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64호 4-2 총선을 계기로: 새삼 확인해야 할 전략적 과제

  • 이 기사는 <노동자신문> 1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진상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정치권과 언론의 사실상 온갖 관심은 4월 10일 제22대 총선거에 집중되다시피 해왔고, 노동운동 진영도 저쪽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적잖은 관심을 거기에 쏟아왔다. 그리고 특히 그 총선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며, 가히 백가쟁명의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총선에서 행사하는 선거권은, 발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그것답게 일정 년령 이상의 성인이라는 누구에게나 아무런 차별이 없는 보통선거권이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권이 노동자ㆍ인민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맑스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보통선거권은,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짓밟을 것일까를 3년이나 6년마다 한번 결정하는”(“프랑스 내전”, MEW, Bd. 17, S. 340.; 안효상 역,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4권, pp. 65-66.) 것이라고. 그리고 좀 더 자세하게는 ― “보통선거권은 지금까지는 신성한 국가권력에 의회의 승인을 부여하기 위해서 악용되었거나, 혹은 수년에 한번 의회제적 계급지배를 승인하기 (그 꼭두각시들(Werkzeuge)을 선출하기) 위해서만 인민에 의해서 사용되어온, 지배계급의 수중(手中)의 장난감으로서 악용되어 왔다”(“‘프랑스 내전’을 위한 제1 초고”, MEW, Bd. 17, S. 544.; 안효상 역, “‘프랑스에서의 내전’의 첫 번째 초고”, ≪… 저작선집≫, 제4권, p. 19.)고!

레닌 또한 맑스를 이어서 ―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짓밟을 것인가를 수년마다 한번 결정하는 것 ― 이것이 의회주의적 입헌군주제뿐 아니라 가장 민주적인 모든 공화제 국가들에서의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실제의 본질”(Lenin Werke, Bd. 25, S. 435,)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의회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에게는 가장 끔찍한 것으로 돼버렸다”(≪“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p. 63.)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근거 없는, 혹은 적어도 지나친 악담일까?

우리의 경우를 보자. 저들 모두가 국민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듯이 떠들어온 바로 그대로 더없이 풍족하고 행복한 노동자ㆍ인민의 삶을! 여ㆍ야가 몇 번인가 바뀌고, 소위 여소야대니 야소여대니 하고 국회의 구성도 바뀌어 왔지만, 그 바뀜에 따라 어떤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는지를! 또 대표적으로는, 한도 끝도 없이 사상ㆍ이론ㆍ언론ㆍ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저 천하의 자유민주주의적인 국가보안법을! 그리고 여ㆍ야가 서로를 “심판해야 할” 대상이라며 입에 담기도 민망한 소리들을 내질러대는 저들의 외침, 즉 자기표현ㆍ자기규정들을!

아무튼 이렇게 끔찍한 것이 바로 “가장 민주적인 모든 공화제 국가들에서의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실제의 본질”인데,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의회, 그것을 구성하는 총선을 나 몰라라 외면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레닌에 의하면, “맑스는, 특히 결코 어떤 혁명적 상황도 현존하지 않은 시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의회주의라는 ‘돼지우리’조차 이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가차 없이 관계를 끊는 것을 이해했다.”(≪국가와 혁명≫, Lenin Werke, Bd. 25, S. 435.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레닌 자신도, ≪국가와 혁명≫이나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등에서,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의 경험을 예시하면서, 혁명적 노동자 당의 부르주아 의회 참여, 그 선거 참여의 중요성을 재삼재사 강력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거ㆍ의회 참여를 거부ㆍ회피하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좌익’ 지도자들을 엄중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는 어떤 조건ㆍ상황 하에서도 선거 보이코트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예의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p. 62-63.)에서, 볼쉐비끼의 1905년의 보이콧은 옳았음에 비해서 1906년의 그것은 옳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1905년의 경우, “의회 바깥의 혁명적 대중행동(특히 스트라이크)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작농민들의 단 한 부분조차 어떤 방식으로든 반동적 정부를 지지할 수 없었을 때에, 그리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업투쟁과 농민운동을 통해 후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반동적인 정부가 반동적인 의회를 소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쓰고 있다. ― 일정한 혁명적 정세 속에서는, 그리고 그러한 정세 속에서만 보이콧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왜, 무엇을 위해서 참여해야 하는지, 맑스와 엥엘스에게서 들어보면,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자들과 나란히 노동자 후보자들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후보자들은 가능한 한 동맹원들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의 당선을 꾀할 것. 당선될 가망이 전혀 없는 곳에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역량을 계량하고, 자신의 혁명적 입장과 당의 관점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후보자들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경우 그들은, 예컨대, 그렇게 하면 민주당을 분열시켜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주게 된다는 식의,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들에 농락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당이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현이 초래할지 모를 불이익보다 무한히 더 중요합니다.”(“1850년 3월 동맹에의 중앙위원회의 호소”, 채만수 역, ≪공산당 선언≫, 부록, p. 123. 강조는 인용자.)

우리 사회에서의 총선이나 각급의 의회 선거에서도 당연히 이 호소 내용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모든 곳에서 내세우지는 못했고, 또 ‘민주연합’ 따위로 독자성을 다소 훼손하긴 했지만” ― 디미트로프까지 내세우며 저 소위 ‘민주연합’ 참여를 합리화하려는 ‘혁명가들’이 안 계신 것은 아니지만 ―, “나름 최대한 노력해왔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한 부족과 오류를 최대한 바로잡아야 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빗나간 현실인식이다! 왜냐?

현재 대한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위 호소 내용을 실천에 옮길 혁명적 정치적 조직, 말 그대로의,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 정당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에서 인용한 맑스와 엥엘스, 레닌의 지침들은 모두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혁명적 조직ㆍ정당들에게 하는 발언들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소위 ‘진보’ 정당들의 우왕좌왕, ‘민주연합’ 등등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조직ㆍ정당이 범하고 있는 ‘오류’가 아니라, 소부르주아 정치조직들, 그 사상적 영향권 내에 있는 일부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소부르주아적 정치행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 즉 우리는 아직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조직, 혁명적 정당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바로 그 혁명적 정당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현 단계의 최대의 전략적 과제라는 점이다. 이 전략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달성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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