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회주의〉 쿠바와 체 게바라

송필경 | 범어송치과 원장

1. 들어가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자 쿠바는 의료진을 세계 여러 나라에 파견하고 있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비롯해 경제적 부국인 이탈리아에도 파견하고 있다. 쿠바는 가난한 나라지만 훨씬 잘사는 나라들보다 ‘탄탄한 의료시스템’을 자랑하고 있다.

영국의 한 크루즈선에서 운행 중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하여 미국에 입항을 원했지만 거절당했지만 쿠바는 이들을 받아줬다. 쿠바는 이런 통 큰 의료를 통한 진정한 ‘국제 연대’를 보여 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현재 쿠바는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가 8.2명(201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탈리아는 4.1명이다. 2016년 기준으로 보면 OECD 평균 3.3명, 미국은 2.6명. 우리는 2.3명이다.

쿠바는 2004년부터 가난한 나라에 안과 의사를 보내 수십만 명에게 무료 지원했다. 2005년 파키스탄 대지진 때 의료 원조대 900명을 보냈다. 2006년 인도네시아 지진 때도 135명 의료진을 보냈다. 2005년 8월 미국 남부에 초대형 허리케인이 닥쳤다. 천문학적 재산 피해와 수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쿠바는 미국에게 경제봉쇄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1,500여 명의 의료단을 꾸려 허리케인 피해에 지원하겠다고 했으나, 옹졸한 미국의 거절로 무산됐다. 2005호 10월 허리케인이 중미를 강타하자 쿠바 의사 800여 명이 15만 명을 치료했다. 2010년 아이티에서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도 쿠바 의료진이 나섰다.

나는 2018년 7월 초 열흘 동안 쿠바를 방문했다. 열흘 동안 둘러보고 쿠바의 역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쿠바 사람에게 10분 만에 삼국지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신 치하인 1970년대 말 이른바 지하서클에서 ‘쿠바의 의료 체계’를 공부하면서 쿠바와 인연을 맺었다. 2000년대 들어 거의 매년 베트남을 왕래하면서 베트남 혁명 역사를 공부했다. 그 공부를 하면서 현대사에서 베트남과 가장 비슷한 역사 경험을 한 나라가 쿠바여서 쿠바의 역사도 얼핏 관심을 가졌다.

인류역사상 최강의 제국주의인 미국에 대항하여 스스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나라가 현재는 쿠바와 베트남뿐이다. 두 나라는 미국 제국주의와 투쟁을 하면서 동병상련을 느끼기에 베트남도 쿠바에 각별한 관심을 아직 갖고 있다. 호찌민 시에는 미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전시한 ‘전쟁증적 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이 있다. 자신의 나라 범죄를 전시한 공간인데도 미국인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 곳인 만큼 호찌민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미 있는 전시 공간이다. 내가 2008년에 여기에 방문했을 때 특별 전시관에서 쿠바 혁명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가면 쿠바의 호찌민이라 할 수 있는 쿠바의 국부 ‘호세 마르티’의 흉상을 얹은 기념탑이 있다. 또 쿠바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는 생전에 가장 존경한 인물로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을 꼽았다. 그만큼 쿠바와 베트남은 친밀한 사이다. 베트남 역사 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면 쿠바를 꼭 방문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 2018년도 3월, 손호철 서강대 교수와 같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호텔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졌다. 손 교수께서 7월에 쿠바를 방문하신다고 해서 나보고도 동행하자고 하셨다. 나는 즉시 제의를 수락했다. 베트남에서 귀국하자 바로 쿠바에 관한 국내에서 출판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바 기행을 마치고 답사기를 쓰기 위해 많은 책을 사 모았는데 이리저리 약 40권 쯤 되었다.

베트남은 30년 간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승리했다. 쿠바는 미국에게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전광석화같이 미국을 몰아냈다. 두 나라는 미국에게 승리한 후 철저하게 경제 보복을 당했다. 베트남은 전쟁에 1975년 승리한 후 미국에게 20년 간 경제 봉쇄를 당하다가 1995년 수교했다. 그리고는 경제는 바로 자본주의 체제로 돌입했다. 긴 전쟁으로 전국토가 석기시대로 돌아갔으며, 긴 봉쇄 기간으로 사회주의를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미국의 경제 체제에 편입했다.

쿠바는 미국하고는 싸우지 않고 미국 괴뢰 정권을 붕괴함으로써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쿠바에 있었던 미국 재산은 쿠바의 전 재산 60%에 달했다. 이를 몰수하자 미국은 단교를 하면서 쿠바를 경제 봉쇄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통일 후 베트남과 달리 소련의 경제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정권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2. 쿠바의 사회주의 기틀

쿠바의 가장 핵심적인 사회주의 기틀은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책 두 권이 필요하지만, 이글에서는 쿠바 체제를 강건하게 지탱한 교육과 의료 제도를 간단히 소개하겠다. 쿠바인으로 태어난다면 평생 교육비 한 푼, 의료비 한 푼 안 든다. 대학까지 무료이며 의과대학에 다닌다면 적은 금액이지만 용도도 받는다고 한다.

⑴ 쿠바 교육의 한 예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정승구 선생이 쓴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에 다음 글이 있다.

아바나에서 몇 년째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K에게 들은 이야기다. K는 자신이 살아본 유럽이나 다른 남미 나라에 비해 쿠바가 너무나 불편했다. 그러나 K의 아이들은 쿠바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했다. 방학이 길어지면 아이들이 선생님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아빠로서 질투가 날 정도란다. 그래서 K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도대체 어떤 분들인지 궁금해서 하루는 유치원에 구경을 갔다. 마침 마당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아이에게 달려가 안아주는 여선생님이 아이와 같이 우는 것이었다. 이래서 K는 불편한 쿠바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했다.

우리나라 유아원에서 어린이 학대가 심심찮게 터져 나와 부모들의 가슴을 덜컹하게 한다. 더 없이 맑고 소중한 어린이를 볼모로 오직 돈만 밝히는 우리 교육을 생각하면 쿠바의 교육제도는 어릴 때부터 사람 위주다. 얼마 전 밝혀진 유치원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라 생각한다. 언론에서 잠시 떠들다가 어떤 개선도 없이 언론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이런 환경에서 교육받은 이 세대들이 자라면 김기춘, 우병우 같은 인간을 끊임없이 재생하지 않을까?

(2) 쿠바 의료의 한 예

먼저 돈 없으면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한국 의료 제도의 예를 보자. 쿠바 가기 얼마 전인 2018년에, 미혼모가 고시촌에서 아이를 기르다가 아이가 죽은 사건을 언론에서 보았다. 아이는 선천적 기형을 안고 태어났고, 그 후 기형에 합당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결국 생활고가 겹쳐 아이는 영양실조로 죽은 것 같았다. 의사 평균 월 소득이 1천3백만 원으로 추정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임신 2개월부터 8개월까지 쿠바에 있었고 산부인과를 신랑이 신부 찾듯 다녔다. 내 생각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쿠바 정부는 임산부를 철저히 관리했다. 일단 임신을 하면 마을진료소(Consultorio)에서 임산부 카드를 작성하고 임산부 관리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된다. 가장 감동받은 프로그램은 심리 상담이었다. 쿠바 임산부들은 반드시 남편과 같이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한다. 임신은 계획한 것인지, 임신으로 인해 심리적 고통은 없는지 등에 대해 심리 상담 받은 후, 담당 의사가 더 이상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사인을 하고 나서야 콘술또리오에서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콘술또리오 산부인과 의사는 매번 임신 상태를 손으로 체크한 다음 각 시기에 필요한 검사를 위해 임산부를 검사기구가 있는 병원으로 보낸다. 임신 몇 주에는 어느 지역 어느 병원으로 가서 초음파를 하고 임신 몇 주에는 어느 병원으로 가서 기형아 검사를 하는 식이다. 콘솔또리오는 심지어 임산부 집을 방문해서 주거환경까지 기록해 간다. 햇볕이 잘 드는지, 필요한 영양제는 잘 먹고 있는지, 가족들이 임산부를 잘 돕고 있는지를 꼼꼼히 체크한다.…

린다 화이트포드, 로렌스 브렌치 지음 최명철 외 옮김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 메이데이 추천 글에서.

정호현 독립영화감독의 이야기다. 정 감독은 쿠바에 가서 쿠바 문화를 체험하러 들렀다가 10살 아래 쿠바 남성과 결혼했다. 쿠바에서는 임신하면 의무적으로 진료소를 찾아야 한다. 정 감독이 처음 진료소를 찾아갔을 때 달랑 하나뿐인 너덜너덜한 침대에 누워 허접한 환경에서 일하는 의사까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바로 기우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의사 월급이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인 쿠바의 의료 제도다.

쿠바의 유아사망률은 최고 의료수준을 자랑하는 미국보다 낮다. 가난한 쿠바인 평균 수명은 아주 잘사는 미국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의료제도를 아주 가난한 나라 쿠바의 의료제도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쿠바는 심장 이식 수술까지 돈 한 푼 안 들지만, 세계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 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미국은 국민 15%가 의료보험이 없어 죽어가고 있다.

영화 식코(Sicko)는 이렇게 말한다.

돈이 없어 잘린 손가락을 버려야 하는 미국

홍세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쿠바의 공공보건 모델에서 우리가 어떤 울림을 느껴야 하는 것은 의료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그 차원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할 듯 싶다.

친절보다 더 본질적인 의료 행위는 <배려>다. 우리 의료 제도에서는 돈 많은 환자에게 친절하기는 쉽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의사도 인간인 이상 가난한 환자에게 친절하기란 만만치 않다. 시쳇말로 하면 친절은 옵션이다.

그러나 정 감독의 사례가 보여 주듯 <배려>가 의료 제도 자체가 되면,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똑같은 시스템에서 똑같은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이 <배려>의 핵심은 무상의료다. 무상의료란 제도에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쿠바 의사들은 도덕적 자부심과 윤리적 수준이 매우 높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우리 돈으로 10만 원 정도인데도 말이다. 쿠바 의사들이 쿠바 일반 노동자 수준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양심을 지키는 근원적인 동기는 의과대학 졸업할 때까지 무상교육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의과대학에서는 기숙사비는 물론 무료이고 용돈까기 받는다고 한다.

쿠바에서는 <평등을 배려>하는 교육 제도로 의사를 만들고, 무상으로 교육받은 의사는 <평등에 바탕 한 배려>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소비에트가 해체한 뒤 1990년대에는 쿠바 경제가 무척 어려웠다. 국가 예산이 40%나 줄어들었다. 쿠바 의료도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국방예산을 깎아 의료비를 보충했다. 정말 쿠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나 내가 2018년에 쓴 답사기의 마지막 부분을 여기에서 말하겠다.

3. 쿠바의 체 게바라와 우리 전태일, 그리고 혁명의 미래

벌이 꽃을 다치지 않고 꽃에서 꿀을 얻는 것이 벌이 지닌 가장 가치 있는 본능이라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지닌 가장 가치 있는 본능은 무엇일까? 나는 배려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배려 말이다. 붓다의 자비, 공자의 어질음(仁), 예수의 사랑도 본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배려하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배려란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선행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회 환경을 개선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배려가 사회 제도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가장 짧은 시일 안에 이루는 수단이 혁명 아닐까? 이런 점에서 경제 착취에 몹시 신음했던 대다수 인류에게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배려의 이론 근거를 마련한 마르크스에게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은 고마움을 나타내야 마땅하다.

고 신영복 선생께서 <혁명의 진정성과 상상력의 생환을 위하여>이란 글에서 하신 말씀이다.

혁명의 시기인 20세기가 지나고, 바야흐로 ‘이후’와 ‘해체’를 모색하는 탈주의 시대에 다시 혁명의 기억에 접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가는 귀성여행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탈주를 위한 탐구여행인가.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여행이 아니라, 혁명이란 무엇이었으며 오늘의 혁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이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혁명에 대한 올바른 독법은 거대 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과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며 공고한 현실의 벽과 어둠을 넘어 별을 바라보는 성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서 쿠바의 혁명가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티의 존재를 알았다. 또한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의 이름을 딴 호찌민 초등학교가 쿠바에 있다는 것을 쿠바에서 알았다. 혁명의 진정성에 접속해 본 나라끼리 이심전심으로 서로 존중하고 존경심을 나누었으리라. 기껏 남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동상을 애지중지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무척 힘들 것이다.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질이 고약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나는 이번 연재 글을 통해 호세 마르티의 이 말씀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 까닭은 혁명 이론이나 거대 담론에 관한 내 지식이 얕아서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이 말씀보다 더 명확하게 혁명의 진정성을 잘 표현한 말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사회주의 예방 의학자이자 공중보건정책 교수인 빈센트 나바로(Vicente Navarro; 1937〜)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민중의 건강 증진은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여 실현한다.

유신이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70년대 말 나는 나바로 교수의 글을 통해 쿠바의 의료제도가 혁명적이며 이상적이라고 어렴풋이 알았다.

나는 1987년 ‘610항쟁’ 이후 의료민주화를 요구하는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활동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건강한 의료제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 가운데 관심을 가장 가질 수밖에 없는 제도는 인간의 얼굴을 한 쿠바 의료제도였다. 올바른 의료 제도 확립은 교육 제도 확립과 더불어 국가가 국민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배려의 핵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사람이 쓴 쿠바 의료제도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책을 보지 못했다. 번역 책은 많이 있다. 전문가들이 전문가들끼리만 논의하는 논문은 있는지는 몰라도 대중이 무릎을 탁치며 ‘옳아, 이런 게 참된 의료제도구나!’라며 감탄할만한 책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요시다 타로(吉田太郞; 1961〜)는 일본 농업관료로 쿠바에 유기농업을 배우러 갔다. 쿠바 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유기 농업보다 교육과 의료의 혁명적 제도에 감탄했다.

암치료에서 심장이식까지, 의료비 전부 무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육비 전부 무료!

요시다는 체류를 1년 반 가량 연장하여 쿠바의 교육과 의료를 파악한 뒤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와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를 썼다. 아마 쿠바 교육과 의료 문제에 관해서 내가 국내에서 접한 책 가운데 가장 체계적이고 상세하다. 한편 일본의 농업 관료를 통해 쿠바의 교육과 의료 실체를 알아야 한다는 우리 지성의 현실에 서글픔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의 생명이 금전보다도 가치가 있고 부드러움과 배려심만 있으면 생명은 구할 수 있다.

이는 쿠바 혁명 정부가 내건 의료철학이다.

돈이 인간보다 가치 있는 시대가 된다면 유감이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요. 저는 병이 아니라 인간을 진찰하고 있는 거예요.

쿠바 혁명 정부의 의료교육제도는 극히 평범한 젊은이를 이런 의사로 키워냈다. 상업의료에 물든 한국 의사라면 이런 철학을 과격한 빨갱이 이론이라 몰아 부칠 것이다.

2018년 7월 쿠바 기행 목적은 체류 기간이 열흘이어서 의료에 대해서 알기보다는 쿠바 혁명의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손호철 교수께서 전문가답게 쿠바 섬에 남아 있는 혁명의 흔적을 열흘 안에 최대한 집어넣은 일정을 짰다.

쿠바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쿠바를 가난하고, 폐쇄되고, 독재에 신음하는 국가라고 한다. 모든 견해를 미국산 렌즈를 끼고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다. 물질의 부만 숭상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렌즈의 시각 말이다. 교육과 의료와 주택 문제에 있어서 쿠바는 현 세계에서 복지가 가장 발달한 북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못지않다. 사실 북유럽은 과거에 제3세계 식민지를 착취해서 부를 축적했거나 자원이 풍부해 경제 사정이 넉넉한 나라들이다. 이에 비해 쿠바는 노예 식민 경험으로 오랫동안 착취를 당했고 혁명 전에는 미국의 자본에 수탈당했고 천연자원이 많이 없는데다 산업 기반 시설도 전무했다. 오직 설탕 생산으로 지탱해 온 가난한 나라다. 그런 가난한 나라 쿠바에서 돈 없어도 교육받을 수 있고, 돈 없어도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돈 없어도 집을 지닐 수 있다.

그 실현의 도구는 ‘1959년 혁명’이었다! 쿠바 혁명을 이삼십 대 젊은이들이 전광석화처럼 이룬 것 같이 생각하기 쉽다. 혁명 정부 출범 당시 피델은 33세, 체는 31세였는데 이들은 혁명 세력의 최연장자였다. 콜럼버스는 지리상으로 쿠바를 발견했다. ‘국부’ 호세 마르티(1853년 ~ 1895)는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만연한 쿠바 땅에 근원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발견했다. 1959년 혁명의 주역인 피델 카스트로는 한 세기 앞선 선배 호세 마르티를 따른 충실한 후배였을 뿐이다.

스포츠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승하려면 얼마나 땀을 흘려야 할까? 피겨 스케이트 김연아는 한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1만 번 이상 반복한다고 한다. 공중 회전하기 위해 점프할 때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근육이 동시에 긴장하며 혼연일체 하여 힘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3바퀴 이상 공중 회전한 뒤에 집중한 모든 근육의 긴장을 풀어 부드럽게 내려서야 할 것이다. 개인이 목표를 성취하려면 뛰어난 재능과 엄청난 땀이 필요할진데 한 사회나 국가가 혁명을 통해 제도 개혁을 완성하려면 어떤 재능과 힘이 필요할까?

이삼성 교수의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1999에서 혁명을 추동한 세력의 역할을 살펴보자.

우리는 잠깐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 가지 역사 해석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인들이 프랑스와 미국의 식민주의와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는 혁명적 헌신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 분석태도를 취한다.

한 흐름은 베트남 사회에 대한 식민주의적 지배와 봉건적 질서라는 사회 역사적 모순, 프랑스와 미국 식민주의 억압성, 그리고 식민주의 세력이 비호한 베트남 내 매판적 지배집단의 반민중성을 강조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자생한 혁명 지도자집단과 민중 사이에 진정한 연대가 존재했음을 주목한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가브리엘 콜크(Gabriel Kollko)의 베트남전쟁 인식이다.

다른 흐름은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베트남공산주의가 성공을 거둔 이유를 호찌민을 비롯한 혁명지도자집단이 주도한 조직과 이데올로기적 조작에서 찾는다. 혁명 엘리트가 농민 대중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동원해냈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 것이다. 마이클 헌트(Michael Hunt) 같은 이들의 베트남전쟁 서술이 후자의 관점을 취하는 예이다.

전자의 경우는 혁명지도집단의 조직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민중동원의 능력 못지않게 민중 자신들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며, 후자는 민중의 피동성과 혁명 엘리트 집단의 조직과 동원 능력을 부각시킨다.

이 글에서 프랑스를 스페인으로 베트남을 쿠바로 바꾸어도 별 무리가 없는 역사 관점이 될 수 있으리라. 혁명의 양 날개는 각성한 민중의 자발적 헌신과 혁명 엘리트들이 민중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지도력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성공 조건은 민중은 혁명 엘리트의 지도력에 신뢰를 하고, 혁명 엘리트들은 민중의 염원을 결코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혁명이란 정치권력의 단순한 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민중 삶에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4.19 의거와 6.10항쟁은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촛불 혁명? 아직 글쎄가 아닐까 …

쿠바 역사에서 혁명 엘리트를 두 사람 꼽으라면 호세 마르티와 피델 카스트로다. 이들의 백인 부모는 스페인계 이민자였다. 식민지 쿠바에서 차별받을 일이 없었다. 총명하기 짝이 없는 이들은 마음먹기 따라 안락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혁명 운동에 뛰어들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혁명을 통하여 제도적 배려를 하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사심 없었고 인류애에 순수했던 호세 마르티의 사상은 쿠바 민중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이 끊임없이 솟아난 원천이었다. 쿠바 민중은 호세 마르티를 가슴에 새겼기 때문에 혁명에 헌신한 것이 아닐까.

피델 카스트로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늘 가난하고 힘없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본능적인 연민을 지니고 있었다. 호세 마르티를 닮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을 실행함으로써 쿠바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까닭은 그 해가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약 6년 뒤 1959년 피델은 기어코 혁명을 이루었다.

쿠바 혁명의 두 주역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태생인 체 게바라 역시 머리가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고,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공통점이 있다. 체는 대학생 때 오토바이로 남미 여러 나라를 일주하며 원주민과 민중의 비참한 현실에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못 본체 외면하고 의사로써 현실에 안주했다면 세속적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도 말이다.

1959년 쿠바 혁명이란 수레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끌 때 민중은 자발적으로 수레 뒤를 힘껏 밀었다. 민중의 자발적 헌신은 호세 마르티 사상이란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민중의 열망을 한 치도 낭비하지 않았다. 토지 개혁을 통해 집 문제를 해결했고, 무상 교육을 통해 교육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무상 교육을 통해 배출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의사들을 통하여 무상 의료를 실시했다.

지금 인류의 능력으로 완전한 사회 제도, 다시 말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 쿠바 혁명이 성공적이라 해도 쿠바를 유토피아 사회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혁명과업을 일사분란하게 추진하기 위해 쿠바는 숨 막히는 관료제로 흘러 ‘미국식 자유’를 제한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세계 경제 질서를 완강하게 이끌고 있는 미국과 완전히 담을 쌓으니 경제 저발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활필수품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제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가 될 수 있는 게 인류 역사였다. 오늘의 낙관이 내일의 비관이 되기도 한다.

피델은 현명하게도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한 체 게바라의 정신을 미래 혁명의 횃불로 삼았다. 아직도 진행하는 쿠바 혁명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울린 삼위일체였다. 과거는 호세 마르티가 현재는 피델 카스트로가 미래는 체 게바라가 맡았다. 혁명의 실제 권력을 현재인 피델이 독식하지 않았다. 세계 혁명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이 체 게바라를 통하여 미래를 꿈꾼 덕분에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게 무상 교육, 무상 의료란 제도적 배려를 흔들림 없이 확립할 수 있었다. 세상은 체 게바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에게 혁명의 미래를 위한 끊임없는 영감을 얻었다. 현실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사람은 피델 카스트로였다. 49년간 집권하면서 혁명의 확실한 결과물을 역사에 남겼다.

1959년 쿠바 혁명을 보면 체 게바라 없이 피델 카스트로의 지도력만으로도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쿠바에 가기 전에는 체 게바라가 피델의 악세서리인 줄 알았다.

쿠바 혁명 정부가 미국과 단절한 대신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배치하려하자 미국은 소련과 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로 미사일 배치를 저지했다. 소련은 미국과 비밀 협상을 통해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철회했다. 소련 처사를 피델 카스트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체 게바라는 소련 역시 또 다른 제국주의란 걸 깨달으면서 반발했다.

체 게바라는 소련에 기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떠나 아프리카 콩고에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자 했다. 떠나면서 피델에게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란 마지막 편지 구절을 남겼고, 피델은 이 구절을 미래를 위한 혁명 표어로 만들었다. 피델은 체가 미래에 던진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체의 상상력을 소중히 간직했다. 인류의 집권 역사에서 1인자가 2인자를 존중을 넘어 숭상한 예가 있었던가. 2인자는 언제나 견제나 제거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는데.

혁명의 성자 호찌민에게는 체 게바라 같은 동지가 없었다. 훌륭한 많은 후배가 있었지만 통일 이후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동지 말이다. 그럼 면에서는 피델은 행복했다.

우리는 우리 땅 한반도에서 아직도 정의와 평등은 고사하고 민족의 독립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직까지 좌절의 연속이다. 미국 트럼프의 의도에 가슴을 졸이고, 일본 아베의 적반하장에 몸서리를 쳐야 한다. 나는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 투쟁 흔적을 보며 지리산의 사령관 이현상을 떠올렸다. 산타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의 기념관을 나서면서 우리 1930년대 혁명가 김산의 비운이 떠올랐다. 체 게바라처럼 스스로 손으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미국 작가 님 웨일즈가 알려준 드넓은 붉은 대륙 한 귀퉁이에서 홀로 애절한 아리랑을 부른 김산 말이다.

님 웨일즈가 기록한 김산의 생애를 보면 우리 스스로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도 체 게바라 못지않게 꿈을 꾼 위대한 기개를 지닌 혁명가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님 웨일즈가 기록한 김산의 육성이다.

나의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또한 실패의 역사였을 뿐이다. 나는 오로지 하나의 승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승리만을.

그러나 이 작은 하나의 승리는 나의 삶을 계속 지탱해갈 수 있는 신념을 나에게 주기에 족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삶이 경험한 패배와 비극은 나를 절망시키지 않고 나에게 힘을 주었다. 이제 나에게는 청운의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인간에 대한 신념은 버리고 있지 않다. 아직도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념은 버리지 않고 있다. ~

나는 살면서 늘 실패만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러하다. 내 승리는 단 하나다.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 이 작은 승리 하나는 나에게 삶을 이어갈 신념을 주기에 충분했다. 살면서 경험한 패배와 비극에도 다행스럽게 나는 절망 않고 오히려 힘을 얻었다. 내 환상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고 있다.

김산은 중국 공산당의 오해를 받아 공산당에게 처형당했다. 체 게바라가 콩고에서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경험한 실패는 우리 김산의 실패와 다르지 않다. 체 게바라가 꿈꾼 세상과 김산이 꿈꾼 세상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체 게바라처럼 될 거야.”라는 가치를 심었다. 김산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우리 역사의 소중한 가치가 될 때 우리도 미래에는 천박한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언젠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건설하리라.

체 게바라의 기념관을 떠나 미국이 피그스 만(Bay of Pigs)이라 부르는 히론 해변(Playa Giron)으로 갔다. 히론 해변 마을 어귀에 입간판이 있다. 가이드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히론, 라틴 아메리카에서 당한 ‘양키’ 제국주의의 첫 패배

‘양키yanqui’란 단어에 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양키’란 미국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우리가 중국인을 낮잡아 ‘짱꼴라’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하늘 같이 우르르 본 중국인을 ‘짱꼴라’라 불렀다가는 당시 국가보안법이었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온 집안이 망하는 꼴을 봤을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양키’를 쓰지 못한다. 양키란 말을 공식적으로 썼다간 조중동에게 어떤 모함을 받을지 뻔하지 않는가.

조선시대에 중국의 짱꼴라란 측면을 보면서 우리 주체를 세웠다면…

지금 남한 사회에서 미국의 양키란 측면을 보면서 우리 주체를 세운다면…

숭미(崇美)가 아니라 어쩌면 승미(勝美)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1961년 4월 미국 CIA가 미국으로 도망친 쿠바 망명인을 훈련시켜 이 해변을 침공했지만 혁명군과 주민들은 합심하여 이들을 섬멸했다. 우리와 다른 가치로 미국을 ‘양키’라 부르며 저항한 쿠바 역사에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바친다. 쿠바인들은 미국에 저항한 대가로 무척 고통을 받았고 아직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자존심을 팔아 얻은 물질적 풍요 때문에 현재의 정신적 타락을 걱정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만이 아니다. 점점 심해지는 강자의 갑질과 약자의 소외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과연 가난한 나라 쿠바에게 우월감을 느낄 자격이 있는가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1961년 4월 미국 침략군을 물리친 히론 해변에 찬란히 뜬 무지개

우리 일행은 히론 해변 호텔에 묵었다. 저녁 먹을 무렵 시커먼 구름이 갑자기 하늘을 뒤덮더니 기어코 한 줄기 소나기가 지나갔다. 시커먼 구름이 물러나니 찬란한 한 쌍 무지개가 동쪽 하늘에 반원을 그렸다. 내가 음악 듣기 위해 이어폰을 꼽으면 항상 첫 곡이 토스티 작곡의 ‘이상(理想; Ideale)’이다. 그 노래를 부른 많은 가수 가운데 내가 듣기에 감미로운 호세 카레라스를 가장 좋아한다. 찬란한 무지개를 보니 호세 카레라스 ‘이상’의 음률이 가슴속에서 나도 모르게 솟아났다.

『너를 따랐네, 평화의 무지개 하늘을 비추듯이
너를 따랐네, 어둠 깃든 밤에 비치는 빛과 같이
너를 느꼈네, 광명과 공기와 향기로운 꽃 속에
나의 외로운 방은 가득했네, 너의 찬란함 속에
너의 음성에 나는 황홀했었네, 오랫동안 꿈속에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십자기를 나는 잊었었네
오라 이상이여, 잠깐 다시 와서 미소 지어라
그러면 나에게 새로운 서광이 다시금 비쳐오리
새로운 서광 비치리
오라 이상이여, 오라, 오라』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는 쿠바에서 이상적인 혁명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만났다.

호세 마르티!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그리고 쿠바의 인민!

쿠바 아바나에서 미국 샬롯 공항과 LA 공항을 거쳐 인천 공항까지 귀국길이 약 26시간 걸렸다. 쿠바 올 때 긴 항공 시간과 쿠바에서 장기간 버스 탑승으로 누적한 피로 때문에 오히려 잠을 설쳤다. 또한 비행기 좌석의 불편함이란…. 이어폰을 달고 있었고 덕분에 호세 카레라스의 이상을 반복해서 들었다.

얼마간 멀뚱한 정신으로, 쿠바의 혁명 이상이 우리 사회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떠올렸다. 나는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우리 지리산의 이현상을 떠올렸고,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 혁명 기념관에서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우리 혁명가 김산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배려하는 혁명을 꿈꾼 체 게바라에게서 어린 여공에게 한없는 연민을 보낸 우리 전태일의 모습이 아른거리며 겹쳤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전태일의 의지는 총알로 제국주의에 저항한 체 게바라의 이상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숭고한 이상이었다.

《오라, 이상이여, 오라, 오라.

;Torna, caro ideale, torna, tor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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