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위하여 −사회주의 대중화와 노동자국가−

홍승용 l 현대사상연구소 소장[1]이 글은 8월 22일 영남권 노동전선 교육위원회 수련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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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변혁당과 노동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대중화의 필요성이 화두에 올랐습니다. 대중화 방법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연합정당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 2022년 대선에 어떻게 임할 것이냐 하는 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논의가 계속될 듯합니다. 기존 ‘진보’정당들이 보수정치권과 자신을 차별화하지 못하고 존재기반을 말아먹어 왔기에,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구현할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보수정치의 대안세력으로 떠올라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둔다면, 평등사회를 꿈꾸는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은 출발단계에서부터 쉽지 않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우선 사람마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천차만별이고, 역사적 사회주의운동의 내용도 매우 편차가 큰데, 사회주의의 본질적 의미를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느냐 문제부터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중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지금 왜 사회주의를 대중화해야 하는지, 그것이 가능한 현실적 조건은 얼마나 마련되고 있는지 납득할 만한 근거를 충분히 공유하는 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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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이 나온 19세기 중엽에는 여러 부류의 이데올로그들과 정치집단이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대중을 현혹했습니다. 20세기에도 현실사회주의체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 인종주의를 본질로 하는 나치까지 (국가)사회주의를 입에 올렸습니다.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한 오늘날 다시 사회주의운동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고수하느냐 마느냐보다 사회주의운동을 통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의식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분분할 수 있지만, 맑스와 엥겔스 혹은 레닌 등 주요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지배관계를 은폐하거나, 지배자들의 얼굴만 바꾸거나, 혹은 지배관계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눈에 띄는 부작용만 완화하려는 다양한 입장들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바는 유사이래의 착취관계를 근본적으로 끝내고, 인류가 그동안 발전시켜온 생산력과 문화유산을 모든 사회구성원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 자본주의 너머의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노동자 민중에게 가난한 삶을 강요하거나, 계급적⋅성적⋅인종적⋅민족적⋅종교적 차별과 위계질서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형태의 억압과 착취,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도 사회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그 근본 목적에 충실할 때 일반적으로 극소수의 지배집단이 아니라 억압받는 절대다수 피지배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 지지와 참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사회주의가 다수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지배관계 자체로 인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사회주의운동은 이러한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화하여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내지 않고는 어떤 의미 있는 성과도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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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너머의 풍요로운 평등사회라는 미래상이 매력적이라고 해도 노동자 민중이 쉽게 사회주의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득권세력이 사회주의를 혐오하고 이에 맞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뿐 아니라 피착취 노동자 민중도 지배이데올로기의 압도적 공세와 변혁운동의 장기 침체로 인해, 자본주의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바쁜 것이 현실입니다. 또 전반적으로 증대한 생산력 덕분에 노동자 민중의 물적 생활조건이 과거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개선되기도 했고, 그에 따라 체제변혁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 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외환위기 이후 양산된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는 노동계급 내부의 위계적 관계와 노동운동의 분열을 고착시켜 자본권력을 공고히 해왔습니다. 오늘날 대다수 노동자 민중은 사회주의를 지지하기는커녕 꿈꾸기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운동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이지, 사회주의운동의 불필요성이나 불가능성을 내세울 알리바이가 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운동의 필요성과 가능성은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국은 GDP 수준에서 세계 10위권으로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OECD 최고 산재사망률, 최장 노동시간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촛불혁명’을 거치고도 ‘삼성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했습니다. 경제성장과정에 양극화 경향이 극단화되고 부와 가난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5G나 AI 등 첨단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증대는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인류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발전의 불균등성, 무정부적 경쟁, 과잉중복투자, 과잉생산 등과 맞물려 자본축적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무한증식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은 축적위기를 여러 형태로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할 방법을 찾으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축적 위기 때마다 반복되어 왔듯이, 임금삭감과 노동시간 연장, 그리고 대량해고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 간, 블록 간 경제전쟁과 이를 도화선으로 하는 무력충돌의 위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괴는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후쿠시마의 재앙이 후쿠시마로 끝나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인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의 모순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인류 공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범인류적 재앙에 비춰볼 때,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제어하는 사회체제, 곧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공멸보다 공존과 공영을 택하는 이성적 존재인 한 자본주의 너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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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사회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본권력과의 전쟁이 불가피합니다. 자본이 스스로 노동자 민중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평등사회 구현을 위해, 증식욕구를 버리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본권력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이미 자본권력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듯해 보입니다.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변혁운동이 방향을 잃게 되고, 대다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모순관계의 중요성을 부정하면서 탈-노동중심주의⋅계급화해주의 이데올로기 확산에 앞장서고, 제도권 ‘진보’정당들이 외연확장을 위해 노동중심성을 포기해온 것도 현재의 상황을 만든 주요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를 통한 분열책과, 거대독점 자본의 제국주의적 성장으로 가능해진 상층부 노동자들에 대한 매수효과야말로 노동운동을 조합주의적 경제투쟁 영역에 묶어놓고 변혁운동과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요인일 것입니다.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투쟁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본축적위기 속에서는 경제투쟁의 성과도 언제나 회수당할 수 있습니다. 축적위기에 따르는 고통의 전가는 자본주의의 근본문제인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자본의 독주를 사회적으로 제어하는 전쟁의 주동력은 노동운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권력에 맞서는 사회주의운동에서 노동운동을 단지 여러 해방운동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고 그 중심적 역할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중심성에 대한 인정을 ‘계급환원론’이라고 비난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서는 자본권력의 현실적 위세를 직시하자고 논박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운동들은 필요 없다거나 자본권력만 제어하면 모든 사회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억압을 극복해가는 개별 부문운동들은 어느 것이든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정신에 비춰볼 때 그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권력이 차지하는 압도적 비중과 이를 극복하려는 변혁운동의 중요성을 고려하는 가운데 제반 부문운동의 의미를 평가할 필요는 있습니다. 변혁운동과 각 부문운동의 관계는 느슨한 연대 수준에서 시작하더라도, 여기에 머물기보다 변혁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체제를 지양함으로써 부문운동의 당면과제들이 더 근본적⋅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경로를 밝힘으로써, 변혁운동과 제반 부문운동의 유기적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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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권력에 맞서는 운동들의 연대와 유기적 결합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국제주의로까지 확대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독점자본에서 제국주의 자본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의 변혁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제국주의 자본권력의 간섭은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오늘날 공식적인 식민지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저렴한 자원획득과 노동력 착취, 자본수출, 시장확대와 영향력 행사 등을 위한 거대 독점자본 및 그 연합체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20세기 전반기의 제국주의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언제라도 전지구적 재앙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독점자본도 저개발국가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초과이윤을 포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본수출 비중도 늘려가는 추세로, 제국주의적 흐름 속에 한 발 깊숙이 들여놓은 상태입니다.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변혁운동은 한국의 범위를 넘어서 전세계 반제국주의 운동세력들과의 공조를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예속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에 국한될 수 없고, 한국 독점자본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도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평등과 호혜를 바탕으로 하는 노동자 국제주의는 생산력의 불균등발전과 축적위기가 초래할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한 원리로서 궁극적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노동자 국제주의는 전반적으로 후퇴한 상태이나, 그 재건은 변혁운동의 성패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물론 노동자 국제주의가 특정 수준에까지 발전하기 전에는, 또 미국이나 일본에 대한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변혁운동이 불가능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만, 사회주의 변혁운동은 노동자 국제주의의 재건과 확산을 위해 적극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해방운동의 유기적 통일을 이루는 것도 주요 당면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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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권력을 사회적으로 제어하는 데에는 국가권력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변혁당과 노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대중화나 사회주의 연합정당 건설 등과 같은 사회주의 변혁운동의 일차 목표는, 노동자 민중을 국가권력의 실질적 주인으로 만드는 일, 곧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을 자본권력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촛불정권’임을 자처하는 현 정권의 친재벌 성향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의회를 비롯해 국가권력을 떠맡고 있는 세력 가운데 노동자 민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는 자본독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 속의 자본독재를 깨고 노동자 민중이 국가권력의 실질적 주인인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즉 민중이 주인인 체제를 구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집권 의지가 없는 정치운동은 조직 활성화나 세력 확장을 이루어내기 어려우며, 자본권력을 대변하는 보수 정치권의 약점들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기 쉽습니다. 사회주의 변혁운동은 명확한 집권 계획에 의거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야만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대중화사업의 최우선 과제에는 설득력 있는 장단기 정책대안 수립 작업이 필히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책수립의 기본 방향은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기본생존권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현실적 방안들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에는 무엇보다 주택⋅교육⋅의료 등 기본적 문화생활과 관련된 문제의 사회적 해결과,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따르는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예컨대 독일이나 핀란드가 시작한 주 28시간 혹은 24시간 노동)이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국가 건설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자본권력을 제압하기 위한 효과적 방안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국유화나 집산화 혹은 시장경제를 얼마나 활용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방법들은 이러한 목표와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 결정해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한 무정부적 경쟁과 과잉생산으로 인한 생산력의 낭비를 막고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고 자연환경과 적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사회 전체 차원에서 거시적인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수립에는 소수 개인이나 정파 혹은 일국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인 공동작업도 불가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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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대안의 수립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류가 풍부하게 축적해온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을 비롯한 문화유산들과 특히 자본주의 속에서 고도로 발전해온 생산력 등을 기초로 합니다. 이때 어떤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따라, 쉽게 조율할 수 있는 견해차를 넘어 심각한 노선갈등이나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가 조성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트로츠키 이론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의 글을 아예 읽지도 않기 쉬우며, 스탈린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사는 사람들은 트로츠키의 주장들을 날조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알튀세르에 매료된 사람들은 헤겔주의가 맑스주의를 망쳐놓았다고 믿으며, 맑스와 엥겔스 혹은 레닌이 헤겔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묵살하려들고 대개는 헤겔을 읽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이론상의 배타성은 미래 사회의 모델을 만드는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역사 속의 특정한 사회를 절대적인 모델로 삼을 경우 종종 그 이외의 유산들은 원리원칙의 이름 아래 쉽사리 배척됩니다. 이러한 배타성⋅편협성은 사회주의운동의 확산과 발전을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요인입니다. 단결투쟁이야말로 자본권력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지상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과 다른 어떤 논리를 들이밀어도 쉽게 그 신조를 바꾸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운동의 미래를 위해 편협성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즉 어떤 유산이나 이론 혹은 모델이든 통째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분석적으로도 파악하여, 오늘의 실천적 필요성에 비추어 버릴 부분과 받아들일 부분을 선별하고 필요한 만큼 활용해 우리 자신의 모델을 종합해내는 방식, 즉 분석적-종합 방식의 주체적 활용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에 익숙해질 경우 부분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지닌 당이나 조직들도 자신의 기존 견해를 논쟁이나 실천적 검증을 통해 교정하거나 확장해가며 타 입장과 결합해가기 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자본주의의 연명이나 착취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 골몰하는 이론적 정치적 입장들을 지양하고, 자본주의 너머의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한다는 공통분모가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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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운동을 어렵게 하는 운동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자본주의 현실에 근거한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 그리고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들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은 모두 본격적인 사회주의 대중화사업을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준비 작업에 이어서, 혹은 그와 함께, 그 정책대안들을 절대다수의 노동자 민중과 널리 공유하고 동의를 얻는 과정, 나아가 노동자 민중이 사회주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운동에 동참하고 적극적으로 노동자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정당이나 조합, 학교나 연구소, 언론과 인터넷, 개인방송과 SNS 등의 다양한 조직과 기구와 매체들을 무기 삼아 자본권력과 벌이는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 전쟁에는 집회, 파업, 법리투쟁만 아니라 국제적 역학관계도 동원될 수 있으며, 선거도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경찰과 군대 혹은 대중의 물리력이 어떤 역할을 하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도 전쟁의 양상을 결정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사회주의 대중화가 성과를 거두어 노동자 국가가 세워진 후에도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일시에 사회주의화될 수 없는 한, 자본과의 전쟁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입니다. 노동자 국가는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소 앞질러서 본 이러한 그림에서 노동자 민중을 설득 대상으로 보는 전위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를 감지하고, 이를 이미 실패한 레닌주의 모델의 재탕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책대안을 만드는 주체는 일차로 당이나 전문가 등의 전위집단이지 노동자 민중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료주의의 싹을 감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어려운 객관적 조건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 민중의 현재 의식이나 욕구도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어떤 경로로든 사회주의운동에 먼저 발을 담근 사람이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운동의 이론⋅욕구⋅활동방식 등을 공유해 가는 것은 사회주의 대중화 과정에서 불가피합니다. 이때 먼저 운동에 들어선 사람, 즉 전위가 자신의 위치를 특권화할 수 없는 가운데 가까운 사람들을 함께 전위로 만들어가고, 정책대안들을 생산⋅검증⋅채택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내는 만큼, 관료주의의 위험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위에 대한 전면적 거부는 운동에 대한 포기로 귀결되기 쉬우며, 대중의 자연발생적 우발적 움직임만으로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지양하기 위한 노동자국가도, 풍요로운 평등사회도 건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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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운동을 어렵게 하는 한 가지 요인으로, 정권만 아니라 체제를 바꾸더라도 다시 누군가는 지배자로서 약자들 위에 군림할 테고 그래서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을 불식하는 최선의 방법은 운동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해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파리코뮌의 주요 성과로 평가한 조치, 즉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을 확실히 막을 방책”을 마련하는 일은 사회주의운동의 절대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사멸 문제도 비현실적인 미래의 과제로 미뤄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본권력의 저항을 제압해야 하는 전쟁 기간에 그 핵심무기인 국가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주의운동이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국가가 자본독재와 다름없이 노동자 민중에 대한 억압기구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면 국가사멸의 이념을 현재의 운동방식과 정책 속에 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사회의 전체 성원 또는 적어도 그 대다수’가 국가를 관리할 수 있고 실제로 관리함으로써 특수한 억압권력으로서의 국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상정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만 아니라 국가관리의 선거제⋅소환제⋅특권배제 등의 민주적 조치들과 아울러 이에 부합하는 ‘습관’의 형성을 강조합니다. 즉 경제적 정치적 제도만 아니라 범사회적 정치문화와 의식 및 욕구체계 형성을 위한 장치도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사멸의 이념은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이상적인 상태로서보다, 운동의 현재 성격을 규정하는 지표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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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인류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자본독재가 초래할 수밖에 없는 범인류적 재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국가 건설이 불가피합니다. 변혁적 노동운동은 노동자국가 건설의 중심동력입니다. 자본권력을 절대화하는 보수정치권 주변을 기웃거릴 필요 없습니다. 탈-노동중심주의나 계급화해주의 따위에 현혹될 이유도 없습니다.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의 개발과 이의 대중적 공유를 통해, 단결투쟁의 절대명제에 따라 사회주의 대중화의 길로 당당히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인류가 공멸보다 공존과 공영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이성적 존재인 한, 사회주의는 오늘의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회주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일차 관문인 노동자국가 건설에 힘을 모을 때입니다.

1 이 글은 8월 22일 영남권 노동전선 교육위원회 수련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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