하여 함께 하였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부터 지내왔으니 길 안내 겸 광주 이야기를 청하였다. 그때 한 참 개인적으로 회의적인 시기 이어서였을까? 대인시장 쯤을 지나며, ‘이곳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80년대에는 쫓기는 대학생을 시장 상인들이 숨겨주고 막아주고는 했다’고 기억을 전하였다. 여기서 멈출 것을…… ‘그런데 91~2년을 지나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더 이상 탐탁해 하지 않았고, 93년에는 최루탄이 매캐해지자 시장 상인들이 대학생들에게 물을 뿌리며 학교로 가라고 했다’는 기억을 전하자,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 결기를 세우기 위해 왔는데 웬 재를 뿌리느냐는 듯 한 원망의 눈총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광주는 그래도 다른 지역과는 무언가 다른 곳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과연 그런가?

광주 망월 묘역

# 멈춤

올 해는 광주민중항쟁 40주년 되는 해이다. 40주년 행사를 위해 작년 중반부터 행사위에서는 부지런히 준비하였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대부분의 행사를 취소·연기하였다.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 학교에서도 정상적인 기념행사를 치루기는 어려웠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작년 말 5.18 관련 강연 건 등을 정리하였다. 적당히 둘러대고, 사과드리고 일을 접었다. 내 안의 책임 의식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나의 게으름 혹은 한계 때문에, 나 아니고도 충분히 역할을 맡아주실 분들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의 이유로는 5.18 교육의 변화를 꾸준히 제안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불편함, 그리고 교사 배이상헌 건에 대한 지역사회 믿었던 이들의 회피를 보며 좌절한 탓도 있었다.

# 광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5.18

지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5.18의 전국화를 주창해왔다. 나름 타 지역과 연계하여 행사를 치르고, 강연도 조직하고, 타 교육청과 연계하여 다른 지역 학생을 대상으로 한 5.18 교육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5.18은 여전히 광주에 머물고, 타 지역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1회성 행사에 그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교사들과 수 년 동안 이에 대한 개선책을 제안하였다. 주된 내용은 교육 프로그램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민주시민교육으로 확장하자는 제안이었다.(이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충분히 동의한다. 다만 위 제안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정규교육과정과 연계한 제안이었다.) 또한 5.18을 80년 광주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80년대 내내 그리고 90년대까지 전국에서 이어지는 진상규명투쟁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5.18을 광주에 고립시키지 않고 전국으로, 그리고 현재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실무자들과 나누는 이러한 제안은 번번이 윗선으로 가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고, 프로그램은 여전히 80년 5.18의 상기와 재현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일쑤였다. 영향력 있는 단체들의 요구가 그러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몇 차례 듣기도 하였다. 8~90년대 전국 곳곳에서 함께 일구었던 5.18의 역사가 광주에서는 80년 광주 5.18에 머물러 기념되고 박제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진기승 노동열사의 장례식의 기억은 끔찍하다. 망월묘역 뒤편 노동 열사들의 무덤 곁에 모시려는 운구에, 5월 단체 대표들은 “여기는 아무나 묻히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열사의 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호소하며 가까스로 장례는 치렀지만, 5.18 전국화를 말하면서도 광주 스스로 5.18을 80년 광주에 묶어두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또 하나의 권력

보통의 경우 지역의 정치는 중앙에 끈을 댄 지역 정치인과 관료 집단, 그리고 자본과 인맥을 갖는 토호세력이 이끌어 간다. 대부분 지역에서 시민단체들은 아직 감시, 제안의 역할을 넘지 못한 곳이 대다수이다.

내가 보는 광주는 조금 더 독특하다. 광주에서는 위의 토호 세력 외에 5.18과 80년대 운동을 이끈 이들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면 광주가 타 도시에 비해 정치 사회적으로 선진적으로 외화 되어 보이기도 하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끈과 끈들의 고질적 유착을 확인하게 된다. 늦깎이 대학 생활과 교직 초년을 타지에서 보내고 온 광주는 ‘아따 형님~!’의 유력한 힘이 발휘되는 곳이었다. 광주의 학교로 전입할 때 친구로부터 들었던 첫 충고가 ‘광주 좁으니 조심해야 한다’였다.

중앙 정치와 관련해서는 제도권의 중도파에게 표가 몰리니 짐짓 진보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제 지역 내에서 작동하는 의사 수렴의 구조와 과정은 몹시 패권적이고 은밀하다. 80년대 지나 90년대로 넘어오는 어느 즈음에 자치 공동체의 상징이었던 도청 분수대 광장의 정치는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 교사 배이상헌의 경우

교사 배이상헌은 성평등 수업 시간에 성평등을 주제로 한 영상을 상영한 이유로 직위 해제되었다. 광주시교육청은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고 사건은 끝내 검찰에 넘겨졌으며, 교육청 앞에서는 함께하는 이들의 시위가 300일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배이상헌은 전교조 해직 교사로 오랫동안 조합 활동과 학생 자치 운동에 헌신하고, 5.18 교육의 수준 또한 한 단계 높인 교사이다. 이름에서 보이듯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전개하고, 문제로 내몰린 수업에 쓰인 교과서의 성평등 수업 단원을 집필한 교사이기도 하다. 그의 의지적 수업이 성비위로 내몰림에도 알만한 지역 단체 인사들의 자세는 소극적이다 못해 비겁하였다. 여성단체는 교육청과 입을 맞추었고, 5.18단체는 안타깝다 말할 뿐 어떠한 조력도 하지 않았다. 시민단체의 알만한 이들은 적당히 회피하였고, 3,000이 넘는 지역 교사들이 응원의 서명을 했으나 주류 활동가들 다수는 시교육청 앞 시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끈과 끈의 엇대임이 아니고 이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공론의 장을 열어도 오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 5.18의 현재화

광주에 사는 나는 5.18이 점차 신화로 박제화 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모두의 자양분인 5.18을 누군가는 자신들만의 역사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권은 언제나 4.19를, 5.18을, 87년 6월을 그 시간에 묶어 박제화하려 하듯, 광주의 또 다른 누군가들은 4.19를, 5.18을, 87년 6월을 그 시간에 묶어두고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려 한다. 그들에게 4월과 5월과 6월이 현재화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5.18이 밀어 올린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는 80년에 고립되고, 광주에 고립된 5.18을 해방시켜야 한다. 5.18이 압제에 대한 저항이며, 인간 권리에 대한 선언이며, 자치 공동체를 지향한 희망의 씨앗이라면 5.18은 여전히 현재에 살아 있다.

5.18은 긴 압제와 싸우며 87년으로 이어지며 그 정신을 드러냈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싸움 또한 5월과 닿아있다. 5.18 엄마가 4.16 엄마를 안아주며 보낸 ‘당신의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글은 5.18이 여전히 현재에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2002, 2008, 2016의 거대한 촛불집회 속 군중 사이에서도 5.18은 생동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5.18은 있다. 철탑 위 고공 농성장에, 청와대 앞 낡아 삭아가는 천막에, 산재 사망 외국인 노동자의 빈소에, 그리고 광주시교육청 앞에도…… 곳곳에서 마치 5월 26일 밤 애절한 목소리 마냥, 우리를 부르고 있다. 이불 둘러쓰고 그 소리를 듣는 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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