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과 풍요의 변증법(12): 내재적 비판의 효능과 한계
홍 승 용(현대사상연구소)
1.
상식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어떤 개념을 활용할 때든 그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한 다음 이를 고수하는 것이 논의의 엄밀성이나 과학성에 부합된다고 여겨진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만으로도 대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에 반해 변증법은 개념들의 의미 변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개념의 운동’은 상식을 괴롭히고, 말 바꾸기 혹은 궤변이 아니냐 하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레닌이 지적한 궤변과 변증법의 차이를 상기하면 좋다. 즉 개념의 가변성을 주관적으로 적용하면 절충주의나 궤변이 되고, 객관적으로 적용하면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올바른 반영 내지 변증법이 된다.(철학55) 레닌이 정리한 변증법의 16가지 주요 특징들 가운데에는 ‘고찰의 객관성’이 맨 앞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철학177) 개념의 운동과 관련해 객관성은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개념의 대상이 무궁무진한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것을 포착하는 개념의 의미는 인식의 발전과 더불어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상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개념의 의미를 변경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변경을 궤변이나 절충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두 경우 모두 개념의 의미 변화는 대상 자체의 ‘살아 있는 본질’에 좀더 다가가기 위한 변증법적 개념의 운동이다.
이처럼 개념의 의미를 확장⋅변경할 필요성은 기존의 의미가 대상과 부합하지 않게 되는 데에 기인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개념을 부단히 그 대상과 대질함으로써 양자의 불일치를 밝히고 일치를 추구한다. 이때 개념의 의미가 변화한다고 해서 원래의 의미나 개념 자체를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그 변화가 개념과 대상의 일치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원래의 개념을 정당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본다.(입문29) 그는 이러한 변증법적 개념의 운동 밑바탕에 ‘사태 자체의 원칙적 역동성에 대한’ 혹은 ‘세계 일반의 원칙적 역사성에 대한’ 기본경험이 있으며, 이 기본경험은 ‘주체의 이론이 아니라 객체의 이론’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입문30) 아도르노가 ‘사태 자체’ 혹은 ‘객체의 이론’을 강조하는 것은 레닌이 ‘고찰의 객관성’을 내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만 아니라 헤겔의 관념변증법조차 ‘사태 속에 머물면서 사태에 매진할 것’을 요구한다.(현상학13) 헤겔은 이처럼 ‘사태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고찰하고, 대상을 대상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규정들에 따라 파악’하는 방법, 즉 ‘내재적 고찰’을 강조한다.(철학209)
내재적 고찰은 아도르노에게도 중요하다. 그는 대상 자체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전제에 비추어 대상을 비판하는 초월적 비판과, 대상 자체의 전제나 개념에 비추어 평가하는 내재적 비판을 구분한다. 어떤 명제나 사고를 내재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그것과 무관한 다른 견해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와 더불어, 그 사고 자체의 힘에 근거해 그것을 논박하는 것’이다. 그는 변증법에서 내재적 비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즉 변증법적 방법에서는 사태 외적인 기준을 사태에 적용해서는 안 되며, 사태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사태 자체 내지 사태의 개념에 근거해 사태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헤겔의 경우든 맑스의 경우든 비판적 논의는 언제나 내재적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맑스는 어떤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에 비추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 어떠하다고 주장하는 바에 비추어 이 사회를 평가하고 비판한다. 즉 맑스는 ‘이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교환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이러한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보고자 한다’는 식으로 비판을 수행한다.(입문65-66) 이때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주장을 실제의 자본주의 사회와 대질하여 비판한다고 해서 자유와 정의의 이념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에서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이제까지 통용되는 자유와 정의의 개념을 수정하고 확장한다.(입문66-67)
2.
내재적 비판은 적의 언어로 적을 논박하고 대안을 찾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시초축적부터 당대의 무자비한 노동일 연장, ‘흡혈학교’를 통한 아동노동력 착취 등 처참한 자본주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세밀하게, 즉 거시적-미시적으로 비판한다. 이때 그는 사회주의적 문헌이나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영국의 의회법령, 공장감독관들의 보고서, 의회보고서 등 적의 언어를 주로 활용한다. 특히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사기나 폭력 혹은 가치 이하의 노동력 구매나 가치 이상의 상품 판매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평등한 교환관계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등가교환이라는 시장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밀고감으로써 그는 착취의 비밀에 도달한다. 그 비밀은 동등한 가치에 따라 판매-구매되는 노동력과 이의 사용가치인 구체적 노동의 구분을 통해 밝혀진다. 이를 통해 맑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대등하고 독립적인 상품소유자들, 즉 자본이라는 상품의 소유자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관계인 것처럼 교묘하게 기만하고 있는”(자본1,1054)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은폐된 노예제도”(자본1,1040)임을 폭로한다. 이러한 폭로를 통해 맑스가 자유와 평등의 이념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선 새로운 생산양식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수정⋅확대한다.
엥겔스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현대적 요구가 시민계급의 성장에 근거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시민계급의 요구는 대규모 상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자유로운 상품 보유자들의 평등한 교환 권리와, 봉건적 정치질서 및 동업조합의 제약에 맞서는 자유통행 및 기회 평등에 대한 요구다.(듀링118) 이러한 요구는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표방하는 계몽사상과 시민혁명을 통해 어느 정도 실현된다. 엥겔스는 그 한계를 명시한다. 즉 계몽사상이 내세우는 ‘이성의 국가’는 ‘시민계급의 이상화된 국가’이며, ‘영원한 정의’는 ‘시민적 사법’으로 실현되었고, ‘평등’은 ‘법률 앞에서의 시민적 평등’으로 귀착되었으며, ‘시민적 소유권’이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듀링 20) 그렇다고 해서 엥겔스가 이성, 정의, 평등, 인권 등의 이념 자체를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특히 평등에 대한 요구가 시민적 한계에 머물지 않으며, 광범한 농민 대중을 위해서도 이와 동일한 차원의 평등한 권리가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또 그에 따르면 “계급적 우선권의 폐지라는 부르주아적 요구가 제기되는 그 순간부터, 그것과 나란히 계급 자체의 철폐라는 프롤레타리아적 요구가 나타난다.”(듀링 118-119) 이로써 평등의 의미는 계급해방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확장된다.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대혁명 때부터 부르주아적 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이래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의 요구로 이에 답하였다. 평등은 그때 이래로 특히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 구호가 되었다.”(듀링 119) 오늘의 해방전쟁에서 평등은 단순한 ‘전투 구호’가 아니라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당연시되는 민주주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선거와 대의제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본독재를 의미한다. 민주주의 국가가 말 그대로 민중이 주인인 국가라면,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입법⋅사법⋅행정부 등 국가권력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를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가 지닌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성격을 비판한다고 해서, 민주주의 이념 자체를 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비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의미를 수정⋅확대하여, 자본독재를 넘어선 노동자민주주의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긴밀한 관계를 밝히는 레닌의 주장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1)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 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승리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 수도, 또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3.
비판 대상 자체의 언어나 논리에 근거를 두는 내재적 비판은 이성적 논쟁에서 강력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의 독점을 위해 자본독재의 대리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들의 애완견이 된 언론이 사방팔방으로 짖어대는 상황에서는, 엄밀하고 예리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그 허위를 논박하더라도 그들을 승복시킬 가망은 전무하다. 그들은 승복에 앞서 타도와 제압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하지만 내재적 비판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자본독재의 폭력에 맞서면서 노동자민중의 공감을 다지고 장기적으로 헤게모니를 넓히는 과정에는 충분히 의미 있다. 그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판 대상을 회피하지 않고 면밀히 연구하는 노고, 개념의 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닌 복잡한 상부구조물들을 다룰 경우, 단순한 거부보다 내재적 비판을 통한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훨씬 유용할 것이다.
물론 내재적 비판이 언제나 올바른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반자본주의라는 주제를 회피하고 해방투쟁을 자유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라고 보는 바디우를 지지한다. 누구나 다 ‘반자본주의가’가 된 오늘날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전복적인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때 지젝은 하트와 네그리를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최근 주장들은 바디우의 통찰력에 대한 일종의 기대하지 못했던 확증이 아닌가? 역설적인 필연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바로 그들의(그들이 초점을 맞추는) 반자본주의가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혁명적 힘을 인식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이 말하듯이 자본주의가 이미 그 자체로 공산주의적 잠재력을 생성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본주의와 싸울 필요가 없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의 공산주의 되기’라고 할 수 있다.”(시차628) 지젝의 주장과 달리 아무나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또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전복적인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발붙일 땅을 잃어 왔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진지들이 초토화되어 왔을 뿐이다. ‘역설적인 필연을 따라가는 과정’은 ‘내재적 고찰’ 또는 ‘내재적 비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어낸 결론, 즉 자본주의 자체가 공산주의적 잠재력을 생성하므로 자본주의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도대체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변증법에서 내재적 비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아도르노도 내재적 비판을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그는 내재적이냐, 초월적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고집하는 것은 전통 논리학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대상을 내부로부터, 즉 그 자체의 요구⋅근원⋅합법칙성에 따라 고찰해야 하지만, 또한 외부로부터, 즉 대상이 처해 있는 기능적 연관관계나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지니는 의의 등의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처럼 사태 속에 있어야 하면서 또한 사태 외부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의 이중성 또는 사고의 유동성도 변증법적 사고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밝힌다.(입문259) 이러한 사고의 유동성 때문에도 변증법은 확실한 것을 손에 잡고 싶어 하는 상식적 사고를 난감한 상태에 몰아넣을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고찰이 빈곤해지면 위상학적 사유에 빠질 위험이 커지고, 초월적 고찰이 없으면 맹목적 논의에 머물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사고의 이중성 또는 유동성을 거부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 또한 자본독재를 호위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교활성에 굴복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기 위해 해방전사들이 감당해야 할 필요노동의 일부 아니겠는가.
(2023. 5. 29.)
One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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