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다시 보다

김남기 l 한성대학교 학생

1. 왜 소련을 다시 봐야 하는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 소련(소비에트 연방, Soviet Union)은 199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해체됐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소련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는 대한민국 학생운동이 소련에 대해 강력한 믿음을 가졌던 것은 그만큼 소련이라는 사회가 진보적인 가치들을 실현했고, 전 세계적으로 준 영향이 막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91년 소련의 해체는 그러한 믿음이 강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상적 충격을 주었다. 소련의 해체는 고로 소련이 내세운 사회주의가 끝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인식되었고, 그러한 서방의 선동과 관점들은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을 때쯤 네오콘적 사고를 가진 일본계 미국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다가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매우 낭만적인 환상 혹은 자유주의적 폭력성이 드러나는 망언을 하기도 했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 사회는 과거 소련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선전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젊은이 중에는 소련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고, 설사 안다고 해도, 스탈린의 대숙청, 학살, 굴라그와 같이 자극적이고 서방 편향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즉 과거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로서 어떠한 업적을 쟁취했고, 실현했는지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의 저자 바만 아자드가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 특히 사유화, 공공 부문의 폐지, 개방적 무역정책의 강요, 정부에 의한 모든 형태의 경제계획의 배제, 모든 형태의 국가 보조금·보상금과 사회적 보호의 폐지 등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이용하여 ‘제3세계’ 국가의 경제를 억지로 개방시켰고, 그러려고 한다. 국제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전면적 진출을 위한 길을 닦고 있으며,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제국주의 국제기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이들 정책의 목적은 선진 자본주의 중심부로의 잉여가치의 유입을 강화·촉진하는 데에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정책의 논리적 귀결은 이들 국가의 천연자원 및 인적자원에 대한 수탈의 증대, 그들 국가 경제에서의 자본형성 과정의 봉쇄, 그들의 경제발전고정의 전면적인 정지 내지 심지어 퇴행, 그들의 생활 수준의 급격한 저하,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대다수 세계 인민의 빈곤·질병·궁핍·노숙자화의 계속적인 증대

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서방 선전의 위험함과 무서움을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으며, 그런 서방이 지금까지 해온 선전과 사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련에 대해 올바르게 알기 위해선, 우선 소련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책들을 읽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쓴 책을 읽게 되면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주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필자는 이번에 쉴라피츠패트릭(자유주의적이긴 학자이긴 하지만 나름 진일보한 학자)의 『러시아 혁명 1917~1938』을 읽었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기존에 국내서 출판된 러시아 혁명 서적들과는 달리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단행한 소련의 대숙청을 러시아 혁명의 일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2. 대숙청도 러시아 혁명인가?

2-1. 들어가며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백남운의 『쏘련인상』에 등장하는 소련 사회의 모습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발전한 사회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이 다른 약소국가의 인민에게 좋게 비추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재건을 급속도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가 혁명으로 탄생했고, 공업화의 기반과 당내의 정치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 냉전기 서방의 편협한 반공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는데, 이러한 편견에서 그나마 벗어난 책이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으면서 국내에도 출판됐었다. 그 책이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 1917~1938』이다.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러시아 혁명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17년 인류 최초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1789년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가치 아래 전개되었던 프랑스 혁명이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만큼 그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소위 민주주의라는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혁명과 쿠바 혁명, 베트남 혁명 그리고 그 외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각종 민족해방투쟁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영향 아래 일어난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러시아 혁명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혁명가 레닌이 식민지 민중에게 주장했던 가치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탄생시킨 계기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을 지도하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가 단행했던 공업화와 대숙청까지를 혁명의 일환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서방 학계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러시아 혁명을 연결해서 보려 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서구에서 독자적인 좌파조직을 만들어 좌파운동을 해왔던 토니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레닌의 사후를 끝으로 스탈린 집권 시기를 아예 ‘반혁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서방 학계에서는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1990년대 수정주의 학파들이 많은 연구 성과물을 냈다. 개방된 소련의 문서를 통해서 서방세계에 알려진 대숙청(The Great Purges)이 매우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낸 아치 게티(Arch Getty)가 바로 그러했다. 아치 게티 외에도 소련 역사를 수정주의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표로서 목소리를 냈고, 그가 쓴 개설서 『러시아 혁명 1917~1938(The Russian Revolution)』은 러시아 2월 혁명부터 1936~1938년에 일어난 스탈린의 대숙청까지를 수정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책이다. 그가 쓴 러시아 혁명사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얘기해볼 필요가 있다.

2. 근대 러시아의 상황과 러시아 혁명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대다수 민중의 삶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강대국인 동시에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러시아의 낙후성은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연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연설 중 발췌한 일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투르크의 베이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봉건 통치자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패배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 귀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모든 패배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인구 대다수가 농민을 차지하던 러시아가 산업혁명의 바람을 맞은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도시 노동자계급의 탄생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에 비해 매우 늦었다. 대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전제정 또한 유지됐으며 황실과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말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던 1905년 아시아의 신흥강국 일본에 쓰라린 패배를 맛본 러시아에선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차르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05년 혁명 이후 차르 또한 일정 부분 굴복했는데, 전국적으로 선출된 의회 두마를 설립함과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비밀경찰의 활동으로 탄압당하기 일쑤였다. 1905년 혁명은 차르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과 일정 부분 두마 허용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며 혁명을 막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됐다. 1914년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벌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8월 유럽에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프랑스·영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현대화된 전쟁에서 싸우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동반한 무기의 현대화는 구식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 제국군의 극심한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독일군은 제국의 서부 영토를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은 총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함과 그 과정에서 라스푸틴과 황후의 추문 및 부정부패는 민중을 분노하게 했고, 2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

민중이 혁명했던 이유에는 경제적 궁핍함과 차르 정권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1917년 6월에서 7월 초에 케렌스키가 감행한 러시아의 갈리시아 공세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혁명가 레닌이 그해 4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주장하고 선언한다. 볼셰비키 레닌이 주장한 4월 테제의 핵심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였고, 또 다른 구호 ‘빵, 토지, 평화’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책에선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새 혁명 지도부하에서 활력을 되찾아야만 부르주아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핵심 기관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제시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는 사실상 계급 전쟁을 요구하는 구호였다. 레닌이 4월에 제시한 다른 구호인 ‘빵, 토지, 평화’에 담긴 혁명적 함의도 비슷했다. 레닌의 용법에서 ‘평화’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철수가 ‘자본의 전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는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 스스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토지를 장악하는 형식과 매우 가까웠다. 한 비판자가 “혁명적 민주주의 도중에 내전의 깃발을 꽂”는다고 레닌을 비난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러시아 혁명 1917-1938』 p.104

1917년 7월 갈리시아 공세가 처참한 패배로 끝난 후 페트로그라드에서 다시 한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7월 봉기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렀던 군중은 크론슈타트 수병·병사·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노동자 조직으로 구성됐고,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실패로 끝났다. 7월 봉기 이후 임시정부는 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핀란드로 도피했다. 다음 해 8월에는 전제주의자 코르닐로프가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10월 혁명을 주도하여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 선거에 도전하여 25%의 득표를 얻었지만 40%를 얻은 사회혁명당에 선거에서의 패배를 맛보았다. 물론 볼셰비키는 선거에서 완벽히 이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퇴하지 않았고, 통치의 위임이라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집단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볼셰비키는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분명한 건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노동자계급의 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사실이었다.

3. 적백내전과 신경제정책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실제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전쟁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독일과의 전쟁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빠져나왔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정권이 치러야 했던 전쟁처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게 바로 적백내전이다. 1918년에 시작된 적백내전은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졌고, 볼셰비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방해 그리고 차르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9세기부터도 낙후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격을 받았던 러시아의 경제는 내전을 통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921년엔 기근이 일어나 수백만이 아사했으며, 비슷한 시기 크론슈타트에선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적백내전을 통해 볼셰비키가 얻은 또 다른 결론이 있었다. 군의 현대화와 공업화 중심의 경제 발전 모델의 추진이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많은 이들이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27년 기준으로 볼셰비키 총 당원 중 33%가 1917~1920년에 가입한 반면, 1917년 이전에 가입한 당원은 1%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적백내전을 통해 많은 사람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는 반증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그 외의 당시 볼셰비키들이 지휘했던 붉은 군대는 내전을 통해 그 규모가 늘어났다. 내전 중에 5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가 한때라도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내전 기간에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처음으로 징집됐고 내전 기간 내내 이들은 전투부대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으며, 내전이 끝날 무렵에 붉은 군대는 주로 농민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의 거대 기구가 됐다. 비록 1/10만이 전투부대였고(붉은 군대든 백군이든 전선에 배치된 부대가 10만 명을 초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머지는 보급, 수송, 행정 일을 맡았지만, 군대의 성장은 놀라운 성과였다.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는 기존의 전시 공산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신경제정책 이른바 네프(NEP)를 추진했다. 물론 네프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후퇴였다. 네프를 통해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다시 복귀했기 때문이다. 네프에서도 문제점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1926년에서 1927년 당시에는 상당한 부분의 경제 회복을 거쳤다. 최소 1926년에서 1927년 기준으로 소련의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프가 진행되는 동안 볼셰비키의 지지층도 늘었다. 1927년에 이르면 공산당은 100만 명이 넘는 정규 당원과 후보 당원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중 39%는 현재 노동자였으며 56%는 당에 가입했을 때의 직업도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볼셰비키가 민중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 스탈린의 공업화와 대숙청

그러나 볼셰비키에 있어 네프가 영구적인 대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후퇴였을 뿐이다. 즉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고 볼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포함한 볼셰비키들은 낙후된 러시아가 공업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스탈린만 공업화를 추구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당시의 공업화는 소련을 매우 낙후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볼셰비키들이 추구한 대안이었다. 책에 따르면 옛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유리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개별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의 틀 안에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 집단화를 극단적인 비율로 채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전 수준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가 내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계급의 적과 무장 투쟁을 하며 일했던 시기에 우리가 지녔던 것과 똑같은 긴장을 지니고 일해야 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영웅다운 시기가 도래했다.

『러시아 혁명 1917-1938』 p.247

1924년 레닌이 죽고 나서 볼셰비키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그리고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즉 스탈린이 단행한 공업화는 볼셰비키들이 추구했던 1차적 과제를 수행함을 의미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기존에 실행하던 네프를 포기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929년에 추진했다. 공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한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929년 말에 이르면 당은 농업을 집단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해 12월에 스탈린이 선언했듯이, 쿨라크의 착취 경향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쿨라크는 ‘계급으로서 박멸’돼야만 했다.

그들의 저항 및 일탈로 1932년과 193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북부 카프카스 그리고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300~400만이 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근은 엄청나게 혹독한 유산을 남겼고, 볼셰비키 또한 이들을 막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기근 자체가 어느 한 집단이나 민족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겠다는 차원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스탈린이 기근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전혀 없다. 비록 공업화 과정에서 기근과 같은 혹독한 사태가 있었고, 공업화 자체도 여러 문제점이 있긴 했지만, 공업화의 성과물은 고무적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그것이 대다수 민중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도시 노동자들(주로 모크스바, 레닌그라드, 우크라이나의 대공장에서 모집된 그 유명한 ‘이만오천인’을 포함)이 콜호즈 조직자나 의장직을 맡기 위해 농촌에 긴급히 동원됐고, 1932년에 농가의 62%가 집단화됐으며, 그 수치는 1937년에 이르러 93%까지 상승했다. 집단화를 거치며 콜호즈 생산량에서 조달량은 곡물의 40%에 이르거나 예전에 농민들이 시장에 팔았던 비율의 두 배에서 세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소련의 지도부는 공업화와 집단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자화자찬이 포함된 주장을 했다. 적 계급은 박멸됐고, 실업은 사라졌다. 초등교육은 보편적으로 의무가 됐고, 성인 문해율은 90%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도시는 맹렬하게 성장했다. 옛 산업 중심지는 광대하게 확장됐고, 조용하던 지방 도시에 거대한 공장이 출현했으며, 새로운 공업·광업 지대가 소련 전체에서 출몰했다. 대규모 금속 공장과 기계 제작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이미 운영을 시작했다. 투르크시브 철도와 거대한 드니프로 수력발전 댐도 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탈린은 이른바 문화혁명을 추진했다. 물론 이 문화혁명은 1960년대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혁명과는 비교적 다른 성격이었다는 것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문화혁명 기간 대다 수의 노동자들이 산업 경영진으로 발탁됐고, 소비에트나 당의 관리가 되거나 중앙정부 및 노동조합 관료제에서 숙청당한 ‘계급의 적’ 자리에 임명됐으며, 1933년 말에 소련에서 ‘지도 간부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류된 86만 1,000명 중에서 1/6이 넘는 14만 명 이상이 5년 전만 하더라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사무직으로 옮겨간 총 노동자 수는 최소한 150만 명으로 변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집중적인 운동도 개시했다. 이는 대학과 기술학교에서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으며, ‘부르주아’ 교수들은 분개하게 했고, 제1차 5개년 계획이 지속하는 동안 사무직 종사자 가정 출신의 고등학교 졸업생은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됐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알렉세이 코시긴과 같이 미래의 소련 지도부로 등극하게 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의 수혜자였다. 즉 문화혁명은 교육혁명이라는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화혁명 기간 소련의 도시 인구는 1929년 초의 2,900만 명에서 1933년 초에는 거의 4,000만 명으로 4년간 38%나 급상승했으며, 모스크바의 인구는 1926년 말 200만 명을 넘었는데 1933년 초에는 370만 명으로 뛰어올랐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며 소련은 1936년 새 헌법을 만들어 내어 헌법상 동등한 권리를 1918년보다 일정 부분 더 많이 부여했다. 이로써 모든 소련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자유를 보장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자유란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적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던 1936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분기인 세 번째 혁명을 진행하는데, 그게 바로 대숙청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이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테러와도 차이점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단행했던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처럼, 이는 왕년의 혁명 지도자들을 주로 겨냥한 국가 테러였다고 주장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로 본인 또한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라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예조프를 희생시켰다고 하지만, 그가 숙청이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꼈다든지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든지 아니면 예조프를 단지 마키아벨리식 신중함 때문에 없애버렸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숙청의 또 다른 사실은 1980년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드러났다. 바로 일각에서 알려진 숙청의 희생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지만,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의 책을 인용하자면 실제 대숙청과 굴라그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고위직에 있던 공산주의자만 숙청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인텔리겐치아(옛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와 1920년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 특히 문화혁명 활동가 모두)도 크게 당했다. 모든 러시아의 혁명적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였고, 1937년처럼 명확하게 용의자를 명시하지 않았을 때조차 유력한 용의자였던 ‘계급의 적’ 출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공식 살생부에 이름을 한 번이라도 올린 사람은 결국 희생자가 됐다. 해외에 친척이 있거나 외국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위험했다. 스탈린은 상습범, 말 도둑, 종교적 분파주의자를 포함한 수만 명의 ‘쿨라크 출신과 범죄자’를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굴라그로 보내라는 특별 비밀 지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현재 굴라그에 수감 중인 상습범 1만 명도 총살당했다. 서양 학자들은 소련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 그동안 어림짐작해온 대숙청의 전체 규모를 확인하게 됐다. NKVD 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굴라그 교정노동수용소의 수감사 수는 1937년 1월 1일 80만 명에서 1939년 1월 1일에는 130만 명으로, 2년간 50만 명이나 증가했다. 굴라그 죄수의 40%는 ‘반혁명’ 범죄로 기소됐고, 22%는 ‘사회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분자’로 분류됐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대숙청 희생자가 감옥에서 처형되어 굴라그까지 가지도 않았다. NKVD는 1937~1938년에 감옥에서 처형된 사람이 68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했다.

『러시아 혁명 1917-1938』 p.295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숙청에는 분명 억울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서방에서 주장했던 수치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합하면서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도 프랑스 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지막 혁명인 대숙청을 1938년에 마무리했고, 이로써 저자 쉴라 피츠패트릭이 주장한 러시아 혁명의 마지막 단계는 마무리됐다.

5. 무엇이 서방의 다른 책들과 다른가?(장점과 한계)

서방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러시아 혁명』은 기존에 나온 러시아 혁명 자료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여 러시아 혁명을 해석한 책이다. 즉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8년 종결된 대숙청의 연결점을 여러 자료를 통해 접근하여, 대숙청 또한 러시아 혁명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 신선했다. 한국 사람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에 접근하는 방식은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대숙청이 일어난 시대사적 맥락이나 환경 그리고 배경을 판단하기보단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의 강화라는 맥락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을 학살, 범죄, 스탈린 개인 독재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단 극우파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내 시중에 많이 출판된 토니 클리프류의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좌파들의 서적들 또한,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소련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과의 인터뷰나 일부 출판된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이런 토니클리프류 좌파들 또한 미국 주류학계의 핵심 주장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서방의 학자이기에, 레닌이나 스탈린에 대해 강력한 권위주의 혹은 공산당 사람으로만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료 독재라는 점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필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리고 소련 자체가 국제 혁명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코민테른이 입장이 기존 러시아 제국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도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일보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서방의 전체주의론적 접근을 일정 부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숙청의 과장된 기존의 반공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을 혁명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진일보한 견해를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당연히 필자가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스탈린의 공업화와 문화혁명 그리고 대숙청 분야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1794년 테르미도르 이전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라는 맥락과 동일 선상에서 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을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테러와 같은 맥락에서 보는 건 필자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리고 문화혁명 관련한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자료는 소련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책을 번역한 역자가 밝혔듯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은 쉴라 피츠패트릭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6. 책에 대한 결론

필자가 읽은 이 책은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다. 호주인 역사학자가 쓴 러시아 혁명 개설서다. 비록 서방의 학자가 쓴 책이라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진일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즉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저자가 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붙이자면 당시 볼셰비키가 추구했듯이, 공업화는 1차적으로 완수해야 할 과제였다. 위에서 스탈린의 연설문을 인용했듯이, 1931년 스탈린은 10년 안에 그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쟁의 위협은 그만큼 공업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극동의 소련 안보를 위협했고,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거리낌 없이 발산했다. 스탈린의 연설은 예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불과 2년 뒤인 1941년 6월 히틀러의 군대는 소련을 침공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예언적인 연설이 있은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생각해봤을 때, 공업화를 통한 군사력 증강과 군대개편 밑 현대화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레닌 사후 소련에 등장한 스탈린 체제는 전쟁의 위협이라는 맥락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1918년에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의 경험은 전시의 위협과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과 경제적 타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했다. 거기다 러시아는 그런 경제적 타격을 받고, 공업화라는 달성해야만 할 과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쥐고 있던 부담과 그 어려움은 상당했다. 저자 또한 스탈린이 러시아를 그 후진성에서 끌어낸다는 목표가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웠는지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련사를 볼 때,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몇몇 부분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관점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사회주의자가 쓴 책이 아니라는 부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일보한 성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스탈린의 대숙청의 시대사적인 맥락에서 어느 정도의 명분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학계가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방학계의 수정주의 학파가 어떤 성과를 학술적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시대사적 내지는 환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혁명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이 일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7. 소련을 다시 봐야 사회주의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가 서평으로써 다룬 책 『러시아 혁명 1917~1938』은 러시아 혁명의 과정과 소련의 대숙청을 다룬 책이다. 쉴라 피츠패트릭이 쓴 러시아 혁명 1917~1938은 자유주의 성향의 학자가 쓴 책이다. 쉴라 피츠패트릭이 쓴 러시아 혁명을 읽은 것은 비록 자유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이지만, 최소한 주류서방학계에서 한때 강력히 부정했던 스탈린의 대숙청을 나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했던 진일보함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됐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그런 진일보함을 알기 위해선 1990년대 문서고 혁명으로 나온 서방의 수정주의 학파의 결과물들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소련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이 해체된 지 거의 30년이 다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소련 시대에 대한 향수와 체계적인 인민대중의 복지는 그 시대를 경험했던 이들에게 아주 강력히 남아있다. 현재 러시아 국민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주의가 민중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과 혜택을 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쉴라 피츠패트릭의 말대로 어떤 체제든 아래로부터의 지지 없이는 권력을 지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 러시아 연방을 포함한 과거 구소련 연방 가맹국들에서 나타나는 소련에 대한 향수는 아래로부터의 지지가 강력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1991년 연방해체 이전 민중의 77%가 연방의 해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과거에 대한 회상 정도로만 이해하고 반공주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접근한다.

이러한 반공주의적 편견은 비단 자유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극우파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업적을 부정하려는 소위 트로츠키의 사상을 수정해서 보는 좌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왜곡된 편견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대중들에게 심어주기도 한다. 그들이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스탈린이 공업화로 건설한 소련은 분명히 사회주의 국가였고,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 여러 국제혁명들을 지원했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민족해방투쟁들이 그러한 반증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부정은 결국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게 결국은 반공주의적 논리에 흡수되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좌파들은 이런 반소 반북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레닌과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소련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소련을 객관적으로 접근한 책들을 접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즉 왜곡되어서 보였던 소련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사회주의 사상의 방향도 올바르게 잡을 수 있다. 그 시작은 바로 소련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가지고 있는 책 읽기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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