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6호 6-4 노동자문화 그 자체에 대하여 (1)

  • 이 기사는 노동잣신문 1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박현욱 ㅣ 노동예술단 선언

‘노동자 신문’의 ‘문화’면 글을 몇 회째 쓰고 있으니 응당 그 내용은 ‘노동자 문화’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정작 노동자 문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룬 적이 없다. 예컨대 ‘노동자 문화란 무엇인가?’ ‘다른 문화와는 어떻게 변별되는가?’ 심지어 ‘그런 것이 존재하긴 하는가?’ 등등. 사실 상당히 논쟁이 될 법한 주제들일뿐더러 지면의 성격상 학술적 쟁점을 심도 있게 논하기엔 부적절하여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 건물을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소 개인적인 생각일지라도 ‘노동자 문화’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연재하기보다는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나가려 하니 읽으시는 동지들의 양해를 구한다.

우선 ‘노동자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런 말 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겠으나, 꽤나 들어온 말일뿐더러 그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면 딱히 ‘이거다’라고 답하기 어려워들 하는 게 현실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관련한 연구나 논의 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제기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관심 밖(흔히 하는 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2019년(이 또한 5년 전이다) 한국의 한 레거시 미디어에 ‘한국 노동자 문화, 대중문화에 포섭 독자성 빈약’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리기도 했는데, 박 모 교수의 ‘한국 노동자문화의 성격’이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쓴 기사였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566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썼다는 그 논문을 통해 기사는 다소 ‘충격적’이라며 ‘한국에 노동자 문화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태조사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노동자들이 대중문화에 저항하며 독자적 문화를 만들어 내기보다 대중문화와 공모하면서 그 부정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거다.

뭐 좋게 보자면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빈약’이라고 답하고 있으니 아예 없지는 않다는 의미로 봐줄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충격적일 만큼 존재 여부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접근 방식이 과학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해서 논문과 이 기사가 말하는 바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량적 데이터 분석 그 자체는 눈여겨볼 일인데, 그나마…. 이 실태조사가 무려 2002년에 이루어진 결과라는 거다. 2002년, 신자유주의 광풍에 노동자들은 여전히 짱돌과 화염병으로 맞서며 투쟁하던 때이다. 11월 노동자 대회를 앞두고 수만 명이 거의 밤을 새워 전야제를 할 만큼 지금과는 노동자 문화가 (적어도 양적으로는) 비교조차 안 될 때이니, 그때조차 ‘빈약’이라면 지금은 ‘아예 없다’라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또한 이 기사는 노동자 문화와 관련하여 그 주요한 요소로 소위 ‘민중가요’를 예로 든다. 노동자 문화에 대한 정의를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노동자 문화에서 ‘민중가요’를 추상하는 것에 반기를 들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2020년 ‘민중가요 소환콘서트’의 준비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사건은 꽤나 주목할 만하다. 소위 민중가요 판 ‘나는 가수다’로 불리며 ‘The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준비되던 이 콘서트와 관련하여 출연자였던 배우 권해효 씨는 한 인터뷰에서 ‘(민중가요가) 용도가 끝났다고 폐기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 음. 어쨌든 용도는 끝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폐기를 하지 않는다’라면 떠오르는 건 한가지이다. 박물관에 모셔 놓고 가끔 꺼내 추억하자? 아니면 무형문화재 정도로 전승하며 유산으로 삼자? 정도.

아무튼 앞서 말한 기사와 이 콘서트와 관련한 일련의 논란(?)들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활동이 노동자 문화와 관련한 활동이고 내가 창작하는 노래가 민중가요라고 여기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보자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부여잡고 용도가 끝난 일에 용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꽤나 ‘쓸모’에 집착하는 편인 내가 당장 필요한 밥그릇이 아닌 고려청자나 빗살무늬 토기를 만드는 헛짓(내 기준에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그런가?

말 나온 김에 민중가요라는 추상을 통해 노동자 문화의 실재성에 대한 구체로 접근해 보자. 내가 만든 노래 중에 ‘이 돈으로 살아봐’라는 노래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임금투쟁에 관한 노래다. 집회 현장이나 노동조합 교육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이거 완전 우리 얘기인데 세상에 우리 얘기가 노래로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정말 이 돈으로 못 살겠어요. 우리 조합원들이 꼭 이 노래를 알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동지들이 있다. 아니 꽤 많다.

민중은 계급적 개념이고 노동자계급은 당연히 민중이다.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계급적 독자성을 부정하고 은폐하려 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그럴 수 있는 수단(이데올로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실태조사 결과가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은, ‘우리 얘기가 노래로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다’라던 노동자들의 말에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난 매일 같이 그런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즉 노동자 문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위력적인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노동자 문화에 대한 인식이 ‘빈약’으로 나오지 않는 정도라면 아마도 이미 자본주의는 뒤집히고 노동자들의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해서 용도가 끝나긴커녕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 용도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우리 조합원들이 꼭 이 노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 동지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꼭 그 노래를 모두 알 수 있을 때까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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