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자본』제2권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1]이 글은 ⸢자본⸥ 제2권 강독세미나를 위해 작성한 강의 원고입니다.김성구 | 한신대 명예교수

1. 자본 제1권 길라잡이로부터

⸢자본⸥ 제2권 길라잡이는 작년에 간행된 제 책 ⸢자본 제1권 길라잡이⸥(나름북스, 2021)를 언급하면서 시작하도록 하죠.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책의 저자로서 서문에서 충분히 밝히지 못한 문제 두 가지만 더 부연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자본⸥의 이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거론, 비판되는 9인의 인물이란 등장하는 순서대로 열거하면, 송태경, 강신준, 윤소영, 백승욱, 곽노완, 조정환, 이진경, 고(故) 김수행, 정성진입니다. 이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서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룬 논자는 네오마르크스주의자인 김수행과 정성진뿐이죠.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와 이에 대한 비판인 네오마르크스주의(=⸢자본⸥ 환원주의 또는 ⸢자본론⸥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사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해당 맥락에서 사실상 지나치면서 경멸적인 언사로 거론했을 뿐입니다. 정성진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올드old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이론적 원천의 하나가 로스돌스키(R. Rosdolsky) 같은 트로츠키파라는 점에서, 또 그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항하는 ⸢자본⸥ 환원주의 전통에 있다는 점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자 정성진’은 잘못된 표현이 아닙니다.

이 책은 ⸢자본⸥ 제1권 길라잡이지만, 부록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개요도 담고 있는데요, 이 개요는 정통파(=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관점에 입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본⸥ 제1권의 길라잡이도 정통파의 관점에 입각해 있죠. 우리말로 접하는 여타의 길라잡이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고유한 기여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대와 다른, 오늘날의 변화된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자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자본⸥은 현대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얼마나 유효하나 라는 문제의식의 발로죠. 전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대략 2/3 정도를 포괄해서 개관하고 있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구성 비중을, ⸢자본⸥과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2/3, 마르크스 이후의 경제학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1/3로 해서 개략적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본⸥ 제1권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절반 즉 1/3을 차지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1/3, 그래서 도합 2/3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빠져있는 1/3 부분, 다시 말해 ⸢자본⸥ 제2권, 제3권의 길라잡이는 책에서 미야카와 아키라(宮川彰), 『『資本論』第2•3巻を読む』(上)(下), 学習の友社, 2001을 참조하도록 안내하였습니다. 일본어 저서를 참조시켜 놓아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현재 우리의 이론 상황이죠. ⸢자본⸥ 제2, 3권에 대한 적절한 우리말 길라잡이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강의 주제로 들어가죠. ⸢자본⸥ 길라잡이에서 이 책만의 또 하나의 특별한 관점은 ⸢자본⸥의 분석의 추상수준 문제였죠. 제1권만이 아니라 전 3권에 걸친 추상수준에 대한 이해 여하가 ⸢자본⸥을 올바로 독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 책에서 제1권 마지막 편인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의 서두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제7편으로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의 분석이 완성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단서가 붙는다. 제2권 ‘자본의 유통과정’, 그리고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편의 서론(589-590/766-767)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여기서 해명하는 위의 과제를 어떻게 한정하고 취급하는지 그 추상수준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제1권의 분석은 원활한 유통 하에 상품가치대로 교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정한다. 제7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하에서는 자본이 그 유통과정을 정상적으로 통과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있다. 이 과정의 보다 상세한 분석은 제2권에 속한다.’(589/766)”(⸢자본 제1권 길라잡이⸥, 254쪽).

마르크스는 제1권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유통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유통과정에 대한 분석은 제2권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제 자본의 유통과정을 분석하는 제2권에서도 후에 보는 바처럼 유통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다시 말해 원활한 유통하에 상품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을 상정합니다. 말하자면 제2권에서의 유통과정의 분석도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수요와 공급의 균형과 가치대로의 교환을 상정한 위에서 유통과정에서의 자본의 운동과 형태를 분석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현실경제는 그와 달리 자본들의 경쟁 속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가치로부터 가격의 괴리, 경기의 변동과 공황 등 무정부적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현실적인 유통과정의 분석은 그러나 ⸢자본⸥ 제2권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자본⸥ 전 3권에 걸친 이러한 추상수준(제3권에서는 나아가 수요와 공급의 균형과 생산가격에 따른 교환을 상정합니다만)은 ‘자본의 이념적 평균’ 또는 ‘자본의 일반적 분석’이라고 하여 그 방법론에 특별히 주목할 것을 강조했죠.(⸢자본 제1권 길라잡이⸥, 30-32쪽). 현실경쟁과 경기순환에 따른 불균형과 변동들을 서로 상쇄하여 추상하고 이념적 평균에서 파악한 유통과정의 분석이 바로 제2권의 대상이라는 것, 우선 이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점에 특히 유념하면서 이제 제2권의 독해법을 살펴볼 텐데요, 그 전에 제2권 편집자인 엥겔스가 제2권 학습을 위해 해준 조언이 있어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2. 편집자 엥겔스의 학습 안내

⸢자본⸥ 제2권은 마르크스가 남겨 놓은 초고들로부터 엥겔스가 편집해서 간행한 것이죠. 엥겔스가 제2권 서문에서 편집을 위해 이용한 8개의 초고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1865/67년부터 1880/81년 간에 쓰여진 이 초고들은 전반적으로 출판을 위해서는 불완전하고 초고에 따라서는 극히 불균등한 상태여서 엥겔스가 편집작업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독자들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기본적으로 초고들로부터의 취사선택에 자신의 일을 한정하고, 초고에 대한 재구성이나 가필 등 편집자로서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마르크스의 원문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힙니다. 말하자면 ⸢자본⸥ 제2권은 엥겔스의 편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고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거죠. 당연히 그 독해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2권만 그런 건 아니지만,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 간에도 많은 쟁점과 서로 다른 해석이 있거든요. 이런 걸 감안하고, 어려운 책을 우리가 읽어나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죠.

어떻게 이 책을 읽어나가야 하나, 엥겔스가 1895년 3월 16일 아들러(V. Adler)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자본⸥ 제2권과 제3권을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될 짤막한 조언을 주고 있는데요, 제3권에 대한 부분은 여기서는 생락하고 제2권 부분만 보겠습니다.

“ … 자네가 감옥에서 ⸢자본⸥ 제2권과 제3권을 읽고자 하니까, 힘이 덜 들도록 내가 몇 가지 힌트를 주겠네.

제2부. 제1편. 제1장은 철저하게 읽어라, 그러면 제2장과 제3장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제4장은 다시 요약으로서 정확하게 읽을 것. 제5장과 제6장은 쉽고, 특히 제6장은 부수적인 것을 다룬다.

제2편. 제7-9장은 중요하다. 제10장과 제11장은 특별히 중요하다. 제12, 13, 14장도 마찬가지다. 반면 제15, 16, 17장은 당장은 그냥 쭉 훑어보면 된다.

제3편은 중농학파이래 여기서 처음으로 다뤄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과 화폐의 총순환을 아주 탁월하게 서술한 것이다. 내용에 따르면 탁월하지만, 그러나 형식에 따라 보면 엄청나게 난해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편은: 김성구] 두 개의 상이한 방법에 따라 작성된 두 개의 초고로부터 편성된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2번 초고[8번 초고?: 김성구]는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뇌가 고생하던 때에 병환 상태에서 무리하게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그것을 제일 끝에, 제3부를 처음 읽고 난 후에 읽을 것이다. 자네가 공부하는 데도 당분간은 읽지 않아도 괜찮다.”(MEW 39, p. 436)

제2권(제2부)은 세 개의 편, 1. 자본의 변태들(자본의 순환), 2. 자본의 회전, 3.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내용을 교과서처럼 비교적 쉽고 정연하게 요약, 정리한 글이 있어 제가 번역해서 이 강의 원고에 첨부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일본의 정통파 경제학자인 토미츠카 료조(富塚良三)의 글인데요, 10쪽밖에 되지 않아 오히려 교과서를 요약한 정도라고 할 수 있지만, 엥겔스가 난해하다고 한 제3편을 포함해서 제2권의 전체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어 제 강의를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제3편 부분은 여전히 어렵기는 합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이 글을 여기에 첨부해 놓았기 때문에, 제가 제2권의 주요 내용을 또 살펴보는 부담을 덜고 강의를 비교적 자유롭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셈입니다. 이하에서 강의는 특별히 ⸢자본⸥의 추상수준과 방법론에 유의하면서 제2권의 독해를 위한 안내 수준으로 하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강의는 토미츠카의 글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죠. 토미츠카의 글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3. 자본2권의 대상과 추상수준

제1편 자본의 변태들(자본의 순환)부터 봅니다. 제1권에서 본 산업자본의 운동정식은 다음과 같죠.

G–W(Pm, A)—P—W′-G′(G: 화폐, W: 상품, Pm: 생산수단, A: 노동력, P: 생산과정, G′=G+ΔG)

이 정식에서 보다시피 자본은 처음에는 화폐로, 다음에는 상품(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그리고 생산과정을 거쳐 새로운 상품으로, 그리고 다시 화폐로 자신의 자태를 변화시켜가면서 가치증식 운동을 수행합니다. 자본은 이렇게 가치증식에서 세 가지 형태변화 또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제1단계는 구매(G–W), 제2단계는 생산과정, 제3단계는 판매(W′-G′)죠. 여기서 화폐와 상품은 단순한 상품유통과 달리 모두 자본이 운동하는 형태 즉 자본의 자태라고 했죠. 따라서 화폐는 화폐자본,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상품인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자본, 그리고 상품은 상품자본을 말합니다. 이 운동에서 자본은 화폐자본의 형태로부터 출발해서 생산자본의 형태로, 다음에는 상품자본의 형태로, 그리고 다시 화폐자본의 형태로 되돌아오는데, 이를 자본의 순환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이 운동은 화폐자본으로부터 시작해서 화폐자본으로 되돌아오므로 화폐자본의 순환이라고 하는 거죠. 화폐자본의 순환은 투하된 가치가 증식된 가치로 돌아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므로 가치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운동을 일반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죠. 제2권 제1편 서두에서 마르크스가 다음처럼 쓰고 있죠. 자본이 이 순환운동에서 취하는 형태들의 분석이 이제부터의 연구대상이라고요. 그러면서 그 분석의 추상수준에 대해서도 밝혀둡니다.

“[자본 순환의: 김성구] 제1단계와 제3단계는, 제1권에서는 제2단계[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한에서 논의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이 각각의 단계에서 취하는 각종의 형태들, 순환의 반복 중에서 자본이 취하거나 벗어버리는 각종의 형태들은 연구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이 형태들이 우선 당면한 연구대상이 된다.

이 형태들을 순수하게 파악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형태전환과 형태형성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모든 계기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상품은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는 것과, 그 판매가 불변의 사정 하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가정할 것이다. 또한 순환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치변동도 도외시할 것이다.”(김수행판, 제2권, 제1 개역판, 2004, 31-32쪽: 이하에서도 이 판으로부터의 인용임)

앞에서도 제가 말했듯이 제2권의 추상수준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 언급의 방법론적 의미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자본⸥ 독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자본은 끊임없는 가치증식을 자기 목적으로 하여 이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데, 이 반복하는 운동을 고찰해보면 여기에서는 화폐자본의 순환 외에 다른 형태의 자본의 순환들도 보게 됩니다. 다음에 반복하는 운동을 보죠.

G–W(Pm, A)—P—W′-G′•G–W(Pm, A)—P— W′-G′•G–W(Pm, A)—P— W′-G′

순환이 두 번만 반복해도 벌써 두 개의 다른 순환이 나타납니다. 즉, P로 시작해서 P로 끝나는 순환 P—W′-G′•G–W(Pm, A)—P, 이건 생산자본의 순환이겠죠. 다른 하나는 W′로 시작해서 W′로 끝나는 순환 W′-G′•G–W(Pm, A)—P—W′, 이건 상품자본의 순환입니다. 자본의 운동이 계속 반복되면 화폐자본의 순환도 계속 반복되고, 생산자본의 순환도 반복되며, 상품자본의 순환도 반복됩니다. 운동의 출발점을 어디로 하는가에 따라 자본의 순환운동에서 세 가지 형태의 순환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자본의 현실적 운동을 보면 이 세 가지 형태의 순환이 서로 나란히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을 볼 수 있죠. 왜냐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은 순환의 세 형태, 세 단계를 계기적으로 거쳐야지 처음의 형태로 돌아오죠. 그러면 어떤 자본이 예컨대 생산을 완료해서 상품자본으로 전화하면 이 상품이 판매되어 화폐로 회수되고 이것으로 다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기 전까지는 생산을 재개할 수 없죠. 그러면 자본의 연속성이 깨지고 그동안 잉여가치 생산은 중단됩니다. 자본이 생산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생산된 상품이 판매되고 그 화폐로 생산자본을 다시 구매할 때까지 다른 화폐자본이 투하되어 생산자본으로 전화되어야 합니다. 생산된 상품이 판매되기 전에, 즉 화폐자본으로 전화되기 전에 생산의 연속성을 유지할 다른 화폐자본이 투하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개별자본은 일부는 생산자본의 형태로, 다른 일부는 상품자본의 형태로, 또 다른 일부는 화폐자본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겠죠. 즉, 자본의 일부가 생산자본의 형태에 있는 중에 다른 일부는 이미 생산된 상품(상품자본)의 형태로 있으면서 화폐형태로의 전화를 기다리고, 또 다른 일부는 화폐자본 형태로 생산자본으로의 전화를 기다리도록 전체 자본은 세 가지 자본형태로 비례에 맞게 배분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순환의 각 단계에 있는 이 세 가지 자본부분들도 저마다 각각 계기적인 순환운동을 수행합니다. 화폐자본은 화폐자본의 순환을, 생산자본은 생산자본의 순환을, 상품자본은 상품자본의 순환을 하는 거죠. 따라서 자본은 순환운동에서 계기적으로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품자본이라는 세 가지 자본형태를 끊임없이 교대해 나가며, 동시에 병행해서 이 세 가지 자본형태가 각각 화폐자본의 순환, 생산자본의 순환, 상품자본의 순환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순환을 그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총순환은 세 형태의 실질적 통일이다.”(제2권, 117쪽) 자본순환을 이렇게 세 형태의 통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현상에서 보이는 특정한 한 형태에 고착시켜 보면, 자본의 운동은 화폐자본의 운동, 또는 상품자본의 운동, 또는 생산자본의 운동으로서 단편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경제학에서 나타난 이런 오류를 대표하는 것이 다름아닌 화폐자본의 운동만을 주목한 중상주의, 상품자본의 분석에 치중한 중농학파, 그리고 산업자본의 생산활동 분석에 주력한 고전학파죠.

이상에서 자본의 순환운동은 개별자본을 상정해서 살펴본 건데(개별자본이라고 해도 이건 사회를 대표하는 개별자본이고 따라서 사회전체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있죠), 사회적 총자본의 부분으로서 이 개별자본의 운동은 당연히 다른 개별자본들의 운동과 상호 연결되어있습니다. 어떤 개별자본이, 그 각각의 자본부분이 화폐자본으로부터 생산자본으로, 상품자본으로부터 화폐자본으로 그 형태를 바꿔나가는 과정 즉 구매(G–W)와 판매(W′-G′)는 이 자본과 거래하는 다른 자본들의 편에서는 판매와 구매이며, 자본의 순환이 원만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죠. 또 이 다른 자본들도 마찬가지로 각각 순환운동을 하면서 자본의 원만한 형태변화를 또 다른 자본들과의 교환에도 의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사회전체적으로 개별자본들의 순환운동이 다른 개별자본들의 순환운동과 뒤얽혀 교환으로 상호 연결되어있는데, 서로 얽혀있는 수많은 개별자본들의 순환이 원활하게 반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3편에서 보게 될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사회전체라는 관점이 거기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회적 총자본의 각종 구성부분[개별자본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구성부분에 불과하다]이 유통과정에서 – 자본과 잉여가치에 대해 – 어떻게 서로 보충하고 있는가는, 상품유통에서 일어나는 변태들의 단순한 상호결합[자본유통의 행위가 상품유통의 과정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는 해명되지 않으며, 다른 분석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자세히 고찰해보면, 모든 상품유통에 공통된 변태의 상호결합으로부터 단순히 빌려온 불명확한 개념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제는 제3편에서 깊이 다루어질 것이다.]]”(제2권, 133쪽)

이제 다음 제2편 자본의 회전으로 넘어갑니다. 자본의 회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자본의 순환은 개개의 단일의 과정이 아니라 주기적 과정이라고 파악할 때 그것은 자본의 회전이라고 불린다. 이 회전의 시간은 자본의 생산시간과 유통시간의 합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 총시간이 자본의 회전시간을 이룬다.”(제2권, 182쪽)

‘주기적 과정으로 파악할 때의 자본의 순환이 자본의 회전이다’, 이 정의는 일단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쉽게 다가오지 않죠. 순환은 하나의 순환을 말하고 회전은 반복하는 순환인가, 순환과 회전은 어떻게 다른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죠. 순환이란 것 자체가 처음으로 돌아온다는 거고, 따라서 순환에서도 주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죠. 순환을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마르크스가 제1편에서 다음처럼 썼습니다.

“자본이 생산영역에 체류하는 시간은 생산시간이며, 유통영역에 체류하는 시간은 유통시간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그 순환을 마치는 데 결리는 총시간은 생산시간과 유통시간의 합계와 같다.”(제2권, 140쪽)

그러면 순환하는 시간과 회전하는 시간은 어떻게 다른 건가, 똑같지 않나, 이런 문제제기입니다. 마르크스가 제2편에서 체계적으로 순환과 회전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 직접 자본의 회전을 설명하고 있어 생긴 곤란이죠. 제2권이 초고들로부터 편집된 저작이라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자본의 회전이 자본의 순환과 다른, 독자적인 문제는 처음에 투하된 자본가치가 다시 돌아오는 순환을 다루는 데 있습니다. 반면 자본의 순환에서는 자본이 취하고 버리는 형태들의 순환에 주목하죠.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설정해 놓아도 여전히 자본의 순환과 회전은 동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의 순환을 다룰 때도 순환은 처음에 투하된 자본이 잉여가치와 함께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자본의 순환과 회전은 동일한 건데, 다만 그 살펴보는 측면만 다르다는 것일까요? 자본의 순환과 회전이 이렇게 동일하게 된 것은, 아래에서 보는 바처럼, 마르크스가 자본의 순환 문제를 다룰 때, 투하된 모든 자본가치가 한 번의 생산과정에서 모두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자본 중에서 생산설비 등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매 생산과정마다 조금씩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되고, 그 생산물의 판매에 의해, 이전된 가치가 화폐로 회수되어 감가상각금으로 적립되며, 그 생명연한이 다했을 때 비로소 투하된 전체 가치가 회수됩니다. 반면 원료 등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한 번의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가치 전체를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하고, 그 생산물의 판매와 함께 투하된 자본가치가 전액 회수되죠.(노동력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그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한 번의 순환에서 전액 회수된다는 점에서 이것과 마찬가지죠.) 이 두 개의 상이한 자본 부분을 고려하면, 이제 투하된 자본가치가 회수되는 자본의 회전은 양자가 다르게 됩니다.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예컨대 노동수단의 생명연한이 10번의 생산과정 동안 계속된다면(또 매번의 생산과정 후에 유통과정이 뒤따르면), 10번의 순환 후에 1회전 하는 것이고, 반면 원료 등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한 번의 생산과정과 유통과정 후에 즉 한 번의 순환에 1회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또 자본의 순환과 회전은 명백히 달라지죠.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1회전 속에 10번의 순환이 있고, 반면 원료 등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1순환이 곧 1회전입니다. 이렇게 회전의 문제를 고찰하면서 자본의 새로운 범주가 등장하죠.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은 고정자본, 원료와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은 유동자본이라고 합니다. 이 예에서 고정자본이 1회전 하는 동안 유동자본은 10회전 하게 되죠. 그러면 총투하자본가치는 10번의 회전을 포함하고 있는 1순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회전순환이라고 하죠. 이 회전순환은 고정자본의 내구연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고, 마르크스는 이를 10년 주기의 과잉생산공황의 물질적 토대라고 합니다.

마르크스는 제1편에서 자본의 순환문제를 순수한 모습으로 다루기 위해 고정자본의 문제를 일단 추상하고 서술할 것이며, 후에 자본의 순환의 수정으로서 고정자본 문제를 다룰 것임을 밝히는 데요, 이게 바로 자본의 회전 문제이지요. 이렇게 보면 자본의 회전이란 자본의 순환의 연장선 상에 있고, 자본의 순환의 수정 또는 자본의 순환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쓴 그 문단을 한번 보죠.

“… 우리의 예에서는, 생산단계에서 생산된 상품량의 자본가치는 최초에 화폐로 투하된 총가치와 같다는 것 –바꾸어 말해, 화폐로 투하된 총자본가치는 한꺼번에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제1권 제8장), 불변자본의 일부인 진정한 노동수단(예: 기계)은 동일한 생산과정의 몇 회의 반복에 계속 봉사하며, 이 때문에 자기의 가치를 다만 조금씩 생산물로 이전시킨다. 우리는 이 사정이 얼마나 자본의 순환을 수정하게 되는가를 뒤에서 살펴볼 것이므로, 당분간은 다음의 논의로 충분하다.”(제2권, 60쪽)

스미스 이래의 고전파 경제학은 유통영역에서 운동하는 화폐자본 및 상품자본을 유동자본으로 파악하고, 이를 생산자본의 두 부분 중 하나인 유동자본과 혼동하였죠.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은 생산자본에 대비해서 유통자본이긴 하지만 고정자본에 대비한 유동자본은 아니죠.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은 어디까지나 생산자본에 있어서의 구별이고 생산자본의 두 가지 요소라는 것이죠. 또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유동적 부분이 동일한 방식으로 회전한다는 것에 현혹되어 가치증식과정에서 양자가 기능하는 본질적 차이를 보지 못하고,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별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의 구별로 해소해버렸습니다. 생산자본은 가치증식의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되고, 회전방식의 관점에서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구별되죠. 양자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은 그 관점에 따라 불변자본/고정자본이고, 원료 등에 투하된 자본은 불변자본/유동자본, 그리고 노동력은 가변자본/유동자본인 거죠.

자본의 회전이란 문제는 투하된 자본가치가 회수되는 주기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화폐자본의 순환 또는 생산자본의 순환을 대상으로 분석합니다. 상품자본의 순환은 그 대상이 되지 못하죠. 왜냐하면 화폐자본이나 생산자본은 투하자본의 가치를 그 출발점으로 하지만, 상품자본은 그 출발점에서 이미 투하된 자본가치와 함께 증식된 가치부분이 포함되어있어서 이 문제를 다루는데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음 제3편에서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문제를 검토할 때는 상품자본의 순환을 대상으로 합니다. 여기서는 잉여가치를 포함하는 사회적 총자본의 총생산물 W′의 각각의 구성부분이 상호 교환을 통해 어떻게 가치측면에서, 또 사용가치 측면에서 보전(補塡)되는가, 그 재생산의 조건들을 규명하는 것이 주제이기 때문이죠.

그럼 이제 제3편으로 넘어가죠. 제3편의 서두에서 마르크스가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제1편과 제2편의 대상을 요약해서 정리하고 제3편의 대상을 밝히고 있어 다소 길더라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제1권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 고립된 과정으로서, 그리고 재생산의 한 과정으로서 분석되었다. 즉, 잉여가치의 생산과 자본 자체의 생산이 분석되었다. 자본이 유통분야에서 겪는 형태변환과 소재변환은 거기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고 가정되었으며, 자본가는 생산물을 그것의 가치대로 판매하며, 과정을 새로 시작하거나 끊임없이 계속하는 데 필요한 물적 생산수단을 유통분야에서 발견한다고 가정되었다. 우리가 거기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통분야의 유일한 행위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으로서의 노동력의 매매였다.

이 제2권의 제1편에서는 자본이 자체의 순환에서 취하는 각종 형태들과 이 순환 자체의 각종 형태들이 고찰되었다. 그리고 제1권에서 고찰된 노동기간에 추가하여 유통시간이 고찰되었다.

제2편에서는 순환이 주기적인 것으로서, 곧 회전으로서 고찰되었다. 우리는 한편에서는 자본의 상이한 구성부분들(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이 상이한 시간에 또 상이한 방식으로 각각의 순환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밝혔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시간과 유통시간의 길이의 차이를 야기하는 사정들을 연구하였다. 우리는 회전시간과 그것의 구성부분의 상이한 비율이 생산과정 자체의 규모와 연간잉여가치율에 미치는 영향을 밝혔다. 사실상 제1편에서는 주로 자본이 자체의 순환 중에서 끊임없이 취하고 또 벗어던지는 [잇따라 나타나는] 형태들을 고찰하였다면, 제2편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자본이 잇따른 형태변화의 과정에서 생산자본, 화폐자본 및 상품자본의 각종 형태들로 [비록 비율은 변경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분할되며, 그리하여 어떻게 그 형태들이 서로 교체될 뿐 아니라, 총자본가치의 각각의 부분들이 어느 특정 시점에서 이 상이한 상태들로 병존하면서 기능하는가를 고찰하였다. 특히 화폐자본은 제1권에서는 지적되지 않은 특성을 가진 것으로서 서술되었다. 즉, 일정한 크기의 생산자본을 끊임없이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본 중 상당한 부분[그 크기는 회전의 조건에 따라 다르다]이 끊임없이 화폐자본의 형태로 투하되고 갱신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일정한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제1권에서나 제2권에서나 문제로 된 것은 언제나 다만 하나의 개별자본이었으며 사회적 자본의 자립적인 한 부분의 운동이었다.

그런데 개별자본의 순환들은 서로 엉키며 서로 전제가 되고 조건으로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바로 이렇게 엉킴으로써 사회적 총자본의 운동을 이룬다. 단순상품유통에서 한 상품의 변태 전체가 상품세계 전체의 일련의 변태들의 한 고리로서 나타났듯이, 이제는 개별자본의 변태가 사회적 자본의 일련의 변태들의 한 고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단순상품유통이 반드시 자본의 유통과 결부된 것은 아니었다면[왜냐하면 그것은 비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 위에서도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총자본의 순환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개별자본의 순환에 속하지 않는 상품유통[곧, 자본을 형성하지 않는 상품들의 유통]도 포함한다.

그러면 이제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부분으로서 개별자본들의 유통과정, 즉 이 사회적 총자본의 유통과정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유통과정은 총체로 보면 재생산과정의 한 형태이다.”(제2권, 423-424쪽)

서로 얽혀있고 서로 조건이 되는 개별자본들의 순환들의 총체가 사회적 총자본의 유통을 이루는데, 이 유통이 어떻게 원활하게 진행되어 사회적 재생산이 유지될 수 있는지가 여기서의 서술 대상입니다. 사회적 총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서는 개별자본들의 순환들에서, 그 각각의 자태변화들에서 상호 간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달성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균형만은 아니죠. 수요와 공급의 균형 속에서 개별자본들이, 따라서 그 총체인 사회적 총자본이 생산의 반복적인 계속 즉 재생산을 수행하는 것이어서 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는 것은 재생산의 유지를 위한 균형, 즉 재생산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제 그 분석을 위해 재생산표식을 사용합니다. 이게 바로 마르크스가 앞에서 자본의 순환만으로는 해명되지 않고 “다른 분석방법”(제2권, 133쪽)이 필요하다고 한 그것입니다. 재생산표식에서는 사회적 총생산물이 소재적 관점으로부터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의 두 종류로 분할되고, 따라서 사회적 생산부문이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I부문과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II부문으로 분할되고, 가치적 관점으로부터는 C+V+M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죠. 사회의 총생산물과 사회적 생산을 이렇게 두 그룹으로 분할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개별상품들과 개별자본들의 교환과 수급관계를 명시적으로 그려내면서 재생산을 설명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일종의 집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표식에 명시적으로 표시된 두 개의 생산물 종류와 두 개의 생산부문에는 각각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진 않지만 수많은 생산물 종류와 수많은 생산부문 그리고 수많은 개별자본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재생산표식을 보면서 재생산과 유통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죠. 재생산의 문제를 검토할 때는 잉여가치가 모두 자본가의 소비로 지출되는 단순재생산과 잉여가치의 일부가 축적되는 확대재생산을 구분해야 되죠. 먼저 다음과 같은 단순재생산 표식을 통해서 문제를 해명합니다.

I. C + V + M = W′I (생산수단)

II. C + V + M = W′II (소비수단)

한 사회의 연년의 총생산물(W′)은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으로 구성되고, 그 가치량은 각각 W′I, W′II, 그리고 생산물의 가치는 각각 (소모된) 불변자본 C, 가변자본 V, 잉여가치 M으로 되어있죠. 단순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총생산물 중 I부문에서 생산된 생산수단이 양 부문의 불변자본(생산수단)을 보전해야 하고, 또 II부문에서 생산된 소비수단은 양 부문의 수입(즉 노동력 가치가 전화된 임금과 잉여가치가 전화된 이윤)으로 소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 부문의 자본은 다음연도에 동일한 규모로 생산을 재개할 수 있고,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I부문의 생산물은 생산수단이어서 I부문 자본가들은 I부문 내부에서 상호 교환을 통해 생산수단을 보전할 수 있지만, 임금과 이윤도 생산수단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I부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그것을 직접 소비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II부문에서는 그 생산물이 소비수단이기 때문에 II부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II부문 내부에서의 상호 교환을 통해 임금과 이윤을 소비수단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II부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인 소비수단으로써 생산수단을 보전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문제는 이런 겁니다. I부문은 생산수단 형태로 존재하는 임금과 이윤을 소비수단 형태로 전환해야 하고, 반면 II부문은 소비수단 형태로 존재하는 불변자본이 생산수단 형태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I부문이 필요로 하는 소비수단은 II부문에서 생산하고 II부문이 필요로 하는 생산수단은 I부문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이러한 재생산의 곤란은 양 부문 간의 교환을 통해서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I부문은 II부문에 생산수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II부문으로부터 소비수단을 구매하며, 반대로 II부문은 I부문에 소비수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I부문으로부터 생산수단을 받는 겁니다. 양 부문이 각각 한편에서는 공급자이자 다른 한편에서는 수요자라는 이중적 위치에 있고, 이 거래는 당연히 양 부문 간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지죠. 이렇게 교환을 통해 생산수단 형태로 있던 I부문의 임금과 이윤은 소비수단으로 전환되고, 소비수단 형태의 II부문 불변자본은 생산수단 형태로 전환되어 보전됩니다. II부문의 불변자본이 생산수단 형태로 보전된다는 것은 이 생산수단이 소비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이라는 거죠. 그래서 I부문에서 생산되는 생산물 즉 생산수단은 다시 두 종류의 생산수단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생산수단, 그리고 이 생산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 말이죠. 예컨대 섬유기계는 섬유같은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생산수단이고 공작기계는 그 섬유기계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이죠. 교환을 통한 이와 같은 전환과 보전을 독일어 원문에는 Umsatz로 되어있는데요(Umsatz는 자리옮김, 자리바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적절한 용어가 마땅치 않습니다. 김수행 판에서는 그냥 교환이라고 번역했고, 일본어 번역에서는 전태(転態)라고 하더군요.(물론 I부문 내부에서도, II부문 내부에서도 각각 부문내 교환을 통해 이런 전환이 일어나서 특정한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I부문의 각각의 자본가는 자신이 생산한 생산수단 형태로 존재하는 불변자본을, 이 생산수단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생산수단으로 보전하고, 또 II부문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특정한 소비수단으로 존재하는 임금과 이윤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소비수단으로 전환합니다.)

그런데 이 교환 즉 불변자본과 수입의 각각의 소재적 보전은 가치적 측면에서도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환에서 불균형 즉 초과수요나 초과공급이 발생하죠. 재생산의 이 균형조건은 위의 표식으로 보면 ‘I(V+M) = II(C)’가 됩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단순재생산의 기본조건이죠.(이 균형조건에는 또한 감가상각금의 적립과 현물갱신의 균형도 상정되어있어 고정자본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곤란도 해소되어있죠. 후에 확대재생산의 균형에서도 축적기금의 적립과 투자 간의 균형이 상정되어 있는데, 이런 문제들은 이 강의에서 생략합니다.) 이와 같은 교환을 통해서 사회적 총생산물 W′의 각 구성부분은 가치의 측면에서도, 소재적 측면에서도 보전되어 다음 년도에 동일한 규모로 생산을 다시 시작합니다. 교환을 통한 가치적, 소재적 보전운동은 물론 화폐를 매개로 해서 진행되는데, 화폐의 매개운동을 고려하면 이 보전운동은 보다 복잡하게 설명됩니다. 이것도 여기서는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이제 마르크스가 예시한 표식(제2권, 479쪽)을 한 번 보죠.

I. 4,000C + 1,000V + 1,000M = 6,000(생산수단)

II. 2,000C + 500V + 500M = 3,000(소비수단)

여기서 굵은 색으로 강조 표시한 부분이 양 부문간 교환으로 보전되는 부분이고, 나머지 다른 구성부분들은 각각 동일 부문 내부에서 교환, 보전되는데, 이 표식에서 보다시피 재생산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I(1,000V+1,000M) = II 2,000C’이죠. 마르크스는 단순재생산의 표식에서도, 또 다음에 보는 확대재생산의 표식에서도 균형을 상정한 표식들을 예시하고 있는데, 이 균형의 의미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 내에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재생산표식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의의 서두에서 언급한 『자본』의 추상수준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이 문제는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확대재생산으로 넘어갑니다.

확대재생산은 잉여가치의 일부가 축적으로 전환되어 다음 년도의 재생산의 규모가 확대되는 겁니다.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앞의 단순재생산의 경우와 달리 일단 I부문에서 생산된 생산수단이 I부문과 II부문의 생산수단을 보전하는 것보다 더 커야 합니다. 즉 ‘W′I ⟩ I(C)+II(C)’가 되어야 하죠. 그래야 이 잉여생산수단으로 생산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겠죠. 이 조건이 확대재생산의 물질적 토대를 이룹니다. 이제 축적되는 잉여가치 중 추가 불변자본은 Mc, 추가 가변자본은 Mv, 그리고 자본가의 소비는 Mk라 한다면, 확대재생산을 위한 표식은 다음과 같은 배치를 하게 됩니다.

I. C + V + Mc + Mv+ Mk = W′I (생산수단)

II. C + V + Mc + Mv+ Mk = W′II (소비수단)

사회적 총생산물의 각각의 구성부분이 교환을 통해 상호 보전하는 운동방식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I(C)와 I(Mc)는 I부문 내부에서의 교환을 통해 불변자본을 생산수단으로 전환, 보전하고, II(V)와 II(Mv+Mk)는 II부문 내부에서의 교환을 통해 임금과 이윤을 소비수단으로 전환, 보전하며, I(V+Mv+Mk)와 II(C+Mc)는 부문 간 교환을 통해 생산수단 형태의 I(V+Mv+Mk)는 소비수단으로 전환되고, 소비수단 형태의 II(C+Mc)는 생산수단으로 전환, 보전됩니다. 여기서 확대재생산의 균형조건은 ‘I(V+Mv+Mk) = II(C+Mc)’가 되죠. 확대재생산을 위해 마르크스가 예시한 표식은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거기서도 이 재생산의 균형조건이 충족되도록 그렇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균형조건을 달성해서 원만하게 확대재생산이 진행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우연으로라도 일어나기 어렵죠.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교환은 상호 연결되어있는 수많은 개별자본 간에 무정부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죠. 재생산의 균형조건인 양 부문 간의 교환은 양 부문을 대표하는 두 개의 자본 간의 교환이 아니라 여기에 참여하는 많은 개별자본들이 있고(앞에서 양 부문과 두 개의 생산물 종류란 건 집계 개념이라고 했죠), 또한 각 부문 내에서의 교환과 보전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수많은 개별자본들 간의 교환이 모두 균형을 취한다는 건 상정하기 어렵죠. 그래서 마르크스가 재생산의 정상적 진행을 위한 이 균형조건들은 “그와 같은 수의 비정상적 진행의 조건으로, 즉 공황의 가능성으로 전환된다”(제2권, 602쪽)고 말합니다. 이 무정부적인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조절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격기구 즉 가격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가격기구의 작동을 통해 부문간 불균형이 즉각즉각 조절되고 균형이 달성된다고 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전 체계가 이런 가정 위에 세워진 건데, 전혀 현실적인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허무맹랑한 가정, 일종의 망상 위에서 자의적으로 구성된 경제학이죠. 제가 이 경제학을 경멸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이 현실의 자본주의 운동을 제대로 해명할 리가 없죠. 자본주의 현실은 가격기구의 작동에도 불구하고 개별자본들의 경쟁 속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부문 간 불비례가 누적되고, 가치로부터 가격의 괴리가 심화되며, 경기의 변동과 과잉생산, 공황을 동반하며 전개됩니다.

그러면 마르크스는 왜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을 검토하면서 재생산표식의 균형을 상정했는가, 이런 문제를 검토해야 하죠. 이게 바로 자본의 이념적 평균, 자본의 일반적 분석이라는 『자본』의 추상수준과 분석방법의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재생산표식의 균형을 상정해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균형의 조건을 분석하였지만, 그건 자본주의 경제가 현실적으로 조화롭게 균형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죠. 그건 자본주의의 이념적 평균에서 경향적으로 재생산의 균형을 달성하면서 자본주의가 확대재생산을 전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현실적으로는 무정부적인 경쟁과 불균형/불비례 속에서 전개되고, 불균형/불비례의 누적, 과잉생산 그리고 공황을 불가피하게 야기하지만, 공황으로 폭발하는 이 모순들은 공황 자체를 통해 폭력적으로 해소되고 새롭게 균형의 조건을 회복해서 축적이 재개된다는 겁니다. 경기변동에서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호황과 공황에서의 각각의 불균형은 이념적 평균에서 보면 서로 상쇄되고 경향적으로는 ‘가치=가격’하에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그런 균형조건을 재생산표식을 통해 분석한 것이죠. 표식이 불균형이면 공황이라는 주장은 재생산표식과 공황에 대한 대표적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강의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실경쟁과 경기변동에서 자본주의의 불균형과 불비례 그리고 과잉생산공황으로 발전하는 현실적 과정, 그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대상이 아니고,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6부작 체계 중 『자본』 이후에 남아있는 후속 부편에 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의 곳곳에 경기순환과 공황에 대한 언급들은 있지만, 그것은 이념적 평균의 법칙들을 서술하는데 필요한 한에서 그런 것뿐이지, 거기서 주기적 공황이론을 전개하려고 한 건 아니죠. 자본주의의 위기는 주기적 공황만이 아닙니다. 이념적 평균에서 자본주의가 확대재생산을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때문에 장기적인 성장둔화와 위기에 빠지게 되죠. 즉 이념적 평균에서 파악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위기로부터 벗어나 조화로운 발전을 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일반적 이윤율(자본주의의 평균이윤율)에서 총괄적으로 분석하는 『자본』 제3권 제3편에서 다루게 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이래 30여 년간 전개된 재생산표식 논쟁에서 대다수 논자들은 마르크스 표식의 균형이라는 추상수준이 갖는 방법론을 잘못 이해하였죠. 그 논쟁의 근본적 오류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마르크스의 방법에 따라 표식을 작성한 건 레닌뿐이었고, 레닌과 부하린(N. I. Bukharin)만이 표식에서의 생산과 소비의 연관을 올바로 인식했죠.] 투간-바라노프스키(M. I. Tugan-Baranovski), 룩셈부르크(R. Luxemburg), 바우어(O. Bauer), 그로스만(H. Grossmann) 등 이 논쟁의 대표적 당사자들은 마르크스의 표식에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표식들을 작성하였는데요, 문제는 마르크스의 표식에 어떤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표식의 균형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표식을 재작성하는 건 커다란 방법론적 오류라는 점이죠. 『자본』의 추상수준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재생산표식 논쟁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보고자 한다면, 제 책(『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공황론』, 나름북스, 2018)의 관련 장들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에서 잘못 서술된 것도 정정해 놓고 싶습니다. 125쪽의 각주에서 마르크스 표식이 연간 생산에서 불변자본 전체가 마모된다고 가정한다는 대괄호 부분은 잘못 들어간 겁니다. 바로 그 앞에서는 표식의 C가 투하된 불변자본 전체가 아니라 마모된 부분만 나타낸다고 했거든요.]

대표적으로 룩셈부르크는 불균형표식을 전개해서 과소소비론과 (잉여)가치의 실현 불능을 주장하고 이에 근거해 제국주의론과 자본주의 붕괴론을 제출했는데, 단적으로 말해 그 이론 전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레닌도 한 마디로 그렇게 평가했죠. 불균형표식은 그 자체가 오류입니다. 반면 투간-바라노프스키와 바우어는 균형표식을 작성하고 자본주의의 조화로운 발전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표식은 실은 균형표식이 아니라 불균형표식이었습니다. 표식의 균형은 앞에서 본 것처럼 가치적 관점만이 아니라 소재적 관점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이들의 표식들은 가치적 관점에서만 균형이었던 것이죠. 소재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그 표식들은 불균형표식이었죠. 말하자면 자의적으로 표식을 작성했던 겁니다. 더 황당한 건 그로스만이죠. 바우어의 잘못된 균형표식에 근거해서 그 표식의 연장을 통해 어이없게도 자본주의가 잉여가치 부족으로 자본가계급이 아사한다는 즉 굶어 죽는다는 자본주의 붕괴론을 제출했죠. 이들의 이론적 오류들은 일본 마르크스 경제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비판, 지양된 것이지만, 지금도 영미권 문헌에서는 이들의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오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년에 룩셈부르크의 주 저작(『자본의 축적』,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과 그로스만의 주 저작(『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 법칙』, 실크로드, 2021)이 번역, 출간되었죠. 사실 두 책의 역자들은 표식 논쟁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그 논쟁의 오류가 뭔지도 전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논쟁이 벌어진 지 무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오류들을 재탕하는 방식으로 무책임하게 번역이나 해놓은 거죠. 그냥 한심하다는 생각뿐이네요. 읽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는 책들이고, 그 표식들의 오류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좋습니다. 책 읽었다고 괜히 엄한 소리는 안 할 테니까요. 더군다나 그로스만의 저작은 사회진보연대의 인물이 번역한 건데요, 사회진보연대는 오류투성이인 그로스만의 붕괴론을 쫓아가면서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자본주의의 종말을 운운하다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자본주의의 현실을 보고도 성찰도 없고 교훈도 없는 거네요. 그러고도 이 책을 번역, 출간하다니, 누구에게 보라고요? 완전히 구제불능입니다.

마르크스의 재생산표식을 통해 비로소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관계,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 및 부문간 연관 등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데요, 이건 경제학에서의 커다란 이론적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은 수요-공급이론을 금과옥조처럼 떠벌리고 있지만, 실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가 어떤 건지는 제대로 설명하는 게 없습니다. 이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매개로 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 떨어져서 각각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뿐입니다. 이 경제학이 말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아 불균형에 빠지면 가격이 변동하고 그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변동해서 즉각 균형을 회복한다는 것뿐이죠. 제가 앞에서 이런 설명은 현실에 비추어보면 터무니없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또다른 문제 즉 재생산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렇게 균형이 달성된다면, 그 균형하에서 수요와 공급은 서로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수요와 공급이 같으면 균형이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사실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아니라 재생산의 균형입니다. 왜냐하면 수요와 공급의 균형 또는 불균형이란 위에서 살펴본 재생산의 균형 또는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재생산의 균형조건을 해명해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란 것도 설명할 수 있는 거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가져오는 재생산의 조건, 다시 말해 재생산의 균형조건에 대해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인식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말하고 있으니 전혀 내용이 없는 빈말일 뿐이죠. 유효수요론을 제출해서 거시경제론의 영역을 열었다고 존경받는 케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인스에 있어서는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 간의 연관에 대한 이해가 없고, 그래서 소비수요(개인적 소비)와 투자수요(생산적 소비)는 서로 관련 없이 각각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서 나란히 존재할 뿐이죠. 소비수요와 투자수요를 합친 총수요와 총공급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기본적으로 재생산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 겁니다. 그가 총생산물 즉 총공급을 마르크스처럼 소비수단과 생산수단 양 부문으로 분할해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단일한 부문으로 총량 집계해서 이론모형을 만든 게 그 단적인 표현이죠. 이런 모형에서는 재생산 자체를 논할 수 없습니다. 이론의 대가는 케인스가 아니라 마르크스죠. 감히 비교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잡다한 지식을 가지고 세상에 주목받기 좋아하는 현학자들이나 ‘마르크스와 케인스’니 하면서 그런 비교를 하죠. 아마도 마르크스의 저작은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는 케인스를 비롯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폄하하는 태도는 이념적 편견, 선입견일 뿐입니다.

그럼 재생산표식을 보면서 이런 문제들을 들여다보죠. 다시 마르크스가 예시한 단순재생산 표식을 가져옵니다. 확대재생산 표식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더 복잡할 뿐입니다.

I. 4,000C + 1,000V + 1,000M = 6,000(생산수단)

II. 2,000C + 500V + 500M = 3,000(소비수단)

우선 I부문과 II부문에서의 생산을 통해 I(1,000V+1,000M)와 II(500V+500M), 도합 3,000의 수입, 소득이 창출되었죠. 양 부문의 임금과 이윤입니다. 이게 개인적 소비, 개인적 수요의 원천인데, 이 원천은 생산을 통해 창출되는 거죠. 생산 자체가 수요를 창출합니다. 이 소득은 소비수단에 지출되는데요, 이게 개인적 소비죠. 반면 소비수단은 II부문에서 3,000이 생산되었으므로 소비수단의 수요와 공급은 각각 3,000으로 서로 균형을 취합니다. 그리고 II부문에서 3,000의 소비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불변자본 2,000C가 들어갔는데, 이 생산수단의 소비가 바로 생산적 소비입니다. II부문에서의 생산적 소비를 위해 2,000C가 투하, 투자된 겁니다. 그런데 이 2,000C는 I부문에서 공급하기 때문에 I(1,000V+1,000M)과의 부문간 교환이 필요하고, 또 I부문에서 II부문에 (1,000V+1,000M)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I부문에서도 그 생산을 위한 4,000C의 불변자본이 투하되어 생산적으로 소비되어야 하죠. 그러면 I부문과 II부문의 불변자본의 투자, 생산적 소비는 도합 6,000(=4,000+2,000)입니다. 이 투자, 생산적 소비는 I부문에서 생산된 6,000의 생산수단으로 충당하는 거죠. 그러면 생산적 소비/투자수요와 생산수단 공급은 각각 6,000이어서 여기서도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사회전체적으로 보면 총수요 = 개인적 소비+생산적 소비 = 3,000+6,000 = 9,000 = 총공급(9,000=소비수단 3,000+생산수단 6,000)이 되죠. 결국 사회전체로도 수요와 공급은 균형이고, 생산수단, 소비수단 각각에 대해서도, 즉 양 부문에 있어서도 수요와 공급의 균형입니다. 이렇게 사회 전체의 소비수단 수요(3,000), 이를 충족하기 위한 소비수단 생산(3,000), 이 소비수단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2,000=1.000V+1,000M), 그리고 소비수단 생산을 위한 생산수단 자체를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4,000)은 상호 엄격하게 연관되어있죠.

케인스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상과 같은 수요와 공급의 연관, 투자와 소비의 연관, 부문과 부문과의 연관 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생겨나는 혼란이 이론적으로 정리되지 못해서 예컨대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경제원론 교과서에서도 국민경제의 순환에 대한 엉터리 도식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죠. 대학에서 배움의 초장에 멀쩡한 경제학도들을 멍청한 바보들로 만드는 강좌죠.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그림 하나를 아래에 가져왔는데, 함께 감상해보죠. 어떤 경제원론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도식입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듣고 나면 누구나 이 도식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겁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생산물시장에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의 구별이 없다는 거죠. 생산물시장은 기업이 공급하고 가계가 구매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생산물에서는 소비수단만 고찰하는 겁니다. 생산물 중 생산수단은 아예 빠져있죠. 정말 황당한 겁니다. 생산수단은 그럼 생산요소 시장에 분류하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식에서 생산요소는 가계가 공급하는 것으로 되어있거든요. 생산수단을 가계가 공급하고 기업이 구매하는 건 아니죠. 생산수단은 기업이 공급하고 기업이 구매하는 상품이죠. 기업들 간에 서로 공급하고 구매하는 상품입니다. 이런 도식에서는 생산수단과 소비수단 간의 연관은 애당초 읽을 수가 없고. 생산과 소비의 연관도 올바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생산수단이라는 커다란 생산물 부분과 생산부문이 빠져있으니까요. 앞서 말한 하나의 단일부문 모형에서 비롯된 근본적 오류죠. 또한 생산요소 시장을 보면 가계가 자본과 경영을 공급하고 기업이 이를 구입한다고 하네요. 그 대가로 이자와 이윤을 받는다고요? 물론 가계의 저축과 그에 따른 은행의 대출이나 주식의 매입을 통해 가계가 기업의 자본을 공급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 도식에서는 기업이 고정자본의 감가상각금 적립과 (요즘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사내유보라고 하는 부분인) 축적기금의 적립을 통해 스스로 동원하는 막대한 자본(이게 투자로 전환되는 건데요)은 아예 나타나 있지도 않습니다. 가계가 경영을 제공하고 이윤을 받는다는 건 그야말로 웃기는 말이죠. 경영은 자본이 자본의 담지자/인격화인 자본가에게 부여한 기능, 또는 자본의 담지자/인격화로서 자본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기능이고, 오늘날 일반화되어있는 주식회사 제도하에서는 소유자본가가 경영자에게 경영을 위임해도 경영자는 어디까지나 자본가(위임받은 자본가, 대리자본가)이고 가계가 제공하는 생산요소가 아닙니다. 경영자도 사람이라서 가계가 공급하는 거라고 우기면, 자본가도 가계가 공급한다고 해야겠죠.

자본주의 경제의 재생산과 관련한 재생산표식의 이상의 이론적 기여 외에도 『자본』 제2권에서 특별히 주목할 주제로는 오늘날 날로 중요성을 높여가는 유통시간의 단축 문제를 들 수 있죠. 제1편 자본의 변태들(자본의 순환)과 제2편 자본의 회전에서 보듯이 유통시간은 기본적으로 잉여가치 생산에 기여하는 게 아니므로, 유통시간의 단축은 그에 필요한 자본량도 줄이고, 그래서 생산규모를 증대시킬 수 있고, 또 자본의 순환과 회전 기간을 단축해서 잉여가치의 연율과, 그에 따른 이윤율 제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유통영역에서도 보관이나 운수는 가치 및 잉여가치 생산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유통시간 단축은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운송수단의 혁명을 추구해온 이유는 시장의 개척, 확대와 함께 바로 유통시간의 단축에 있죠. 현대자본주의 하 이윤율의 장기적 둔화에 직면해서 오늘날 기업들은 사활을 걸고 유통부문의 온갖 혁신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B2B 거래나 B2C 거래, 물류혁명, 인터넷 쇼핑과 통신판매, 택배사업 경쟁 등 유통서비스 부문이 혁신에 혁신을 이어가고 있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론적 안목을 제2권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강의는 이런 정도로 마치죠. 앞에서도 언급했던 토미츠카 료조의 다음 글도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다음 쪽)

1 이 글은 ⸢자본⸥ 제2권 강독세미나를 위해 작성한 강의 원고입니다.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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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자본론』 제2권 해설(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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