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3호 3-5 마오쩌둥 혁명을 위해 일가를 희생하다

  • 이기사는 노동자신문 1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이철의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이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성립하기 전까지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혁명이론 수립 및 당의 지도, 전략 및 전술의 수립, 전쟁 및 전투지휘에 이르기까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그늘로 빛이 바랬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사는 그를 가리켜 “위대한 맑스주의자이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 이론가.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영웅. 중국 인민을 영도하여 명운을 개척했으며 국가 면모를 일신한 일대 위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오쩌둥이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여기서는 혁명과정에서 희생한 그의 가족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투신한 뒤 여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아우로 마오쩌민(毛澤民)과 마오쩌탄(毛澤覃)이 차례로 희생되었고 아내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국민당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촌 누이인 마오쩌지엔(毛澤建),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조카 마오추슝(毛楚雄)을 차례로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도 모두 죽거나 다른 사람이 겪지 않을 고통을 받았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 잡혔을 때 후난성의 군벌 장군 허젠(何鍵)은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퇴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의 소식을 듣자 “내가 백 개의 목숨이 있더라고 바꿀 수 없다.”고 비통해했다고 한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세 아들은 상하이 공산당 지하당에 맡겨졌다. 상하이당이 파괴되자 세 아들은 유리걸식하며 유랑하게 되었다. 셋째 마오안룽(毛岸龍)은 유랑과정에서 실종되었다. 첫째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고 둘째 마오안칭(毛岸靑)은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지만, 유랑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평생 고통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언젠가 아들들의 유랑과정을 회고하며 “어린 나이에 백가(百家)의 밥을 먹었다.”고 탄식하였다. 즉 구걸하거나 남의 집에 얹혀 지냈다는 뜻이다.

    마오쩌둥은 두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서도 여러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끝까지 남은 것은 딸 리민(李民)뿐이다. 첫 번째 딸은 마오쩌둥이 징강산 근거지를 빼앗긴 뒤 후난성과 장시성 등을 전전할 때라서 남에게 맡겼다. 그는 우는 허쯔전을 이렇게 달랬다. “아이를 맡기자. 혁명 투쟁에 승리한 후, 다시 데려오자.”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둘째 아들 마오안훙(毛岸紅)은 장정을 출발하며 아우 마오쩌탄 부부에게 맡겼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은행 책임을 맡고 있던 요인이었다. 마찬가지로 불안한 신분이던 마오쩌탄 부부는 아들을 어느 경호원의 집에 맡겼는데 끝내 행방불명되었다. 국민당군이 루이진(瑞金)을 비롯한 장시성의 소비에트를 이 잡듯 뒤져 공산당원과 동조하던 민중들을 학살했으므로 함께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허쯔전은 국민당군이 루이진의 소비에트를 포위 토벌할 때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 쫓기는 환경에서 아이를 조산한 결과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의 부인 중 팔자가 기구하기로는 허쯔전이 손꼽힌다. 그는 장정 도중에 다시 딸 하나를 출산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 부부는 어느 농가에 아이를 맡겼는데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쯔전은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고 그 여파로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운명이 되었다. 허쯔전은 옌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리민을 낳는다. 리민은 소련으로 정양하러 간 어머니를 따라갔으며 귀국 후에도 허쯔전을 보살폈다.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정양 중 마지막 아들을 출산했으나 금방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자녀 중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세 번째 부인 장칭(姜靑)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나(李訥)이다. 그는 마오쩌둥 장칭 부부의 슬하에서 순조롭게 성장했으나 문화대혁명 후 어머니가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마오쩌둥 일가 중 비교적 알려진 이는 맏아들 마오안잉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자원하였다.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이던 펑더화이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아들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아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식들을 출전시키겠는가?” 하지만 마오안잉은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네이팜탄에 시신이 새카맣게 타서 손목에 찬 소련제 시계를 보고 신분을 겨우 확인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전사를 알게 된 펑더화이는 직접 전문을 기초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방에서 자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기밀비서 예즈룽이 말없이 전보를 건네자, 마오는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는데 기록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라고도 하고 아무 표정도 없었다고도 적혀 있다. 마오는 낮은 목소리로 예즈룽에게 말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데 한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는 없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에 있다. 중국으로 이장하는 문제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인민의 자식들도 조선에 묻혀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이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성립하기 전까지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혁명이론 수립 및 당의 지도, 전략 및 전술의 수립, 전쟁 및 전투지휘에 이르기까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그늘로 빛이 바랬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사는 그를 가리켜 “위대한 맑스주의자이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 이론가.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영웅. 중국 인민을 영도하여 명운을 개척했으며 국가 면모를 일신한 일대 위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오쩌둥이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여기서는 혁명과정에서 희생한 그의 가족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투신한 뒤 여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아우로 마오쩌민(毛澤民)과 마오쩌탄(毛澤覃)이 차례로 희생되었고 아내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국민당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촌 누이인 마오쩌지엔(毛澤建),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조카 마오추슝(毛楚雄)을 차례로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도 모두 죽거나 다른 사람이 겪지 않을 고통을 받았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 잡혔을 때 후난성의 군벌 장군 허젠(何鍵)은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퇴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의 소식을 듣자 “내가 백 개의 목숨이 있더라고 바꿀 수 없다.”고 비통해했다고 한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세 아들은 상하이 공산당 지하당에 맡겨졌다. 상하이당이 파괴되자 세 아들은 유리걸식하며 유랑하게 되었다. 셋째 마오안룽(毛岸龍)은 유랑과정에서 실종되었다. 첫째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고 둘째 마오안칭(毛岸靑)은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지만, 유랑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평생 고통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언젠가 아들들의 유랑과정을 회고하며 “어린 나이에 백가(百家)의 밥을 먹었다.”고 탄식하였다. 즉 구걸하거나 남의 집에 얹혀 지냈다는 뜻이다.

    마오쩌둥은 두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서도 여러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끝까지 남은 것은 딸 리민(李民)뿐이다. 첫 번째 딸은 마오쩌둥이 징강산 근거지를 빼앗긴 뒤 후난성과 장시성 등을 전전할 때라서 남에게 맡겼다. 그는 우는 허쯔전을 이렇게 달랬다. “아이를 맡기자. 혁명 투쟁에 승리한 후, 다시 데려오자.”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둘째 아들 마오안훙(毛岸紅)은 장정을 출발하며 아우 마오쩌탄 부부에게 맡겼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은행 책임을 맡고 있던 요인이었다. 마찬가지로 불안한 신분이던 마오쩌탄 부부는 아들을 어느 경호원의 집에 맡겼는데 끝내 행방불명되었다. 국민당군이 루이진(瑞金)을 비롯한 장시성의 소비에트를 이 잡듯 뒤져 공산당원과 동조하던 민중들을 학살했으므로 함께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허쯔전은 국민당군이 루이진의 소비에트를 포위 토벌할 때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 쫓기는 환경에서 아이를 조산한 결과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의 부인 중 팔자가 기구하기로는 허쯔전이 손꼽힌다. 그는 장정 도중에 다시 딸 하나를 출산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 부부는 어느 농가에 아이를 맡겼는데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쯔전은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고 그 여파로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운명이 되었다. 허쯔전은 옌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리민을 낳는다. 리민은 소련으로 정양하러 간 어머니를 따라갔으며 귀국 후에도 허쯔전을 보살폈다.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정양 중 마지막 아들을 출산했으나 금방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자녀 중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세 번째 부인 장칭(姜靑)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나(李訥)이다. 그는 마오쩌둥 장칭 부부의 슬하에서 순조롭게 성장했으나 문화대혁명 후 어머니가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마오쩌둥 일가 중 비교적 알려진 이는 맏아들 마오안잉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자원하였다.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이던 펑더화이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아들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아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식들을 출전시키겠는가?” 하지만 마오안잉은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네이팜탄에 시신이 새카맣게 타서 손목에 찬 소련제 시계를 보고 신분을 겨우 확인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전사를 알게 된 펑더화이는 직접 전문을 기초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방에서 자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기밀비서 예즈룽이 말없이 전보를 건네자, 마오는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는데 기록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라고도 하고 아무 표정도 없었다고도 적혀 있다. 마오는 낮은 목소리로 예즈룽에게 말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데 한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는 없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에 있다. 중국으로 이장하는 문제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인민의 자식들도 조선에 묻혀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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