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국진 ㅣ 맑스사상연구소
무릇 인간 삶은 “실존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성민엽 비평집, <문학의 숲으로>) 흔히들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정치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라고 하지만, 개인의 내면적인 측면을 무시해서는 인간은 존재할 수도 실존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이 두 가지 요인 중에서 “사회적 조건”만을 주로 추구하다 보니 그 다른 하나 “실존적 조건”을 경시하고 무시해온 것같다.
헤겔은 젊은 시절과 장년기에 정신철학과 논리학의 대체계를 구성한 이래 말년에는 “예술, 종교, 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나 역시 요즘 들어 문학과 예술, 그리고 중국의 철학과 종교에 자연스레이 관심의 초점이 옮겨감을 느낀다. 삭막한 사회과학의 세계만을 추구해 온 세월의 무게 앞에 이제는 저절로 실존과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들어가는 것일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는 요즈음이다. 실존과 혁명을 통일하고 (노바크 편, <실존과 혁명>) 사회적 실천 속에서, 과학적 역사인식에서 주체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그토록 노력을 경주해왔던 지난 세월이 그리 아쉽지는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더러 어떤 이는 “80년대에 살고 있는 사람같다”고 했던가.
내면을 살찌우는 작업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적 조건”을 떠난 “실존”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맑스가 로빈슨 크루소 역시 발달한 영국 문명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했듯이) 그러나 개인들로 분열된 이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사회적 실천”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집단을 이루어 제 목소리내는 것이외에 어떤 “사회적 실천”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개인으로서의 비판적 지식인에게는 어떠한 “사회적 실천”이 허용되는가?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사회적 실천.
현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이며 그 사회는 모순으로 이루어져 운동하고 있으며 그 극복은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운동 사회가 대체로 합의점을 이루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이다. 이 문제가 바로 운동의 전략문제로 제기된다. 우리 운동의 전략의 근본문제는 과거의 민주주의운동 전략론을 발전적으로 지양하는 과제, 즉 민주주의적 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관계를 명확히하는 과제에 그 중심점이 놓여 있다. 다른 말로 민주주의 투쟁과 계급투쟁의 문제, 정치적 민주주의 투쟁과 경제적 계급투쟁의 문제를 선명히 제기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제투쟁의 정점으로서 “노동자국가”라는 권력의 문제, 사회주의혁명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학문의 목표, 따라서 사회과학의 목표 역시 진리의 추구에 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맑스주의 역시 그것이 학적 체계인 이상 진리 추구의 선상에서 발전해왔다. 이제 자본주의사회를 구성하는 제계급을 분석한 맑스의 역사유물론(<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멜 18일>에서 전형적으로 제출된)에 따라 우리 사회의 제계급의 정치적 특징, 나아가 문화-심리적 특징을 연구하고 분석해야 될 때가 되었다. 지식인계급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람시의 분석이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람시는 자신의 혁명전략을 짜아가는 데 있어서 국가론, 특히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상이론을 중시하였다. 트로츠키 역시 <평가와 전망>에서 러시아의 짜르권력의 국가의 특수한 역사적 발전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혁명의 불균등결합발전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80년대의 “신식민지파시즘국가론”을 지나 친자본/반노동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적 국가론(문재인정권)을 거쳐 오늘날 수구반동의 보수주의부르주아적 국가권력에 이르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반민주요, 경제적으로는 반민중이요, 사상적으로는 반공국가이다. 그러나 그것의 계급적 본질은 자본가 독재이다. 이러한 제규정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 국가 현상이요,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모순의 실체이다.
개인은 결코 사회나 국가에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실존은 환경 속에서만 그 실존이 보장되고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각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적 실천자로서 우리는 현실의 모습으로 불거져나온 “사회문제”에 눈감을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문제의 어떤 측면을 더 중요시할 것인가라는 인식에 있어서의 강조점 부각의 차이일 것이다.
실존하는 자아가 실존하는 사회와 맺는 관계가 바로 “실천”일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천적 자아”를 구현하는 데서 우리의 “삶의 의미”가 찾아지고 “더불어 행복한 사회”로서의 인류의 오랜 사회주의의 이상은 실현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