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과 이 본질로부터 나오는 반혁명적 특성들

백철현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편집위원장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은 무엇인가?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의 핵심을 예로 들면서 이와 대비한 무정부의자들의 정치적 본질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에 대항한 자신의 투쟁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필요로 하는 ‘혁명적이고 잠정적인(transient) 형태’의 국가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으로만 국가를 필요로 할 뿐이다. 우리는 목표로서의 국가의 폐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결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장 날카롭고 명확한 방식으로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란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에 대항해서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만약 ‘잠정적인 형태’로서의 국가가 아니라면, 하나의 계급이 또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무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레닌《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이를 통해 보면, 맑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바쿠닌주의 같은 혁명적인 무정부주의의 경우)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와 국가의 사멸에 대해 동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기존 국가를 파괴한 뒤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잠정적인 형태’로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반면에, 무정부주의자들은 곧바로 국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필요한 핵심적인 이유는, 생산을 계획적, 집단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기존 착취자들의 반혁명 음모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떠한 형태의 국가도 반대한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라고 주장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정작 자신들의 정치적 본질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이라는 화두를 품고 살다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테러리즘 아닌가요?”, “아나키스트도 투표를 하나요?”, “아나키스트도 정당활동을 하나요?”,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요?” 사실 아나키스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인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점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체제인 한국에서 무(無)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비(非)현실을 넘어 반(反)현실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자명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강제적인 억압에 반대하는 ‘반(反)강권주의’로 받아들였다.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인 억압 모두에 반하는 사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 독점된 자본,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 가부장적인 권력을 거부하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고, 아나키즘은 자율적인 개인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로는 아나키즘을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인가 이후연구소 2012. 5. 19.

‘정치적 테러’는 아나키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의 조류 중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바쿠닌주의의 경우에 ‘정치적 테러’를 아나키즘을 실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테러’는 아나키즘 조류의 일부가 사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말은 ‘정치적 테러’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아나키즘도 있다는 것이다. 아나키즘 조류 일부의 정치적 특성을 그 본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음은 혼란스럽게 표현되어 있고,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는 아니라는 것을 위해 작성되었지만 실은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바로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아나키즘도 하나의 사상이지만, 다분히 ‘이상향’을 꿈꾼다. 문제는, 다른 사상과는 달리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 물론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권력의 행사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 권력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아나키즘과 국가는 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 국가권력은 그 속성상 통치와 지배에 순응하는 국민을 원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을 반대하고, 불복종한다 … 아나키즘이 왜 이다지도 국가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립각을 세우는가? 아나키즘의 어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나키(anarchy)‘는 ‘시원, 근원, 통치 혹은 지배’을 뜻하는 그리스어 ἀρχός(arkhos)에서 유래한다. 이 말에 “~이 아니다, 혹은 ~이 없다(not, without)”는 것을 뜻하는 부정접두사 ἀν(an)가 결합하여 ‘아나키’가 만들어졌다. ‘아나키’란 본래 “통치 혹은 지배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나키즘(anarchism)은 ‘아나키’에 “사상이나 주의”를 나타내는 ‘이즘(-ism)’이 결합한 것이다 …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의 폐지’가 아니라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다. 이 입장에 선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통한 후자의 목표, 즉 ‘국가와 정부의 폐지를 통한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의미의 사상 및 운동을 전개하면서 무력이나 폭력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다”라는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었다.

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칼럼] 아나키와 아나키즘: 기원과 의미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2) 뉴스민 2015. 04. 28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권력”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는 아나키즘이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을 반대”한다는 주장도 심각하게 배치되는 주장이다.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명제와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주장은 하나로 성립될 수 있는 주장이다. 게다가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의 폐지’가 아니라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다”는 명제와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통한 후자의 목표, 즉 ‘국가와 정부의 폐지를 통한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는 명제도 서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아나키즘은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를 궁극적으로 폐지하는 것인데, 그 수단은 바로 “국가와 정부의 폐지”이다.

맑스주의에서 국가의 본질은 바로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조직화된 폭력이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함으로서 기존 자본의 “지배와 통치”를 철폐하고자 한다. ‘아나키’란 본래 “통치 혹은 지배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그 어원을 통해 볼 때도 아나키즘은 곧 무정부주의이다. 아나키즘 본질이 무정주의라는 주장을 반박하려면 국가권력의 본질이 “통치와 지배”에 있다는 맑스주의 국가론의 핵심을 반박해야 한다. 그런데 “국가는 권력의 행사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는 위 글 필자의 주장에 비춰볼 때도 아나키즘의 본질은 역시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도 분명히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공산주의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 없이는 인간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세력을 집중하여 국가에 흡수시키려 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재산을 국가로 집중시킨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국가의 폐지를 바란다. 국가의 권위와 보호라는 원리가 근절되기를 바란다. 국가는 도덕과 문명을 구실로 한층 인간을 노예화 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약탈하였다.

《아나키즘》玉川信明 오월

여기에는 바쿠닌이 베른에서 열린 ‘평화자유동맹’ 회의에서 열린 연설에서 한 발언 핵심이 담겨 있다. 1872년 아나키즘 국제대회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1. 프롤레타리아가 달성해야 할 최대의 의미는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2.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소위 혁명적 임시 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

3. 일체의 부르주아 정치를 배제하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연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같은 책)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함하여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는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의 본질이라는 것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나키즘은 “사회혁명”을 주장하는데, 이 말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정치혁명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소위 혁명이라는 것은 낡은 권력을 뒤엎어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권력이 다시금 민중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악순환 되는 정치 본연의 모습은 부정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혁명 그 자체가 부정된다. (같은 책)

맑스주의가 정치혁명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세우고 이를 통해 토지와 기업 등 생산수단을 전 사회로 집중시키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혁명을 반대하고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쿠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프루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푸르동은 ‘적극적 무정부 상태’를 외치며 자신이 목표로 하는 사회체제 내지는 신질서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 프루동이 그리는 미리 이상사회는 대개 노동자 자신이 자치관리하는 기업을 경제단위로 하여 지역·지방·국가로 연합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푸르동의 경우,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이다. (같은 책)

바쿠닌이 정치적 테러를 포함해 폭력적 수단을 통해 기존 국가권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온건한 무정부주의자인 프루동은 이를 반대한다. 그러나 바쿠닌이나 프루동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 권력에 의한 국유화를 반대한다는 점은 일치한다. 실제로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대해 극렬 반대했다. 볼셰비키 권력은 기존 타도된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혁명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들하고도 격렬하게 투쟁해야 했다.

Golos Truda’지는 봉기 직후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지배도 거부하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 이 생디칼리스트 잡지는 소비에트를 향해, 정당 지도자들이나 이른바 인민위원회들로부터 자유로운, 분산된 독립된 단위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약 어떤 정치적인 집단이 그들을 압제의 수단으로 변화시키고자 시도한다면 인민들은 다시 한 번 무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의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곧 ‘혁명의 제3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이며 ‘사회민주당의 권력과 대중의 창조적 영혼 간의 …… 권위주의 체제와 자유주의 체제간의, …… 마르크스주의 원칙과 아나키스트 원칙간의’ 마지막 투쟁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범러시아 식품공장 노동자대회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집행부(막시모프, 야르추크, 그리고 세르게이 마르크스)가 제안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들은 이 결의문을 통해 볼셰비키 정권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에게 ‘무제한적이고 비통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며, 가공할만한 집중화를 모순점에 이르기까지 진행시키고 있고 …… 나라 전체에서 생기있고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사실상 정당 심지어 개인적 인간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에게 행사하는 지배권이다.’ 이 대담한 문장을 직접 쓴 막시모프는 비정당적 소비에트와 자유노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한 것이다.

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예문

비정당적 소비에트는 가능하지 않다. 1917년 2월 혁명 직후에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기 전에는 러시아에서 혁명을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빵과 토지와 평화”라는 당시 러시아 인민들의 염원을 배신하자, 소비에트 내 다수 인민들은 일관되게 이러한 요구들을 위해 투쟁해 왔던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되었고, 이 속에서 10월 혁명이 대중적인 기초와 지지 속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러시아 인민들의 혁명적 창조물인 소비에트는 가장 대중적인 조직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당적 소비에트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반혁명적 세력들이 이 내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소비에트는 혁명의 기관이 되지도 못한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그럼에도 비당적 소비에트를 요구했으며,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 이는 실제로는 혁명권력에 대한 반대, 즉 반혁명이었다.

이 점에서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면, 무정부주의는 곧 반혁명과 일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에서는 실제로 그랬고, 역사적으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세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프랑코 독재와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었던 인민전선 정부에 맞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이는 실제로는 “반혁명”이 되었다. 주관적 혁명가들이 실제로는 반혁명 분자들이 되기도 하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그러했고, 이들과 정치적 특성들이 일치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실제로 그러했다. 러시아의 저명한 무정부주의자였던 크로포트킨은 1920년 3월 레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는 명목상으로만 혁명적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러시아는 소비에트가 아닌 당위원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희망을 잃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1920년 5월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나는 미래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나는 생디칼리스트 운동이 앞으로 오십 년을 통하여 공산주의 무정부사회의 창조를 선도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같은 책)

“공산주의 무정부사회의 창조”, 이것이 무정부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 다시금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정치적 본질인 모든 권력에 대한 반대, 즉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후 실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들은 정치적 테러를 사용하여 레닌을 암살하려는 기도를 하는가 하면 볼셰비키 정치 지도자들을 암살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1921년 3월에 벌어진 크론슈타트 반란에 동조하여 여기에 참여하기조차 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궁극적으로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고 하면서도, “국가는 금명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이 점에 비춰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엥겔스가 강조했던 혁명의 핵심적인 원칙,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전화시킨다”는 원칙을 부정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국가권력의 폐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맑스주의에게 있어서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는 것은 즉각적이고, 인위적으로 국가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물질적 제반 조건들 속에서 국가는 소멸되는 것이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이를 낮은 수준의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공산주의)로 나누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흔적을 남긴 사회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받는” 사회라면,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풍요로운 물질적,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해야 하고, 구상과 집행을 분리하고 관료주의를 낳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별이 사라지고,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사라져 도농복합체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 지배계급에 의한 반혁명 책동이 사라져야 하는데, 이는 일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에서 혁명이 벌어져서 제국주의 체제가 소멸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쏘련 사회주의에서도 1930년대 중반에 사회주의의 승리가 선언되자 국가소멸이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당내에서 등장했는데, 스탈린은 이를 맑스주의의 국가소멸론을 제국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언급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염불 외우듯 하는 것이라고 조소하기도 했다.

이로써 우리는 아나키즘이 국가소멸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이며, 이들은 곧 정치적 공상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란 멍에를 벗어던진 후에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놓아야”하며,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하여 자본가에 대항해서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데 이는 반혁명 분자들과 제국주의자들에게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의 차이는, 전자가 집중된 대규모의 공산주의적 생산을 찬성하는데 반해, 후자는 세분된 소규모 생산에 찬성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바로 권력문제, 국가문제에서의 차이는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투쟁을 위해 국가의 혁명적 제형태를 혁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하지만, 무정부주의자는 이에 반대한다는 점에 있다.

레닌「먼 곳으로부터의 편지」 1917

레닌의 이 주장처럼 아나키즘의 정치적 본질이 무정부주의라면, 이 정치적 본질을 바탕으로 경제적 본질이 나온다. 생산수단의 국가수중으로의 집중은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경제적 원칙이다. 아나키즘은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하고, 이 국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집중에 대해 반대하여 “세분된 소규모 생산에 찬성”한다. 아나키즘의 정치에서의 무정부주의는 생산에서는 자치제, 상호부조로 나타난다. 러시아혁명 이후에 볼셰비키 권력에 대해 무정부주의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공장위원회별로 노동자통제와 자치를 하는 것을 반대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해서였다. 이들은 생산의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생산에서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다를 바 없는 무정부적 주장을 했던 것이다.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로부터 나오는 이들의 정치적 특성은 혁명에 대한 공상성이다. 혁명에 대한 공상성은 혁명을 비현실주의적인 것으로 하여 혁명에 대한 대중적 전망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보통 바쿠닌의 대를 잇기 보다는 프루동, 크로포트킨 같은 자치주의자들의 대를 잇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기존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것을 부정하고 기존 생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속에서 자치와 부조를 주장한다. 결국 어느 모로 보나 무정부주의는 혁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특집 사회주의〉 쿠바와 체 게바라

다음 글

〈특집 사회주의〉 오늘의 사회주의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