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한국전쟁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 휴전협정의 전말과 전후 체제 성립 –

김동국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

들어가며[1]영문으로는 정전을 truce, 휴전을 armistice라고 표현하는데 휴전협정의 영문 명칭이 armistice로 표현된 것으로 보면 미국과 유엔은 정전과 휴전을 엄밀히 … Continue reading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최초의 전쟁을 겪은 나라, 종전 70년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군사적 위협이 상존하는 나라,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우리의 현 주소이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체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양산했고, 인위적 38도선의 경계가 정전체제로 고착화, 내면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상이한 각자의 체제를 움직이는 내부 동력으로 전환되었고, 전쟁을 통해 분단 질서가 대중들 속에서 전쟁 경험과 의식을 통해 주,객관적으로 내재화되었다. 남북한 내부에 상대 체제, 정부에 대한 적대 의식이 공유·일반화되었고, 나아가 배타적 이데올로기가 우월적 지위로서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적대 의식, 배타적 이데올로기가 사회, 국가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민족의식이 부정되고 무력통일 방안이 전면화 되었다.

현재의 한반도 정전체제는 분단과 한국전쟁의 결과물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전쟁의 원인과 발발, 배경에 관심의 초점이 있었고, 현 정전체제를 규정하는 휴전협정은 대중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즉 정전체제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원으로서 한국전쟁 시기 휴전회담과 협정 체결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67년 동안 준 전시상태인 정전체제가 지속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면서 남북 양자 회담이 아닌 4자 또는 6자 회담에 의존해야 하는가, 거의 매년 발생하는 서해상과 지상의 군사분계선의 군사적 충돌을 막을 방도는 없는가 등의 의문에 대해 답을 구하려면 휴전협정의 내용과 체결 과정을 소상하게 살펴볼 필요가 분명 있다.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가장 많은 인원의 희생을 초래했던 휴전협정에 대한 이해는 전후 체제, 나아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1년 만인 1951년 6월 양측은 휴전을 모색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 후 2년여 동안 회담의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는 동안 전투는 계속되었고, 지난한 협상 과정에서 정전체제의 기본 틀이 형성되었다. 회담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합의했던 협정 조항들은 전후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거의 사문화되었고, 현재 지켜지고 있는 것은 사실상 군사분계선뿐이라 할 만큼 한반도는 적나라한 힘의 대치 속에 있다. 한국전쟁 70년, 남과 북의 선택은 휴전협정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제한적이고, 이 또한 휴전협정이 남긴 유산이다.

휴전협정의 전개 과정과 협상 쟁점

1) 휴전협상 배경과 예비회담

개전 이후 전황과 휴전 제안

정전 논의는 개전 초기부터 있었다. 미국과 인도 등은 한국전쟁의 정전을 모색하며 소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느 한 편에 군사적 승리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이를 포기하고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반면 전쟁 양상의 정체와 희생의 증가는 휴전에 대한 고민을 가중시켰다. 전쟁의 양상은 38도선에 머물러 있었고, 개전 이후 상대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교차로 점령하고 다시 38도선으로 복귀하는데 9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승리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은 휴전협상의 속도를 가속화하기에 충분했다.

전 소련 주재 미국대사 케난(George.F.Kennan)이 소련 유엔 수석대표인 말리크를 만나 미국의 의사를 전달했고 휴전 논의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중국과 소련은 휴전을 선택했으며, 북한은 이 단계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북한과 함께 남한 역시 휴전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과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사실상 한국 정부만이 소외된 가운데 휴전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수석대표 말리크는 ‘피의 대가’라는 라디오 방송프로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안했다. 여기에 중국과 북한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공산군 측의 휴전 의사는 확인되었다. 미국은 6월 28일 소련의 협상 제의를 수락하는 국무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몇 차례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개성에서의 예비회담 개최에 양측이 합의했고 7월 10일 개성에서 정식회담을 진행하기로 확정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3개월 만에 휴전회담에 들어갔으나 이후 전쟁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의 협상 전략과 지휘 체계

휴전협정에서 협상 전략과 지휘 체계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협상 전략은 실제 협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되었고 전쟁이 장기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지휘 체계는 공산군과 유엔군 각각 협상 대표단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누가 행사하였나에서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도 한반도 정세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산군 측 협상은 스탈린-마오쩌둥-리커눙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과 실무를 맡는 협상대표단으로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최고지도부에 포함되었지만 실제 협상을 주도한 것은 마오쩌둥이었다. 그럼에도 공산군 측은 수석대표와 수석연락관을 북한이 맡도록 하고 숫자도 중국보다 한 명 더 많이 배정하여 협상을 북한이 주도해 간다는 인상을 갖도록 했다. 이는 전쟁 당사국인 북한에 대한 배려이며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의 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다는 논리를 대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측 남일이 수석대표단을 맡았다고 해서 협상의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며 김일성의 역할도 제한적이었다. 반면 협상 지휘 계통으로는 자문의 역할이지만 스탈린이 협상 기간 내내 절대적 역할을 행사했다. 공산군 측의 협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1. 쌍방이 동시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릴 것.2. 쌍방 병력은 38도선을 따라 10마일씩 밖으로 철수할 것. 38도선 기준 10마일 이내에는 완충지대 설치.3. 쌍방은 조선 외부로부터 무기 및 병력 반입을 통한 무력 증강 행위를 중지할 것.4. 중립국 감시위원회 구성.5. 전쟁 포로 송환 : 적들은 포로의 일대일 교환을 제의할 것이나 우리는 모든 포로의 일괄 교환을 고수해야 함.

여기에 대해 유엔군 측은 휴전의 전제로 적대 행위 금지, 전투 재발 방지, 유엔군의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군사적 문제에 국한하여 협상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구체적 휴전 조건으로 아래의 4개의 조건을 제시했다.

1. 군사정전위원회 구성2.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 휴전협정 서명 시 쌍방 점령 진지선 기준, 20마일 폭의 비무장지대 설정3. 군사력 증강 금지 : 1대1 교체는 예외4. 포로교환 : 11 기준으로 신속히 교환,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의 포로수용소 방문 허용

여기에서 미국이 특히 강조한 부분은 협상이 군사적 목적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후 이 부분으로 인해 ‘38도선’과 ‘외국군 철수’에서 군사적 범위를 넘어서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판단으로 양측이 충돌하면서 휴전협정을 어렵게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미국은 공산군 측 제안의 ‘군사분계선 38도선’과 ‘전투 중지’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위에 제시한대로 미국은 진지선 기준의 군사분계선을 주장한 바 있으며 이는 전쟁 양상이 불리하지 않고 유엔군의 군사적 압박이 유효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실제 협상에서도 유엔군 측은 당시의 진지선보다 북쪽에 경계선 설정을 요구했는데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군사적 우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전투 중지와 관련해서도 군사력의 우위에 자신감을 가진 유엔군이 전투 중지에 합의해주면 이 기간을 이용해서 공산군 측이 병력을 증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휴전협정의 군사분계선은 협상 초기의 군사분계선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유엔군 측의 ‘전쟁 계속의 원칙’이 관철되면서 영화 ‘고지전’과 같은 이해 할 수 없는 무수한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미국은 휴전협상을 배타적으로 주도하고자 했다. 개전 초기 대전협정으로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통째로 넘겨주었다고 해도 한국은 전쟁 당사국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유엔은 물론 한국까지도 배제하고 워싱턴에서 주도하는 협상라인을 구축하려 했다. 휴전회담 대표단 구성에 있어서도 극동 지구 미 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을 비롯해서 4명의 미군과 1명의 한국군 대표로 구성했다. 이때 참석한 한국군 대표가 최근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이었다. 당시 백선엽에게는 발언권도 없었다. 한국 대표는 발언권이 없는 옵저버(observer)에 불과했고 이는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유지되었다. 회담 진행 과정에서도 한국은 미대사관을 통해서 관련 정보를 제공받았을 뿐이다. 판문점에서 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보고 채널을 거쳐 걸러진 정보가 다시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서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참전으로 전혀 다른 전쟁이 되었다. 전쟁의 실제적 주체는 미국과 중국이었다. 남과 북은 더 이상 전쟁의 주체가 아니었다. 전쟁의 당사자였지만 휴전협정에서는 보조적 위치에 머물거나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는 북한보다 남한에 더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군 측은 형식적이나마 북한을 협상 대표로 내세웠지만 미국은 남한을 정반대로 대우했다. 이것은 회담장 밖에서 한국의 휴전 반대 시위를 격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처지를 이용해서 지휘권을 이양받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상의 과정은 전쟁 당사자나 주체의 측면에서 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협정을 체결할 때 북한과 중국을 일방으로 하고 유엔군을 또 다른 일방으로 하는 협정문으로 남게 되었고,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정전체제의 불안정성과 한국의 애매한 지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2]한국의 휴전협정 미서명국의 지위는 휴전협정 당사국 여부에 대한 논쟁과 함께 북한의 통미봉남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2) 휴전협상 본회담 개최와 주요 의제 설정, 타결

의제 채택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來鳳莊)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회의 진행 조건으로 유엔군 측은 9개항을, 공산군 측은 5개항을 각각 제시했다. 서로의 제안에서 가장 충돌한 것은 ‘38도선 분계선’과 ‘외국군 철군’이었다. 유엔군 측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는 고려할 수 있어도 38도선 분계선은 수용할 수 없으며, 외국군 철군은 군사적 문제를 넘어선 정치적 범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고위급에서 처리해야 할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외국군 철군 문제는 휴전 논의의 선결조건이라며 강하게 맞섰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유엔군 측이 4개항의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의제 채택에 보다 접근하게 되었다. 유엔군 측이 제시한 ‘38도선을 명시하지 않은 비무장지대 설치’를 공산군 측이 수용하고, 외국군 철군과 관련해서는 공산군 측이 새롭게 제시한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 사항’을 유엔군 측이 받아들이면서 17일간의 의제 채택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2년간의 지난한 휴전회담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여전히 38도선 군사분계선은 양측이 합의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되었고 건의 사항으로 정리된 외국군 철군 문제는 정치회담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휴전회담을 시작할 때 양측은 자신의 군사력의 우세를 낙관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세 전망이 애매한 문구로의 의제 채택에 합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예측과는 다르게 의제 합의 과정은 난항의 연속이었고 전쟁의 2/3가 회담 기간이 되었다. 아래는 의제 채택 내용이다.

1. 회의 의제의 채택2. 한국에서의 적대 행위 정지를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 양측이 비무장지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군사분계선을 설정3. 정전 및 휴전에 관한 조항 수행을 감독하는 기관의 구성,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한 한국에서의 휴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협의4. 포로에 관한 협의5. 양측의 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

군사분계선 설정

의제 채택 후 첫 번째 협상이었던 군사분계선 협상은 1951년 7월 26일 본회담에서 시작되어 잠정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한 1951년 11월 27일까지 계속되었다. 예상대로 공산군 측의 38도선과 유엔군 측의 접촉선에 근거한 군사분계선이 충돌하였다. 그러던 중 개성중립지대 위반 사건으로 8월에서 10월까지 회담은 중지되었다. 이 기간 유엔군은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였고 공산군 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공산군 측은 회담 재개를 요청하게 된다. 이제 회담 장소는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변경되었고, 회담 재개와 함께 공산군 측은 38도선 군사분계선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양측은 군사분계선 기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으나, 다시 ‘개성 지역 확보’와 ‘어느 시점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에 빠지게 된다. 개성은 38도선 이남 지역이었으나 개전 초기부터 북한의 점령지로 되었고,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양측이 포기할 수 없는 전략 요충지였다. 공산군 측은 개성에 대한 어떠한 거래도 거부했으며, 나중에는 개성 문제에 대해 논의마저 거절하였다. 결국 유엔군 측은 현 전선에 따른 군사분계선을 공산군 측이 수락한 상황에서 개성 문제로 회담이 결렬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개성을 양보하는 결론을 내렸다.

군사분계선 설정의 마지막 논쟁은 어느 시점의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유엔군 측은 휴전회담 조인 시점의 접촉선을, 공산군 측은 휴전 성립 시기와는 관계없이 군사분계선 협상이 완료되는 시점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하자고 주장했다. 즉 ‘어디서’가 아니라 ‘언제’ 전투를 중지할 것인가를 두고 협상이 다시 난항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회담 첫날부터 유엔군 측이 제기한 전투 계속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상황에서 사실상의 휴전에 해당하는 전투 중지 합의는 유엔군 측에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고 공산군 측은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합의되지 않을 것 같은 군사분계선 의제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서로 타협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1월 27일 가조인된 협정문 초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2.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3. 상기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는 30일 이내에 휴전 협정이 조인될 경우에 한하여 유효하다.4. 30일 이내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의 군사분계선은 휴전 협정이 조인될 당시의 접촉선으로 한다.

군사분계선 협정이 가조인되자 전선에서는 수일 내에 휴전협정이 체결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미국의 신문들은 미8군이 전투 중지 명령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위 합의는 실질적인 휴전을 바라던 많은 이들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30일은 남은 의제들을 합의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따라서 위 합의에 의한 군사분계선은 휴전협정 당시의 접촉선으로 변경되었으며, ‘전투 계속의 원칙’의 고수로 수많은 고지전이 전개되었고, 의미 없는 무수한 죽음이 뒤따라야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현실은 가조인 시점인 1951년 11월 27일의 군사분계선과 1953년 7월 27일의 군사분계선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사력 증강 금지와 중립국 감시기구 구성 논쟁

30일 기한부 협상의 첫 의제로 양측은 제3의제인 휴전 감시 방법과 기구 협상을 시작했다. 휴전 이후 평화적 상태 유지를 위한 방안 논의로 핵심 쟁점은 비무장지대에서의 철군, 군사력 증강 금지, 중립국 감시기구 구성 등이었다. 양측의 제안에 의해 쟁점은 유엔군 측이 주장한 북한 내 비행장 건설 또는 복구 문제[3]이 문제는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 금지의 핵심으로 유엔군 측에서 강하게 주장하였다. 한편으론 억지스러운 측면도 있어서 회담 장기화의 요인으로 … Continue reading와 공산군 측이 주장한 소련을 포함한 중립국 감시 기구 구성 건으로 모아졌다. 유엔군 측은 우월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전후 군사력의 균형이 바뀌지 않을 핵심 사안으로 북한의 비행장 복구를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공산군 측은 내정간섭이라 주장하며 강한 반발을 했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소련을 포함한 중립국 감시 기구를 제안함으로써 전후에도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소련의 중립국 자격을 두고 양측은 공방을 했고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4]소련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소련기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일체의 흔적을 지우고 … Continue reading)

제3의제의 해결책은 유엔군 측이 비행장 문제 한 가지를 양보하는 대신 공산군 측에 소련 문제와 포로 송환 문제 두 가지 양보를 요구한 일괄 타결안을 제시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유엔군 측은 일괄타결안이 수용되지 않으면 중국 해안 봉쇄를 포함한 군사적 압박도 예고했다. 이에 공산군 측은 포로 문제와 비행장 문제 두 가지를 유엔군 측이 양보하면, 소련 문제 한 가지를 양보하겠다는 역제안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엔군 측은 비행장 문제를 양보하고 공산군 측은 소련 문제를 양보함으로써 제3의제의 쟁점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양측이 자신들의 양보와 포로 송환 문제를 연계했기 때문에 완전한 해결은 포로 송환 협상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쟁점도 발생했다. 철군 지역에 포함할 연안 도서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지상의 군사분계선에 이은 해상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였다. 지상의 군사분계선을 현 접촉선으로 합의한 것을 적용한다면 회담 당시의 양측이 점령한 연안 도서로 규정을 하면 간단히 합의될 사항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전쟁 당시 유엔군 측은 우수한 해군력을 앞세워 38도선 이북 연안 도서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분계선 설정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공산군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도서들이 공산군 측에 재점령되었다. 이런 상황이 해상분계선 설정 과정에서 영해 개념이 적용되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유엔군 측은 당시 점령하고 있던 북한의 후방 지역의 특정한 연안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원칙의 예외를 두고자 했다. 그래서 영해 개념이 아닌 ‘연해 도서’의 정의를 적용하여 서해 5도 예외 규정을 담은 아래의 내용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연해 도서의 정의는 휴전협정의 발효 시에 어느 쪽이 점령하고 있었느냐와는 관계없이 1950624일에 각기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한다. 다만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의 서, 북쪽에 있는 모든 섬들 중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다섯 섬은 유엔군 총사령관의 군사 통제하에 남겨둔다.

이로 인해 서해 5도를 유엔군 측이 확보할 수 있었으나 명확한 해상 분계선이 설정되지 못한 이유로 현재까지도 서해상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 사항 협상

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 사항 협상은 공산군 측이 의제 채택 협상에서 외국군 철수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합의했던 의제였기 때문에, 또다시 정치 문제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의제에 비해 협상 기간도 짧았고 타결도 쉬웠다. 다소 의외의 결과였다. 아래는 그 합의문이다.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쌍방 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제국 정부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이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고위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

위 합의문 마지막 구절의 ‘건의한다’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협상의 구속력은 매우 약한 수준이었다. 이것이 협상과정에서 양측이 구체적 사안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타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빠른 합의는 휴전 이후 정치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실제 휴전협정이 발효된 지 거의 9개월 후인 1954년 4월이 되어서야 정치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지만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3) 포로 송환을 둘러싼 갈등 구조와 휴전협정 체결

포로 송환 원칙의 대립과 회담의 결렬

복잡한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마지막 남은 의제는 포로 송환 문제였다. 포로 송환 문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양측이 모두 인정한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미국은 1951년 중반 이 협약을 비준했다. 따라서 포로교환 문제는 양측이 모든 포로를 송환하면 끝나는 단순한 문제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휴전협상 기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로 송환 협상이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양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의 극명한 차이 때문이었다.[5]공산군 측이 넘겨준 유엔군 측 포로 숫자는 11,559명에 불과했다. 전쟁 초기 북한 측이 발표한 전과만 합치더라도 포로는 65,000명 이상이 되며, 유엔군 … Continue reading) 대략 10배 정도 차이가 나는 포로의 숫자에 의해 유엔군 측은 1대1 교환을 공산군 측은 전체 대 전체 교환을 주장했다. 결국 유엔군 측이 약 3,000명의 유엔군 포로의 안전한 송환을 위하여 1대1 교환을 포기하면서 이 논쟁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이 포로의 ‘자원송환원칙’을 내세우면서 휴전협정은 난항에 빠졌다. 미국은 1951년 전선 교착화 이후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정치, 심리적 승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또 다른 전쟁, 즉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명분에서라도 승리하자는 새로운 전략이 창조된 것이다. 포로들의 선택에 따른 자원송환원칙은 제네바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의 계기와 정당성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공산군 측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고, 휴전협정은 장기간 중단되었다. 휴회는 곧 전선의 혈전으로 연결되었다. 유엔군은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북한에 대한 폭격을 집중했다. 1952년 중반 미공군은 더 이상 군사시설 및 목표를 찾기 어려웠고, 댐, 저수지, 발전소를 집중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공산군 측은 세균전 의혹과 포로수용소 폭동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1952년 2월~5월간 최고조에 달한 세균전 주장은 미군이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세균무기를 발전시켰고 한국전쟁기 북한 및 만주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세균전을 시도했다는 내용이다. 계절과 기후에 맞지 않는 벌레들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잇따랐고, 북한과 만주에서 대대적인 방역, 접종과 선전, 선동사업이 벌어졌다. 공산군 측의 이러한 의혹 제기는 세균전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미국에게 정치적, 외교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한편 포로수용소에서는 자원송환을 위한 심사에 반발하는 친공포로들의 폭동이 전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거제포로수용소의 76포로수용소 사건으로 당시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휴전협정 체결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양측의 갈등은 미국과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교체되면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미국은 1952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인 출신이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소련의 스탈린 사망(1953. 3. 5)은 휴전협정의 속도를 더욱 앞당겼다.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전략으로 휴전협정의 장기화를 주도했던 스탈린의 사망으로 양측은 조기 종전에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6]이런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1951년 맥아더청문회에서 합참의장 오마 블리들리(Omar Bradley)가 말한 것처럼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 Continue reading) 무기 휴회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인 1953년 4월 16일 공산군 측의 요청에 따라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4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먼저 상병 포로를 쌍방 간에 교환하고, 6월 8일에는 그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서 처리하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1년 반 동안이나 끌어오던 포로 송환 문제를 해결하였다.

1953년 6월 9일부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최종적으로 휴전협정 체결에 앞서 군사분계선의 확정, 휴전협정 조인 일자, 비송환 포로의 인도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유엔군 측이 억류 중이던 반공포로 2만7천여 명을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석방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구실로 공산군 측은 또다시 회담을 중단시켰으나, 유엔군 측이 한국군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겠다는 것을 공산군 측에 확약함으로써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7월 22일에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7월 23일에는 비송환 포로들을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단에 인계했으며, 7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7]미국은 전쟁 포로의 자원 송환 원칙을 관철시킨 것을 미국과 비공산 세계의 전반적인 승리이며, 송환 거부 포로들의 존재는 공산군 측의 체면을 … Continue reading) 휴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한국이 서명 당사자에서 제외된 휴전협정이 종결되었다. 전쟁 시작 3년 1개월 2일째 되는 날이었다.

전후 체제 성립 : 한미관계와 남북관계

휴전협정과 한미관계

휴전협정은 전후 한미관계 형성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의 한미관계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 공세를 펼쳤다. 첫째, 한국정부는 휴전회담 반대, 작전지휘권 회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취했다. 이는 실제 반공포로 석방으로 현실화되었고 단순히 허풍이나 공갈이 아님을 증명했다. 둘째, 한국정부는 휴전회담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구했다. 한국정부의 실제 목적은 두 번째 요구였으며, 휴전협정에 대한 동의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정부의 이중 공세에 맞서 미국 역시 이중 대응으로 나섰다. 우선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부터 이승만 제거를 계획했던 미국은 이승만의 휴전 반대 공세가 거세지자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Paln Everready)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사전 작업에 돌입했다. 그 형태는 유엔군 사령부가 배후에서 지휘하는 한국군에 의한 쿠데타였고, 한국군의 핵심으로는 당시 이종찬 참모총장, 이용문 장군, 그리고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이 계획에 개입되어 있었다. 이들은 장면을 국가 수반으로 추대할 계획이었고 이들 중 일부가 장면을 만나 사전 모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쿠데타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준비해둬야 하는 계획(Ever ready)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계획이었고 이후 이 계획에 참여했던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로 계획의 일부를 실행에 옮겼다. 미국은 한국 안보의 수호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최고 지도자의 교체를 계획하고 구체적 실행 계획을 완비할 정도로 한국 내정에 깊이 개입했고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정부는 휴전협정 이전 한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휴전협정 조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로 휴전협정 이후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공산군 측의 반발이 커지면서 미국은 그 일정을 앞당기게 된다. 결국 한국의 휴전협정 동의와 준수, 유엔군사령관 작전통제 하에 한국군을 위치한다는 조건으로 휴전 후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제공한 수준의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했다.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식 조인되었고 현재까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급속히 서두르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로 유엔군의 패퇴와 한국정부의 붕괴 가능성을 상정한 미국은 1951년 2월과 4월에 걸쳐 덜레스(John Foster Dulles)특사를 파견해 대일평화조약을 추진했다. 이렇게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이었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지 못했으나 이후 미국을 매개로 일본과 원치 않는 잠정적 반공동맹의 느슨한 끈을 유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일회담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었는데, 강화조약이 체결된 후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1년 10월 한일예비회담이 개시되었고, 회담의 주요 의제 및 범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한일회담 또는 한일관계는 한일 양국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속에서 조율되고 추진되었다. 즉 한일회담은 한일관계가 아닌 한·미·일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는데, 한·일 두 나라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 틀 속에서 제한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한일관계의 정상화 전략이며 이 역시도 한국전쟁의 파생물이었다.

정전체제와 남북관계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를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강력한 유산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280만 명에서 369만 명 가량(전체 인구대비 10%)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8]백종천·윤정원, 「6.25전쟁에 대한 연구:결과와 영향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28호, 1991 남북한의 분단의식이 내면화되었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의식이 체제 유지의 동력이 되었다. 한국 정치의 보수화 및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가 사회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되고 동의를 획득한 것은 생사를 넘나든 전쟁의 경험이었다. 전후 남북관계는 현상적으로는 휴전이며 본질적으로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닌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락된 결과 법적, 제도적 평화는 한반도에 자리할 수 없었다.

휴전회담의 합의에 따라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회담의 목적은 외국군 철수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었다. 그러나 정치회의 예비회담은 1953년 10월 25일 개최되었지만 2개월 만에 결렬되었다. 이어진 제네바정치회담(1954. 4. 26~6.15)은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휴전회담의 부대조건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1990년대까지 총 460여 회가 개최되었지만, 쌍방에 대한 비난과 선전장으로 변모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남한과 북한이 각각 유엔측(스웨덴, 스위스), 공산측(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대표의 감시활동을 방해했으며, 중립국감독위원회는 1957년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남북한은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마주한 채 군사적 충돌을 지속했다. 지상의 군사분계선과 한강하구에 대한 경계선은 휴전협정에서 합의되었지만, 여전히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지속되었다. 사소하고 우발적인 군사 충돌이 군사지휘관과 정치인의 호전적인 판단과 결합되면 국지전을 넘어선 대규모 충돌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1970년대 이후에는 해상분계선과 NLL이 남북간 대립의 중심이 되고 있다.

전쟁 이후 남북관계, 중미관계, 북미관계는 냉전의 고조 및 냉전의 종식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은 휴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 아닌 이유로 형식논리로는 북한과 교전 상태를 지속하고 있으며, 이는 북한의 ‘통미봉남’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남북한은 적대적 충돌을 기본으로 간헐적 대화가 이어지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1972년 7·4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10·4남북정상선언, 2018년 4·27판문점선언 등 대화와 화해의 순간이 부가되었지만, 구조적 적대관계는 해소되지 않았다. 탈냉전 이후 최근까지도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와 연동해 부침을 겪었다. 휴전협정 당시의 구조에서 독립적이지 못한 남북한의 지위가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

한국전쟁 70년, 정전체제 67년을 맞이하고 있다. 휴전은 전쟁의 중단일 뿐,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휴전협정에서 양측이 합의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후 전쟁 재발을 막는 것, 또 하나는 궁극적으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전후에도 논의한다는 것이 협정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정전체제는 전후 남북 분단 구조의 규범이자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과도적 체제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안정한 휴전을 감시하고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합의한 휴전협정은 거의 사문화되었다. 정전체제 67년 동안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휴전협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첨예한 힘의 대결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재발 가능성이 상존하는 분단구조, 그것이 휴전협정에서 비롯된 한국 현대사의 기본 틀이다.

현 정전체제는 외형상 남과 북의 분단과 대립이 주요인이 되고, 관련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그에 맞물려 있는 구조로 보인다. 그러나 남북한의 표면적 대립 구조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남과 북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련국의 한반도 현상 유지 정책이다. 정전체제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남과 북의 선택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휴전협정의 진행 과정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면 휴전협정 주체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반적 평화협정과는 다른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동안 정전체제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4자 회담 또는 6자 회담의 다자간 틀이 제시된 것도 휴전협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반도가 가지는 특수성이며 평화협정으로의 이행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정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은 우리 시대의 필연적 과제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북의 의지보다는 주변국 특히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더 크게 다가온다. 특히 종전과 평화협정은 북한의 핵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북미관계의 변수에 의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하였지만, 이후 북미관계에 의해 실질적 진척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전후 체제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주체는 누구일까? 탈냉전이라는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도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적 대립이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토록 오랜 기간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분단을 선택하고 유지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의 한반도 정세를 관통하는 물음이며 그 해답은 휴전협정의 과정과 결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휴전회담을 주도한 미국과 중국은 남과 북에 군사분계선을 남겨두고 그 이행의 책임도 떠넘겼다. 특히 한국은 협상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협상 전략 수립은 물론이고 실제 협상 과정에서 다루어진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이 정전체제 이행의 온전한 담당자가 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는 서해 해상분계선 및 NLL문제, 미귀환 국군 포로 및 전시 납치 문제, 피난민과 실향민, 이산가족문제 등이 휴전협정에서 논쟁을 회피하거나 제대로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까지 내다보면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러나 휴전협정 당시의 업저버의 지위와 역할에 머물러 있는 한 정전체제의 변화를 모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사국의 주체적 노력과 해결 의지가 수반되지 않는 평화체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뼈아픈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최근에 개봉된 어느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다.

분단국가의 국민은 분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는다.

지극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70년, 이제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때이다. 이제 그 세력과 결별을 해야 할 때다. 종전선언을 앞당기고 평화협정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 된다면 현 정전체제의 근간인 휴전협정을 상기해보는 것이 어떨까.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3권』 인물과사상

김보영 『전쟁과 휴전』, 한양대출판부

박태균 『한국전쟁-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함께

베른트 슈퇴버, 황은미역 『한국전쟁-냉전시대 최초의 열전』 여문책

도경옥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2단계 구상의 의미와 과제」 통일정책연구 제28권 1호

정병준 「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1 영문으로는 정전을 truce, 휴전을 armistice라고 표현하는데 휴전협정의 영문 명칭이 armistice로 표현된 것으로 보면 미국과 유엔은 정전과 휴전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유엔과 한국전쟁』(강석학편),리북,57쪽 재인용) 휴전과 정전은 대체로 혼용되지만 엄밀하게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용어에 따른 구분에 의하면 휴전협정은 정전협정으로 명명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휴전’의 용어를 사용하되, 필요한 경우 ‘정전’ 용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2 한국의 휴전협정 미서명국의 지위는 휴전협정 당사국 여부에 대한 논쟁과 함께 북한의 통미봉남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3 이 문제는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 금지의 핵심으로 유엔군 측에서 강하게 주장하였다. 한편으론 억지스러운 측면도 있어서 회담 장기화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4 소련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소련기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일체의 흔적을 지우고 대부분 중국 공군기로 변장했고 일부는 북한기로 위장했으며 조종사들은 중국 공군 복장을 착용했다. 교신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미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철저히 조심했다. 참전 연인원이 7만2천명에 달했고, 조종사 중 70%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정예들이었다. 소련 공군은 한국전에 참전해 1,300대의 미군기를 격추했으며, 소련기도 345대가 격추되었고, 전체 전사자는 200여 명이었다(중앙일보, 1994.7.28. 재인용
5 공산군 측이 넘겨준 유엔군 측 포로 숫자는 11,559명에 불과했다. 전쟁 초기 북한 측이 발표한 전과만 합치더라도 포로는 65,000명 이상이 되며, 유엔군 측에서 전투 중 실종 인원으로 추정한 숫자는 한국군이 88,000명, 미군도 11,500명 이상이었으며, 영국군과 터키군 실종자 수를 합하면 그 숫자는 100,000명이 넘었다. 실종 인원 전부가 포로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75,000명 이상을 기대했던 유엔군 측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한편 유엔군 측이 넘겨준 공산군 포로는 132,474명으로 북한 출신 95,531명, 남한 출신 16,243명, 중국인 20,700명이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포로를 비교하면 10배가 넘는 차이가 있었다.(김보영,2016『전쟁과 휴전』한양대출판부 218~219쪽
6 이런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1951년 맥아더청문회에서 합참의장 오마 블리들리(Omar Bradley)가 말한 것처럼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만난, 잘못된 전쟁”이었다. 미국의 군사력이 한반도에서 소진되는 사이 스탈린은 유럽과 세계 다른 곳에서 행동자유와 기회를 얻었다.(정병준, 2019 「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7 미국은 전쟁 포로의 자원 송환 원칙을 관철시킨 것을 미국과 비공산 세계의 전반적인 승리이며, 송환 거부 포로들의 존재는 공산군 측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평가했다(『미국합동참모본부사』, 452쪽 재인용
8 백종천·윤정원, 「6.25전쟁에 대한 연구:결과와 영향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28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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