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본주의 기본모순: 사회적 생산과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 –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을 중심으로

이현숙 | 자유기고가

지난 ≪현장과 광장≫제2호에, 김성구 교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실렸다. 그 글을 읽고, 논의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 기본모순을 정리하고, 그 모순의 전개 속에서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1. 유물론적 역사관

엥겔스는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하여, 19세기 초반에 발생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물론적 역사파악이 등장하여: 인용자) 이로써 이제 사회주의는 더 이상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은: 인용자) 이러저러한 천재적 두뇌의 우연한 발견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투쟁의 필연적인 산물로 보였다. 사회주의의 과제는, 가능한 한 완전한 사회체계를 작성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이 계급들(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역할-인용자)과 그들의 상호투쟁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고, 이를 통해 창조되는 경제적 상황에서, 충돌의 해결을 위한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 중요한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그것의 역사적 연관과 관련하여, 그리고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의 그것의 필연성과 관련하여 서술하는 것, 따라서 그것의 몰락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것… (강조는 인용자)[1]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2]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 발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년, pp. 453-454.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경제적 상황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충돌의 해결을 위한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 즉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을 규명하고, 그 속에서 사회주의로의 발전 혹은 이행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자본주의 운동 자체에서, 그리고 특별히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 그것의 몰락의 필연성과 사회주의로의 이행 혹은 혁명의 가능성과 필연성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2. 사회적 생산과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은 사회적 생산과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다.

2.1. 개별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개별적(사적) 생산 :

엥겔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본주의적 생산 이전에는, 즉 중세에는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데 기초를 둔 소경영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자유농 또는 예농이었던 소농민의 경영, 도시들의 수공업. 노동수단 ― 토지, 농기구, 작업장, 수공업 도구 ― 은 개별적 사용만을 고려한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 수단이었던지라, 필연적으로 작고 왜소하며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통상적으로 생산자 자신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상품 생산에서는, 노동의 산물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혀 성립될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개별 생산자는 종종 자기 스스로 산출하기도 했던 자기에게 속하는 원료로, 자기 자신의 노동수단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손노동으로 그것을 제작했다. 그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전유할 필요도 없었고, 그것은 저절로 완전히 그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생산물에 대한 소유는 자기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타인의 조력이 사용된 경우에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부차적인 것에 머물렀으며… (강조는 엥겔스)[3]엥겔스, 같은 책, pp. 456-458.

“노동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종종 자기 스스로 산출하기도 했던 자기에게 속하는 원료로,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손노동으로” 생산하는 소경영이 개별적(사적) 생산이다. 중세의 자유농 또는 예농이었던 소농민의 경영, 도시들의 수공업이 그러한 예들이다.

사회적 생산:

(소경영의: 인용자) 이러한 분산되고 협소한 생산수단을 집적시키고 확대하여 현재의 생산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렛대로 바꾸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그것의 담지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부르주아지가 15세기 이래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이 역할을 역사적으로 수행했는가에 대해서 맑스는 ≪자본≫ 제4편에서 상세히 묘사하였다: 단순 협업, 매뉴팩처, 대공업. 그러나 그곳에서도 논증되었다시피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개인의 생산수단에서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요컨대 오로지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는, 저 제한된 생산수단을 강력한 생산력으로 전화할 수 없었다. 물레, 베틀, 대장간의 해머를 대신하여 방적기, 역직기, 증기 해머가 등장하였다; 개별적 작업장을 대신하여 수백 수천 명의 공동작업을 요구하는 공장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자체도 일련의 개인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위로 전화하였고, 생산물도 개인적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전화하였다. 이제는 공장에서 나오게 된 방사, 직물, 금속 제품 등은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차례 거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만들었고, 그것은 나의 생산물이다. …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성장적인 무계획적 분업의 한가운데에 개별공장에서 조직되는 계획적 분업을 세웠다; (소경영의: 인용자) 개별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들어선 것이다. (강조는 엥겔스)[4]엥겔스, 같은 책, pp. 456-457.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사회적 생산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생산수단이 거대해진다. 강력한 기계설비를 갖춘 거대한 공장이 등장한다. 둘째, 수백 수천 명의 공동작업, 즉 인간들의 총체에 의해서만 이러한 생산수단이 사용될 수 있다.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전화한 것이다. 셋째, 개별공장에서 계획적 분업이 조직된다.

그러면 사회적 생산은 오로지 개별공장안에서만의 문제인가. 그렇지는 않다. 레닌은 사회적 생산의 개념을 사회전체로 확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통한 노동의 사회화(생산의 사회화와 같은 의미: 이현숙)는 같은 장소에서 인간들이 노동한다는 점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다만 과정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사회적 노동의 전문화라는, 그리고 각각의 주어진 산업 부문에서의 자본의 수의 감소와 개별적 산업부문 수의 증가라는 자본의 집적이 수반된다는 점을 본질로 한다. 즉 수많은 파편화된 생산과정들이 단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 융합된다는 점을 본질로 한다.[5]오토마르 크라취, “국가독점자본주의 주제에 대한 관한 토론” ≪국가독점자본주의이론연구 Ⅱ≫, 정운영 편저, 돌베개, 1988, p. 180에서 재인용. 이 … Continue reading

하나의 공장에서, 즉 같은 장소에서, 인간들이 노동한다는 것도 사회적 생산의 하나의 부분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는 노동이 전문화되면서 자본이 분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집중되면서 자본이 대기업으로 결합하면서 자본의 수가 감소한다. 그리고 이들 자본들 간에는 긴밀한 분업이 발생하여, 생산이 점차로 단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 융합된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으로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직접 만들었던 각종 부품들을 외부에서 조달한다. 브레이크 생산기업, 타이어 생산 기업, 자동차용오디오 생산기업 등등이 생겨서 분업체제가 생긴다(“개별적 산업부문 수의 증가”). 자동차제조에 사용되는 제품을 만드는 철강 기업, 플라스틱기업 등등이 사회적 분업체제로 결합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현대차와 기아차가 현대-기아차로 하나로 합병된다(“주어진 산업 부문에서의 자본의 수의 감소”). 이렇게 한편으로는 이른바 계열화 등에서 보는 것처럼,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면서, 다수의 기업들이 자동차 생산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 융합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기아차로 합병되면서, 두 개의 기업으로 파편화되었던 것에 비해서, 두 기업의 생산들은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으로 융합된다.

레닌의 상세한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예를 들어, 소규모 생산자들 스스로 실을 잣고 그것을 옷감으로 만드는 수공업 직조의 시대에는 제조업분야가 몇 개에 불과했다(방적과 직조는 합쳐져 있었다). 그러나 생산이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화되면, 제조업의 독립된 분야들은 수가 증가한다. 면방적은 독립적으로 행해지고, 직조도 마찬가지다. 생산의 바로 이런 분할과 집중은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킨다. 기계 제작, 석탄 채굴 등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더욱더 특화된 제조업 각 분야에서, 자본가들의 수는 꾸준히 감소한다. 이는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연결고리가 점점 더 튼튼해지고, 생산자들은 단일한 하나로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6]레닌,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최재훈 역, 아고라, 2018, p. 86.

엥겔스는 사회적 생산을 “수백 수천 명의 공동작업, 즉 인간들의 총체”에 의한 생산으로 보고, 공장 안에서 그것의 예를 들었다. 레닌도 사회적 생산을 엥겔스와 같은 의미로 “생산자들이 단일한 하나로 결합”되어 생산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공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더 확대하여, 사회 전체에서의, 인간들의 총체에 의한 생산으로 규정한다.

레닌을 좀 더 들어보자.

고립된 소생산자들은 각자 여러 개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따라서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다. 예를 들어 수공업자가 자신이 아마 섬유를 짜고 잣고 만들 때,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의 독립적이다. …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의 사회화 아래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자는 면실 제조업자에게 의존한다. 후자는 면화를 키우는 자본주의 경작자와 기술업무소유자, 석탄소유자 등에게 의존하는 식이다. 그 결과 어떠한 자본가도 서로가 없이는 헤쳐갈 수 없다. … 작고 고립된 기업들 체제에서 작업이 그 중 하나에서 멈춰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몇몇 구성원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 전체적인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고, 따라서 전반적인 관심을 끌거나 공공의 개입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기업, 즉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분야에 관련되어 있어 거의 사회 전체를 위해 작업하고 또 사회 전체에 의존하고 있는 기업에서 작업이 차질을 빚으면(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나는 사회화가 정점에 달한 경우를 가정한다), 작업은 사회의 다른 모든 기업에서도 차질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기업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얻을 수가 있고, 그 기업의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어야지만 그들 자신의 상품을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과정들은 하나의 단일한 사회적 생산과정으로 통합된다.[7]레닌 같은 책, pp. 86-87.

다시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광산기업에서 철광석을 캐고, 현대제철소에서 차량용 강철을 만들고, 현대자동차에서 그 철로 차를 만든다. 이렇게 생산의 연쇄가 발달하는 것, 즉 “어떠한 자본가도 서로가 없이는 헤쳐갈 수 없다”는 것을 생산의 사회화로 규정한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봉건시대에도, 광산에서 철광석을 캐고, 제철소에서 철을 만들고, 대장간에서 호미와 낫을 만들고, 농민은 그 농기구로 농사지어 쌀을 생산했다. 이렇게 당시에도 생산의 연쇄가 존재했고,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 존재한 것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엥겔스는 형이상적 사유방법과 변증법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이상학자에게 있어서, 사물들과 그 사상적 모사인 개념들은 개별적으로, 하나씩 순차적으로, 다른 것과 무관하게 고찰해야 할, 고정된, 부동의, 한번 주어지면 그만인 연구 대상들이다. … (그들은 한계에 부딪치는데: 인용자) 개별사물들에 집착하다가 그 사물들의 연관을 망각하고, 그것들의 존재에 집착하다가 그것들의 운동을 망각하고,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예를 들어 어떤 동물이 살아 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또 그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 문제가 때로는 극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자궁 안의 태아의 살해가 어떤 시점부터 살인이 된다고 하는 합리적인 한계를 찾느라 헛되이 골머리를 앓았던 법률가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순간도 확정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생리학은 죽음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매우 오랜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유기체는 순간마다 바로 그것이면서 동시에 바로 그것이 아니다; 순간마다 모든 유기체는 외부로부터 공급된 소재를 소화하고 다른 소재를 배설하며, 순간마다 유기체 내의 세포들은 사멸하고 새로운 세포들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길건 짧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 유기체의 소재는 완전히 갱신되어 다른 소재 원자재들로 교체되는바, 그러므로 모든 유기체는 항상 바로 그것이면서 또한 다른 것이다.[8]엥겔스, 같은 책, pp. 448-449.

사물을 운동 속에서, 그리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죽어간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이 통일되어 있는 존재가 생명체이다. 삶이 우세할 때 청소년기 혹은 청년기, 삶과 죽음이 대등할 때 장년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죽음이 우세해지면 노년기라고 부른다.

사회적 생산은 노예제에도, 봉건시대에도, 자본주의 시대에도, 그리고 사회주의에도 존재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발달 정도(운동)와 따라서 사회 전체의 생산에서 차지하는 규정력(전체적 연관)이 다르다. 사회적 생산이 발달해 가면서, 봉건시대에는 부차적이었고, 자본주의에서는 주요한 것으로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에는 전면적인 것이 된다. 반대로 개별적 생산도 항상 존재한다. 봉건시대에는 주요한 것이고, 자본주의에서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는 점차로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엥겔스는 말한다.

Ⅰ. 중세 사회: 소규모 개별적 생산. … 상품생산은 이제 막 발생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미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를 맹아로써 내포하고 있다. (강조는 엥겔스)[9]엥겔스, 같은 책, pp. 472-473

즉, 중세에도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 따라서 사회적 생산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 생산에 비해 미약하고 부차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와 같이 공황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생산이란 완결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 중에는 있게 된다. 만약 사회 전체의 기업을 하나의 콘체른[10]콘체른(Konzern): 법률적으로 독립하고 있는 몇 개의 기업이 출자 등의 자본적 연휴를 기초로 하는 지배 ·종속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기업결합체. … Continue reading으로 결합한다면, 그 최고치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 콘체른을 소유하고 계획적으로 지휘할 때, 그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이때의 국가는 물론 노동자 국가이어야만 하고, 그럴 때만 생산도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으로 변화될 수 있다.

2.2.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

전유(專有)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 독차지하여 가짐”이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생산물, 즉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소유한다는 말이다. 사회가 공동으로 생산한 것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혼자 독차지하는가.

엥겔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 내부의 자연성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점차로 성립하는 분업이 생산의 기본형태인 곳에서는, 그 분업은 생산물들에 상품이라는 형태를 각인하며, 개별생산자들은 상품의 상호교환에 의해서, 즉 구매와 판매에 의해서 자신들의 다면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중세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농민은 수공업자에게 농경생산물을 판매하고 그 대신 그에게서 수공업의 산물을 구매하였다. 그런데 개별 생산자들의, 즉 상품생산자들의 이 사회에 새로운 생산방식이 끼어들었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성장적인 무계획적 분업의 한 가운데, 개별공장에서 조직되는 계획적 분업을 세웠다; 개별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들어선 것이다 . … 개별적 생산은 한 분야씩 차례로 패퇴하였고, 사회적 생산은 낡은 생산방식 전체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의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은 거의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로 상품생산을 고양시키고 촉진하는 수단으로서 도입된 것이다. 사회적 생산은 상품생산 및 상품 교환의 다음과 같은 이미 발견된 특정한 지렛대를 직접 실마리로 삼아 성립하였다: 상인자본, 수공업, 임금노동. 사회적 생산자체가 상품생산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상품생산의 전유형태는 사회적 생산에 대해서도 통용력을 완전히 유지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생산의 혁명적 성격”은 무엇인가. 첫째, 중세의 개별적 생산자들의 상품생산을 절멸시킨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를 연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사회적 생산이 더욱 발전하면 상품생산 자체, 즉 자본주의를 부정하게 된다. 상품생산 사회의 전제는 “사회 내부의 자연성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점차로 성립하는 분업”인데, 사회적 생산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계획적 분업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레닌을 들어보자.

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한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현저하게 진전된다. 특히 기술의 발명이나 개선과정도 사회화된다.

이것은 과거와 같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분산된 채 미지의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생산하던 제조업자들 간의 자유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집적은 엄청나게 진전되었으며 후에 살펴보겠지만, 한 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원료자원(예컨대 철광석 매장량)을 대략적으로 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 원료자원은 거대한 독점체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또한 대략적인 시장의 크기도 산정하여, 독점체들은 협정을 통해 자기들 사이에서 시장을 ‘분할’해버린다. 숙련노동이 독점되고, 일급 기술자들이 고용되며, 운송수단 ― 미국의 철도, 유럽과 미국의 선박회사 ― 이 장악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한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11]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초판, 1988, p. 53.

레닌을 하나 더 들어보자.

대기업이 더욱 거대해지고, 대량의 자료에 대한 정확한 자료에 기초하여,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주된 원료 공급의 2/3, 3/4 아니 전부를 계획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면, 또 그 원료를 체계적 조직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수백 수천 마일까지 떨어진 생산의 적재적소로 운송할 수 있게 되면, 그리하여 수많은 종류의 완제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원료 처리 작업 단계를 하나의 중심에서 감독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이 생산물들을 하나의 계획에 따라 수억의 소비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게 되면(예컨대 미국의 석유트러스트가 미국과 독일에 석유를 공급 판매하는 것처럼), 그때 우리는 … 바로 생산의 사회화[12]전국적인 생산의 사회화, 즉 계획적 분업과 계획적 생산을 위해서, 산업체만이 아니라 은행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은행은 사회의 신경계통과 … Continue reading)

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그때 사적 경제와 사적 소유관계는 더 이상 그 내용물에 적합하지 못한 껍질, 따라서 인위적으로 그 제거를 늦춘다면 불가피하게 부패해버릴 수밖에 없는 껍질, 곧( 혹시 최악의 경우 기회주의적 종양의 치료가 지연된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부패 상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으나, 결국은 제거되고 말 껍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13]레닌, 같은 책, p. 165.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생산의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은 거의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로 상품생산을 고양시키고 촉진하는 수단으로서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 생산자체가 상품생산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중세의 개별적 생산에 적합했던) 상품생산의 전유형태는 사회적 생산에 대해서도 통용력을 완전히 유지하였다.”

그러면 중세의 개별적 생산에 적합했던 상품생산의 전유형태는 무엇인가.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상품생산에서는 노동의 산물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혀 성립될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개별생산자는 종종 자기 스스로 산출하기도 했던 자기에게 속하는 원료로, 자기 자신의 노동수단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손노동으로 그것을 제작했다. 그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전유할 필요도 없었고, 그것은 저절로 완전히 그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생산물에 대한 소유는 자기노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타인의 조력이 사용된 경우에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부차적인 것에 머물렀으며 ….[14]엥겔스, 같은 책, pp. 457-458.

자기노동에 기초하고 있는 소유, 생산도 사적이고 전유도 사적이다. 여기에 모순은 없다.

그런데 대작업장과 매뉴팩쳐에 생산수단이 집적되었고, 생산수단은 사실상 사회적 생산수단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마치 그것들이 전과 마찬가지로 개인들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인 것처럼 취급되었다. 이제까지 노동수단의 보유자들이 생산물을 전유한 것은, 그 생산물이 통상적으로 노동수단의 보유자 자신의 생산물이고, 타인의 보조노동은 예외였기 때문이라면, 이제 생산물이 더 이상 자신의 생산물이 아니고 전적으로 타인의 노동의 생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노동수단의 소유자가 계속 전유하였다. 생산물은 이제 사회적으로 산출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생산수단을 움직이고 실제로 생산물을 산출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유하지 않고 자본가가 전유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생산수단과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인들의 사적 생산을 전제로 하는 전유형태, 따라서 각자가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보유하고 그것을 시장으로 가져가는 그러한 전유형태에 복종한다. 생산방식은, 이 전유형태의 전제를 지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유형태에 복종한다.[15]엥겔스, 같은 책, p. 458.

갓 쓰고 자전거 타기! 생산물은 노동자들 공동의 생산물이 되었다. 그러면 그들 공동의 소유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적 생산물처럼 자본가 개인이 소유한다. 그는 더구나 노동도 하지 않았다. “생산방식은, 이 전유형태의 전제 ― 개별적 생산 ― 를 지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유형태 ― 개인적 소유 ― 에 복종한다.”

“이제까지 노동수단의 보유자들이 생산물을 전유한 것은, 그 생산물이 통상적으로 노동수단의 보유자 자신의 생산물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노동수단은 자본가의 소유가 되었고, 그는 노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생산물을 독차지한다. 이것이 엥겔스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이다. 현실성이 아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생산물을 전유하는 원인은 두 가지, 즉 생산수단의 소유와 자기 노동이다. 그러면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생산물을 독차지한다.”면, 노동을 투여한 노동자도 그것을 독차지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었다. 단지 논리의 문제라면 그러하다. 그런데 노동자는 왜 그것을 독차지하지 못했는가?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면 힘이 그것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전의 엥겔스 인용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회적 생산은 상품생산 및 상품 교환의 다음과 같은 이미 발견된 특정한 지렛대를 직접 실마리로 삼아 성립하였다: 상인자본, 수공업, 임금노동.”[16]엥겔스, 같은 책, p. 457.

“예외로서, 부업으로서, 임시방편으로서, 과도기적인 것으로”서의 노동형태이기는 하였지만, 이미 노예제부터 전해 내려오던 “임금노동”을 지렛대로 삼아서, 상인 자본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엥겔스는 매우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좀 더 사고를 진척시켜보자. 자본주의가 태동할 당시, 임금노동자는 아주 소수였을 것이고, 자본가는 그들을 복종시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무산자를 대규모로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이 이른바 “본원적 축적(혹은 시초 축적)”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강제노동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서 국가의 폭력이 수반되었다. 맑스는 “만약 화폐가 오지에(Marie Augier)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한쪽 볼에 핏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하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17]칼 맑스, ≪자본론≫ 제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 p. 956.라고 그 참혹한 모습을 서술하였다.

이 생산양식(중세의 개별적 소경영: 인용자)은 철폐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철폐된다. 그것의 철폐, 즉 개인적이며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의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의 전환되는 것, 그리고 광범한 국민대중으로부터의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 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러한 처참하고 가혹한 국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거기에는 일련의 폭력적인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가운데서 오직 자본의 시초 축적의 방법으로서 획기적인 것만을 고찰하였다.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은 가장 무자비한 만행에 의해서, 그리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야비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정열의 충동 하에서 수행되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인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건과의 결합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타인의 노동[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서 축출된다.[18]칼 맑스, 같은 책, p. 958.

“타인의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소유”에 승리한 방법이 서술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폭력을 동반하였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야비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정열의 충동 하에서 수행”된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이라는 “가장 무자비한 만행”이었다. 폭력은 새로운 사회의 산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산수단이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것, 그 자체가 그들의 힘의 우위를 입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동시에 자본의 논리 ―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노동의 생산물을 전유하는 것 ― 가 관철되어 과정이기도 하다.

3. 기본모순의 표현으로서 두 개의 모순

생산방식은, 이 전유형태의 전제를 지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유형태에 복종한다. 새로운 생산방식에 자본주의적 성격을 부여하는 이 모순 속에는 이미 현재의 충돌 전체가 맹아적으로 놓여 있다. 새로운 생산방식이 모든 결정적 생산분야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모든 나라들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개별적 생산을 보잘 것 없는 잔재가 되도록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의 양립 불가능성도 더욱 명명백백해질 수밖에 없었다.[19]엥겔스, 같은 책, pp. 458-459.

여전히 사회적 생산방식은 개별적 생산의 전유형태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 복종은 일시적이다. 그 전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산이 발전할수록 ― 모든 결정적 생산분야와 주요 국가들로 퍼져나가고,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 사회적 생산방식은 자신에게 맞는 전유형태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생산방식의 전유형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잠재되어 있던 사회적 대립과 충돌은 현실로서 나타나게 된다.

3.1.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대립과 충돌:

사회적 생산이라는 극에서는 노동하는 자들을 만든다. 자본주의적 전유라는 극에서는 전유하는 자들을 만든다. 결국 한편에서는 부지런한 빈자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게으른 부자들이 축적된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의 모순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대립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면성실, 선하고 정직함은 가난과 노동과 실업의 고통, 멸시와 천대를 부른다. 게으름과 사기와 협작은 부와 권세, 명예를 낳는다. “현존하는 사회 장치들은 비이성적이고 부정하다는 통찰, 이성이 어불성설로 되고, 선행이 재난으로 되었다는 통찰이 싹튼다[20]엥겔스, 같은 책, p. 455”. 노동자들의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투쟁·충돌이 시작된다.

3.2. 개별공장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의 대립 그 표현으로서의 자본 사이의 경쟁전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대립과 충돌은 자본 간의 경쟁전이다. 이것과 기본 모순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중세의 개별적 상품생산에서는 수공업자가 대개 혼자서 일한다. 도제도 있지만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농촌에서의 상품생산도 사정은 같다. 즉 개별 작업장에서의 상품생산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거나, 극히 미미하다.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생산을 의식적으로 조직하지 않는다. 생산의 무정부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각각의 생산단위에서의 비조직성과 사회 전체에서의 생산의 비조직성(무정부성)은 나란히 사이좋게 병존하고 있다.[21]현재 한국에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창업과 폐업을 반복해도, 사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다. 이들도 개별적 생산의 형태인데, 정부가 그들을 … Continue reading 주요한 문제는 낮은 생산력과 과소생산 때문에 발생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개별 공장에서 생산은 조직되어 있다. 농촌에서도 집단농장에서 생산을 조직한다.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을 조직하여 계획하고 통제한다. 상품생산은 폐지된다. 개별 생산단위에서의 조직화는 사회전체에서의 조직화에 조응한다. 여기에 대립과 충돌은 없다.[22]개별 생산단위와 전체적 계획 사이에서 대립과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력 자체가 낮거나, 개별단위에서의 조직이 … Continue reading

자본주의에서는 개별기업에서 생산을 조직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생산을 조직하지 않는다. 즉 생산의 무정부성이 지배한다. “개별 공장 내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에 대립”이 나타난다. 이 대립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개별 공장 내에서 생산이 조직되면서, 생산은 빠르게 발달한다. 두세 개의 기업이 사회 전체의 수요를 넘어설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된다. 좁은 시장을 두고 자본 간의 경쟁은 격화된다. 산업 전쟁이 이어지고, 승패가 결정되고 파산과 합병 등이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의 기업이 생산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충돌은 계속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까지 진행된다면, 이것은 사회적 생산이 완성된 모습이다. 조직된 개별기업의 생산은, 자신의 산업부문에서 스스로 전 사회를 조직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생산을 통제할 중앙을 세운 것이고, 자본주의 생산에 고유한 무정부적 생산을 극복한 것이다.

이렇게, 개별 공장에서 생산의 조직화는 (자본가들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 사회를 조직할 때까지 끝없이 전진하고자 한다. 전 사회를 장악하여, 생산의 무정부 상태를 타도하고, 생산의 정부를 세우고자 한다 (이러한 산업전쟁은 동시에 무정부성의 표현이기도 하다[23]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비교해 보자. 중국은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전란이 끝이 없다. 이것은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를 … Continue reading). 그러나 이것이 설사, 예외적으로 한 부문에서의 생산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있을지라도, 주요산업부문 전체를 장악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주요한 생산이 정부에 의해서 계획·통제되는 것은 사회주의이거나, 적어도 “사회주의를 위한 완벽한 물질적 준비”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생산의 무정부성도 또한 발전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개별적 상품생산자들의 사회에 끼어들었다.” 자본가들은 공동의 노동 생산물을 마치 개별적 생산의 결과인 것처럼 사적으로 소유한다. 그들이 이윤을 위해 사적으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소유하고 생산하는 한, “사회 내부의 자연성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점차로 성립하는 분업[24]엥겔스 같은 책, p. 457”은 극복될 수 없고, 이는 노동생산물에 상품형태를 각인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가 유지되는 한, 무정부 상태는 지속된다[25]엥겔스 같은 책, p. 460. “상품생산은 특유한, 내재적인, 자기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무정부 상태에도 … Continue reading.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중세에 농촌과 도시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자가 소비를 위한 생산을 무너뜨렸다. 중세의 지역적, 직업적 폐쇄성도 무너졌다. 상품생산사회가 확대·발전할수록 생산자들은 점점 더 개별화된 독립적 상품생산자들로 된다(자가소비를 위해 생산하던 농민들이 농산물을 상품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만들어 입던 옷을 자본가들에게 산다). 그만큼 그들 사이의 무정부성도 발달한다. 자본의 전쟁터인 시장은 국내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을 만들고, 무정부성은 국경의 장벽을 넘어 세계적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개별공장에서의 생산의 조직화는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대립하면서 끝없이 충돌하게 된다.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 상품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라는 왼손으로는 “개별공장에서의 생산의 조직화”를 낳고, 이는 무정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사적소유라는 오른손으로는 상품생산을 낳고, 이는 무정부성을 격화시킨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개별공장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의 대립”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4. 과잉생산공황 : 생산과 소비의 충돌

4.1. 공황의 원인

자본주의적 생산은 위의 두 개의 모순 속에서 운동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별공장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대립”은 자본 사이의 경쟁전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전은 개별자본가들에게 기계의 개선을 통한 생산력 증대를 강제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과 자본과 계급의 모순에 작용한다. 기계의 도입과 개선은 인간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이들은 취업자에게 압력을 가하여 임금을 전반적으로 하강시킨다.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계급의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등이 축적된다. 동시에 기계의 개선을 통한 생산력 증대는, 다른 한편에서의 자본의 축적을 의미한다.

이미 보았다시피, 현대 기계의 최고도에 도달한 개량 가능성은, 개별 산업자본가에게, 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기계를 끊임없이 개량할 것을, 기계의 생산력을 끊임없이 높일 것을 강제명령으로 전화시킨다. 그런데 자신의 생산영역을 확장할 사실상의 단순한 가능성도, 개별 산업자본가에게 있어서는 마찬가지의 강제명령으로 전화한다. 가스의 팽창력조차 완전히 어린애 장난에 비견될 엄청난 대공업의 팽창력은, 어떠한 저항도 조롱하는 질적이고 양적인 팽창 욕구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이 저항은 대공업의 생산물의 소비, 판로, 시장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시장의 팽창 능력은, 외연적으로나 내포적으로나, 무엇보다도 훨씬 약하게 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시장의 팽창은 생산의 팽창과 보조를 맞출 수가 없다.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며,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를 폭파시켜버리지 않는 한, 해결책이 산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하나의 ‘악순환’을 창출한다.[26]엥겔스, 같은 책, p. 463.

공황의 원인을 “시장의 팽창(소비)”은 제한적이지만, “생산의 팽창”은 거의 무한하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즉 생산과 소비의 충돌, 과잉생산공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장의 팽창이 제한적인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산의 팽창 자체에 기인한다. 생산을 팽창시키기 위해서 기계를 개선한 것이, 실업자를 만들고 노동대중을 빈곤 상태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제한된 소비는 생산의 팽창에 저항한다. 그 대립과 충돌, 그 표현이 과잉생산이고, 이것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공황으로 터져 나온다.

4.2 공황의 의미

“공황이 오면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발발한다. 상품 유통은 일시적으로 절멸된다. … : 생산방식(=생산양식: 인용자)이 교환방식에 반란을 일으킨다[기본모순 때문에 교환(유통)이 마비된다: 인용자].

공장 내부에서의 생산의 조직화가 발전하여, 그것과 나란히 또는 그것 위에 현존하는 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는 사실 ― 이 사실은, 공황 동안에 많은 대자본가와 그보다 더 많은 소자본가들의 몰락을 매개로 하는 폭력적인 자본집적을 통해서 자본가 자신들에게도 손에 쥘 정도로 분명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전체 메커니즘은 이 생산방식 자체가 산출한 생산력들의 압력에 눌려 말을 듣지 않게 된다.[27]엥겔스, 같은 책, p. 464.

“공황이 오면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발발”하고, 기본모순의 표현인 “공장 내부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도 충돌한다. 그 정도는 심각하여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나아간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한 사회에서 연간 자동차 수요는 100만대이다. 공장 내부에서 생산이 조직되면서 생산은 거대하게 팽창한다. 이제 자동차 기업 5개에서 150만대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러면 사회주의 사회라면 생산을 사회적으로 관리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공급을 적절하게 100만대로 조절한다. 여분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전체를 관리할 주체가 없다. 결국 무정부적 살육전이 발생한다. 1개사는 파산하고 공장은 고철더미가 된다. 1개사는 다른 회사에 합병되어 생산이 축소된다. 이렇게 공황시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자본가들의 몰락을 통해 “폭력적인 자본집적”이 발생한다. 이때 자본가는 깨닫게 된다. 생산이 이렇게 발달한 상태에서는 정부가 생산을 관리·조절하지 않고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특히 공황시기에, 무정부성에서 오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가 전면에 나선다. 이른바 “IMF 경제위기” 시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나서서 산업구조 조정(기업 간의 인수합병)을 지휘하고, 구제금융을 주어 기업을 살렸다. 이렇게 공황시기에 정부가 나서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공장 내부에서의 생산의 조직화가 발전하여, 그것과 나란히 또는 그것 위에 현존하는 사회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가 경제 전반에 항상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위의 예에서 필자는 자동차의 연간수요를 100만대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의 수요는, 구매력을 가진 “유효수요”이다. 자본주의가 창출하는 인민의 빈곤을 고려해보면, 그 사회의 절대적 수요는 150만대가 될 수도 있고 200만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1개사의 생산력은 완전히 파괴되고, 1개사는 축소된다. 노동자들도 실업자가 된다. 사회가 여전히 필요로 하는, 부의 원천인, 생산수단도 노동자도 폐기 처분된다. 문제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미리 자본으로, 인간 노동력의 착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화하지 않는 한, 활동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띠어야 할 필요성이, 그것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유령처럼 서 있다. 오직 이 필요성만이 생산의 물적 지렛대와 인적 지렛대가 결합되는 것을 방해한다 ; 오직 이 필요성만이 생산수단이 기능하는 것을 금하고, 노동자들이 노동하고 살아가는 것을 금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자신에게 더 이상 이 생산력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생산력들 자체는 모순을 지양하라고, 자신을 자본으로서의 성질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독촉한다[28]엥겔스, 같은 책, p. 465..(강조는 엥겔스)

“공황은 부르주아지가 생산력을 관리할 수 없음을 폭로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실업과 빈곤의 절망 속에서, “이 모순을 지양하라는, 자신을 자본으로서의 성질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하라”는 생산력의 외침을 듣는다.

5. 사회적 생산(력)을 승인 : 사회적 생산의 전진

공황의 예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전체 메커니즘이 이 생산방식 자체가 산출한 생산력들의 압력에 눌려 말을 듣지 않게 된다.” 때문에 “자본가계급 자신도 자본 관계 내에서, 대체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이 생산력들을 사회적으로 생산력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 예를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5.1. 주식회사

산업의 호황기에는 신용을 무제한적으로 팽창시킴으로써, 그리고 파산 자체는 자본주의적 대기업을 와해시킴으로써, 우리가 각종 주식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대량적 생산수단의 사회화형태를 촉진한다[29]엥겔스, 같은 책, p. 465.

위에서 엥겔스는 먼저 주식회사의 발달과정을 설명한다. 주식회사는 신용제도의 일종이다. 기업은 주식을 발행하여 기업의 일정지분을 넘기고, 이윤에서 일정 부분을 배당금이라는 형태로 지불한다. 즉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회사채를 발행하여 돈을 빌려서, 이자를 지급하는 것과 동일하다. 차이는 주식은 이자가 이윤의 양(“경영성과”)에 따라 결정된다면, 후자의 두 개는 일정하게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대한 주식회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사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자본주의적 대기업”)을 몰락시키고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주식회사는 대량적 생산수단의 사회화형태, 즉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으로 다루는 형태이다. 생산력들이 너무나 거대하게 자라났다. 그래서 그것은 자본가가 사적으로 소유할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공동으로 소유하여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주주들이 공동으로 소유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화의 형태만을 가지고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가 개인적 소유에 근거한 공동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羊)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낡은 형태 ― 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의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사적소유 기업:인용자) ― 와의 대립이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적 장벽 안에 붙들려 있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인 부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30]칼 맑스, ≪자본론≫ 제3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6. p. 546.

사회주의에서는 공장은 사회적 부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부이다. 물론 공장 일부분이 개인의 부가 아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결합되어, 연합된 생산자들로서, 사회적 부의 소유자이다.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인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이 극복되어 있다.

자본주의를 보자. 초기에 기업이 자본가의 소유일 경우, 자본가는 사회적 부인 공장과 그 생산물을 자신의 사적인 부로 만들었다. 이제 주식회사 제도에서는 거액을 가진 화폐자본가(사적인 부의 소유자)들은 소액주주들의 공동의 부(사회적 부)인 주식을, 증권거래소에서 매수하면서 수탈한다. 두 경우 모두 사회적 부를 사적 부로 만드는 것이고, 여기서 부의 사회적 부와 사적 부라는 성격은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대립의 형태는 바뀌고 있다. 하나는 잉여노동의 착취를 통해 생산수단의 직접적 소유라는 형태로, 하나는 주식의 매매라는 형태로.

5.2. 트러스트

국내의 하나의 같은 사업 부문의 대생산자들은 ‘트러스트’, 즉 생산의 조절을 목적으로 한 연연합체로 연합한다 ; 그들은 생산할 총량을 규정하고, 그것을 자신들 사이에 분배하고, 미리 설정된 판매가격을 강요한다. …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전화되고, 자본주의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이 닥쳐오는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항복한다.[31]엥겔스, 같은 책, pp. 465-466

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체들이 형성되어, “생산을 조절하고, 생산량을 결정하고, 그것을 분배하”는 것은, 계획적 생산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이 닥쳐오는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5.3. 생산에 대한 국가의 지휘와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렇든 저렇든,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휘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나는 (떠맡지: 인용자)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이나 교류수단(철도, 전신, 우편 등 교통통신시설:인용자)이 실제로 주식회사의 지휘에 비해 웃자라서 국유화가 경제적으로 불가피하게 된 경우에만, 비록 오늘날의 국가도 국유화를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만 국유화는 경제적인 진보를 의미하며, 사회 자체에 의한 모든 생산력의 점유획득을 위한 새로운 전초 단계에 다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2]엥겔스, 같은 책, p. 466.

이제 사회적 생산력은 주식회사의 지휘에 비해서도 웃자라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자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휘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적 지휘만이 거대한 생산력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의 생산에 대한 지휘”를 거론하며, 엥겔스는 국유화만을 거론하고 있다. “국유화는 경제적인 진보를 의미하며”, “사회 자체에 의한 모든 생산력의 점유획득을 위한 새로운 전초 단계”, 즉 혁명의 전초단계라고 규정한다. 레닌도 동일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독점자본을 국가가 (소유 혹은 생산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방식으로) 지휘하는 상태를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명명하며,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준비”라고 불렀다.

역사의 변증법에 따라 전쟁은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하는 것을 특별히 수월하게 해주었으며, 이로써 인류가 사회주의를 향하여 특별히 빠르게 전진하도록 해주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이다. 전쟁의 참화가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유발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조건이 무르익지 않으면 어떤 봉기도 사회주의를 가져올 수 없다. ―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준비, 사회주의의 문턱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의 사다리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단계와 사회주의라는 단계 사이에는 아무런 중간단계들이 없다.(강조는 레닌)[33]레닌, <임박한 파국, 어떻게 그것과 싸울 것인가>≪혁명의 기술에 관하여≫, 정영목 옮김, 생각의힘, 초판, 2017, pp. 171-172.

그렇다고 모든 국유화가 진보적이거나, 사회 자체에 의한 모든 생산력의 점유획득을 위한 새로운 전초 단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주식회사의 지휘에 비해 웃자라서 국유화가 경제적으로 불가피하게 된 경우에만 그러하다. 국가가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담배전매를 위해 담배의 생산을 국유화하는 것은 전혀 진보적이 아니다.

국가가 생산을 지휘하는 문제를, 엥겔스는 국가가 독점자본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논의하고 있다. 그 이후,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되고, 1930년 대공황 시기부터 전면적으로 전개된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지휘의 방식이 획기적으로 넓어졌다. 국유화, 국가 재정을 증대시켜 복지제도와 군수품 구매를 통한 “유효수요창출”, 파산에 처한 독점자본에 대한 구제금융 등, 지휘의 범위는 경제적 재생산과정에 전반으로 넓어졌다. 그리고 이를 위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지폐를 거의 무한정 발행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유기업을 사유화하는 현상도, 지휘의 포기가 아니라, 국가가 재생산과정을 지휘하는 방식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독점자본의 투자처를 보장하여 과잉자본의 탈출구를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지휘가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임종에 가까울수록 병원에 의지한다. 엥겔스의 지적처럼 “혁명의 전초단계”로서, 사회주의를 재촉하는 것이다.

국가부도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디폴트, 한국의 “IMF 경제위기”, 그리스 등 남부 유럽의 재정위기 등은 그러한 예이다. 세계적으로 주요 국가는 모두 만성적으로 거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자본가계급의) 국가의 지휘에 비해서도, 사회적 생산력이 웃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도 한계에 이른 것이다.

5.4.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사회적 생산의 승리

그러나 주식회사로의 전화도, 트러스트로의 전화도, 국가소유로의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들의 기관, 자본가들의 국가, 관념상의 총자본가이다. 현대 국가가 생산력들을 더 많이 자기의 소유로 떠맡으면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현실적인 총자본가로 된다. 국민들을 더욱더 착취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점에서 그 자본관계는 전도된다. 생산력들의 국가 소유가 충돌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해결의 칼자루는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이 해결은 현대적 생산력들의 사회적 본성이 실제로 승인되는 것에만, 따라서 생산방식 전유방식, 교환방식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성격과 일치시키는 것에만 놓여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의 지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지휘에 비해서도 웃자란 생산력을 사회가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점유 획득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34]엥겔스, 같은 책, pp. 467-468.

“자본가 국가의 소유로 전화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질을 지양하지 못한다.” 자본은 증식해야만 자본이다. 그래서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가 자본을 지휘하고, 관리할수록 “자본관계는 폐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즉, 자본은 점점 더 거대하게 성장한다. 대중의 빈곤도 점점 더 거대해진다. 생산과 소비의 충돌은 일상적이다. 만성적 불황과 침체가 나타난다. 자본가 국가는 자신의 지휘에 비해서도, 사회적 생산력이 웃자랐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의 지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지휘에 비해서도 웃자란 생산력을 사회가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점유 획득하는 것”, 즉 사회적 생산에 사회적 소유를 조응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은 없다.

해결의 칼자루는, 현재 나타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국가 소유와 경제 전반에 대한 지휘 안에 숨겨져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주요 생산수단과 교통통신수단, 그리고 은행을 우선 노동자 국가 소유로 전화시키고, 경제 전반을 지휘해야 한다.

1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
2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 발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년, pp. 453-454.
3 엥겔스, 같은 책, pp. 456-458.
4 엥겔스, 같은 책, pp. 456-457.
5 오토마르 크라취, “국가독점자본주의 주제에 대한 관한 토론” ≪국가독점자본주의이론연구 Ⅱ≫, 정운영 편저, 돌베개, 1988, p. 180에서 재인용. 이 책에서 밝히는 레닌의 출처: W.I. Lenin, Ausgewählte Werk in zwei Bänden, Dietz Verlag, Berlin 1953, Bd Ⅰ, S. 127.
6 레닌,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최재훈 역, 아고라, 2018, p. 86.
7 레닌 같은 책, pp. 86-87.
8 엥겔스, 같은 책, pp. 448-449.
9 엥겔스, 같은 책, pp. 472-473
10 콘체른(Konzern): 법률적으로 독립하고 있는 몇 개의 기업이 출자 등의 자본적 연휴를 기초로 하는 지배 ·종속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기업결합체. 기업결합이라고도 한다. 카르텔이 개개의 기업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트러스트가 동일산업 내의 기업합동인 점과는 대조적으로, 각종 산업에 걸쳐 다각적으로 독점력을 발휘하는 거대한 기업집단이다. 이에는 자본의 유효한 활용을 목적으로 하는 금융자본형 콘체른과, 생산·판매상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산업자본형 콘체른이 있다. 결합방법으로는 주식의 상호소유(자본교환) ·융자(자본참가) ·임원파견, 경영자의 인적 결합, 인테레센 게마인샤프트(Interessen gemeinschaft:이익협동) ·경영위탁(경영임대차) 등이 있다. 금융자본형 콘체른은 거의가 자본참가방법에 의해서 행하여지며, 산업자본형 콘체른의 경우에도 자본참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11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초판, 1988, p. 53.
12

전국적인 생산의 사회화, 즉 계획적 분업과 계획적 생산을 위해서, 산업체만이 아니라 은행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은행은 사회의 신경계통과 혈관망처럼 기능하면서 산업을 통제한다.

레닌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은행자본이 거대하게 “자본과 화폐수입을 집중시키면서, 분산되어 있는 수천수만의 기업을 단일한 전국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키는 조밀한 통로망이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레닌, 같은 책, p. 62)”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언급한다.

“(은행: 인용자) 자본의 집적과 은행거래액의 증가가 은행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흩어져 있는 자본가들은 하나의 집단적 자본가로 전화되었다. 소수의 자본가를 위해 당좌계정을 개설할 때, 은행은 이를테면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완전히 보조적인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면, 한 줌의 (은행: 인용자)독점체가 전체 자본주의사회의 모든 상업적 산업적 활동을 그들의 의지에 종속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독점체는 ― 은행거래 관계, 당좌계정, 기타의 금융업무를 통해 ― 우선 개별 자본가들의 재정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또 신용을 제한하거나 확장함으로써, 혹은 저지하거나 용이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통제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소득을 결정하고, 그들로부터 자본을 박탈하거나 그들의 자본을 급속하게 그리고 엄청난 규모로 증가시키도록 허용하는 등, 그들이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레닌, 같은 책, p. 64.

13 레닌, 같은 책, p. 165.
14 엥겔스, 같은 책, pp. 457-458.
15 엥겔스, 같은 책, p. 458.
16 엥겔스, 같은 책, p. 457.
17 칼 맑스, ≪자본론≫ 제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 p. 956.
18 칼 맑스, 같은 책, p. 958.
19 엥겔스, 같은 책, pp. 458-459.
20 엥겔스, 같은 책, p. 455
21 현재 한국에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창업과 폐업을 반복해도, 사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다. 이들도 개별적 생산의 형태인데, 정부가 그들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 즉, 무정부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삼성이나 현대가 무너진다면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국가가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 나선다. 이들 기업은 고도로 조직화되어 거대한 크기로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고 있어, 정부의 관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생산의 무정부 상태와 개별기업에서의 조직화는 대립하고,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2 개별 생산단위와 전체적 계획 사이에서 대립과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력 자체가 낮거나, 개별단위에서의 조직이 불충분하거나, 아니면 사회적 계획과 통제가 부실한 데서 발생한다. 기업에서의 조직화와 사회적 조직화라는 원리자체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원리를 실현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23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비교해 보자. 중국은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져, 전란이 끝이 없다. 이것은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 간의 전쟁은 무정부성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정부성을 부정하는 요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즉, 전쟁의 주체들인 소국들은 고도로 조직화된 정부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정부는 중국의 무정부상태에 대립하고 있다. 또한 그들 간의 전쟁은 무정부상태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전쟁은 무정부성의 표현이면서, 무정부성과의 투쟁이고 그것의 부정이다.
24 엥겔스 같은 책, p. 457
25 엥겔스 같은 책, p. 460. “상품생산은 특유한, 내재적인, 자기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법칙들은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통하여, 자신을 관철한다.”
26 엥겔스, 같은 책, p. 463.
27 엥겔스, 같은 책, p. 464.
28, 29 엥겔스, 같은 책, p. 465.
30 칼 맑스, ≪자본론≫ 제3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6. p. 546.
31 엥겔스, 같은 책, pp. 465-466
32 엥겔스, 같은 책, p. 466.
33 레닌, <임박한 파국, 어떻게 그것과 싸울 것인가>≪혁명의 기술에 관하여≫, 정영목 옮김, 생각의힘, 초판, 2017, pp. 171-172.
34 엥겔스, 같은 책, pp. 467-468.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연구〉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식화

다음 글

〈논쟁〉계 급

One Comment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