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2호 5-6 ‘당연한 전제’를 의심하라-《인권을 외치다》를 읽고

박한솔 ㅣ노동전선 회원

‘권리’가 차고 넘친다. 차별없는 노동권, 죽지 않고 일할 권리와 더불어 ‘120시간 일할 권리’, ‘“부정식품” 먹을 권리’1)도 어엿한 권리다.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이들 권리는 120시간과 부정식품에 가중치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를테면 국민의힘 이준석 당대표의 발언이 그러하다. 얼마 전 국민의힘 이준석 당대표는 “생산직은 (사무직과 달리) 주 52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이 있다”2)며 주52시간제 폐지의 필요성을 암시했다. 잔업과 특근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이 존재하는데 노동시간을 주52시간으로 일괄 제한하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다.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지만 실제로 현장에는 남들보다 많이 일해서 많이 벌고자 잔업, 특근을 자처하는 노동자가 있다. 그러나 기본급보다 특근 수당이 높은 기형적 임금체계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쯤은 거짓말이다. 장시간 과로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임금 총액이 터무니없이 줄어드는 구조 속에서 특근을 마다한다기란 쉽지 않다. 적게 일할수록 생활수준의 하락이 불보듯 뻔하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할 권리’를 베푼다. 달리 말하자면 ‘일하다 죽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장시간 과로 노동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로노동할 권리’를 주장하는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자본의 논리는 어떻게 공중의 이익을 사칭하는가. 윤석열‧이준석의 자유론은 외견상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노동자계급의 이익과는 거리가 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주의’라는 이념 자체가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조응한다. 실제로 근대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는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기초로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이제 막 성장하던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창출과 노동력의 자유로운 활용을 방해하는 봉건제에 대항할 논리가 필요해졌으니, 그 과정에서 ‘사회계약설’이 만들어졌다. 봉건 권력이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 국가를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정교분리를 확립했고, 자유로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을 토지로부터 폭력적으로 분리했다. 이는 농민을 무산자(無産者)로 전락시켜 도시 노동자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노동자를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농민은 봉건영주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토지(생산수단)에 대한 점유권의 상실과 산업혁명 시기로 대표되는 ‘전적인 무권리 상태’가 노동자에게 강요되었다. ‘몸뚱이’만 남은 노동자에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대신 겨우 살아남기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만을 가졌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했다는 사실은 제법 섬뜩하다. 역사적으로나 현재로서나 그 자유는 결코 노동자를 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대통령이 권좌에 오른 덕분인지 자유를 갈망하는 외침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극심한 비난과 폭력을 정면으로 마주하거나, 스스로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동권 획득을 위해 지하철 탑승 시위를 벌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SPC자본의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촉구하고자 53일간 곡기를 끊었던 파리바게트노조 임종린 지회장,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46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던 두 명의 인권활동가까지, 저마다의 ‘인간 선언’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누군가를 배제한 기초 위에 선 인권은 특권일 뿐이며, 우리의 공동체는 소수에 대한 차별을 전제로 유지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일제히 노동자들, 사회적 소수자들의 집회에 부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인간 선언의 내용은 소거되었고 ‘함께 살자’는 외침은 불법과 민폐라는 딱지 아래 가라앉았다.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게 정당하냐”3)는 개인적 권리 주장이 윤리를 대체하고, 신자유주의적 파편화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책임은 철저히 불문에 부쳐진 시대에 보편권으로서의 인권을 제기하는 일이 더없이 어려운 일이 됐다. 이럴 때일수록 인권의 본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당신에게만 인권이 있냐”는 비난에 “‘나의 인권’과 ‘당신의 인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이 인간인 이상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들이 있음을 입증하고, 설득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류은숙의 《인권을 외치다》(2009)를 집어들었다. 류은숙은 1992년부터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다. 이 책은 세계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파리코뮌 선언과 같은 유명한 인권선언들과 함께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덧붙여진 ‘인권 백과사전’이다. 책에 소개된 인권 문헌들은 “당대 인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울림이 있고, 치열한 토론의 결실인 국제적 합의가 있고, 인권을 우습게 아는 권력을 속시원히 비웃어주고, 인권의 핵심을 한 방에 꿰는 그런 문헌들”(7p)이다. 저자는 인권 현장의 절실한 외침 속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인권 저작들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갈증을 느꼈고, 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인권의 역사들을 긁어모았다고 밝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권의 역사를 담은 기록이자, 동시에 인권의 저자들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인권의 저자’란 인간의 고난과 굴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전해온 사람들”(11p)이라는 게 류은숙 활동가의 설명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곧 ‘권리’의 동의어로 이해된다. 그러나 양자는 유사성이 있음에도 개념적으로는 분리된다. 인권은 보편성과 추상성을 띠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점에서 무조건성을 가진다. 반면 권리는 개별성과 구체성을 가지고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만 부여된다는 점에서 ‘배타성’을 띤다. 따라서 인권은 권리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규제하며 그 대상이 인간인 경우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는 다르다. 권리는 “타인 또는 국가가 특정 행위를 못하도록 하거나 반드시 하도록 명령하는 힘”(10p)이다. 때문에 “권리 주장이 늘어날수록 인권의 자리는 오히려 협소”(같은 쪽)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쟁취를 위해 도로에 드러눕거나 지하철 탑승시위를 벌이면 “자신들의 불편함을 호소하려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4)는 항의가 쏟아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겉으로만 합리적인 이런 비판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권이 평등한 관계 속에서 동등하게 보장되고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을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권한쟁의’로 보는 것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인권적 고려가 결여된 판단이다. 현실에서 이들 권리는 분명 불평등하게 안배되고 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저상버스가 없어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장애인의 이동권과, 교통카드 한 장만 있다면 발걸음 닿는 데로 움직일 수 있는 비장애인의 이동권은 같지 않다. 2020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8.8%는 장애로 인한 불편 탓에 한 달 동안 단 한번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 외출을 하더라도 장애인 10명 중 4명은 교통수단 이용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호소했다. 이동권이 장애 여부에 따라 그 질과 양을 완전히 달리하는 현실에서 비장애인의 이동권은 사실상 ‘특권’이나 마찬가지다.

‘인권적 견지가 탈각된 권리’는 그래서 차별과 특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남용될 가능성이 크다. 인권은 그런 약탈적 권리들로부터 ‘무권리자의 권리’를 지켜야 하고, “경쟁을 강요하는 정치·경제·사회적 관행을 추궁하는 악역”(10p)으로서 불가침의 평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야 한다. 인권이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척도가 되는 만큼 ‘나 먼저’를 외치는 무수한 요구들 가운데 무엇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근원적 요구인지를 분간할 수 있도록 세심한 인권감수성을 기르는 일도 중요하다.

때문에 인권을 흐릿한 추상에 가두어 둔 채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특히나 어떤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권인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게을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권은 그저 좋은 것이니까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그저 실천하자는 심정으로 매달리다가도, 현실에서 튕겨져 나오는 인권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132p) 모든 권리들이 그러하듯, “인권 또한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경제적 생존 조건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특정 계급의 기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5) 이러한 맑스주의적 인권론에 따르면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은 성립하지 않고, 다만 인권은 어느 계급의 권리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인권은 부르주아적 인권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맑스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공민권과 구별되는 이른바 인권이란 시민사회 구성원의 권리, 다시 말해 인간과 공동체에서 분리된 이기적 인간의 권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133p)고 말했다. 맑스에 따르면 “시민사회에 속한 인간은 생산 활동의 주체로서의 인간, 즉 ‘지상에서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고 이 개인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개인’이며 이들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자연 상태’의 인간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에게 있어 인권은 필연적으로 자연권이 되고 자연권이므로 무조건적이다. 결국 부르주아들이 바란 인권의 진의는 다음과 같다. 소유권=자연권=인권.

‘제1인권’으로 소유권을 승인한 가운데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편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그래서 기만적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평등은 형식적 차원에 머문다.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로, 그리고 자본가들의 인권은 노동자를 착취할 자유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부르주아적 인권에 대해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본문에서는 자유를, 각주에서는 그 자유의 폐지를 규정하고 있다”(135p)고 했다. 다시 말해 “기본적 인권은 재산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의 향유가 궁극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134p)되는 계급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적 인권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피억압민중의 이익에 부합할 수 없는 것이다.

맑스의 부르주아 인권론 비판을 류은숙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인권 자체가 아니라 사실상 인권의 폐지를 가능케 하는 인권 담론과 그 모순들”이라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제척되고 120시간 일할 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는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의 ‘당연한 전제’들로부터 자연히 도출되는 결론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은 없다는 것, 소유권은 자연권이 아니라는 것, 생산수단이 사적소유를 인정하는 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권이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적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된 사회만이 진정한 의미의 인권을 보호하는 든든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인권은 자연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규정된 한 사회의 전체적 구조에서만 존재한다”(127p)는 뜻이다.

끝으로 책을 읽은 소감을 간략히 전하고자 한다. ‘도대체 인권이 뭐냐’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인권을 외치다》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적 인권론은 물론 사회주의적 인권론에 이르는 다양한 관점의 인권 담론을 소개한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인권 입문서’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공사다망한 탓에 구석구석 꼼꼼히 읽지 못한 아쉬움이 커서, 아마 조만간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앞서간 인권 선배들의 자취를 더듬는 일은 몇 번이 되었든 지나치지 않다.

1)한국일보, “윤석열 ‘불량식품’ 논란…”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2021.08.02.
2)한겨레, “이준석 “생산직, 주 52시간 이상 원해”…노동계 “임금구조 왜곡 간과”“, 2022.05.17.
3)조선일보,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 “권리다” “민폐다””, 2022.03.29.
4)조선일보,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출근길 대란… 장애인총연합 “이런 방식 반대”, 2022.04.21.
5)《철학소사전》, 296쪽, 동녘,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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