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이 글은 2020년 9월 15일 노동전선 대중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임.홍승용 | 현대철학사상연구소 소장

우리는 대개 가족이나 동료들 혹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고립되거나 따돌림 당하여 무기력해지면, 삶의 의미를 찾기도 어려워지고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 차원의 고립이나 배척을 경험할 때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자신이 참여하여 만들어낸 정치권력의 주요 정책들의 결정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특히 자신이 기여하여 이룩해낸 경제적 성과를 나누면서 심한 차별을 경험하는 계급이나 계층 역시 전반적으로 무기력감과 불행을 겪기 쉽습니다. 이 경우 그러한 계급⋅계층은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풍요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현대사회에서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소외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난해하고 심오한 이론들을 펼쳐왔습니다. 그 심오한 이론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는 재미에 빠져 길을 잃기보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소외 문제의 경제적 뿌리를 밝히고 그 극복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맑스의 논의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입니다. 소외를 비롯해 맑스가 정면으로 대결했던 자본주의의 주요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해소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삶을 압도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1844)에서 소외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여기서 그가 소외 극복의 방안을 충분히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문제의식을 말년까지 끌고 갑니다. 그래서 󰡔자본론󰡕 등 그의 주요 저술을 함께 참조할 필요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최선의 소외 극복 방안을 찾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소외 문제를 주로 노동과 관련지어 파악합니다. 그는 우선 소외된 노동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어떤 동떨어진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힘이 되어 노동에 대립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2]K. 맑스: 󰡔경제학 철학 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65-66쪽. 이하 󰡔경철초고󰡕 또는 ‘경철’로 약칭하며, 필요에 따라 원문(MEW Ergänzungsband … Continue reading 이때 생산물이 생산주체와 분리되어 대립한다는 특성을 주목하면, 소외를 노동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여타의 활동에도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자 민중이 만들어낸 정치권력이 노동자 민중과 독립된 힘이 되어 노동자 민중과 대립하는 경우에도 역시 소외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외 개념의 확대 적용과 관련해서는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사용한 ‘사물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루카치는 인간관계의 산물들을 인간관계와 무관한 것으로 파악하고 대상을 정태적⋅파편적⋅방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 전반을 비판하기 위해 ‘사물화’ 개념을 썼습니다. 사물화된 사고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맑스주의적 사유방법의 요체로서 루카치는 대상을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역동적⋅전면적⋅실천적으로 파악하는 총체성의 관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총체성 범주를 과학에서 ‘혁명적 원리의 담지자’로 간주했습니다.[3]G.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85쪽 이하 참조. 한동안 총체성을 전체주의와 묶어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고 야유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행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민중의 분열을 고착시키는 불평등한 위계질서를 고정불변의 숙명이나 자연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파편화된 작은 이익과 행복을 찾는 일에 영혼을 팔수록,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지배관계의 변혁은 꿈도 꾸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총체성을 찾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를 고찰하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호”[4]T. 이글턴: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김준환 역, 실천문학사 2000, 36쪽.라는 이글턴의 주장도 새겨들을 만합니다. 오늘의 지배관계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총체성의 관점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이론적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루카치는 소외 개념이 아니라 ‘물신’ 개념을 활용했습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물신 개념을 통해 상품이나 화폐를 그 생산과정에서 작동하는 인간관계 내지 착취관계와 무관하게 물건들의 성격이나 물건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합니다. 예컨대 ‘돈이 돈을 번다’는 식의 자본물신주의에서는 그 배후의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적대적 모순관계 내지 잉여가치의 원천이 은폐되는 것입니다. 이자 낳는 자본과 관련해 맑스는 “나무들의 성장이 나무들의 속성인 것처럼, 화폐를 낳는 것이 화폐자본의 형태로 있는 자본의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5]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3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8, 501쪽. 이하 ‘자본3’으로 약칭함.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물신적 관념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지배관계를 은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이 점에서 이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 역시 변혁운동의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점에 착안하여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물상화의 폐지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6]정성진: 「󰡔자본론󰡕과 포스트자본주의론」, 현대사상 세미나 발제문(2021. 2. 6.)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물신적 환상이 그 비밀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통해서도 상품생산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에서는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생산형태로 이행해야 비로소 사라진다고 봅니다.[7]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99쪽 참조. 이하 ‘자본1’로 약칭함. 따라서 맑스의 관점에서는 ‘물상화의 폐지를 통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은 뒤집힌 논리입니다.

나아가 맑스는 물신적 관념 자체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은폐하여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기능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자본축적의 한계를 재촉한다는 점도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자본가에게는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 없이 투하자본에 대한 이윤의 크기, 즉 이윤율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회 전체 차원에서 평균적 이윤율은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대함에 따라 저하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또 자본주의적 경쟁으로 인해 개별 자본의 이윤은 그 자본이 직접 생산하는 잉여가치가 아니라 투하자본과 사회적 평균 이윤율을 곱한 크기에 수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개별 자본은 유기적 구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즉 골치 아픈 가변자본부분을 줄이고 불변자본의 비중을 높여 기계화, 자동화, 나아가 무인화를 확대해감으로써 타 자본에 대한 경쟁력을 기르고 특별잉여가치를 일시적으로 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는 총자본의 평균이윤율을 낮추는 데에 기여하게 됩니다.(자본3,214-246) 즉 자본가 자신의 물신적 관념에 따르는 이 전체 과정이 자본축적의 한계를 앞당기는 주요 동력이 되는 셈입니다. 루카치의 사물화 비판과 총체성 범주가 주체의 변혁적 사유에 강세를 두는 데에 반해, 맑스의 물신 개념은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사유방식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체제 변혁의 객관적 조건을 밝히는 기능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소외 개념은 노동 생산물과 노동자의 적대적 대립관계에 더 큰 비중을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처럼 소외 개념은 사물화 및 물신 개념과 유사한 본질을 지니면서 그 의의나 강세 혹은 적용범위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또 󰡔자본론󰡕에서는 소외보다 물신 개념에 대한 설명의 비중이 훨씬 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들뢰즈는 맑스가 󰡔자본론󰡕에서는 소외나 모순 혹은 대립 등의 헤겔적 개념들을 분화의 범주인 노동분업으로 대체했다고 주장합니다.[8]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447쪽 참조. 물론 이는 들뢰즈 자신의 차이 형이상학을 위해 󰡔자본론󰡕을 터무니없이 왜곡하는 주장입니다. 󰡔자본론󰡕에서도 맑스는 소외 개념을 󰡔경철초고󰡕에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로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맑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노동조건과 노동생산물에 주는 노동자로부터의 독립성과 노동자에 대한 소외성은 기계의 출현과 함께 철저한 적대관계로 발전한다.”(자본1,583) 또 그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자신의 노동은 노동력의 판매에 의해 이미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자본가에 의해 취득되어, 자본에 합체되었기 때문에, 자기 노동은 생산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의 생산물에 대상화되는 것이다.”(자본1,778)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노동 생산물과 노동자의 부정적 관계를 신랄한 대조법으로 묘사합니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노동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을 생산한다. 노동은 미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기형을 생산한다. 노동은 기계들을 통해 노동을 보완하지만, 그 반면에 일부 노동자들을 야만적 노동으로 몰아가고 또 다른 일부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든다. 노동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어리석음 내지 백치상태를 생산한다.”(경철67-68) 여기서의 노동은 물론 모든 노동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을 뜻합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도 노동 생산물과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대립관계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밝힙니다.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며, 노동자를 부분인간으로 불구화하고,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로 떨어뜨리며, 그의 노동의 멋있는 내용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을 혐오스러운 고통으로 전환시키고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자본1,878-879) 여기서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노동 생산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는 노동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며 불구화하는 수단으로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노동 생산물의 대립관계는 사실상 노동자와 노동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 사이의 대립관계이기도 합니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의 방법’이므로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의 상태는, 그가 받는 임금이 많든 적든, 악화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 쪽 끝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 편 끝,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계급 측의 빈곤⋅노동의 고통⋅노예상태⋅무지⋅잔인⋅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자본1,879) 이때 맑스는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자본의 독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맑스는 이미 󰡔경철초고󰡕에서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적대적 대립관계를 명확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가들의 승리는 필연적이다”(경철15)

자본가들의 승리는 자본축적의 증대, 자본의 집중⋅독점화와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즉 양극화 경향을 의미합니다. 맑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해 양극화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경향임을 밝힙니다. 이때 빈곤이 절대빈곤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맑스는 자본을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지배력’ 혹은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이라고 파악합니다.(경철30) 이처럼 자본을 권력으로 파악하면 자본은 사회적이고 상대적이며 그 박탈상태인 빈곤 역시 본질적으로 상대적입니다. 생산력 발전의 결과로 절대빈곤이 완화될수록 상대적 빈곤이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집니다. 상대적 빈곤 내지 빈부격차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하더라도 노동자들의 빈곤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지며 자본권력은 그만큼 더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독점적으로 증대한 자본권력이 정치권력의 성격도 좌우하고, 역으로 정치권력은 자본권력을 비호하는 가운데, 노동자 민중을 상대로 하는 권력독점 곧 자본독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적 빈곤의 증대를 고려할 때, 소외된 노동이 “부자를 위해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경철67)는 맑스의 지적은 자본주의의 핵심문제를 짚고 있는 것입니다. 소외와 양극화의 이 뗄 수 없는 관계로 인해 소외의 극복은 양극화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양극화의 극복은 자본주의의 권력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 권력관계 속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자본가들이 스스로 양극화와 소외 문제를 해소하려 노력할 리 없고 기껏해야 성장과 낙수효과 따위를 내세우면서 지속가능한 효율적 착취에 관심을 쏟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소외의 지양을 사적소유, 즉 자본주의의 지양과 등치하는(경철96) 맑스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자본권력은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의식과 감성과 욕구에도 파고들어 자본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길들여놓고자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 점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의식과 감성, 그리고 욕구의 영역은 형이상학과 심리학적 현학이 난무하는 관념의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적대관계가 불붙는 주요 전쟁터입니다. 자본독재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적 조건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하면 변혁운동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결과들이 노동과정 자체의 소외에 기인한다는 관점에서, 노동과정 자체의 주체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중에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로이 발전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노동 중에는 탈아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 안심하고 노동할 때 불안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은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것,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 자체가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밖의 욕구들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경철68-69)

소외된 노동의 객관적 결과로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문제 이전에, 또 생산수단 소유의 양극화가 소외된 노동을 야기하는 문제와 별도로, 노동과정에서 주관적으로 어떤 경험이 지배적인지를 살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소외의 늪에 빠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활동이나 노동을 통해 자신을 자유로이 발전시키고 있는지, 자신을 긍정하고 행복을 느끼는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로이 발전시키는지, 아니면 노동이 남의 일일 뿐이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노동이며 다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지, 또는 노동 자체가 ‘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인지, 얼마나 그러한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외된 노동이 아닌 노동을 오늘의 자본주의사회의 현실에서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경험에 비추어 소외 극복의 지향점과 지표를 생각하는 것도 의미 있어 보입니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1875)에서 노동수단의 사적소유를 극복한 후, 생산력의 성장 및 분업에 대한 예속상태의 소멸과 아울러,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욕구’가 되는 상태를 높은 단계 공산주의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라고 보았습니다.[9]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참조. 이하 ‘고타’로 … Continue reading 따라서 이 높은 단계에 이르기 이전에는 노동에서 소외의 성격을 완전히 제거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이 점에서 생산력 증대에 부합되는 노동일 단축이 소외를 극복해 가는 현실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소외의 지양과 사적소유의 지양을 등치하기도 하지만[10]소외와 사적소유의 원인-결과 관계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석을 해가는 중에 분명해지는 것은, 신들이 본디는 인간 … Continue reading, 동시에 당대 현실의 생산력으로도 5시간노동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합니다.(경철24) 󰡔자본론󰡕에서도 그는 노동일 단축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자본3,1041) 물론 주52시간 시행을 놓고도 생사를 건 전쟁을 불사하려 드는 자본의 집요한 저항을 감안할 때, 노동일 단축이 손쉽게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오늘날의 첨단 과학기술이 대량해고사태와 절대빈곤의 양산으로 귀결되지 않고 보편적 노동일 단축과(예컨대 핀란드의 4시간노동제) 자유로운 여가활동 시간의 확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혹은 혐오스러운 자본독재의 극복 내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양을 위한 노동자 민중의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5

맑스의 인식에 따르면 욕구와 감성은 상호작용하면서 현실적 대상들에 의존하여 형성되거나 발전하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음악적 감성은 음악에 의해 비로소 일깨워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비음악적인 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대상도 되지 않는다.”(경철101) 따라서 감성과 욕구는 양극화나 소외와도 불가분으로 연관됩니다. 그는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사로잡힌 감성은 또한 편협한 감성에 머문다”고 보며,(경철101) 사적소유 즉 자본주의가 이 ‘조야한 실제적 욕구’와 ‘편협한 감성’을 부추기고 ‘조야한 욕구를 인간적인 욕구로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고 비판합니다.(경철133-134) 또 이때 “모든 육체적⋅정신적인 감성 대신에 이 모든 감성의 소외, 즉 소유의 감성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경철99)

‘조야한 욕구’를 대표하는 것은 화폐에 대한 욕구인데,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금욕과 절약이 필요해집니다. 절약은 사치를 누리거나 먹는 일 따위의 직접적 감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맑스는 자본주의 경제학이 요구하는 절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경제적이고자 하고 환상에 빠져 몰락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공공의 이익에 참여한다거나 동정한다거나 신뢰한다고 하는 등의 모든 일도 또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경철137) 그는 자본주의 인구론이 무욕의 원리를 극단화하여 ‘도덕적인’ 노동자들에게 심지어 ‘생식의 절약’까지 요구한다고 야유합니다.(경철139) 그런데 경제적인 이유로 공익과 동정과 신뢰, 심지어 생식까지 절약하는 것은 맑스 시대의 전설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절약은 대체로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몫입니다. 자본가들도 절약할 수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소비를 줄임으로써가 아니라, “남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짜내며 또 노동자에게 생활상의 모든 쾌락의 포기를 얼마나 강요하는가에 비례해 부유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자본1,810) 맑스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욕구를 육체적 생존 유지에 꼭 필요로 수준으로 축소하고, 노동자를 감성도 욕구도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간주합니다.(경철136)

맑스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력이 증대한 오늘날에도 노동자 민중이 풍부한 감성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지배질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힘겹게 유지하면서 대부분의 욕구를 절약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또 지배서열의 사다리에 매달려 한 단계라도 더 오르려는 욕구, 그저 매달려 있기라도 하려는 욕구,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화폐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구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본독재 너머의 평등사회에 대한 욕구를 범사회적으로 길러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감성과 욕구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지 불변의 자연적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닙니다. 현재의 편협한 감성과 욕구를 근본적으로 바꿔가는 일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조건이며, 또한 소외 극복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6

현재의 빈곤하고 조야한 감성과 욕구의 변화를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에 대해 맑스는 “인간 본질력의 새로운 확인과 인간 본질의 새로운 풍부화”(경철137)라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때 그가 인간의 본질을 어떤 고정불변의 특징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맑스는 오늘날 인간이 본능적으로 구사하는 감성들조차 세계사의 산물임을 강조합니다.(경철101) 또 그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므로 개인을 사회와 단순히 대립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경철97-98) 이처럼 맑스가 인간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명시하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 혹은 유적 본질은 제반 조건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자 인간 스스로 바꾸어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인간의 본질, 다른 동물의 생명활동과 구분되는 인간다운 삶의 본질적 특징으로서, 맑스는 본능의 명령에만 따르지 않고 대상들을 보편적으로 대한다는 점, 또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고 그래서 자유로이 활동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경철71-72)

인간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맑스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받아들인다면, 맑스의 소외론을 근거로 인간 본연의 삶이라는 것을 현재의 소외된 삶과 대립시켜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로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로 현재의 소외된 삶을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사는 존재’라는 식으로 당연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본질적 특징들은 맑스가 지적하는 것들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맑스가 제시하는 특징들, 즉 본능에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편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며 자유로이 활동한다는 점, 한마디로 다른 어떤 동물보다 강력한 주체성을 지닌다는 특징이 결여되는 만큼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주요 특징으로서 노동자 개인을 유적인 삶, 즉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점도 명시합니다.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을 개인의 생활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첫째로 유적 생활과 개인생활을 서로 소원한 것으로 만들고, 둘째로 추상화된 개인생활을, 마찬가지로 추상화되고 소외된 형태의 유적 생활의 목적으로 만든다.”(경철71) 즉 소외된 노동 속에서 노동자는 인간답게 주체적으로 살 수 없고 연명하기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유적 생활로부터의 소외가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로 이어진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인간이 그의 노동 생산물과 생명활동의 유적인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의 직접적 귀결 하나는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할 때, 다른 인간도 그에게 대립한다.”(경철73)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지배와 착취의 대상 혹은 자본증식의 수단으로 취급하며 노동자들과 대립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비인간화되는 현실의 다른 측면이기도 합니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미 포이어바흐의 ‘구태의연한 유물론’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는 특히 맑스가 인간 주체를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출발점”으로도 파악하는 데에서 드러납니다.(경철97) 하지만 맑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의존해서 생활한다는 점,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 자연과의 물질대사가 불가피하다는 점 등을 명확히 밝힙니다. “인간이 자연에 의존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자연은 인간의 신체이며, 인간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것과 교류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자연이 나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경철70) 이런 관점에서 맑스는 과학이 자연에서 출발할 때에만 현실적인 과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연적인 인간과학’ 혹은 ‘인간적인 자연과학’인 ‘하나의 과학’을 지향합니다. 나아가 긍정적인 의미의 공산주의를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 내지는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하며, “이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또 인간과 인간의 항쟁의 참된 해결이고, 현실 존재와 본질의, 대상화와 자기 확인의, 자유와 필연의, 개별과 유의 다툼의 참다운 해결”이라고까지 단언합니다.(경철95)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고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중요시하는 맑스의 입장은 󰡔자본론󰡕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자본3,984)

맑스는 소외된 노동이 자연도 인간과 소원한 실체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경철72-73) 그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노동자들의 처지에서는 “빛, 공기 등과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까지도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욕구가 되지 못한다. 불결, 인간의 이 타락과 부패, 말 그대로 문명의 오수 배출구야말로 살아가야 할 생활환경이 된다. 완전히 비자연적인 황폐, 부패한 자연이 그의 생활환경이 된다.”(경철135) 노동자들이 빛과 공기와 단순한 동물적 청결에 대한 욕구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과장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을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폭력적 과정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과, 노동자들이 처해 있던 극한상황들에 대한 공장감독관들의 공식적 보고서들은 특히 󰡔자본론󰡕 1권의 분량 2/3에 해당하는 ‘노동일’ 장 이후 상당량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11]19세기 노동자들의 극한상황은 엥겔스도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겪는 이 고통은 자본가들의 치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소외된 노동에 예속될수록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풍요로움과 멀어집니다. 자본의 무한증식을 위해 소외된 노동이 노동자의 삶 전체를 잠식하는 생산양식이 무제한으로 작동할 때 인간만 아니라 자연도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인간다운 삶으로부터의 소외, 노동과정 속의 소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양극화와 감성 및 욕구의 빈곤화 등등 소외된 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초래해온 비인간화와 수난의 역사는 오늘날의 눈부신 생산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물이자 원동력기도 했습니다. 이 생산력은 이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풍요로운 삶을 인류에게 만들어줄 토대가 될 수도 있지만, 자본증식을 절대화하는 자본독재 하에서는 대량실업과 전쟁위기와 환경재앙을 초래할 위험이 훨씬 더 큽니다. 수십억 년의 지구역사에서 여러 차례의 재연재해로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했으며, 인류라고 해서 영원히 번성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으로 멸종하거나 지상에 지옥을 불러내지 않고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이라도 자본독재와 소외를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달라진 생산양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7

이 근본적 변혁의 주역은 자본독재로 고통받는 노동자 민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노동자 민중이 자본의 권력 독점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적 권력관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고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지 못하도록 만드는 여러 가지 사회적 원인들이 있습니다. 이 원인들을 분명히 의식하는 것도 극복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원인으로는 무엇보다 절대빈곤의 완화와 자본권력의 총체적 이데올로기 공세로 인해 노동자 민중의 변혁 의식과 욕구가 싹을 틔우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패배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적극 대응하지 못한 점,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차별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노동운동이 분열된 채 조합주의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 증대로 가능해진 매수효과[12]노동계급 상층부가 매수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V. I.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2015, 38-39쪽 참조. 덕분에 상당수의 상층부 노동자들이 살만큼 산다는 환각을 누리며,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을 은폐하고 자본독재의 영속화를 노리는 자본권력의 논리에 말려든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사회적 부가 증대하여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유리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이 ‘복합적 궁핍’에 빠진다고 지적합니다. “노동임금의 상승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과로를 일으키게 한다. 노동자들은 많이 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의 시간을 희생시켜, 모든 자유를 내던지고 탐욕에 봉사하는 노예노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경철17) 󰡔자본론󰡕에서 맑스는 같은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본축적의 결과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노동자 자신이 이미 만들어낸 금 사슬의 길이와 무게로 말미암아 그 사슬의 긴장이 약간 완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자본1,844-845) ‘복합적 궁핍’과 ‘금 사슬’은 OECD 최장수준의 노동시간과 최고수준의 산재사망률, 천문학적 가계부채 등으로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자본독재 극복은 이 복합적 궁핍과 금 사슬의 주술에서 깨어나 자본독재가 불러오고 있는 범지구적 재앙의 실체를 명확히 간파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맑스의 이론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과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궁극적 한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현실적 의의를 지닙니다. 현대 자본주의를 그의 이론에 근거해 볼 때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핵심적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증식하지 못하는 자본은 자본이라고도 할 수 없을 텐데,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성장의 궁극적 한계에 부딪쳐 왔습니다. 이윤율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이자율은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전반적으로 제로 혹은 마이너스를 향하고 있고, 첨단기술 개발을 통한 일시적 특별잉여가치는 갈수록 더 짧은 기간에 평균치로 하락하고 있으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대에 따른 일반적 이윤율 저하 역시 맑스의 악의적 가설이 아니라 현실적 경향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생산성 증대를 통한 노동력 절약은 노동일의 보편적 축소와 노동자 민중의 자유 확대가 아닌 대량실업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독점 하의 경쟁과 무정부적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과잉생산은 분야별로 혹은 경제전반에서 반복적으로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증식의 위기가 곧장 체제변혁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지만, 자본이 그로 인한 손실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은 필연일 것입니다. 전가 방식이 대량해고와 절대빈곤의 폭발에 머물지 않고, 크고 작은 전쟁과 환경재앙으로 인한 총체적 파국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당연시함으로써 맞이하게 된 인류문명의 총체적 파국 위기를 늘 절감합니다.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자본권력의 처분에 자신을 맡길 것이냐, 아니면 자본증식의 위기가 곧 인류문명의 위기는 아니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지양하고, 소외된 노동이 드디어 사라지고 노동이 자아실현 활동으로 될 수 있게 만드는 사회를 건설해갈 것이냐 하는 선택에 매순간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층계급들’이 옛 것을 원하지 않고, ‘상층계급들’이 더 이상 예전의 방식대로 할 수 없는” 시점[13]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94쪽., 즉 근본적인 변혁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8

객관적 상황이 근본적 변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변혁 주체들의 적극적 준비 없이는 소외가 극복된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가장 시급한 준비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사회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모습을 만들어내고 이를 널리 공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너머의 미래사회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소외된 노동과 욕구 절약, 그리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가난과 부의 대물림을 숙명처럼 굳혀놓는 극단적 양극화가 모두 일상영역에서 퇴출되어 역사교과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 미래사회의 요체는 이제까지 인류가 이룩한 문화유산과 생산력을 누구나 고루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 사회의 주인인 사회구성원들 위에 아무도 군림할 수 없는 평등사회, 곧 풍요로운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철초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지양한 미래사회가 ‘모든 인간적 감성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고,(경철100) ‘풍부한 인간적 욕구를 가진 풍부한 인간’, ‘인간적 삶의 표현을 총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간’, ‘자기 자신의 실현을 내적 필연성 내지 필요성으로 삼는 인간’, ‘풍부한 감성을 모두 갖춘 사려 깊은 인간을 그 사회의 지속적인 현실로서 생산’하리라고 예상합니다.(경철102-104) 또 그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통일’, ‘자연의 참다운 부활’을 기대하며,(경철97) 역사를 자연사의 일부로, 혹은 ‘인간적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인간을 위한 자연 생성’으로 파악합니다.(경철106) 또 그는 󰡔자본론󰡕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에 의해 의식적⋅계획적으로 이루어진 물질적 생산과정을 상정합니다.(자본1,104) 이때 그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리더라도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들은 대안 사회의 바탕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자본1,1046) 예컨대 자본의 집중에 의한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적 성격을 띠는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 속에 편입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 등이 그것입니다.(자본1,1045) ‘물질적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일반의 감축’이나 ‘사회가 얻는 절대적 여가시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자본3,330) 아울러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와 관련해 강조한 특징들, 즉 분업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 노동이 일차적인 욕구로 되며,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넘치고 남으로써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된 상태(고타377)도 염두에 둘 필요 있습니다.

물론 맑스에게 미래사회를 위한 세부 방안까지 일일이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기본 방향에 공감한다면 그 실현방안을 찾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류의 문화유산들, 특히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인식들, 노동운동과 혁명의 경험, 현실사회주의운동의 교훈 등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것들을 우리의 실천적 필요에 부합하도록 주체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 민중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철학적 원칙부터 세부 정책들까지 생산해내고, 이를 널리 공유하는 것이 화급한 당면과제입니다. 현 단계에서 몇 가지 원론적인 생각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소외와 빈곤화의 뿌리인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극복할 중심세력은 자본권력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자 민중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변혁적 성격을 살려내야 하고, 여러 부류의 탈-노동중심주의 이데올로기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자본논리를 절대화하여 착취의 효율적 지속을 추구하는 개량논의에 머물러도 안 되지만, 자본주의에서 성장한 생산력을 소외 극복과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에너지로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때 환경 및 자원 문제를 고려해 산업구조를 재구성하고 생산력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가는 것도 주요 과제가 될 것입니다.

셋째,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데에는 국가권력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속의 자본독재를 극복하는 실질적 민주주의 국가, 즉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민중이 권력의 주인인 국가, 노동자국가 건설을 최우선 당면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국가의 핵심과제는 자본권력을 근본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물적 조건을 창출하고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일입니다.

넷째,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이 또 다른 소외 체제로, 새로운 대중 억압과 착취의 체제로 전락하지 않도록 운동과정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국가와 국가 기관들이 ‘사회의 종복으로부터 사회의 주인으로 변화하는 것’[14]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을 방지할 모든 방책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 전위의 역할과 조직적 활동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의식적 자발성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억압에 맞서는 모든 해방운동들과 느슨한 연대 수준을 넘어서는 그 운동들의 현실적 비중에 합당한 수준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자본권력의 국제적 성격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성장 및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

지금까지 노동자 민중세력은 극우세력의 폭압에 맞서기 위해, 또 친재벌 보수를 친노동 진보로 날조하고 공격하는 극우 이데올로기에 현혹되거나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 세력으로서 발판을 굳히고 성장하고자 총력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 민중은 ‘촛불혁명’을 거치고도 여전히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있습니다.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존재감도 없는 상태인데, 이를 타개하는 운동도 아직 미약합니다. 이제는 노동자 민중세력이 친재벌 극우와 친재벌 보수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당하면서 자본독재의 들러리 노릇을 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목표가 확실히 설정될 때, 각 현장과 일상에서의 다양한 활동들도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형태의 소외를 몰아내고 자본주의 너머의 풍요로운 평등사회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자본권력을 비롯한 온갖 장애물들과의 지난한 전쟁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모순과 한계가 새로운 사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의 일차 관문인 노동자국가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때가 온 것입니다.

1 이 글은 2020년 9월 15일 노동전선 대중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임.
2 K. 맑스: 󰡔경제학 철학 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65-66쪽. 이하 󰡔경철초고󰡕 또는 ‘경철’로 약칭하며, 필요에 따라 원문(MEW Ergänzungsband 1. Teil)과 대조해 표현상 약간의 변경을 가할 수 있음.
3 G.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85쪽 이하 참조.
4 T. 이글턴: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김준환 역, 실천문학사 2000, 36쪽.
5 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3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8, 501쪽. 이하 ‘자본3’으로 약칭함.
6 정성진: 「󰡔자본론󰡕과 포스트자본주의론」, 현대사상 세미나 발제문(2021. 2. 6.
7 K. 맑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99쪽 참조. 이하 ‘자본1’로 약칭함.
8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447쪽 참조.
9 K. 맑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에 대한 평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4󰡕, 이수흔 역, 박종철출판사 2007, 377쪽 참조. 이하 ‘고타’로 약칭함.
10 소외와 사적소유의 원인-결과 관계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석을 해가는 중에 분명해지는 것은, 신들이 본디는 인간 지성의 착란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도 또한, 비록 그것이 외화된 노동의 근거나 원인인 것처럼 보여도 오히려 그 한 귀결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디 이 관계는 뒤에서는 상호작용으로 변화한다.”(경철75) 그러나 시초축적에 대한 󰡔자본론󰡕의 서술에서는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사적소유가 소외된 노동의 출발점임을 밝힌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 19세기 노동자들의 극한상황은 엥겔스도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12 노동계급 상층부가 매수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V. I.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2015, 38-39쪽 참조.
13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게 1995, 94쪽.
14 F. 엥겔스: 「1891년 서문」, K. 맑스: 「프랑스 내전」,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이종훈 역, 소나무 1993, 296쪽.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연구〉주택문제에 대하여

다음 글

〈연구〉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식화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