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식화

[1]이 글은 노동전선 <현장과광장편집위> 세미나(2020년 9월 9일)에서 발표한 글을 재정리한 논문입니다이병창 |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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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원리는 마르크스[2]엥겔스와 공저이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마르크스만 지칭하겠다.가 1847년 작성한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였다. 특히 이 책 가운데 서론에 해당하는 1장 포이어바흐 장이다. 포이어바흐 장은 일반적으로 1932년 편집된 MEW판으로 읽혀졌는데, 여기서는 편집자의 자의가 개입되어 원전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평가된다. 마르크스가 남긴 수고를 그대로 편집하려 했던 새로운 편집본 MEGA2가 발표된 이후, 이 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마르크스가 구상한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던져준다.

이 글은 새로운 편집본에 기초하여 역사적 유물론에 관해 밝혀지는 측면 가운데 하나인, 역사발전 법칙의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2)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장, 1-2절에서 그의 역사철학의 원리가 출현한 기본 구상을 간단하게 소개한 다음[3]여기서 그의 역사 원리가 헤겔의 노동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인간이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 … Continue reading

, 이어서 1-3절에서부터는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을 간략하게 소묘한다. 역사에 대한 이런 소묘는 고대 국가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며, 1-3절은 중세 봉건제 사회의 수립에서 갑작스럽게 끝나고 만다.[4]여기서 원래 서술에서 이 부분이 이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편집할 때 4절은 슈티르너에 대한 설명에서 떼어낸 … Continue reading 역사에 대한 소묘가 다시 시작되는 것은 다시 4절에 이르러서이다. 그 사이는 물질적 생산이 의식이나 법 또는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을 주로 분석한다. 마침내 4절에 이르면 앞에서 끊어졌던 역사에 대한 소묘가 다시 시작된다. 이 부분은 중세 중기에서부터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바로 이런 역사에 관한 소묘인데, 역사 소묘는 마르크스가 사적 유물론의 원리를 처음으로 역사의 분석에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분석은 그가 그동안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것이며, 서구 역사 전체를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니만큼 무척이나 소략하고 그 기본 골격만 제시된 소묘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서술도 일목요연하지는 않게 보인다. 그런데도 이런 소묘를 통해 그는 사적 유물론의 원리로 서구 역사를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보이며 이런 자신감을 통해 그의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이 확립되었다고 하겠다.

그는 1850년대 이르러 즉 1848년 2월 혁명이 끝난 이후 혁명의 좌절에 대한 분노 속에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전개된 2월 혁명의 역사[5]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다.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1), 󰡔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1852), 엥겔스, … Continue reading

에 관해 서술한다. 이런 서술은 그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확립된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서술은 당시의 역사를 거의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포착한 것이니 아마도 다급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서술은 후대에 다시 보아도 그 통찰력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서술을 통해 그는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그의 역사서술이 실제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냈던 것은 1850년대의 여러 역사서이다. 이때 분석의 기본 틀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지만 그런 기본 틀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역사 서술을 전제하고 그런 테두리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런 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역사서술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3)

그런데 우리가 소묘 정도에 지나지 않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역사 분석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첫 번째의 역사서술이라는 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가서 이런 역사 서술은 후일 정식화되는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와 매우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교과서적으로 정식화되는 것은 1859년 작성한 󰡔정치경제학비판 서문󰡕에 와서였다.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작성하는 도중에 예비적으로 작성한 글인데 그 서문에서 그는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를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원리는 기왕에 교과서적으로 표현된 것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인간은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특정한, 그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에 들어간다. 즉 생산관계이며, 이는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상응한다. 이런 생산관계의 전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이루며 이것이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진 실질적인 토대이며 여기에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식이 상응한다.”[6]Marx Engels, Zur Kritik der Politische Oekonomie, Vorwort, MEW 13, S. 8

알다시피 그 원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물질적 생산이라는 하부구조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법칙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물질적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생산관계가 변화하면서 형성된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원리에 따라 마르크스는 서구 역사를 5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법칙의 제시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원리와 나머지 면에서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양자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독일 이데올로기』는 역사 발전의 주요 매개개념은 바로 노동분업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되어 있다. 역사에 대한 소묘가 시작되는 1-3절의 서두에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전반적인 내부체제 자체도 그 국가의 생산과 내외적인 교류의 발전단계에 의존한다. 한 국가의 생산력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는 노동분업이 발전한 정도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든 새로운 생산력은 지금까지 이미 알려진 생산력이 단순히 양적으로 확장한 것이 아닌 한에서 결과적으로 노동분업을 새로이 형성한다.”[7]독일 이데올로기 2권, 1254쪽

이 인용된 구절의 앞부분은 나중에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에 대응되는 원리이다. 그런데 뒷부분을 보자. 나중에 제시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가 여기서는 생산력과 노동분업의 관계로 제시되어 있다.

4)

우선 그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하는 노동분업 개념을 정리해보자. 그가 이 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끌어왔는가는 쉽게 짐작된다. 이미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노동분업이 생산력 발전의 원천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아담스미스는 주로 매뉴팩처 이후 등장한 공장 내 분업을 지칭했으며 이것이 오히려 생산력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서술했다.

마르크스는 이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생산력이 이런 노동분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서술은 유물론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더 나가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 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을 더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 관계는 아담 스미스처럼 생산의 단위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업도 포함한다. 가족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분업이라든가 공장 내에서 노동분업의 관계가 그런 것이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이 노동분업이라는 개념 속에 후일 그가 교역 관계라고 지칭했던 상품교환관계를 포함한다. 예를 들면 농촌과 도시의 분업이다. 이런 상품교환관계는 국내적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노동분업이라는 개념은 세 가지 차원에 걸치게 된다. 하나는 생산단위 내의 분업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적인 상품교환이고 마지막으로는 국제적인 관계이다.

이런 노동분업의 개념은 생산관계라는 개념과는 별개로 보인다. 생산관계는 생산수단 소유자와 노동력 제공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관계는 인격적 지배의 정도, 분배의 정도, 소유의 수준 등의 하부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관계이다. 이렇게 노동분업 개념과 생산관계 개념을 기초로 해서 이제 기왕의 역사적 유물론에서 역사원리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역사원리가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를 선명하게 그려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문은 이제 왜 마르크스가 당시 생산관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노동분업개념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 했으며 나중에 다시 이 개념을 포기하고 생산관계 개념으로 돌아갔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짐작하듯이 당시까지 마르크스에게서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1847년 작성된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에 1850년 초부터 시작된 구체적인 역사서술에서는 그는 역사분석의 기본 틀을 계급투쟁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그는 이미 역사 속에 존재하는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계급투쟁이란 곧 생산관계에 기초한 정치적 대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노동분업이라는 말을 역사 서술에 사용했다면 거기에는 독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나중에 그가 다시 이런 노동분업 개념을 포기하고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돌아간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여러 문제들을 그가 제시한 역사적 소묘 자체를 통해서 충분하게 제시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5)

그러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그의 역사서술을 간략하게 서술해 보자. 사실 그의 서술은 그야말로 역사상 처음으로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서술한 만큼 약간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의 서술이 지니는 매력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해를 쉽게 하려고 여기서 그의 서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고대와 중세 초반[8]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본문에서 ‘봉건제 두 번째 시기’, ‘봉건제 이후 소유의 제3 시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제3째 시기는 사실상 자본주의 … Continue reading까지의 흐름은 독일 이데올로기 1-3절에 서술된다. 그런 후, 중세 후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시기는 4-2, 4-3절에서 출현한다. 서술 가운데 전체를 개략해서 서술한 부분이 두 부분 있는데, 이 두 부분은 노동 분업이나 생산력 개념에 관한 사유를 발전시키는 가운데 제시된 철학적 원리이다.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는 벗어나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9]이 두 부분을 참고로 인용해 두자. GA2, 129:14-26(1-3절) “노동분업이 발전하면 우선 농업노동에서 산업노동과 상업노동이 분리하며 이와 함께 도시와 … Continue reading)

* 이 표에서 고딕 부분은 필자가 이해를 위해 보충한 부분이다.

명칭생산력생산관계국내적 분업국제적 분업정치적 지배
부족소유목축, 농경공동체 소유가족 내 자연발생적 분업 가부장적 부족장(가족의 확장)
고대 지역공동체 또는 도시국가의 소유 시민과 노예의 계급관계사적 소유의 집중이 발전노예제도시와 농촌의 대립도시 내부에서 산업과 해양무역의 대립  해양무역부족의 도시로 통합, 부동산의 사적 소유가 발전, 그러나 이는 지역 공동체 소유의 하위 형식도시 소유는 공민의 공동적 사적 소유도시의 자연발생적 협의회를 통해 노동노예를 지배귀족과 평민의 분화  
봉건적 또는 신분적 소유(첫 번째 시기)(1단계)농노인 소농민의 출현농노제농업과 산업, 교류의 침체 게르만의 로마 정복, 정복조직의 구성방식의 영향으로 봉건적 소유가 발전, 토지소유의 위계화무장가신의 출현, 자치 단체(결합체)를 기초  
(첫 번째 시기)(2단계)1-3절에서   직인과 도제관계절약을 통해 마련된 작은 자본노동지대분할 경작과 가내수공업국지화된 생산관계를 조건으로도시 수공업의 발전개별 수공업 내부 분업은 결여, 개별 수공업 상호간에는 미미하게, 산업과 상업의 분업은 일부 현존   도시 노동자는 귀족에 대항하고 공동 시장을 위해, 도주 농노 간 경쟁을 제어하기 위해 길드를 구성, 도시와 농촌의 대립봉건왕국으로의 통합이 발전하기 시작.
(첫 번째 시기)(2단계)4-2절에서 추가된 부분숙련에 대한 관심직인과 도제는 장인과 가부장적 관계도시의 자본은 자연발생적 자본. 자본은 소유주의 특정 노동과 결합된 신분적 자본생산물지대 사치품 원거리 교역새로 도주한 농노는 길드에서 배제되어 천민이 된다. 천민은 때로 폭동을 일으키지만 무력했다. 도시는 연합 조직
두 번째 시기(3단계)(17중반-18세기 말)경작지의 목초지화매뉴 팩처의 출현(특히 방직에서)자본의 유동화천민, 유랑민의 노동자화,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화폐 관계가 출현. 화폐 지대생산과 교류가 분리, 상인 계급이 형성됨근교를 넘어선 도시동맹이 출현, 도시 간 분업이 출현, 식민지 금, 은의 유입으로 봉건적 소유자와 노동자에게 타격, 부르주아에게 유익매뉴팩처가 길드를 해체하기 시작세계 시장의 형성무역과 해운의 급속한 발전  새로운 산업 도시가 출현(촌, 장터 중심으로)유랑민의 시대자국의 매뉴팩처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 간 무역 경쟁의 등장(전쟁, 보호관세, 수입금지 등)항해법, 식민지 독점영국의 지배
중세 이후 사적 소유의 제3시대(4-3절)자연력, 기계자동화 체계  대공업의 출현   -사적 소유의 질곡을 파괴하면서          노동분업의 확장경쟁의 자유무역의 자유노동분업에서 자연발 생성을 박탈, 화폐관계로 대체농촌(수공업)에 대한 교역 도시의 승리자본의 산업화  근대적 세계 시장혁명을 통한 자유이데올로기, 종교, 도덕의 파괴근대적 공업도시의 출현동일한 계급관계를 일반화개별민족이 지닌 특수성을 파괴   -프롤레타리아의 등장-대공업에서 배제된 노동자는 더 열악한 삶을 살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를 받는다.

7)

이상에서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간단한 소묘를 보면, 사적 유물론을 처음으로 적용한 이런 소묘는 상당히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금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후일 역사에 대한 사적 유물론의 체계적 서술과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 하겠다.

그런 소묘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첫째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하거나 심지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노예, 소농, 노동자(화폐관계)라는 말을 통해 기본적인 생산관계를 암시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관계를 분명하게 생산관계로 지칭하거나, 이 생산관계가 역사발전의 기초라는 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물질적 생산을 상부구조의 발전에 토대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물질적 생산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법칙으로 규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둘째 마르크스는 노동분업(내적 분업, 국가 내 교환, 무역 시장)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왕의 마르크스적인 역사서술에서는 노동분업에 관한 서술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관계라는 개념에 비해 적은 분량으로 또는 부차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서술된다. 그런 서술에 비해 본다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노동분업에 관한 역사서술은 매우 특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그는 역사발전에서 상부구조를 주로 소유의 방식과 연관하여 설명했다. 아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아니며, 역사적 단계의 이름도 주로 이런 소유제로 표현되어 있다.[10]참고로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단계 구분은 다음과 같다. “대략 말하자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방식이 경제적 … Continue reading)

이렇게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점에서 역시 결정적인 측면은 노동분업에 대한 마르크스의 특별한 관심이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관계보다 오히려 노동분업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노동분업을 역사발전의 토대로까지 고양했던 것인가? 그것은 위의 표에서 정치적 부분에 대한 서술에서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분업에 관한 설명과 국가나 정치적 발전에 관한 서술과 연결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이유는 노동분업의 전개가 정치적 발전을 더 직접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남녀의 노동분업이 가부장적 부족을 형성한다거나, 도시와 농촌의 분업이 고대 도시국가의 수립을 설명한다거나, 수공업의 분화가 도시 길드를 발전시킨다거나, 상인의 분화가 새로운 산업도시와 국가의 등장을 예고한다거나 하는 설명이다.

8)

그런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마르크스의 설명은 노동분업이 생산력의 발전과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에 대한 설명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서술은 노동분업을 직접적인 출발점으로 삼아 정치 국가적 현실에 대한 설명으로 이행한다. 하지만 위의 표를 보면 자연스럽게 생산력이 노동 분업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서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이르면 이제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역사발전에서 주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다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생산관계가 어떻게 이런 다양한 노동분업을 야기하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부족적 소유, 고대적 도시국가적 소유의 경우는 단순하므로 그 연관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이미 중세에 이르게 되면 동일한 생산관계에서 3단계에 걸쳐서 발전하게 되므로 그 연관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문제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엥겔스가 중세 봉건제에 대한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했던 󰡔독일 농민전쟁사󰡕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엥겔스는 독일에서 자본제적 발전이 중단됐던 사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는 …영국에서 봉건적 질서를 부르주아적 입헌군주제로 변화시킨 것과 같은 귀족과 도시의 동맹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독일에서는 구 귀족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들이 장미전쟁을 통해 불과 28 가문을 남기고는 절멸했으며 중간 계급적 기원과 중간 계급적 제 경향의 신흥귀족이 그 자리를 대치했다. 또 독일에서는 농노제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일반적 관행으로 남아 있었으며 귀족은 봉건적 수입원으로부터 수입을 얻어내었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완전히 제거되어 귀족은 중간 계급적 수입원 즉 지대를 가진 단순한 중간 계급적 지주에 지나지 않게 됐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는 루이 11세 이후 귀족과 중간계급의 이해 충돌이 독일에서는 불가능했다. 독일에서는 국민적 중앙집권의 제 조건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아주 원초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다.”[11]엥겔스, 󰡔독일 농민전쟁󰡕, 󰡔독일 혁명사 2부작󰡕, 소나무, 92쪽

여기서 봉건제를 구성하는 기본적 생산관계가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농노제이다. 다른 하나는 중간계급적 수입원 즉 지대이다. 엥겔스가 구분한 봉건제의 두 형식은 최근 일본의 연구가 다카하시 고하치로의 󰡔자본주의 발달사-시민혁명의 구조󰡕를 참조하여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은 종래 직접 노동의 형태로 영주에게 급부하여 오던 것을 노동이 실현된 형태 내지는 그 가격으로 다시 말해서 생산물이나 화폐의 형태로 잉여노동을 그대로 영주에게 직접 급부한다.”[12]다카하시 고하치로, 󰡔자본주의 발달사- 시민혁명의 구조󰡕, 광민사 편집부 역, 광민사, 1980, 73쪽

여기서 나오는 내용을 참조로 하면, 엥겔스가 말한 독일의 농노제란 곧 노동지대에 해당하며, 그가 지대라고 말했던 것은 곧 생산물이나 화폐 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카하시의 책에 의거하자면 중세 봉건제 생산관계는 3단계로 나누어져, 초기의 노동지대(4-8세기)에서 중기의 생산물지대(9-14세기), 마지막으로 15세기 이후 화폐지대로 분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엥겔스와 다카하시가 구분한 중세의 생산관계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설명된 중세에서 노동분업의 단계적 발전 사이의 연관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대개 다음과 같은 논리로 양자를 연결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노동지대(농노 시대)의 시대, 잉여는 생활비 외에는 모조리 수탈되었고, 그 결과 농촌은 가내수공업과 결합된 분할경작의 시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생산물 지대가 도입하면 일부 잉여가 농민에게 축적되면서 농촌의 생산물을 도시의 수공업품과 교환하는 근교 교역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길드와 도시의 발전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15세기 화폐지대를 보자. 이는 식민지에서 유입된 금은과 더불어 인플레가 일어나면서 농민에게 잉여가 막대하게 쌓이게 했으며, 도시에서는 매뉴팩처가 엄청난 이익을 쌓으면서 자본이 귀족과 노동자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중세3단계가 출현했다. 물론 독일 농민전쟁사의 서술에 따르면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런 생산관계의 변화에 성공했으나, 독일은 대외전쟁(항가리, 터키 등의 침략)을 통해 군사 국가화되면서 노동지대로 복귀했다.

위와 같은 설명은 결국 중세 예속농민의 손에 얼마나 많은 잉여가 남는가가 결국 분업과 교환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잉여가 약간 증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일으키듯이 사회 전반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노동분업의 개념이다. 중세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다른 역사 단계에서도 적용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대나 생산관계가 동일한 기본관계 속에서도 내부적으로 변화하면서 그에 따라 노동분업도 변화하게 되며 그 결과 계급과 내부 계층 사이의 역학관계도 변화하면서 전체 국가의 모습도 변화하게 된다.

9) 결론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을 종래 2개의 법칙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던 것을 넘어서서 다시 3가지 법칙으로 좀 더 복잡하고 상세하게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그러므로 역사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정식화하고자 한다.

1) 생산력은 생산관계를 변화한다.

2) 생산관계는 사회적 노동분업을 변화시킨다.

3) 물질적 생산(생산력, 생산관계, 노동분업)은 상부구조(정치, 법,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킨다.

이런 정식화는 우리에게 역사에서 생산관계의 변화가 노동분업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을 하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생산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이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 생산관계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지 않았을까?

1 이 글은 노동전선 <현장과광장편집위> 세미나(2020년 9월 9일)에서 발표한 글을 재정리한 논문입니다
2 엥겔스와 공저이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마르크스만 지칭하겠다.
3

여기서 그의 역사 원리가 헤겔의 노동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인간이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 시작하는데, 이런 생존수단을 생산하는 방식은 생존수단 자체의 특성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생산방식은 그보다는[신체적 현존의 재생산] 오히려 개인이 활동하는 특정한 방식이자, 개인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특정한 방식이고 개인의 특정한 삶의 방식이다. 개인은 그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한다.”(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2권, 이병창 역, 먼빛으로, 2019, 1253쪽)

여기서 ‘개인이 활동하는 방식’이라는 개념이 제시되는데 헤겔의 노동 개념을 상기시킨다. 헤겔이 노동 개념을 생산도구와 사회 관계라는 두 측면에서 고찰했듯이 마르크스도 활동하는 방식을 이 두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생산력과 생산 관계라는 개념이 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4 여기서 원래 서술에서 이 부분이 이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편집할 때 4절은 슈티르너에 대한 설명에서 떼어낸 것인데, 그 가운데 앞부분은 1-3절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4절로 남겨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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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다.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1), 󰡔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1852),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1852

6 Marx Engels, Zur Kritik der Politische Oekonomie, Vorwort, MEW 13, S. 8
7 독일 이데올로기 2권, 1254쪽
8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본문에서 ‘봉건제 두 번째 시기’, ‘봉건제 이후 소유의 제3 시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제3째 시기는 사실상 자본주의 성장기이다. 그러므로 봉건제는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그의 서술을 잘 보면 봉건제 초기 형성기를 나머지 두 단계로부터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는 3단계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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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부분을 참고로 인용해 두자.

GA2, 129:14-26(1-3절) “노동분업이 발전하면 우선 농업노동에서 산업노동과 상업노동이 분리하며 이와 함께 도시와 농촌이 분리하고… 노동분업이 더 발전하게 되면 산업노동에서 상업노동이 분리한다. 이와 동시에 노동 분업을 통해서 서로 다른 부문 각각의 내부에서 다시 일정한 노동을 위해 협력하는 개인들의 서로 다른 편제가 발생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2권, 1254쪽)

GA2, 69:5-18(4-1절) “그러므로 여기서는 자연발생적 생산수단과 문명을 통해 산출된 생산수단이 구별된다. 경작지는 자연발생적 생산수단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 자연발생적 생산수단이 사용되며 개인은 자연 아래 종속하고 두 번째 경우 소유는 직접적, 자연발생적 지배로 나타나고, 두 번째 경우 소유는 노동에 의한 특히 축적된 노동에 의한 즉 자본에 의한 지배로 나타난다.”(독일 이데올로기, 2권, 1311쪽)

GA2, 71:4-15(4-2절) “물질 노동과 정신 노동의 분업 가운데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GA2, 71-15-41(4-2절)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오직 사적 소유 아래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립이다. 이 대립은 개인이 노동분업에 즉 그에게 강제되는 어떤 특정한 활동에 종속한다는 사실을 가장 현저하게 표현하며”(독일 이데올로기, 2권, 13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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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단계 구분은 다음과 같다.

“대략 말하자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방식이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점진적인 시기로 표시될 수 있다.”(Zur Kritik der Politische Oekonomie, Vorwort, S. 9

11 엥겔스, 󰡔독일 농민전쟁󰡕, 󰡔독일 혁명사 2부작󰡕, 소나무, 92쪽
12 다카하시 고하치로, 󰡔자본주의 발달사- 시민혁명의 구조󰡕, 광민사 편집부 역, 광민사, 1980,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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