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 ㅣ 예비 임금노동자
1951년 5월 16일 밤, 스물한 명의 여성들이 황량한 신의주에 도착했다. 달빛에 비친 도시는 성한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허허벌판 폐허만 남아 있었다. 북한 주민과 고위 관료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녀들은 가장 잔혹하고 악명 높은 전쟁터 한가운데로 묵묵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마다 이유를 품은 채, 자발적으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향한 그녀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국제민주여성연맹(이하 ‘국제여맹’)의 초청에 응한 한국전쟁 진상 조사위원들이었다.
이 여성들은 생김새도, 성격도, 국적도, 이곳에 온 이유도 모두 달랐다. 그래서 조사 과정에서도 의견 차이로 인한 잦은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전쟁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소이탄 폭격으로 인해 집과 가족, 삶의 전부를 잃고 홀로 토굴을 파서 살아가는 할머니, 며칠간 달려도 황량한 폐허만이 보이던 풍경, 어린아이들을 집단 학살한 무덤,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증언.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처절한 통곡과 절규 속에 울부짖는 여성들과 아이들을 보며, 조사위원들은 객관성을 지켜내려던 시도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자주 무너지곤 했다.
10일간의 조사 끝에 그녀들은 ⟪우리는 고발한다(We assure)⟫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녀들은 보고서를 통해 자신이 직접 보고 생생하게 겪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보고서를 발간하고 모국으로 돌아온 후, 갖은 억압과 정치‧사회적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영국의 조사위원인 모니카 펠턴은 이 사건 이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던 직장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펠턴을 향한 끊이지 않는 마녀사냥으로 인해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영국을 떠나 인도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또한 쿠바의 조사위원이었던 로드리게스는 조사 활동을 마치고 쿠바로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군사정보부와 공산주의활동조사국으로 이송되어, 이후 여러 차례 강제 이송과 투옥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서독 조사위원 릴리 베히터의 경우, 그녀는 대중연설을 통해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알리고자 했으나, ‘선동적 발언’에 대한 혐의로 재판장에 서야만 했다. 이는 조사위원 개인에 대한 탄압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제여맹은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보낸 일로 인해 유엔 내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그간 국제여맹의 행보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공산당 전선 조직”으로 낙인찍혔다.
보고서 발표 직후 덴마크의 한 언론은, 이 여성들이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서방 국가의 어떤 사람들도 한국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 보고서 이전에 한국 민간인들의 목소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음에도, 북미나 서유럽에서 국제여맹 보고서에 대해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미국 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조사위원들이 무자비한 학살의 주체로 ‘미군’ 혹은 ‘미군 통제 하의 한국군’만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미 국무부 유엔정치안보국 직원들은 국방부 소속의 군인들과 전문을 주고받으며 국제여맹 조사보고서에 대한 대응 방식을 논의했다. 최종 결론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심을 향한 소이탄 대량폭격, 집단학살, 전시 성폭력 등의 내용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것보다 국제여맹을 ‘빨갱이’로 낙인찍는 일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국제여맹 창립은 1945년 11월 프랑스민주여성동맹이 개최한 파리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민주여성동맹은 1945년 6월 ‘반파시스트’ 투쟁 경력을 지닌 여성들을 중심으로 1차 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여성대회를 추진할 준비위원회를 소집했다. 이후 그들은 반년 만에, 초청에 응한 40개국 단체 대표들을 중심으로 국제여맹을 조직하였다.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대전의 참상 이후, 여성들은 ‘전쟁’과 ‘파시즘’이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이 같은 체험은 ‘평화’와 ‘반파시즘’의 성취를 향한 당대 여성들의 절박한 열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이 열망과 의지가 1945년 11월 대규모 국제여성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다양한 여성단체가 존재했지만, 타 여성단체와 국제여맹이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국제여맹은 기존 여성운동에서 사실상 배제되어 있던 아시아‧아프리카‧남미지역의 여성들이나 서구사회 내의 비(非)백인 여성들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다는 것이다. 아시아‧아프리카 여성들은 비판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파시즘을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그 배후에는 파시즘보다 식민주의가 훨씬 더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아프리카 여성들의 호소는 국제여맹 내 다른 여성들에게 커다란 동감을 자아냈다. 국제여맹 지도부는 식민지 여성들의 반식민주의 여성운동과 연대를 한층 강화하고, 제3세계 여성들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활동에 즉각적인 착수를 결정했다. 1951년 국제여맹이 북한에 현지조사단을 파견한 조치는, 그들이 친소적인 공산주의 단체라는 오해와 무관하게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10일이라는 기간 동안, 조사위원들이 목도한 참상은 한국에 오기 전 얼핏 상상했던 상황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곳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규의 현장이었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먹을거리, 입을 거리가 부족하다 못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무차별적인 폭격 아래 사람들은 픽픽 쓰러졌다.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조차 부모와 자식을 잃은 고통 아래 몸부림치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었다. 조사위원들은 밀려오는 두려움과 슬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되새김질하며, 한국에서 듣고 경험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영국의 조사위원인 모니카 펠턴은 조사 활동 이후 집필한 책에서 ‘이 모든 파괴가 인간의 삶과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서술하였다.
총성은 멈추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약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산하지 못한 폭력은 거듭하여 대물림되며 군대 문제, 남북 갈등, 정치적‧이념적 탄압 등 새로운 폭력을 낳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남북 양자 간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토록 아프고 처절한 역사로부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조사위원들이 한국전쟁 보고서를 통해 전하려고 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덴마크의 조사위원인 플레론은 자국의 저널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덴마크인들은 ’침략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완벽한 정의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지속과 형식에 대해서도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조사위원들은 아무리 정당한 전쟁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모든 도시와 농촌을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도저히 군사적 목표로 간주할 수 없는 폐허 위에 계속 폭탄을 투하하는 행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38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왜 남북한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전쟁을 끝내지 않고 있는지, 왜 군사 활동과 무관한 인구 밀집 지역에 지속해서 소이탄을 투하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해야만 했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전쟁을 포함한 모든 폭력과 파괴는 그 자체로 어떠한 힘도 가질 수 없으며, 이로써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폭력은 약자에 대해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가장 쉽게 관철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위험성에 대한 반성 없이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폭력적으로 관철된 주장은 피해 당사자에게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와 존중 없이 오직 모멸감과 패배감만을 안겨준다. 폭력을 행한 이에게도 폭력은 단순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남아 있지 않고, 폭력이 순환되는 것대한 폭력장 안으로 그를 집어삼킨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결국 폭력과 혐오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을 뿐 근원적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인류의 반복된 과오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폭력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를 싫어하지 않고서는 그에게 총칼을 겨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팽배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될 수 없다.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애정과 신뢰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사회가 어디 있을까? 그제야 비로소 모두가 행복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가꾸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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