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전태일 동지를 기억해야하는 이유

김승호 |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1]이 글은 부산대학교 학보사의 원고청탁에 따라 지난 9월 29일 송고한 글입니다. 수정 없이 다시 <현장과 광장>에 기고합니다.

전태일 동지가 서거한 지 반백년이 되었다. 전태일 동지는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서울 청계천 변 평화시장 앞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던 중 자신의 육신을 불살랐다. 이 모습을 본 동료 노동자들은 슬픔과 분노에 차서“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누가 전태일을 죽였는가?”“우리도 사람이다.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라고 울부짖으며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비보를 듣고 달려 온 어머니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어머니 이소선은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라고 약속했다. 전태일은 병원에 찾아온 친구들에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더라도 꼭 이루어주게.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고 촉구했다. 친구들은 “네 말대로 꼭 하겠다. 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다짐했다. 이런 약속과 다짐을 받은 후 전태일은 밤 10시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만 22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렬한 분신항거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신이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하던 때였다. 종교인들은 비인간적 노동현실에 눈감아 온 기존의 종교활동을 성찰하고 산업선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청년학생들은 참혹한 노동현실에 무지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지 못한 자신들의 학생활동을 반성했고, 가두시위 중심의 박정희 정권 반대운동에서 나아가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같은 기층 민중운동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불의하고 열악한 노동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쟁해야 함을 깨달았으며,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비롯하여 민주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태일의 죽음을 기점으로 야만적인 박정희 군사파쇼에 파열구를 내는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본가계급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협치 운운하며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에는 야당이 주된 공로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 인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는다.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 전날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면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므로 이번이 마지막 대선이 될 거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해외에 망명해 반 박정희 투쟁을 벌이다가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돼 바다에 수장될 고비를 넘겼다. 그리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항거를 계기로 터져 나온 각계각층의 투쟁, 특히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및 그들의 형제자매인 청년학생 등 기층민중의 변혁적 투쟁이 없었다면 민주화운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제도권 야당과 정치인들의 투쟁만으로는 군사독재가 타도되지 못했을 것이며, 군사독재를 축출해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해도 노동자·민중의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와 삶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1970년대 정치인들은 반 박정희 운동을 ‘민주수호’ 운동 또는 ‘민주회복’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런 호칭은 10월 유신 이전에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존재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전에 대통령 직선제가 있었고, 국회의원이 직접 선출되었을 뿐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선거조차 부정선거와 정보정치로 얼룩진 것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사실상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선정했고, 야당 국회의원을 매수해서 제3별관에서 삼선개헌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할 노동자의 권리는 헌법 조문에만 적혀 있었다. 노동악법으로 유일노총 체제를 강제해서 중앙정보부가 통제하는 한국노총 이외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은 존재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은 반공법과 중앙정보부에 의한 탄압으로 자유로운 학생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없어서 문인들이나 교수들은 숨죽이고 살았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단순하게 유신 이전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실현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세운 파쇼체제를 변혁함으로써 쟁취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전태일은 그 싸움의 불을 당겼다. 그리고 전태일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반체제 변혁운동 세력으로서 민주화운동의 주된 동력이었다. 이것이 전태일 동지가 널리 기억돼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우리가 전태일 동지를 널리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동지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억돼야 할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더욱 널리 기억돼야 하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제는 완료되지 않았다. 군사파쇼 통치는 물러났지만 부드러워진 민간파쇼 통치로 대체됐을 뿐이다. 반공법을 내포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 있다. 민중의 진보적 사회·정치 활동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국가비밀경찰기구인 중앙정보부가 이름만 국정원으로 바꾸어 존속하고 있다. 그 밖에 국민의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억압적 국가기구들이 해체되지 않고 온존되고 있다. 그 결과 민주화가 진행된 지 한 세대 이상 지났음에도 노동자·민중은 집권은커녕 유의미한 정치세력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뿐 아니라 토대에서도 비민주적인 질서가 온존돼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제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빈부 양극화다. 이 빈부 양극화의 원흉은 독점재벌이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5.16 군사쿠데타 직후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재벌을 동반자로 삼은 결과다. 박정희는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일본에 도망가 있던 삼성 이병철을 불러들여 경제개발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사면해 주었다. 그리고 재벌들과의 협력을 위해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인협회를 만들게 하고 체계적으로 재벌을 지원했다. 그 결과 경제발전의 성과는 고스란히 재벌들에게 귀속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재벌지배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다. 박정희의 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나 이병철의 손자는 국정농단 죄를 저지르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 세계를 활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전태일 분신항거 50년이 지나도록 근로기준법은 지켜지지 않고 있고 매년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다. 절대다수 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투쟁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전태일 동지가 목숨을 내던져 바꾸고자 했던 지배질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당시보다 더 나빠졌다. 전태일 동지는 자신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라고. 그런데 전태일 동지가 산화한 50년 이전보다 지금 이 땅의 노동자와 민중은 더 물질화된 존재가 되어 있고, 더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이 되어 있다. 인간조건의 이런 악화는 통치형태만 군사파쇼에서 민간파쇼로 부드러워졌을 뿐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동지는 수기에서 뒤이어 이렇게 썼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이라고. 그의 이 촉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아니 50년 전보다 더, 절실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특히 앞으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될 그리고 눈앞의 현실보다 미래를 더 생각하고 이상을 추구해야 할 청년들은 전태일 동지의 이 촉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인생관을 성찰하면서 자본의 지배에 맞서 타협하지 않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 동지를 기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1 이 글은 부산대학교 학보사의 원고청탁에 따라 지난 9월 29일 송고한 글입니다. 수정 없이 다시 <현장과 광장>에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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