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4호 4-6 나는 사장님이 아니로소이다

이 기사는 <노동자신문> 1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박현욱 ㅣ 노동예술단 선언

어제도 들었다. “사장님, 이 제품 한번 써보세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 사장 아닌데요. 초면에 왜 그런 험한 말씀을 하시죠?”라는 말이 올라와 목구멍을 간지럽히지만, 그저 웃으며 대답하고 지나간다. “괜찮습니다. 많이 파세요.” 악의 없이 한 말임에도 듣는 나는 황당하고 기분이 나쁘지만, ‘내가 사장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냐? 무턱대고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쓰라는 건 회사 방침이냐?’ 등등. 따지는 것은 그저 애쓰는 그 노동자의 마음과 노동을 더욱 고되게 할 뿐일 테니….

암튼 마음의 소리를 꾹 누르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내 정신건강 문제도 있으니, 여기서라도 얘기 좀 해보자. 언제부턴가 처음 보는 상대에게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문화가 꽤나 자리했다. 대체로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 기분을 좋게 하려는 목적, 혹은 존중하려는 의도로 쓰는 듯하다. 사장으로 보일 리 없는 나조차 자주 듣는 걸 보면 사회적으로 꽤 통용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는 건 대체로 사람들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는 의미이다. 딱히 그렇진 않다고 해도 들어서 기분 나쁠 말은 아니라는, 말하자면 ‘평타’는 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으니까 자리 잡은 호칭 문화일 거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소위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노고를 폄훼할 생각은 없을뿐더러 ‘사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개개인에 대한 인간적 악감정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쁠 뿐 아니라 뭔지 모를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이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아마 ‘사장님’이라는 호칭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떠올린 분은 거의 없을 거다. 보편적으로는 자본가 혹은 그 하사관(부사관)계급을 부르는 명칭이 ‘사장님’이고, 그 반대편에는 ‘노동자’라는 명칭이 있다. 요컨대 다른 이의 노동력을 착취해 생활하는 자본가, 혹은 그 무리의 일원으로 불리는 것은 존중받는 혹은 기분 좋은 일이고, (순전히 형식논리학적으로 따지자면) ‘노동자’로 불리는 것은 반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 나쁜 일이라는 의미가 된다.

언젠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동인권 감수성’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가 학부모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던 활동가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항의의 요지는 “내 자식이 노동자가 되라고 고사 지내는 거냐? 학교에서 왜 그따위 교육을 하느냐?”는 거였다. 황당하다고 여기실 분도 계시겠으나 ‘사장님’이라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호칭 문화 하나만 놓고 봐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싶다.

따지고 보면 이 현상의 뿌리는 꽤 깊다. 어릴 적 내 할머니는 밥을 먹고 빵빵해 진 내 배를 볼 때마다 “아이고~ 우리 욱이 박사장님 되시겠네”하며 세상 환한 웃음을 짓곤 하셨다. 물론 사장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평생의 노동으로 뼈마디가 내려앉아 밥 먹는 모습보다 약 먹는 모습이 기억 속에 더 많이 남아 있는 할머니가, 그 말을 할 때만큼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에 일부러 배를 더 빵빵하게 부풀려 할머니에게 내밀곤 했었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현상이 그저 기분 나쁜 것을 넘어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 따라가 본 할머니의 일터는 작은 건물(지금 보면 작은 마을 회관이나 옛날 동사무소 같은)을 만들던 공사장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으며 건물을 만들던 할머니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이거 우리 할매가 만들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해야지”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의기양양한 나와는 반대로 할머니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마라”라고 하시는 거다. 왜 그러면 안 되냐고 묻자, 할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하셨고 그땐 그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창피하다 아이가…”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끝내 사랑하는 손자가 자신의 노동을 창피하게 여길 거라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눈 감으신 할머니가 생각나 밑도 끝도 없는 답답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대체로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노동자들이기에 그들의 모습에 할머니가 자꾸 겹쳐 보이는 까닭이다.

아무튼 이 글은 문화칼럼이고 ‘문화’라는 단어의 ‘문’은 한자로 ‘글월 문’이다. 즉, 말 그대로 ‘말글살이’가 문화의 근본이고 가장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는 거다. 일제가 행한 문화통치의 핵심 또한 우리 말과 글을 없애려는 이른바 ‘언어 말살 정책’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노동자의 문화를 올바로 세워내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언어를 올곧게 세워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현장에서 ‘동지’라는 호칭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자면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며 우리는 그것을 ‘동지’라고 부른다. 노동자계급다운 호칭을 사용하는 작은 실천이 곧 문화적 실천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도 연습 좀 해야겠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하하하…. 그런데 저.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제게 안 써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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