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76호 4-4 신좌파가 답한다 : 자본주의는 우리의 문제다

박혜인 ㅣ 대학원생

<<현장과 광장>> 제10호의 제호인 ‘신좌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처음 봤을 때 사뭇 놀랐다. 제호와 같은 제목의 글을 쓴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은 이른바 ‘신좌파’라고 여겨지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예미학을 전공하였기에 더욱 놀랐다.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여성주의(페미니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과 장애 인권 운동과 이주노동자 인권운동 등 ‘무지개 좌파’라고 불리는 사회운동의 조류들을 접하면서 연대해왔기에, 신좌파가 왜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하는지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신좌파를 극복하고자 마련한 특집에 대해서, 필자는 신좌파로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바라보고자 하는 반대편의 입장에서 논평을 해보고자 한다.

신좌파 운동을 극복하는 것은, 여러 사회 운동의 부문들을 더욱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현실 인식과 실천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교차적인 억압들을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으로도 함께 지양해나가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 장애인에 대한 억압, 성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결국 자본주의와 이러한 억압들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원인분석과 현실파악이 불가능하다. 물론 자본주의를 타파한다고 해서 여러 억압들이 일소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억압들이 자본주의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고, 자본주의가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억압하면서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해왔기에, 그러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노동운동 또한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을 인식하고 함께 지양해나가야한다는 의식 없이는 노동운동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신좌파의 개념에 속하는, 본래 페미니즘에서 발생한 ‘교차성’ 개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여성이기에 받는 억압과 노동자이기에 받는 억압이 따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로서 억압받는다는 현실이 존재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가 필요하고 이는 노동자들이 받는 억압에 더해서 여성노동자들이 받는 억압을 가했다. 자본주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낮은 지위와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를 강요하면서 남성노동자들과 차별해왔다. 또한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돌봄노동과 가사노동 등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노동을 떠맡으면서,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유지하도록 했다.

자본주의는 소수자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을 노동을 할 수 없는, 즉 자본이 착취를 할 수 없기에 이윤에 도움 되지 않는 대상으로 낙인 찍고, 이를 비정상이라 규정했다. 신좌파의 소수자 운동들은 이렇게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규정된 이들이 존엄과 인권을 되찾고자 하는 사회운동이다. 소수자들이 자본의 이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대상으로 더 이상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자본주의의 극복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없앤다고 해서 반드시 소수자들이 존엄과 인권을 되찾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변혁운동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할 수 없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운동해야한다.

홍승용 <신좌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는 좌파의 문제점을 청산주의, 반-권위주의, 반-환원주의, 탈-위계주의로 나누어서 분석한다. 청산주의에 대해서는 현실사회주의 국가와 맑스-레닌주의 당 중심의 변혁운동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설명한다. 물론 맑스주의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통째로 내다버리는 것은 노동자 민중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역사상 존재해온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을 넘어서야할 필요가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과오를 철저히 비판하고 그에 대한 반성과 거리두기를 통해서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반-권위주의의 뿌리는 무정부주의와 룩셈부르크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등 다양한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윤석열의 12.3 계엄 때문에 열린 ‘광장’에서 성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말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말하고, 여성으로 차별받는 사회의 극복에 대해 말하고, 장애인이 지하철을 탈 권리를 말하는 것이 마치 68운동과 같은, ‘신좌파’의 운동적 지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는 아도르노의 ‘짜임관계’를 실천의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례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 소수자와 약자들의 인권은 존엄하기에 각자의 운동은 모두 중요하고 위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적어도 ‘요구되어야할’ 이상이다. ‘당장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급해서’, ‘더 중요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에’, 미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변혁운동은 실천의 차원에서 반-환원주의, 탈-위계주의를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물론 광장에 나온 대부분의 민중들은 노동자이거나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기에 ‘노동’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자본과 노동의 모순, 자본주의를 지양해야할 필요성은 더욱 더 광장에서 말해져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부문의 운동들에게서 우선순위를 탈취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광장에서 말해지는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자본주의 체제가 미치는 억압을 밝히고, 따라서 자본주의 지양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한다. 그것이 반-환원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국진(맑스사상연구소)의 <무엇을 위한 ‘성장논리’인가>는 <<녹색평론>>의 ‘반성장’의 사상을 바판하면서, 문제는 성장논리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성장논리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주의도 경제성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제한적인 성장을 지향하는 ‘성장논리’ 자체를 깨부숴야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 많이 성장할 수 있기에 우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성장 자체를 사회가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추구해야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이고 무제한적인 생산 증대로 인해서 산업폐기물과 환경오염, 더 나아가 기후위기가 심각해지고 있기에, 사회주의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을 반드시 제시해야한다. 따라서 성장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이 무정부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생산을 노동자 민중의 이해관계에 맞게 사회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2025년 4월 4일 윤석열에 대한 탄핵이 인용되어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사이에 광장에서는 수많은 이들과 수많은 외침이 있었다. 나는 그 광장이 노동운동으로 대표되는 ‘구좌파’와 ‘신좌파’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광장에서는 신좌파적인 의제들이 말해졌지만, 그 ‘판’을 깔고 준비한 사람들은 ‘구좌파’, 사회운동내의 기성세대였다. 윤석열은 파면되었지만 변혁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고공에는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고, 차별금지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고, 기후위기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문제다. 광장에 나온 무지개 좌파와 응원봉 동지들은 노동문제가 우리의 문제라고 말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우리의 문제다. 반자본주의의 기치를 날카롭게 세우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억압들을 보다 정밀하게 인식하고 타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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