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6호 9-4 전쟁 시대를 내란 시대의 시작으로

전쟁 시대를 내란 시대의 시작으로

-레닌의 『사회주의와 전쟁』을 읽고-

하영진 ㅣ 현대사상연구소

1.위기의 시대

위기의 시대다. 기후위기, 자본주의 체제위기, 전쟁위기. 이들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야기한 것들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다. 100여 년 전 레닌은 “20세기에 비로소 도달한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라고 규정한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본주의는 산업 전 분야를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와 자본가 백만장자 연합이 장악하기에 이를 정도로 자본 집적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지의 형태로나 수천 갈래의 금융적 착취로 타국을 얽어매는 것을 통해 거의 세계 전체를 ‘자본의 영주들’간에 완전히 분할해놓았다. 자유무역과 경쟁은 독점을 향한 쟁투로, 자본 투자와 원료 획득 등을 위한 영토 쟁탈전으로 대체되었다.”(사전32) “인류가 사회주의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와 독점과 특권을 통해,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민족 억압을 통해 자본주의의 인위적 보존을 꾀하는 ‘강대’국들 간의 수년, 심지어 수십 년간의 무장투쟁의 고통을 겪을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할 정도로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놓았다.”(사전33)

레닌은 제국주의에 의해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위기를 혁명을 통해 건넜다. 그곳은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30여 년 전 그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 체제는 기후위기와 전쟁위기와 함께 자신의 위기에 봉착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은 현재 우리가 처한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제 자본주의는 다른 모든 문명을 대체한 유일한 문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적합성을 판단할 외부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 레닌에게 ‘외부적 시각’은 사회주의자의 시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레닌은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위기를 건넜다. 다니엘 코엔에게 ‘외부적 시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외부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위기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은 레닌의 『사회주의와 전쟁』을 통해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를 건넜던 혁명을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살펴보려한다.

2.바젤 선언

레닌은 1914년 발발한 “영국과 독일, 그리고 그들의 현 동맹국들 간의 전쟁”(사전43)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912년 바젤에서 국제사회주의 대회가 열렸고 만장일치로 전쟁에 관한 선언이 채택되었다. 레닌이 밝히는 ‘바젤 선언’이 천명한 내용은 “아무리 인민의 이익을 핑계거리로 내세운다 하더라도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약탈적 정책에 토대를 두고 ‘자본가들의 이익과 왕조의 야망을 위해’ 수행되는 그 같은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사전43)

레닌에 따르면 바젤 선언은 “현 전쟁과 관련하여 국제적 규모로 노동자들이 그들 정부를 겨냥하여 전개할 혁명적 투쟁의 전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술을 규정한 것”(사전43)이다. 무엇보다, 레닌에게 바젤 선언은 “전쟁 발발 시에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전쟁이 야기하는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즉 사회주의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전쟁으로 인한 정부의 곤란과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야 한다는 슈투트가르트 결의의 선언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사전43)

레닌은 “전쟁은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첨예한 위기를 낳았으며, 믿기 힘들 정도로 대중의 고통을 증대시켰다”(사전52)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키라는 슬로건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표현”(사전52)되며, “전쟁 중에 모든 일관되게 수행되는 계급투쟁의 모든 진지하게 행해지는 ‘대중행동’ 전술은 필연적으로 이 슬로건에 이르게 된다.”(사전52)고, 어느 경우든,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확고한 작업을 하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임무“(사전52)라고 주장한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슈투트가르트에서 결의한 대로, 바젤에서 선언한대로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계급투쟁이라는 ‘대중행동’ 전술을 통해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은 바로 그 슈투트가르트의 결의와 바젤 선언에서 천명한 내용들을 실천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평화’및 ‘민족’에 대한 이데올로기, 사회배외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배반에 대해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사회주의와 전쟁』의 많은 지면이 그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것은 대중들을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3.평화를 위한 투쟁

레닌은 사회주의자는 “평화주의자와 다르다”(사전29)고 밝힌다. 사회주의자들도 언제나 “국가 간 전쟁을 야만적이고 야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사전29)는 점에서는 평화주의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레닌은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감정은 종종 전쟁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초보적 항의와 분노로 표현된다.”(사전56)고 보는데 이러한 감정을 활용하는 것이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도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다르다는 것이다. 레닌은 평화주의자와 달리 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운동이 부재한 상태에서 병합 없는 평화가, 민족들에 대한 억압 없는 평화가, 약탈 없는 평화가, 현 정부들과 지배계급들 사이에 새로운 전쟁의 조짐 없는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용인함으로써 인민을 기만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사전56)이라고, 더 나아가 그런 식의 인민 기만은 “교전국 정부들의 비밀외교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며, 그들의 반혁명적 계획을 용이하게 만들어줄 것”(사전57)이기 때문에, “항구적이고 민주적인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맞선 내란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사전57)고 주장한다. 레닌의 주장에서 짚어야 할 것은 ‘혁명적 운동’과 ‘내란의 지지’다. 관건은 ‘내란’을 지지하느냐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은 물을 것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내란)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용인하자는 것인가.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나 쓸모가 있는 평화 슬로건은 전쟁을 방어하는 데 어떤 쓸모가 있는가. 그와 같은 논쟁에서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방식의 차이를 넘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내란과 같은 전쟁 없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평화 슬로건을 내거는 것으로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그런 전쟁이라면 전쟁은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자는 “계급이 없어지고 사회주의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전쟁도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사전29)고 쓰고 있다. 레닌은 “전쟁은 다른(폭력적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는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유명한 경구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든 전쟁의 의미와 관련하여 자기 견해를 세우는 이론적 기초로 여겨왔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항상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 다양한 전쟁을 고찰했다고 밝히고 있다.(사전37) 이러한 레닌의 입장은 과연 전쟁은 사라질까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전쟁의 구체적인 성격을 묻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전쟁의 발생 요인과 전쟁의 성격을 물음으로써 전쟁의 발생 가능성을 억제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공격전쟁과 방어전쟁’의 차이를 말한다. 레닌은 “내란, 즉 억압계급에 대항하여 피억압계급이 수행하는 전쟁, 노예 소유주에 대항하여 노예가 수행하는 전쟁, 지주에 대항하여 농노가 수행하는 전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임금노동자가 수행하는 전쟁 등을 적법하고 진보적이며 필연적인 것”(사전29)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자들이 ‘방어적’ 전쟁을 말할 때는 언제나 이러한 의미의 ‘정의전(正義戰)’을 뜻했다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공격 전쟁이나 방어 전쟁이나 전쟁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주장에 따라 평화주의자들이 억압계급, 노예 소유주, 지주, 부르주아지가 일으키는 전쟁을 억제하려는 노력(그것이 내란이 아니더라도, 평화 슬로건으로도 가능한)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전쟁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레닌이 ‘내란’을 통한 혁명을 주창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는 제국주의 전쟁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전쟁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모든 공포, 잔학 행위, 비탄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역사상에는 진보적이었던 전쟁들이 많이 있었다. 지금의 전쟁에 대해서도 그 역사 특수성(역사적으로 종별적인 특징들)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사전29-30)고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또한 사회주의자들도 고민하고 있을 문제는 추상적인 평화 슬로건을 넘어 공격전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고, 방어전쟁에서 발생하는 인민들의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계급이 사라지고 사회주의가 실현된 이후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전까지는 제국주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평화 슬로건’을 넘어선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전쟁을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그곳이 사회주의든 또 다른 이름의 체제든 계급 대립이 사라지거나 완화된다면, 그리하여 제국주의적인 약탈과 침략 전쟁이 줄어드는 사회가 된다면 평화의 지속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레닌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주의자는 모두 “피억압 국가, 종속 국가,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국가가 억압 국가, 노예 소유주 국가, 약탈 국가 등의 ‘대’국에게 승리하는 것에 동조할 것“(사전32)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사회주의로 건너가기 위해서 레닌은 이 전쟁이 세 가지 점에서 ”노예제 강화를 목표로 하는 노예주들 간의 전쟁“(사전35)이라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 전쟁은 식민지에 대한 ‘보다 공평한’ 분할과 그에 이어지는 보다 일사 분란한 착취를 통해 예속화를 강화시키기 위한 전쟁이다. 둘째, ‘강대’국 내 소수 민족들에 대한 억압을 강화시키기 위한 전쟁이다. 셋째, 임금노예제를 확대하고 연장하기 위한 전쟁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분열되어 있고 탄압당하고 있는 반면, 자본가들은 전쟁으로 부를 모으고, 민족적 편견에 불을 붙여 반동을 강화시킴으로써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사전35-37) 레닌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현재의 전쟁, 즉, “노예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노예주들 간의 이 전쟁에서 ‘민족’이데올로기와 ‘조국 방위’라는 용어를 가지고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사전32)고 주장한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이른바 ‘행동’ 강령을 내건 대회들은 지금까지 단순한 평화주의 강령을 선언하는 데 그쳐왔다”는 것이다. 레닌은 “물론 가장 신속한 전쟁 종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평화’ 요구는 혁명적 투쟁을 동반할 때에만 프롤레타리아적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혁명 없이는 이른바 민주주의적 평화란 속물적 유토피아”이며, “진정한 행동 강령이라면 오직 마르크수주의적 강령에 의해서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창한다.(사전80)

4.민족주의 아닌 민족자결권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고 베네딕트 앤더슨은 주장한 바 있다. 상상력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아니, 상상된 것일 뿐이라고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상상된 민족’이 낳은 역사는 처참했다. 나치즘, 파시즘, 전체주의 등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과 전쟁은 ‘민족주의’라는 ‘민족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상상되었든 전승되었든 ‘민족’이 무슨 잘못인가. ‘민족’ 우월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는 또 무슨 잘못인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자본의 논리 아래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약소 민족, 소수민족에 대한 침탈이야말로 ‘민족’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 아닌가. 이제 ‘민족’에 대한 옹호는 ‘민족주의’라는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학살과 전쟁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전히 극우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혐오하고 억압하는 일들은 벌어지고 있고 그들 소수민족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극단적인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제국주의적인 ‘강대국’들의 ‘약소 민족’에 대한 전쟁을 통한 수탈과 억압이다.

레닌은 ‘러시아는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가?’ 묻는다. “차리즘은 갈리치아를 강탈하고 이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를 짓밟기 위해, 그리고 아르메니아, 콘스탄티노플 등을 강탈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차리즘은 전쟁을 국내의 점증하는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성장하는 혁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차리즘은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러시아에 억압받는 민족의 수를 늘리고, 이 억압을 영속화하며, 그럼으로써 다름 아닌 대러시아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와해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러시아에 관한 한 전쟁은 뿌리 깊이 반동적이고 반(反)해방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사전40-41)

레닌은 “제국주의는 세계의 민족들에 대한 한 줌의 ‘강대’국들의 억압이 부단히 증대하는 시대”라고 밝힌다.(사전58) 그런 점에서 민족자결권의 인정은 개별 민족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레닌이 주장하듯이 ‘민족자결권’에 대한 인정 없이 “제국주의에 맞선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불가능”(사전58)할 것이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마르크스·엥겔스)을 것이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타민족에 대한 ‘자’민족의 폭력을 용인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일 수 없다.”(사전58)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적 계급은 반동적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랄 수밖에 없으며, 정부의 군사적 패배는 반드시 정부의 타도를 용이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모든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이 품고 있는 평소의 생각과 일치하고,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를 위한 우리의 활동과 합치한다.”(사전55-56)고 강조한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이나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에 대하여 용인할 때 ‘민족자결권’을 지켜주고 ‘민족주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자’국 정부를 혁명으로 타도하지 않고서는 어떤 다른 구원의 길도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며, 현 전쟁에서 이들 정부가 처해 있는 난관을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사전56)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들은 “억압국들의(특히 이른바 ‘강대’국들의) 사회민주주의당들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다름 아닌 그 말의 정치적 의미에서−즉 정치적 분리의 권리를 인정하고 옹호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지배국이나 식민지 보유국의 사회주의자는 배외주의자다.”(사전57) 한편으로,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과 억압민족 노동자의 완전한 단결(조직적 단결을 포함하여)을 위해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 한 민족으로부터 다른 한 민족의 법적 분리(바우어와 레너가 주창하는 이른바 ‘문화적·민족적 자치’)라는 관념은 반동적”(사전57-58)이라고 주장한다.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의 악몽 때문인지 군사적 충돌로 인한 핵폭발의 위협까지 언급되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어떻게 봐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황정규는 “우크라이나 내의 지배계급과 극우 민족주의세력의 실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들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없는 러시아 침공 반대, 우크라이나 지지는 자칫 우크라이나 지배계급과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내에서 진보적 역량이 강화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크라이나 지배계급과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황정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그것이 제국주의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 간의 충돌은 비단 유럽 동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평화를 보장받는 길은, 전 세계적으로 민중의 진보적, 반제반전 투쟁이 강화되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진보적 역량이 커지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이 요청되는 때이다.”

레닌은 ‘러시아는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가?’ 물은 바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대러시아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와해시키려는 것‘이며, “러시아에 관한 한 전쟁은 뿌리 깊이 반동적이고 반(反)해방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사전40-41)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오늘날 ‘러시아는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가?’ 그와 함께 물어보자. ‘제국주의’는 무엇이며, ‘제국주의 전쟁’은 왜 발발하는가? 레닌의 제국주의 시대를 주름잡았던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북대서양 동맹국들은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무관한가. 그 전쟁 속에서 약소 민족과 민족자결권은 보호되고 있는가. 다시 문제는 제국주의를 낳은 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되고 만다.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자’민족 중심과 ‘자’민족 우월이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침탈하는 한, 그들의 전쟁은 ‘자’민족의 이익과 ‘자’민족의 우월을 내세워 ‘민족’을 정당화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뿐이다. 민족 간의 ‘분열’이 아니라 약소 민족의 ‘자결’을 위해서 ‘자’국의 노동자들로부터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국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적(敵)이 사라졌다는 오늘날의 전쟁은 약소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과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야기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 위기, 기후 위기를 낳고 그와 같은 자신들의 이윤의 위기를 전쟁으로 넘어서려는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즉,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국가권력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넘어 평화를 위해 사회주의라는 인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국주의 전쟁은 반복되고 있다.

5.사회배외주의와의 단절

레닌은 ‘사회배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사회배외주의란 “현 전쟁에서 ‘조국 방위’ 사상을 주창하는 것”이며, “전쟁 중에 계급투쟁의 포기로, 전쟁공채에 대한 찬성투표로 이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사전41) 레닌에 따르면 사회배외주의자들은 “반프롤레타리아적·부르주아적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들이 옹호하고 있는 것은 “외국의 억압에 대해 싸운다는 의미에서의 ‘조국 방위’가 아니라, ‘강대’국의 하나로서 식민지를 약탈하고 타민족을 억압할 ‘권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사전41) 또한, 레닌은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전쟁이 민족들의 자유와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수행되고 있다는 부르주아적 기만을 되풀이하며,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간다.”(사전41)는 것을 폭로하며 비판한다. 그와 같은 점에서 사회배외주의자는 “실제로 ‘자’국의(또는 모든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특권과 이익, 약탈과 폭력에 대한 옹호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회주의적 신념들과 바젤 국제사회주의 대회의 결정에 대한 전적인 배반”(사전41)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사회배외주의는 기회주의의 완결판”(사전46)이라고 쓰고 있다. “기회주의가 노동계급 운동 내 부르주아적 정치의 표현이라는 점,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피억압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의 표현이라는 점, 부르주아화한 소수의 노동자들이 그들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고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을 마크르스주의자라면 누구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사전46)이라고 레닌은 쓰고 있는 것이다.

레닌이 폭로하고 비판하는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배반은 실로 안타깝고도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인류 역사에서 흔하지 않은 너무나 소중하고도 귀한 종(種)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안타까움과 비통함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왜 바젤 선언을 배반했는가, 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했는가. 애초에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들이라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국 방위’를 위해 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맑스주의자였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을 용인하며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갔는가라는 점은 짚어봐야 할 문제다. 레닌 역시 그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레닌이 지적하듯이 배반의 중요한 이유 중에는 ‘경제적 토대’가 있다.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는 동일한 경제적 토대를 갖고 있다. 특권을 갖고 있는 소수의 노동자층과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이 그러한 토대인데, 이들은 ‘자’국 부르주아지가 타국을 강탈해서 얻는 이윤의 일부 부스러기를 누릴 ‘권리’와 지배 민족으로서의 지위에서 오는 특권을 방어하고 있다.”(사전47)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소수의 노동자 특권층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뼈아프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비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특권’을 지키기 위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평등’을 저버리는 것은 배반이기 이전에 그들의 ‘선택’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평등’의 가치 이전에 ‘경제적 이익’과 ‘특권’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 소수 노동자 특권층들이 이미 ‘경제적 이익’과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 ‘평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위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특권의 유혹은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게 만들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기회주의적이거나 ‘경제적 이익’과 ‘특권’에 매수당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신념’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레닌처럼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입되거나 강요된 신념이 아니라 스스로 납득하여 확립한 신념이라면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냐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내부’도 중요할 것이다. 그 내부가 맑스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이냐는 것이다. 가령, 그들이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대로 내부가 ‘평등’한가라는 것도 ‘신념’을 형성하고 지켜가는 데 중요한 요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배반 혹은 선택에서 ‘경제적 이익’과 ‘특권’과 같은 외부적 요인 못지않게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내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 ‘내부’가 얼마나 평등한가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다. 동일한 노동자계급이며 맑스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지만 그들은 다를 수 있는 이미 다른 존재라는 것이 존중될 때 ‘평등’해질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은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맑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그것이 배반이든 선택이든 그들 사회배외주의자들이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권력으로 넘어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경제적 이익’과 ‘특권’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면서 노동자 계급과 사회주의 혁명 운동의 특권층으로 머무는 것은 노동자 계급과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야기하며 평등한 사회로 가는 길을 교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이 그들의 배반과 선택을 존중하며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치를 선명히 하며 그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몰아내는 것은 옳았으며 중요한 투쟁으로 보인다. 그들 소수 노동자 특권층은 늘 배반과 평등의 가치를 깨뜨리며 노동자 계급 내부를 분열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들과의 연합은 노동자들과 그들 ‘자’국의 부르주아지 간 동맹을 의미하며, 혁명적 국제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기회주의는 ‘성숙하여’ 이제는 노동계급 운동에서 부르주아지의 첩자로서 그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기회주의자들과의 연합은 노동자계급을 그들 ‘자’국의 부르주아지에 종속시키는 것을 실제로 의미하며, ‘자’국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여 타국을 억압하고 강대국의 특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모든 나라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사전49)

레닌의 사회배외주의자들에 대한 폭로와 비판과 단절은 맑스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평등’의 가치를 지켜가는 과정이며, 노동자 계급과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막고 ‘내부’를 지켜가는 과정일 것이다. 또한, ‘평등’의 가치를 형성하며 지켜가는 것 그 자체가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 ‘내부’를 상하 없이 골고루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러한 ‘평등’의 가치에 대한 논의를 사회 전반에 확장 시키는 일일 것이다.

다니엘 코엔의 시각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적 시각’이 점차 사라져 인류 전체가 ‘경제적 이익’과 ‘특권’에 매수당해 불평등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노동자 계급, 맑스주의, 사회주의 내부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야기하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단절하며 평등한 사회를 향한 투쟁을 해나갔던 것이다.

6.비합법과 소수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국주의적인 국제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입법도 사법도 행정도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편에 선 정치인들과 법조인들과 관료들에게 합법적으로 유리할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에게 불평등한 법을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냉소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공기가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유에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며 준법 투쟁이나 평등한 법으로의 개정을 위한 투쟁들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법 자체가 문제라면 법을 바꾸려는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럴 경우 합법과 비합법의 이분법적인 구분보다는 불평등한 법을 문제 삼으며 바꾸어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레닌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내부의 청산주의가 “새로운 혁명을 위한 투쟁의 포기, 비밀 조직 및 비밀 활동의 포기, ‘비합법에 대한 경멸과 조롱, 공화제 슬로건에 대한 조롱 등”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판한다.(사전88) 프라우다파는 “당의 혁명적 원칙에 충실했고 노동계급 운동의 부활 기운(특히 1911년 봄 이후)을 북돋았으며 비합법 조직 활동과 공개 조직 활동을 결합시키고 신문과 선동을 결합시킴으로써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다수를 자기 주위에 결집시킨”반면 “청산파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분자들의 지지에 전면적으로 의존했다.”고 비판하고 있다.(사전89-90) 레닌이 청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합법성에 대한 굴종‘과 그에 따른 ’대러시아인 지주들과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특권 및 이권의 옹호‘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대중을 조직하고 사회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모든 합법적인 가능성들을−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하지만, 합법성에 대한 굴종과는 단절해야 한다.”(사전55) ”청산주의는 민족적 자유주의 노동자 정치를 취하는 조류다. 청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대항하여 급진 소부르주아지의 일부와 한 줌의 특권적 노동자층이 ‘자’국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이룬 것이다.“(사전92-93)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사회배외주의자들과 같은 노동계급 내의 소수 특권층의 배반과는 단호히 단절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한 논쟁에서 정파주의나 패권주의로 인한 내부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파벌 싸움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서로 다른 입장들이 논쟁을 통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서로 다른 입장이 서로 다른 채로 공존할 수 있는 것 또한 ‘평등’의 한 양태일 수 있다. 부르주아로의 배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으로 반목하고 분열되더라도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며 평등의 가치를 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살려 할 때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의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라면 설사 자신들이 소수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레닌은 소수의 볼셰비키 당을 이끌어 ‘전쟁 시대를 내전 시대의 시작으로 전화’시켰다. 레닌은 단호하게 주장한다. “현 시점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반대파의 주된 임무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드는 것, 그리고 우리가 제국주의 전쟁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노동자들에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밝혀주고, 대중의 혁명적 행동 슬로건을 내오는 것, 즉 제국주의 전쟁 시대를 내란 시대의 시작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사전78-79) 그러면서 레닌은 ‘우리 당의 임무’에서 ‘기회주의에 맞선 단호한 투쟁’에 대해서 강조한다.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에 맞선 30년간의 단호한 투쟁이 없었다면 자신의 당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쟁은 유럽 기회주의의 수치스런 붕괴를 가져왔고 우리나라의 민족적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배외주의적 청산주의 간의 동맹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세계 전쟁의 경험은 계속해서 우리 당이 지금까지와 같은 일관된 혁명적 길을 따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리의 확신을 한층 더 강화시켜준다.”(사전98)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인자들이 존재한다. 처음에 그 숫자가 아무리 작더라도 이들 마르크스주의 인자들을 모아내서 그들의 이름으로 지금 망각된 진정한 사회주의의 약속들을 되살리고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배외주의자들과 단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서도록 요구하는 것, 이것이 시대의 과업이다.”(사전79-80)

레닌이 시대의 과업을 통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사회주의에 이르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곳을 살아본 적도 없고 살아 본 이들의 입장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이 쓰고 있는 레닌의 승리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이 승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레닌은 승리하기 위해 쓰고 있었고, 승리하며 쓰고 있었고, 승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레닌도 알고 있었듯이 레닌의 승리는 이제 겨우 사회주의의 시작일 뿐이었다.

7.시작을 위한 준비

자본주의도 언젠가는 붕괴할 것이다. 언제 붕괴할지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길 것인지 조금이라도 늦출 것인지, 붕괴 이후에 어떤 사회를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하고 소비하는 노동자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유용한 정치다. 레닌은 그와 같은 제국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정치·경제적 이용을 이용하여 내란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다.

이제 레닌은 없다. 그 누구도 동일한 레닌이 될 수 없지만, 또 다른 레닌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레닌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론적(『제국주의론』), 정치적(『공산주의 좌익 소아병』), 혁명적(『사회주의와 전쟁』) 실천들을 그는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서 글로 남겼다. 레닌의 삶과 글을 통해,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우리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제국주의 시대에 시작하여 다시 시작되려는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를 내전 시대의 시작으로 전화’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와 같은 평등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를 시작하는 데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평등한 사회의 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시작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준비의 내용이나 과정은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전쟁의 위기를 마주하면서 레닌이 비판하며 투쟁했던 ‘평화주의, 민족주의, 사회배외주의, 합법성에 대한 굴종’에 대한 단절과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를 내란의 시대로 전화하기 위한 소수의 투쟁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건너가기 위한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살펴야 할 문제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1) V.I.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양효식 옮김, 아고라 2017. 32쪽. 아래에서 이 책에 대한 인용은 (사전쪽수)로 표기함.
2) D. 코엔: 『악의 번영』, 이성재‧정세은 옮김, 글항아리 2010, 271~272쪽.
3) B.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서지원 옮김, 길 2018. 25쪽.
4) 1986년 4월 26일 폭발 사고 당시 폭발 반경 30km 모두 강제 이주, 6년간 해체작업에 투입된 노동 자 5722명 사망, 지역 주민 2510명 사망. 폐쇄 마을 우크라이나 16개, 벨라루스 485개에 이른다고 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해체작업은 현재도 진행중이라고 한다. 출처: https://jangane.tistory.com
5) 황정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어떻게 봐야 하는가?」, socialist.kr. 2022년 3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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