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ㅣ 농민
이번 이재명 대표의 대법원 판결에 ‘사법정의가 무너졌다’와 그 반대로 ”사법정의’를 바로세운 판결이라고 페북이 시끄럽다. 이쪽저쪽을 다 읽으면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법과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층 지도부들의 판결에서만 사회적 논란이 되느냐고 말이다. 예컨대,
사상 최악의 경제범죄자 이재용과 삼성재벌에게는 법원이 직접 나서서 빠져나갈 방법을 조언하는 것을 넘어 주문하고,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행정부의 수장 대통령이 재판 중인 이재용을 만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뿐인가 성폭력 판검사는 수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다.
하지만 2400원을 회사에 입금하지 않는 버스 기사의 해고가 부당하는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 해고 판단에 법원은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전에 800원을 횡령한 버스 기사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도 있었다. 이 판사들은 노동자에게 사회적 살인이라 불리는 ‘해고’에 대한 무시와 무심함이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횡령이 아니라 착오였다. 매표소가 없던 정류소에서 타는 승객들이 현금을 내면 거스름돈을 돌려줘야 했는데, 그때 생긴 잔돈은 그 다음 운행에 정산하고 수기로 보고 하는 관행이었다. 그런데 회사가 어느날 이것을 문제 삼아 해고를 시켰다. 버스 기사들의 노조가입 때문이었다. 이 판사들이 내린 판결이 장발장 재판인 까닭은 금액이 소액이라서가 아니다. 장발장도 경찰과 사법부가 전후사정을 전혀 헤알리지 않은 것 아니냐. 자기가 내린 판결이 한 사람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숙고도 없었던 것이다.
2014년 전주의 시내버스 회사에서 해고된 기사가 회사 국기봉에 목을 매 숨지는 일이 있었다. 사망 이튿날 그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정년을 3년 앞둔 2400원 횡령 사건의 정용진씨도 해고는 사형 선고와 같았다. 그러나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은 왜 해고가 노동자들에게 사형 선고가 같은지를 알지 못한다. 입으로는 상식과 공정을 외치는데 그들의 상식과 공정은 구름 위에 떠다니는 특권이기에 시민들과는 겹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린 이런 전문가들에게 법과 제도를 다 맡기고 복종하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이 땅의 법과 제도는 강자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약자에게는 야수와도 같다. 분명 너무도 큰 문제가 있는 법과 제도인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이런 몰상식한 형태가 계속 이어지고, 이런 법과 제도가 지금껏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나라는 어느 권력기관 엘리트도 시민의 통제와 견제를 받지 않는다. 여론을 살피고 시민의 실질적인 삶에 책임을 지라 요구하면 포퓰리즘이라 욕하면서, 대통령은 시민의 투표로 선출된 사람이니 맹종해야 하고, 시험으로 얻은 권력은 ‘전문가’들 결정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800원에 해고 당한 사람은 억울하지만 법관은 자신의 양심 앞에, 검찰은 법 앞에 떳떳하면 그만이다. 적어도 지금의 제도가 그렇다.
한마디로 말하면 권력과 엘리트 전문가 집단에게 대중은 주기적으로 찬 / 반 알을 낳는 투표기계 정도이고, 나머지 일들은 선출된 권력과 전문가 마음대로인 세상에서 굳이 돈도 힘도 없는 서민의 눈치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선출된 권력(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손에 쥔 권력이 있는 모든 이에겐 시민의 뜻을 살피고 책임질 의무가 있다. 헌법 앞자락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쓰여 있으니 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만 뜯어고친다고 만사가 형통되지 않는다. 이 나라에 눈치 볼 것 없는 제왕적 엘리트 전문가가 너무 많다.
매번 같은 결론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눈치 볼 것 없는 권력들이 자리만 바꾼다고 이 사회가 바뀔 수는 없다. 이건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의 민주당이라는 차악이 천년만년 집권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 때 국민 대부분이 동의한 ‘검찰개혁’이 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종국에는 검찰주의자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검찰개혁을 원칙과 절차에 따라 하지 않고 윤석열이라는 ”우리편 검찰수장’ 앉혀서 단박에 진행하려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어떤 ‘악’이라도 권력은 자기 편이냐 아니냐만 따지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내란죄와 이재명의 대법원 선고를 둘러싸고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내전’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전쟁과 같은 상황을 우린 지금껏 만들고 용인하면서 살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입시전쟁, 취업전쟁, 전세전쟁, 성별전쟁, 성과전쟁……이 사회는 늘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스스로의 삶을 지키지 못한 약한 자들을 패자라 부르며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이 패자들의 분노가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한 근원을 향해,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광장으로 모여 진부해진 민주주의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때에만 변화하고 진보했다.
더글라스 러미스는 민주주의는 민중에 대한 신뢰에 다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민중이 민주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런 엘리트 관료들이 눈치 볼 것 없는 권력이 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