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서평

이현숙 | 자유기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책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1]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한길사, 제1판 제3쇄, 2012년 10월 30일.는 1899년 3월초에 발행되었다.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강신준 교수는 “‘수정주의’의 고전에 해당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지음, 한길사

철학(변증법 유물론과 사적유물론), 정치경제학(가치론, 공황론, 독점체의 경향), 계급투쟁과 혁명론(마르크스주의와 블랑키주의), 당면 정치적 과제 등등, 기초적 이론에서 실천과제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서문에서 듀링박사를 언급하면서 말했다:

우리 독일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큼 지독한 철저함이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를 근본적 심오함이라고 말하든, 심오한 근본성이라고 말하든 아무래도 좋다.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발표하려면 한다면, 그는 먼저 일체를 포괄하는 체계로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

베른슈타인도 나름대로 이 말에 부합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 단, 다음의 서술은 대체로 맞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영어판 서문에서, 이 저작이 이론적 엄격성을 기해서 집필된 것이 아니었고, ‘때때로 급조하듯이 집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p. 30.)[2]이하 인용문에서 (p.00)이라는 표현은 베른슈타인 책의 페이지를 말한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그것이 너무 많은 (그릇된-인용자)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p. 61.) 노동자들이 나에게 말이나 글에서 … 내가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라거나 유식한 체하는 오만한 사람이라(고 한다-인용자) (p. 348)

시대적 배경

유럽에서 19세기말은 제국주의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추동하는 금융독점자본(“독점체”)의 발전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과 같은 독점체 역사의 주요단계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년~70년대: 자유경쟁이 절정에 달한 단계. 독점체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의 공황 이후: 카르텔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직 지속성을 갖추지 못한 일시적인 현상이다. (3) 19세기 말의 호경기와 1900~03년의 공황기: 카르텔은 경제생활 전반의 한 기초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3]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초판, 1988, p. 49.

(20세기 초반- 인용자) 현 상황의 뚜렷한 특징은 노동계급운동의 전반적 필수적 이해와 기회주의 간의 비화해성을 더욱 증가시키는 경제적·정치적 조건들이 더욱 우세해졌다는 데 있다. 즉, 제국주의는 맹아의 상태에서 지배적인 체제로 성장했고, 자본주의적 독점체는 경제와 정치에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세계분할이 완료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전일적인 독점에 대신하여 몇몇 제국주의 열강(독일, 미국, 일본–인용자)들이 이 독점에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바, 이 투쟁이야말로 20세기 초반 전 시기의 특징이다.[4]레닌, 같은 책 p. 142.

베른슈타인이 책을 쓴 시기는 제국주의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영국의 전일적인 독점에 대신하여 몇몇 제국주의 열강(독일, 미국, 일본–필자)들이 이 독점에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독일과 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론> 1920년 쓴 불어판 독일어판 서문에서 말한다.

전체 노동계급운동의 국제적 분열은 이제 매우 명백하다(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지금 바로 이 두 가지 조류 사이에서 무장투쟁과 내전이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즉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콜차크와 데니킨을 지지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항하여 샤이데만 일파와 노스케파가 부르주아지에 협력하고 있다.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사적 현상의 경제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즉 자본주의 최고단계의 특징인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후화이다. 이 소책자에서 증명되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오늘날 한 줌의(세계인구의 1/10도 되지 않는,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1/5이 채 되지 않는) 예외적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고, 이들 국가는 단지 ‘이자표(Clipping courpons)’에 의해 전 세계를 약탈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필자) 전쟁 전의 부르주아 통계에 의하면, 이들은 자본수출을 통해서 전쟁 전 가격으로 해마다 80~100억 프랑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물론 지금 그 액수는 훨씬 많다.

이러한 거대한 초과이윤(이 이윤은 자본가들이 ‘자국의’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고 있는 이윤 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므로 초과이윤이다) 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선진’국 자본가는 실제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또 공개 비공개적으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주아화한 노동자층 혹은 ‘노동귀족’층은 매우 속물적인 생활양식, 소득규모,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지주이자 오늘날에는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군사적은 아니지만) 지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운동에 있어서 부르주아지의 실질적인 하수인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부르주아지의 편에 가세하여, ‘꼬뮨파’에 대항하여 ‘베르사이유파(반동파-인용자)’에 참여한다.[5]레닌, 같은 책, pp. 37-39. (강조는 인용자)[6]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강조는 인용자(이현숙)가 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탄생한 이유와 그들의 역할을 레닌은 정리하고 있다: 독점자본이 거대한 초과이윤 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자 지도부와 노동귀족 상층부를 매수했다. 이들은 노동계급운동에 있어서 부르주아지의 실질적인 하수인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관리인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다.

“사회주의의 최종목표”

베른슈타인은 “서문”에서 말한다.

나에게는 운동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사람들이 대개 사회주의의 최종목표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글이 가리키는 보다 분명한 뜻은, 그것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궁극적으로 달성하는 (것-인용자)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사물이 궁극적으로 만들어지는 ‘방식’(Wie)에 대한 무관심, 혹은 보다 잘 표현한다면 무신경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57.)

그는 “최종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그렇다면 최종목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여전히 최종목표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자 계급은 …… 인민의 결정을 통해서 도입할 어떤 형태의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형태의 이상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방과 자신들의 보다 높은 생활형태 – 현재의 사회는 고유한 경제적 발전을 통해서 바로 그런 방향으로 불가피하게 흘러가고 있기도 하다 – 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들 노동자 계급이 오랜 투쟁, 즉 인간은 물론 사회적 조건들도 완전히 바꾸는 그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실현해야 할 어떤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 요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최종목표에 관한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문장이었는데, 특히 이 문장의 모든 부분보다는 그것의 근본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운동, 즉 일련의 과정 그 자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그에 반해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란 것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pp. 323~324.)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운동, 즉 일련의 과정 그 자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그에 반해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란 것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마르크스가 하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일련의 과정 그 자체는 물론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과정, 즉 운동이 최종목표, 즉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운동과 그 운동이 나아가는 최종목표지점을 인식한다면, 그 운동법칙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야만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 요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다. 물론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가 그 운동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면, 즉 공상에 불과하다면, 당연히 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위 글에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은 단지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 요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할 뿐이다. 자신의 역사적 사명(일종의 “최종 목표”-인용자)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할 영웅적인 결의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계급은 비굴한 신문쟁이들의 꿍꽝거리는 욕설에 대해서나, 과학적인 무오류성의 신탁의 어조로 자신들의 무지몽매한 상투어와 분파적인 억설을 쏟아 붓는 선의의 부르주아 공론가들의 훈계조의 생색에 대해서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7]칼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4권, 박종철 출판사,안효상 역, 2000, p. 68.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말한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 사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목적이다 – 자연적인 발전단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8]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3, p. 6.

지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 있”으려면,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거기서 도출된 “최종목표”를 단단히 틀어쥐어야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운동, 특히 당시 그 운동을 주도하던 독일 사회주의 정당의 운동의 “최종목표”는 당연히 사회주의의 실현이다. 그 핵심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권력(프롤레타리아트 독재)과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이다.

그는 말한다.

노동자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자본가 계급에 대한 몰수 등은 그 자체 최종목표인 것은 아니며 단지 일정한 목표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사민당의 강령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p. 57.)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자본가 계급에 대한 몰수 등은 그 자체 최종목표인 것”이 맞다. 사회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최종목적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 그것이 수단으로 복무한다는 “일정한 목표나 계획”이란 무엇인가? 그는 대답이 없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민당의 강령, 즉 사회주의를 그가 어떻게 부정하는가를 보자.

사민당이 의회주의 운동의 토대 위에, 즉 독재와는 서로 모순되는 적당한 수의 인민대표와 인민입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그런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말을 고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말은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 계급독재는 보다 저급한 문명에 속하는 것이다. (p. 256.)

사민당은 이 사회를 해체하여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프롤레타리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부르주아의 사회적 지위로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자 하며,(노예를 노예소유자의 지위로 올리자! 그러면 인류는 노동의 저주에서 해방될 것이고, 노예제는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인용자) 그리하여 부르주아 계급 또는 부르주아로서의 지위를 사회 내에서 일반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사민당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사회제도 대신에 사회주의적 사회제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pp. 257-258.)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집필을 한 이후로 노동자계급은 지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산업적인 면에서나 모두 커다란 진보를 이루긴 했지만, 나는 지금 아직도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발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 343.)

모든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9]물론 사회주의는 “모든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를 즉시 국가에 넘기지”는 않는다. 주요 생산수단과 은행, 토지 등을 즉시 국가의 손에 넘긴다.를 즉시 국가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얘기이다. 국가는 많은 중기업이나 대기업을 한꺼번에 결코 인수할 수 없다. (p. 203.)

베른슈타인이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 되어 버렸”고 “저급한 문명에 속한다”고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무엇인가. 레닌은 말한다.

한 계급의 독재가 모든 계급사회 일반에서 필연적이라는 것, 부르주아지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무계급 사회’인 공산주의 사이에 놓인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마르크스 국가론의 본질을 습득했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국가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동일하다. 즉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분명히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본질은 반드시 동일한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10]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 51.

레닌은 주장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국가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국가란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베른슈타인은 이렇게 “저급한 문명에 속하”는 사회주의를 비웃고, 자본주의로 넘어간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내 견해로는 [독일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더 크다… (p. 56.)

독일 제국주의 만만세!

베른슈타인은 말했다: “‘사회주의의 최종목표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글이 가리키는 보다 분명한 뜻은, 그것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궁극적으로 달성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결국 그는, 사회주의적 원칙 모두를 배신해버렸다.

식민지 문제

레닌이 주장했던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자 노동운동 내의 제국주의 옹호자로서 베른슈타인의 모습이 식민지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사민당의 당면과제”를 논하면서 말한다.

원칙적으로 사회주의나 노동운동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사회주의나 노동운동과-인용자)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다. 식민지를 확대하는 것이 사회주의 실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궁극적으로 … 완전히 낡아빠진 옛날 이론에 근거해 있다. … 독일 사민당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식민지 국수주의가 해군 국수주의와 관련이 없다면-인용자) 식민지 획득에서 언제나 그 가치와 전망이 엄격하게 검토되어야 하고 또 원주민에 대한 보상과 대우 그리고 기타의 행정적인 문제들을 예민하게 통제해야 할 이유는 있겠지만, 그런(식민지-인용자) 획득자체를 처음부터 기피해야할 것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독일이 오늘날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는 대체로 앞으로 획득하게 될 식민지에 관한 한 사민당은 당연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pp. 288~289.)

그는 주장한다: “새로운 식민지를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사회주의나 노동운동과-인용자)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고, “식민지를 확대하는 것이 사회주의 실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궁극적으로 완전히 낡아빠진” 것이고, 식민지 “획득자체를 처음부터 기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는 다시 주장한다: “독일이 오늘날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는 대체로 앞으로 획득하게 될 식민지에 관한 한 사민당은 당연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식민지 획득이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고, “기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할 이유도 없”다는 문제라면서, 사민당이 왜 앞으로 획득하게 될 식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그게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미래도 우리에게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현재 독일이 매년 상당히 많은 양의 식민지 생산물을 수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적어도 이들 생산물의 일부를 독일자체의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시기가 올 수 있다는 점도 말해야만 할 것이다. … 만일 열대 농산물을 즐기는 것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면 그런 작물을 경작하는 일도 비난 받을 수 없을 것이다.(pp. 290~291.)

그는 주장한다: “열대 농산물을 즐기는 것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면 그런 작물을 경작하는 일도 비난 받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작물을 경작하”기 위해서, “독일자체의 식민지”를 가지는 것도 비난받을 수 없다. 미래의 독일국민은 그러한 것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독일 국민 히틀러가 주장했던, 우크라이나를 포함하는 광대한 독일의 “국민 생활권(lebensraum)”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계속 들어보자.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식민지 획득을–인용자)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유럽인들에 의한 열대지방들의 점령이 반드시 원주민들의 생활의 즐거움을 침해하는 것이 될 필요는 없으며, 지금까지 대체로 그런 경우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야만인들이 스스로 점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리는 매우 제한된 것으로만 인정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최악의 경우에도 보다 고급의 문화가 보다 높은 권리도 갖는다. 토지의 이용권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주어진 이름은 토지의 정복이 아니라 토지의 경작이다. (p. 291.) (강조는 원문)

점입가경이다. 고급문화를 가진 서구인들은, 아프리카 야만인들의 토지를 점령할 권리를 가진다. 서구인들이 야만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를 이용하는 것은 토지의 정복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토지의 경작일 뿐이다. 이것은 원주민들의 생활의 즐거움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것이다! 현재까지도 서구 사민당·학계·언론계 등에 존재하는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의 많은 부분, 그리고 일본의 우익들의 논리가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더불어 서구의 학문적 식민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학계”도 걱정되는 부분이다. 이 인용문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하나의 사회 전체, 하나의 국민 전체, 그리고 같은 시기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들을 하나로 합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토지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들은 단지 토지의 점유자들이며 또한 토지를 이용하는 자들일 뿐이며, 그들은 훌륭한 가장으로서 토지를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마르크스, 󰡔자본󰡕 제3권, 2부 309쪽 p. 291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토지의 소유자는 아니다(마르크스)”: 따라서 “야만인들이 스스로 점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리는 매우 제한된 것으로만 인정될 수도 있다.(베른슈타인)”. 즉 야만인들의 토지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단지 땅의 점유자 이용자일 뿐이며, 그들은 선량한 가장으로서 땅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마르크스): 따라서 “여기에서는 최악의 경우에도 보다 고급의 문화가 보다 높은 권리도 갖는다. 토지의 이용권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주어진 이름은 토지의 정복이 아니라 토지의 경작이다(베른슈타인)”. 보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보다 고급의 문화”를 가진 독일이 야만인들의 토지를 이용할 권리를 가지며, “선량한 가장으로서 땅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물론 독일인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가 될 것이다.

그러면 마르크스의 본래 의도는 무엇일까. 베른슈타인이 인용한 부분의 앞을 보자.

그(토지와 노예에 대한-인용자) 소유권은 전적으로 생산관계(자본주의, 노예제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생산관계가 그 외피를 벗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면, 그 소유권의 물질적 기반 [즉 인간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그 소유권을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정당화시킨 것]은 사라지며, 그와 함께 그 소유권에 바탕을 둔 모든 거래(토지와 노예의 매매-인용자)도 사라진다. 보다 높은 경제적 사회구성체(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인용자) 관점에서 보면 토지에 대한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소유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지어 사회전체, 한 국민,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들의 전체도 땅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땅의 점유자 이용자일 뿐이며, 그들은 선량한 가장으로서 땅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사람 혹은 사물(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불합리한가의 여부는 생산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노예제도하에서는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당화된다. 자본주의하에서는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정당화되고 당연시된다. 만약 보다 높은 경제적 사회구성체, 즉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가 된다면 토지소유권은 노예소유권만큼이나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심지어 사회전체, 한 국민,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들의 전체도 땅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땅의 점유자 이용자일 뿐이며, 그들은 선량한 가장으로서 땅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글을 상기하여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다음의 명제들로부터 출발한다. 생산이, 그리고 생산 다음으로는 그 생산물들의 교환이 모든 사회 질서의 기초이다; 역사상 등장한 그 어떤 사회에서도 생산물들의 분배는, 이와 아울러 계급들이나 신분들로의 사회적 편제는,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는가에 따라, 그리고 생산된 것들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사회적 변화들과 정치적 변혁들의 최후의 원인들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심화되는 통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방식과 교환방식의 변화들에서 찾아야 한다; 해당시기의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 현존하는 사회적 장치들은 비이성적이고 부정하다는 통찰, 이성이 어불성설로 되고 선행이 재난으로 되었다는 통찰이 싹튼다는 것은, 생산방법들과 교환형태들에서 은밀한 변화가 일어나, 이전의 경제적 조건에 맞게 만들어져 있던 사회질서가 더 이상 그 변화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후에 불과하다. 이것은 동시에, 발견된 폐해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도 역시 변화된 생산관계들 자체 내에 – 그 발전수준은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다 –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수단은 머리에서 고안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현존하는 물질적 사실에서 발견해야 할 어떤 것이다.[11]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 발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년, p. 455.

독점체(독점자본)

“공황과 근대 경제의 적응능력”에 대한 논의에서, 베른슈타인이 독점체(독점자본, 대경영)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것(신용제도-인용자)이 (공황을 발생시키는-인용자) 과잉생산을 더욱 촉진하는 수단인 이상, 오늘날 많은 나라들에서는 이런 생산의 팽창에 대응하여, 여러 방면에서, 심지어 국제적으로까지 점점 더 빈번하게 카르텔이나 신디케이트 혹은 트러스트 등의 기업결합을 통해서 생산을 규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업결합의 생존가능성이나 유효성에 대해서 특별한 예언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시장상황에 대한 생산활동의 크기를 조절하여 공황의 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p. 176.) (강조는 인용자)

내가 보기에 노동자적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무능력’을 예언하는 것보다 그것의 가능성을 현재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들 기업결합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원래의 목적 – 공황의 저지 –을 달성할 수 있을지 여부는 노동자 계급에게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 카르텔이 공황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는 생각이 매우 치명적인 실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p. 184.) (강조는 인용자)

카르텔이나 신디케이트 혹은 트러스트 등의 기업결합, 즉 독점자본의 “원래 목적이 공황의 저지”는 물론 아니다. 독점이윤일 뿐이다. 생산을 조절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윤을 위해서일 뿐이다. 이들이 “공황의 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도 이미 역사가 부정했다. “대략 10년을 주기”로 아직까지도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중요한 점은 독점자본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기본시각이다. 그는 독점체를, 자본주의 치명적인 질병인 공황에 대한 해결사로 인식한다. 이를 통해 “근대 경제”가 “적응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현 시기에 독일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책이 될 수 있“다고, 여기저기서 주장한다.

그러면 엥겔스는 독점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상업의 호황기에는 신용을 무제한적으로 팽창시킴으로서, 그리고 (공황기-인용자) 파산 자체는 자본주의적 대기업을 와해시킴으로서, 우리가 각종 주식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량적 생산수단의 사회화 형태를 촉진한다. …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로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게 된다; 국내의 하나의 같은 사업부문의 대생산자들은 ‘트러스트’, 즉 생산의 조절을 목적으로 한 연합체로 연합한다; 그들은 생산되어야 할 총량을 규정하고, 그것을 자신들 사이에 분배하고, 미리 설정된 판매가격을 강요한다. …

트러스트에서는 자유경쟁이 독점으로 전도되고, 자본주의적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이 닥쳐오는 사회주의적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항복한다. 물론 우선은 여전히 자본가들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착취가 손에 잡힐 듯이 너무나 분명해져 와해될 수밖에 없다. 어느 인민도 트러스트에 의해서 지휘되는 생산, 이자표나 끊는 얼마 되지 않는 도당들에 의한 전체에 대한 드러내 놓은 착취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

공황이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현대의 생산력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였다면, 대규모 생산시설과 교류시설이 주식회사와 트러스트와 국가소유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 (현대의 생산력들을 관리하려는-인용자) 목적을 이루는 데 부르주아지는 없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가의 모든 사회적 기능들은 이제 봉급을 받는 직원들에 의해 수행된다. 자본가는 수입을 챙기는 것, 이자표를 끊는 것, 다양한 자본가들이 서로 자본을 뺏는 증권 거래소에서 투기를 하는 것 외에,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처음(기계제 대공업 시기-인용자)에 노동자들을 몰아냈다면, 이제 그것은 노동자들을 몰아낼 때와 꼭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추방하여 비록 당장 산업예비군으로 되어버리지는 않더라도 과잉인구가 되게 한다.[12]엥겔스, 같은 책, pp. 465-467.

레닌도 보자.

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한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현저하게 진전된다. 특히 기술의 발명이나 개선과정도 사회화된다.

이것은 과거와 같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분산된 채 미지의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생산하던 제조업자들 간의 자유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집적은 엄청나게 진전되었으며, 후에 살펴보겠지만 한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원료자원(예컨대 철광석의 매장량)을 대략적으로 산정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렇게 산정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 원료자원은 거대한 독점체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또한 대략적인 시장의 크기도 산정하여, 독점체들은 협정을 통해 자기들 사이에서 시장을 ‘분할’해 버린다. …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단계에 이르러 생산의 전면적인 사회화에 바짝 접근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 곧 완전한 자유경쟁으로부터, 완전히 사회화로의 과도적인 질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생산은 사회화되지만, 소유는 여전히 사적이다. 즉 사회적 생산수단은 여전히 소수의 사적소유로 남아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된 자유경쟁의 일반적 틀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소수의 독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씌우는 멍에는 한층 무거워지고 가혹해지고 견디기 힘든 것이 된다.[13]레닌, 같은 책, p. 53

대기업이 더욱 거대해지고, 대량의 자료에 대한 정확한 계산에 기초하여,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주된 원료 공급의 2/3, 3/4, 아니 전부를 계획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면, 또 그 원료를 체계적·조직적 방식으로 때로는 수백 수천마일까지 떨어진 생산의 적재적소로 운송할 수 있게 되면, 그리하여 수많은 종류의 완제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모든 원료 처리작업 단계를 하나의 중심에서 감독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이 생산물들을 하나의 계획에 따라 수억의 소비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게 되면(예컨대 미국의 석유트러스트가 미국과 독일에서 석유를 공급 판매하는 것처럼 ), 그때 우리는 단순한 ‘상호연결’이 아니라 바로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그때 사적 경제와 사적소유 관계는 더 이상 그 내용물에 적합하지 못한 껍질, 따라서 인위적으로 그 제거를 늦춘다면 불가피하게 부패해버릴 수밖에 없는 껍질, 곧 (혹시 최악의 경우 기회주의적 종양의 치료가 지연된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부패 상태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으나, 결국은 제거되고 말 껍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14]레닌, 같은 책, p. 165

베른슈타인은 말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즉 독점체들의 존재와 그 성장은 자본주의의 가장 고질적 질병인 공황을 치유할 것이다.

엥겔스와 레닌은 말한다: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혁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그러자 베른슈타인은 다시 말한다.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 사적유물론은 무엇보다도 이 전제조건을 근대 생산의 발전에서 찾는다. 즉 공업과 농업부문에서 자본주의적 대경영의 확대로 인하여 사회가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물적 토대가 점차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증대한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라는–인용자) 첫 번째 전제조건에 관해 본다면, 이미 우리가 생산과 분배에서의 경영규모[15]베른슈타인은 50명 이상의 노동자가 있는 기업을 대기업(대경영, 대공업)에 포함한다. “1895년 프로이센에서는 제조업 노동자의 38%가 대공업에 속해 … Continue reading)에 대해서 논의한 앞 절에서 본 바와 같이, 오늘날 대경영이 산업에서 사실상 우위를 이미 차지하고는 있지만, 프로이센과 같이 비교적 발전된 나라에서조차 이들 대경영은 자신에게 예속된 경영들을 포함해도 아직 생산에 종사하는 전체 인구 가운데 겨우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

… 생산과 분배의 사회화를 위한 물적 조건인 경영 집중의 충분한 발달이 아직 겨우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pp. 188-193)

그는 여기에서는 대기업의 발달이 혁명의 ”전제조건”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 발달이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혁명이 시기상조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앞부분에서는, 그러한 대기업의 발달이 공황을 저지하여, 자본주의의 질병을 치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혁명은 더욱 힘들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이 정리 해보면 어떨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노동자: 지도자 동지, 우리 사민당이 의회 제1당이 됐어요[16]독일 사민당은 1890년 선거에서 20%의 득표율로 제국의회에서 제1당이 되었다. 함부르크나 베를린 같은 북부 프로이센 공업도시들에서는 득표율이 50%를 … Continue reading. 지금 당장 혁명 합시다.

베른슈타인: 시기상조일세. 혁명은 공황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네. 그런데 대경영이 나타나 생산을 조절하여, 공황을 저지하고 있네. 이 점을 경시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책이 될 수 있지.

노동자: 어떤 동지는 대경영 시대야말로, 혁명하기 딱 좋은 때라고 하던데요?

베른슈타인: 아~참. 그렇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흠흠… 그런대 말이지, 자료를 찾아보니, 독일에서 대경영은 아직 겨우 절반밖에는 안 되네. 역시 혁명은 시기상조야.

노동자: 대경영이 발전해서 안 되고, 미발전해서 또 안 되면, 도대체 혁명은 언제 합니까?

베른슈타인: 듣고 보니 또 그렀네 그려. 그러니까 말이야 사실은, 동지! 지난번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사회주의의 최종목표라고 부르는 것, 즉 혁명은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네. 어떤가 동지. 골치 아픈 이야기 그만두고, 우리 조깅이나 하지 않겠나? 이것도 지난번에 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운동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네. 아니 그러한가? 헛둘 헛둘.

노동자: 그런데 지도자 동지, 어디까지 뛰십니까?

베른슈타인: 어허~ 이 사람 말귀가 어둡구먼. 나에겐 최종목표라는 것은 없다고 했잖아. 운동,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노동자: 정신을 어디다 팔아드셨는지… 쯧쯧 (짐작은 간다만…). 그나저나 엥겔스[17]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비서였고, 엥겔스 사후에는 유언을 집행하는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상님만 불쌍하구나!

지나가는 길에 공황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심오한(!) 이해의 진수를 보고 가자. “4. 공황과 근대경제의 적응능력”에서, 과잉생산이 공황의 원인이라고 실컷 떠들다가, 다음과 같은 글로 바로 그 절을 마친다.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경기침체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오늘날처럼 세계시장이 조직되고 확장되어가는 상태에서는, 특히 생활수단의 생산이 대규모로 확대되어가는 상태에서는 일반적 경기침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생활수단의 생산의 확대현상은 우리의 문제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아마도 지대와 생활수단의 가격하락만큼 경제공황을 완화하고 또 공황의 심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p. 185.) (강조는 베른슈타인)

협동조합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운동은 “이미 붕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 요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야 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엥겔스와 레닌은 부르주아 사회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요소가 독점체들임을 파악한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는다.

베른슈타인도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운동, 즉 일련의 과정 그 자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그에 반해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최종목표란 것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미리 상세하게 정해진” 이런 저런 목표들을 고안한다. 그 중 하나가 협동조합이다. 그는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성장·번영하는 것과 쇠퇴·소멸 중인 것을 구분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협동조합 생산은 … 결국 실현되고 말 것이다. (p. 225.)

소수의 몇몇 생산 협동조합들은 … 주로 종업원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하여 생산하는 협동조합들이며, … 말하자면 그것은 어쨌든 사회주의적 사상에 근접해 있는 형태인 것이다.(p. 227.)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이 적절해 보인다.

생산협동조합이 자본주의적 경제의 한 가운데서 확실히 존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즉 자본 간의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인용자), 인위적으로 자유경쟁의 법칙에서 벗어나(야 한다-인용자) … 이것은 협동조합이 판매시장, 즉 확실한 소비자 집단을 확보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바로 소비자 연맹이 이를 위한 구제수단으로 생산협동조합에 봉사한다. … 생산협동조합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비자연맹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현대사회에 생산 협동조합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소비연맹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과 연결된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생산협동조합은 가장 유리한 경우일지라도, 지역적인 소규모 판매와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생산물, 특히 생필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모든 결정적 영역, 즉 섬유, 석탄, 금속, 석유 그리고 기계, 철도, 조선산업 등은 소비자연맹에서, 따라서 생산협동조합에서 처음부터 배제된다. 즉 생산협동조합은 그 자체의 중간자적인 특성은 차치하고라도, 근본적으로 이미 전체적인 사회개혁으로서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산협동조합이 전체적으로 관철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시장이 없어지고, 기존의 세계경제가 지역적으로 소규모 생산과 교환집단으로 해체되는,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대규모 자본주의 상품경제가 중세 상품경제로 후퇴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18]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역, 책세상, 2019, pp. 80-81.

생산협동조합은 가장 유리한 경우일지라도, 지역적인 소규모 판매와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수의 생산물, 특히 생필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이를, 주로 유기농 먹거리를 판매하는 생협(한살림 등등)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화적 이행(의회주의)과 폭력혁명

폭력혁명을 부정하고, 합법적이고 의회주의적 사회변혁을 주장하면서 베른슈타인은 말한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폭력혁명론자-인용자)은 여기에서 다음의 두 가지 글을 기억에서 떠올릴 필요가 있다. 1872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 신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예기하고 있다. 즉 파리 꼬뮨이 특별히 우리에게 입증해준 사실은 “노동자 계급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그 국가 기구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움직여 나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정치적인 기습의 시기, 즉 “몇몇의 의식화된 소수가 의식화되지 못한 다수의 대중 앞에 서서 수행하던 혁명”의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다수 대중의 행렬을 군대와 충돌시키는 것은 사민당의 지속적인 성장을 저지하고 일시적이나마 후퇴시키고 말 것이다. 요컨대 사민당은 불법적인 사회전복의 방법보다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훨씬 더 번창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에 따라 당의 당면과제가 “득표율을 끊임없이 높여나가는 데 있다,” 즉 의회활동의 지속적인 선전에 있다고 지적하였다.(p. 55.) (강조는 베른슈타인)

엥겔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서,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결연한 태도로 보통선거권과 의회활동을 노동자 해방의 수단으로서 찬사를 보내고, 기습적인 (폭력-인용자) 혁명에 의한 정치적 권력의 획득과 결별을 고한 데에는, 바로 이와 같은 통찰이 함께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p. 113.)

그래서 우리가 엥겔스의 논지에 동의한다면 .. 다음과 같은 설명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 즉 사민당은 …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노동자계급을 고양시키고 국가 기구를 민주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모든 개혁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p. 55.)

먼저 마르크스의 언급, “기존의 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그 국가 기구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움직여 나갈 수는 없다”는 무슨 의미일까. 베른슈타인은 이 말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폭력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지 말고, “국가 내에서 노동자계급을 고양시키고 국가 기구를 민주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모든 개혁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 폭력혁명을 부정하고 의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근거로 마르크스의 말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레닌이 지적했듯이 정반대의 의미이다. 레닌의 반론을 보자.

조금 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위의 마르크스 언급-인용자)에 대한 현재의 속류적 ‘해설’이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권력의 쟁취와 반대되는 완만한 발전의 사상 등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노동자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분쇄해야 하며, 단순히 그것을 장악(“점령”-인용자)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꼬뮨 당시인 1871년 4월 12일, 마르크스는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귀하는 내가 프랑스혁명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전처럼 관료·군사기구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료 군사기구를 분쇄하는 것이며, 그것이 대륙에서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관료·군사기구를 분쇄하는’이란 말은 혁명과정에서 국가와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적인 가르침을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횡행하고 있는 카우츠키류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있다.[19]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p. 55-56.

우리는 “현재 횡행하고 있는 카우츠키류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바로 베른슈타인에서 왔음을 확인한다.

다음으로 엥겔스를 보자. 그는 정말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에서,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결연한 태도로 보통선거권과 의회활동을 노동자 해방의 수단으로서 찬사를 보내고, 기습적인 (폭력-인용자) 혁명에 의한 정치적 권력의 획득과 결별을 고”했을까. 지금까지의 베른슈타인의 수법으로 판단해 보면, 정반대일 것임이 틀림없다.

엥겔스는 결코 “기습적인 혁명에 의한 정치적 권력의 획득과 결별을 고”하지 않았다. 단지 19세기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인 당시에 정규부대의 무장력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주로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시민군에게 역관계가 불리해졌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역관계가 불리해진 것-인용자) 이것은 장래에는 시가전이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조건들이 1848년 이래로 시민투사들에게는 훨씬 더 불리하게, 군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장래의 시가전은, 상황의 이러한 불리함이 다른 계기들에 의해 상쇄될 때에만 승리할 것이다. 따라서 시가전은 대혁명이 훨씬 더 진행된 후보다는 그 초기에 일어나는 일이 더 드물 것이며,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수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큰 세력은 프랑스 대혁명 전 기간, 빠리의 1870년 9월 4일과 10월 31일에 그랬던 것처럼, 소극적인 바리케이트 전술보다는 공공연한 공격을 선호할 것이다.[20]엥겔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단행본 서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김태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 p. … Continue reading

엥겔스는 주장한다: 시가전은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수행되어야만 할 것이고, 공공연한 공격을 선호할 것이다. 엥겔스는 과연 “결연한 태도로 보통선거권과 의회활동을 노동자 해방의 수단으로서 찬사를 보”냈는가?

그들(독일 노동자들-인용자)은 선거권을 … 이제까지 기만의 수단이었던 것에서 해방의 도구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보통 선거권이 다음과 같은 것, 즉 삼 년마다 우리의 수를 헤아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정기적으로 확인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급속한 표수의 증가를 통해, 바로 그만큼 노동자들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키고, 적들의 위축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우리의 가장 좋은 선전 수단이 되었다는 것;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힘과, 모든 적대적 당들의 힘에 대해 정확히 보고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행동의 균형을 맞추게 하기 위한, 어떠한 것에도 뒤지지 않는 기준을 제공하였다 – 우리를 때에 맞지 않는 소심함과 동시에 때에 맞지 않는 무모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 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이득을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비록 이것이 우리가 선거에서 얻은 유일한 이득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보통선거권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였다. 선거 선동을 통하여 보통 선거권은 우리에게, 아직은 우리와 멀리 있던 인민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정당들로 하여금 우리의 공격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와 행위를 모든 인민들 앞에서 변호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보통선거권은 제국의회의 우리 대표자들에게 연단을 열어 놓아서, 그 연단에서 우리 대표자들은 신문이나 집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권위와 자유를 가지고 의회 내의 적대자들과 의회 밖의 대중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21]엥겔스, 같은 책, pp. 437-438.

엥겔스는 선거권이 “해방의 도구로 변화”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의의도 상세하게 제시한다.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선거에 대해서 가져야 할 기본시각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계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독일 사회 민주주의당이 투표장에 보내는 이백만 유권자들은 …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결정적인 ‘맹렬부대’를 이룬다. …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미, 225만 유권자[22]이 글을 쓰던 1895년 당시에 225만 명이 독일 사민당에 투표를 했다는 말이다. 베른슈타인은 이보다 적다고 한다.들이 있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이 흐름을 선도한다면 … 우리는 … 국내의 결정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러한 성장을 현재의 정부제도 자체가 감당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중단 없이 진행시키는 것, 날로 강화되어가는 이 맹렬부대를 전초전에서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결전의 날까지 흠 없이 유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주요과제이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투력의 꾸준한 증대를 순간적으로 저지하고, 심지어 잠시 동안 되돌리기까지 할 수 있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하나밖에 없다: 군과의 대규모 충돌, 1871년 빠리에서와 같은 출혈.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극복될 것이다. … 그러나 정상적인 발전은 저지될 것이며 맹렬부대는 위기의 순간에 뜻대로 될 수 없을지도 모르며, 결정적 투쟁은 연기되고 연장되며 더 무거운 희생을 요할 것이다.[23]엥겔스, 같은 책, pp. 443-444.

“결전의 날, 위기의 순간, 결정적 투쟁” 등은 시가전 등등을 포함하는 폭력혁명을 말한다. 베른슈타인이 인용했던 부분, “독일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투력의 꾸준한 증대를 순간적으로 저지하고, 심지어 잠시 동안 되돌리기까지 할 수 있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하나밖에 없다: 군과의 대규모 충돌, 1871년 빠리에서와 같은 출혈”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엥겔스의 원문에 있다. 그러나 이는 준비되지 않는 봉기나 모험주의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처럼 “요컨대 사민당은 불법적인 사회전복의 방법보다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훨씬 더 번창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리하면 엥겔스는 선거권을 이용한 의회활용등의 합법활동, 그리고 결정적 시기의 봉기, 시가전 등등을 적절하게 구사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비록 명시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 투쟁”, 즉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선거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선거제도의 역할은, 우리의 힘을 키우고 확인하고 결전의 날을 잡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 양의 탈을 쓴 늑대

베른슈타인은 “사민당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노동자계급을 고양시키고, 국가 기구를 민주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모든 개혁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어서, 혁명 혹은 그의 표현대로 사회변혁을 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의회주의 혹은 개량주의 노선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정리해보자. 먼저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보자.

민주주의라는 개념 속에는 정의의 개념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동등한 권리의 개념에서 다수에 의한 지배 – 모든 구체적인 경우 바로 여기로부터 인민에 대한 지배가 비롯된다 – 는 그 한계를 갖는다. 이런 동등한 권리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반적 의식으로 굳어갈 때 민주주의는 그만큼 만인을 위한 최고의 자유라는 개념과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 (p. 250)

민주주의는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주의 투쟁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의 실현 형태이기도 하다. (p. 251)

민주주의는 비록 그것이 곧바로 계급의 철폐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역시 계급지배의 철폐이다. (p. 253)

보통선거권은 민주주의의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마치 자석이 흩어진 쇠조각들을 끌어모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민주주의의 다른 요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사민당이 이것의 작동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교의를 보통선거권의 토대인 민주주의 위에 세우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전술을 그것과 일관성 있게 맞추어 채택하는 것이다. (p. 255)

정리하면 이렇다: “민주주의는 계급지배의 철폐”이고, “인민의 지배”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보통선거권이다. 사민당은 민주주의를 자신의 교의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선거참여를 핵심으로 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 산업민주주의,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관철해 나가면,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① 공산주의적 형식과 계급독재라는 내용의 통일로서의 민주주의(국가)

엥겔스는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다루면서, 8개 씨족집단으로 이루어진 세네카 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0. 씨족에는 평의회가 있다. 그것은 성년의 남녀 씨족원 전원으로 이루어지며, 모두 평등한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적 회의이다. 이 평의회는 사쳄(평상시의 수장)과 군사 수령을 뽑고, 또한 그들을 해임한다.[24]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 p. 101.

평의회는 씨족의 내의 주요한 문제들, 즉 살해된 씨족원에 대한 배상금, 피의 복수(전쟁), 족외자를 씨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을 결정하였다.

엥겔스는 그리스의 씨족을 다룬다.

그리스 (씨족집단을 기본 단위로 하는–인용자) 부족들은 … 가축 떼와 전야 경작이 확대되고 수공업이 시작되면서 인구가 증대하였다; 그와 함께 부의 차이가 증대하였고, 또 그와 함께 옛날의 자연성장적 민주주의 내부에 귀족적 요소가 성장하였다. …

1. 상설적 기관은 평의회(bule) … 이것은 원래는 아마도 씨족들의 수장들로 구성 …

2. 민회(agora).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인용자) 이로쿼이족의 경우에서, 남녀 인민이 평의회에 입회하여 정돈된 방식으로 토론에 참가하여 평의회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았다. .. 그리스인의 경우에… 이 ‘입회인’은 이미 완전한 민회로 발전해 있었다. 민회는 중요한 사안의 결정을 위해 평의회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남자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다. 결정은 거수나 갈채로 이루어졌다. 민회의 결정은 종국적인 지고의 것이었다. … 성년의 모든 남자 부족원이 전사였던 시대에는, 인민과 대립할 수 있는, 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공적 권력(국가- 인용자)이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 성장적인 민주주의는 아직 전성기에 있었다.[25]엥겔스, 같은 책, pp. 117-119.

엥겔스는 아메리카인디언 사회와 고대 그리스에서, 즉 국가가 존재하기 전에 부족사회를 운영하는 제도를 서술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평등한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적 회의, 자연 성장적인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계급사회가 출현하기 전, 국가가 출현하기 전의 사회운영방식에 민주주의라는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적”, “자연 성장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함으로써,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제한적으로 쓰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완성형태로서 아테네 국가가 제시된다. 그 구성을 보자. 국가의 기초지역단위로 100개의 자치구(데모스)가 있었고, 자치행정을 하였다. 다시 자치구 10개는 하나의 지연 부족(혈연부족 아님)을 이룬다. 이 지연부족은 자치적 정치 단체이자 군사단체이다. 각 부족은 5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여 아테네 평의회에 보냈다.

이러한 것들이 매듭지어진 결과가 아테네 국가였다. 아테네 국가는 10개 부족에서 선출된 500명의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에 의해서 통치되었으나, 종국적으로는 모든 아테네 (자유시민-인용자) 시민이 출석권과 투표권을 가지는 민회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

사회·정치 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계급 적대는 이제 더 이상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아니라, 노예와 자유민, 거류민과 시민의 대립이 되었다. 아테네가 가장 번영하였던 시기에 아테네 자유시민은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여 약 90,000명 이었고, 그들과 나란히 365,000명의 남녀 노예와 45,000명의 거류민 – 외국인과 해방노예 – 이 있었다. …

아테네인들에게서 이루어진 국가의 성립은 국가형성 일반의 아주 전형적인 견본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외적 또는 내적 폭력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기 … 때문이고, 둘째 민주주의 공화제라는 아주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국가를 씨족 사회로부터 직접 출현시켰기 때문…[26]엥겔스, 같은 책, pp. 132-134.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공화제라는 아주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국가로 완성되었다. 즉 엥겔스는 민주주의의 발생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레닌은 이를 확인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라는 원칙을 승인하지만- 인용자)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하여, 인민의 일부가 다른 일부에 대해서 폭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이다.[27]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p. 110-111.

민주주의는 국가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 인간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의 사용을 의미 …[28]레닌, 같은 책, p. 131.

“민주주의는 … 인간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의 사용을 의미”한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주의도 발생하고, 성장하다, 소멸하는 것이다. 레닌을 계속 들어보자.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 : “전체 국가를 극복하고 따라서 민주주의도 극복하는 것을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로 하고 있는 당에게는…”

국가의 폐지는 민주주의의 폐지를 의미하며, 국가의 사멸은 곧 민주주의의 사멸을 의미한다…

우리는 국가, 즉 모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 인민일반에 대한 모든 폭력의 사용을 폐지할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우리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라는 원칙이 준수지 않는 사회체제의 도래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며, 따라서 인민 일반에 대한 폭력,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속, 그리고 인민 일부가 다른 일부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폭력과 복종 없이도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조건들을 준수하는 데, 곧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습관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기 위하여, 엥겔스는 새로운 세대, 즉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적 조건에서 성장한’ 세대가 국가라는 고목-민주공화제를 포함하는 모든 국가-를 완전히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9]레닌, 같은 책, pp. 109-111. pp. 109-111

민주주의는 국가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국가를 극복하면, 따라서 민주주의도 극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가 없던 시기에는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엥겔스가 위에서 언급한 아메리카 인디언, 아테네 국가 이전의 그리스 씨족사회에서, 평의회, 민회에 대해 민주주의라고 규정을 내리는 것은 오류가 된다. 적어도 그런 규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필자는 당시의 보통평등선거, 민회와 평의회로 사회를 운영하는 것을,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라고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② 민주주의의 형식(현상) = 공산주의

민주주의에는 민회나 평의회에서 보이는 성격, 즉 필자의 규정대로 표현하다면 공산주의적 성격이 존재한다. 레닌의 말을 들어보자.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평등에 대한 형식적 승인과 모든 시민이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를 통치할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 승인을 의미한다.[30]레닌, 같은 책, p. 131.

혹자는 우리가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라는 원칙이 준수되지 않는 사회체제를 바라고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이 원칙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1]레닌, 같은 책, p. 110.

민주주의의 원칙을 정리해 보자.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 모든 시민은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를 통치할 권리를 동등하게 지녔다.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한다(다수결 원칙). 국가라는 단어를 사회공동체로 바꾼다면, 이것은 공산주의에서와 동일하다.

③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내용(본질) = 자본가계급 독재

그런데 왜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인민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로 나타나는가. 이러한 공산주적인 원칙이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 승인되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첫째, 물질적 생산수단(공장), 정신적 생산수단(매스미디어)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인민을 물질적(경제적, 폭력적)으로, 정신적(이데올로기적, 문화적)으로 지배한다. 평등이 승인되고는 있지만, 생산수단을 공유할 평등이 아니다. 때문에 평등에 대한 승인과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를 통치할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이,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된다.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오는데, 승인된 권리만으로는 노동자계급은 생산수단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배당하는 인민은 부르주아 정당에 표를 바치게 된다. 둘째로,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를 통치할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 그 자체에서 오는 문제가 있다. 생산수단을 공유할지 사유할지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민주국가를 선택할지 사회주의 국가를 선택할지에 대해 투표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를 폐지할지 유지할지를 투표하지도 않는다. 오직 민주국가의 통치자와 구조를 결정하는 것에 머물게 된다.

결국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베른슈타인이 말하듯이 “만인을 위한 최고의 자유”를 표방하지만, 계급사회 속에서 그것은 정반대의 것, 99%에 대한 1%의 지배·착취, 즉 자본계급의 독재로 전화한다.

따라서 필자는 민주주의(국가)를 공산주의적 형식(현상)과 계급독재라는 내용(본질)의 통일체라고 규정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만인을 위한 최고의 자유”, “계급지배의 철폐”라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현장실천사회변혁노동자전선」은 올해 초에 배포한 <노동운동의 당면과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엄연히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민중이 주인인 정치체제다.

이 말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우리 사회는 엄연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다(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은 자본가 계급이 주인인 정치체제다. (민중은 물론 “개·돼지”이다)

④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노동자 계급이 투쟁하기에 가장 좋은 국가형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가지는 ‘공산주의적 형식’은, 노동자계급에게 커다란 장점을 준다. 레닌의 글을 보자.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의 평등에 대한 형식적 승인과 모든 시민이 국가의 구조를 결정하고 국가를 통치할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형식적 승인을 의미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먼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을 융합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부르주아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산산 조각내어 이 지구상에서 싹슬어버리는, 그것들을 보다 민주적인 (프롤레타리아-인용자) 국가기구, 모든 대중을 포함하는 시민의용군을 형성하는 데로 나아가는, 무장한 노동자들이라는 형태의 국가기구 – 그러나 여전히 국가기구이다-로 대체할 수 있게 한다.[32]레닌, 같은 책, p. 131.

엥겔스의 말도 들어보자

최고의 국가 형태인 민주공화제는 현대 사회의 조건들 하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불가피하고 필연적으로 되어간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유일하게 최후의 결전을 치를 수 있는 이 국가 형태 …

보통선거권은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재는 측정기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국가에서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보통 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의 비등점을 가리키는 날에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33]엥겔스, 같은 책, pp. 190-191. pp.

“노동자들도 자본가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자본가들은 유혈적 파쇼국가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이 “모든 부르주아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산산 조각내어 이 지구상에서 싹 쓸어버렸다”.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노동자 계급이 투쟁하기에 가장 좋은 국가형태이다.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다. 계급사회에 어울리지 않게, 공산주의라는 무계급 사회의 옷을 입힌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계급은 기회만 되면 이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린다. 노동자계급은 공산주의라는 옷에 맞는, 공산주의라는 몸을 만들기 위해 투쟁한다.

이상에서는 베른슈타인의 책의 내용 중에서, 한국사회에서 실천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을 다루었다. 철학, 가치론, 공황론 등 기초 이론과 관련한 내용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루었으면 좋겠다.

1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한길사, 제1판 제3쇄, 2012년 10월 30일.
2 이하 인용문에서 (p.00)이라는 표현은 베른슈타인 책의 페이지를 말한다.
3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초판, 1988, p. 49.
4 레닌, 같은 책 p. 142.
5 레닌, 같은 책, pp. 37-39.
6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강조는 인용자(이현숙)가 한 것이다.
7 칼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4권, 박종철 출판사,안효상 역, 2000, p. 68.
8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3, p. 6.
9 물론 사회주의는 “모든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를 즉시 국가에 넘기지”는 않는다. 주요 생산수단과 은행, 토지 등을 즉시 국가의 손에 넘긴다.
10 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 51.
11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 발전>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년, p. 455.
12 엥겔스, 같은 책, pp. 465-467.
13 레닌, 같은 책, p. 53
14 레닌, 같은 책, p. 165
15 베른슈타인은 50명 이상의 노동자가 있는 기업을 대기업(대경영, 대공업)에 포함한다. “1895년 프로이센에서는 제조업 노동자의 38%가 대공업에 속해 있었다. … 1895년 현재 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1,025만 명 가운데, 대기업에 속하는 사람들이 약 300만 명을 약간 넘어서고 있다. 250만 명은 중기업(6~50인 규모), 475만 명은 소기업에 속해 있었다. (베른슈타인 같은 책, p. 145
16 독일 사민당은 1890년 선거에서 20%의 득표율로 제국의회에서 제1당이 되었다. 함부르크나 베를린 같은 북부 프로이센 공업도시들에서는 득표율이 50%를 넘었다.
17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비서였고, 엥겔스 사후에는 유언을 집행하는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역, 책세상, 2019, pp. 80-81.
19 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p. 55-56.
20 엥겔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단행본 서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김태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 p. 441.
21 엥겔스, 같은 책, pp. 437-438.
22 이 글을 쓰던 1895년 당시에 225만 명이 독일 사민당에 투표를 했다는 말이다. 베른슈타인은 이보다 적다고 한다.
23 엥겔스, 같은 책, pp. 443-444.
24 엥겔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최인호 역, 박종철 출판사, 2000, p. 101.
25 엥겔스, 같은 책, pp. 117-119.
26 엥겔스, 같은 책, pp. 132-134.
27 레닌, <국가와 혁명>, 강철민 역, 도서출판 새날, 1993, pp. 110-111.
28, 30, 32 레닌, 같은 책, p. 131.
29 레닌, 같은 책, pp. 109-111.
31 레닌, 같은 책, p. 110.
33 엥겔스, 같은 책, pp. 190-191.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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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공황기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방향 이 글은 지난 2019년 10월 진행된 ‘노동 전선 10월 정책토론회’ 발제문을 수정 보완한 자료이다. – 대우조선해양을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국유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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