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88호 10-7 갈라진 땅에 선 예수

백창욱 ㅣ 목사

조헌정, 『갈라진 땅에 선 예수』, 동연.

나는 이 책을 조헌정 목사님으로부터 2021년에 기증받았다. 그리고는 책장에 고이 모셔 놨다. 조 목사님은 익히 아는 사이인지라, 책 역시 인사용으로 생각해서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주 예수살기 영성수련에서 한 분이 고백하기를, 조 목사님 책을 읽고 자신의 의식이 깨였다는 말을 듣고서 불현듯 이 책이 예사 책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래서 돌아와서는 읽고 있던 책들을 잠시 보류하고 <갈라진 땅에 선 예수>를 붙잡고 완독했다. 정말이지 안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나의 덜떨어짐을 반성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책 앞쪽에 여러분들이 추천사를 썼는데 그 중 문대골 목사님 추천 글이 특이했다. 내용인즉 문 목사님은 이 책을 제1성서(구약), 제2성서(신약)에 이어 제3성서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퇴한 자신의 책장에는 20권짜리 함석헌 전집만 있었는데, 여기에 이 책을 더 꽂아 놓기로 했다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성서를 전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글이 좀 과장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는 그럴만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그럴 만 한지 차근차근 풀어보자.

우선 제목부터 남다르다. 갈라진 땅.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칭한다. 조 목사님은 여기서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사고의 잔재이므로 한강토로 바꿔 부른다. 한국 대중 중에, 또 권력자나 관료 중에 우리 땅이 갈라진 땅이라는 의식을 얼마나 할까. 물론 머리로는 모두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갈라진 땅, 갈라진 현실을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서 이 갈라짐을 기필코 넘어서자는 시대와 인생의 소명으로 삼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진실로 얼마나 될까. 애석하게도 별로 없다. 모두 현실 생활에 파묻혀 살아가기에 바쁠 뿐이다.

그런데 조 목사님은 책 전면에서 이 갈라진 땅을 통탄히 여긴다. 그리고 이 갈라진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의식한다. 그래서 갈라진 땅을 예수와 연결 지어서 그 사이에 자신을 놓고 인생의 갈 길로 설정했다. 나도 목사인지라 수많은 목사를 만나왔지만 이렇게 갈라진 분단의 현실을 가슴으로 느끼고 기필코 극복하여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자고 결의하고 거기에 몸 바치는 목사는 그리 많지 않다. 좀 냉정하게 말하면 목회적 필요에 따라서 액세서리로 말하는 사람은 제법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애를 걸고 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데 한번 진지하게 말해보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오랜 세월 신학 공부를 하고 무수히 많은 신학책을 읽고 교회라는 레테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유명한 외국 신학자들의 신학과 말을 입에 떠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서 내가 좀 안다고 지식연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교인들이 이 처절한 분단 현실에 대해서 먼 산 보게 해도 되는가? 이 갈라진 땅에서 분단을 극복하고 미제로부터 독립하여 찢어진 형제들이 하나 되게 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신앙과 신학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같은 목사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 목사님이 같은 목사로서 또 같은 교회 공간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를 교회 안이 아닌 세상 안에서 구현하자고 시종일관 역설하는 그 자체가 참으로 귀하고 남다르다.

나는 조 목사님을 익히 안다고 했지만, 실상 책에서 그동안 몰랐던 많은 부분을 새로 알았다. 정말이지 사람은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안다고 하면 안 된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 특히 우리의 분단 현실에 대해 이를 악물고 공부해야 한다. 분단 현실도 대충 지나가면 극복되지 않은 채 대충 지나갈 것이고, 미제새끼들 역시 계속 대충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우선 한국전쟁이 왜 발발했는지 그 전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대충밖에 알지 못한다. 조 목사님 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의 산업구조는 전쟁무기 대량생산구조로 확대되면서 뒤로 물러설 길을 잃게 된다. 사실 한국전쟁이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전쟁산업구조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수많은 무기생산 공장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을 수는 없다. 포탄은 창고에 차고 넘친다. 포탄에도 유효날짜가 있다. 소비시장이 필요했고 여기에 조선이 후보지로 선정된다. 미국 정부는 북조선이 침략 준비를 거의 마쳐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철수시킬뿐더러 1급 군사비밀을 세계에 천명한다. 1950년 1월 12일 당시 국무장관 애치슨은 조선반도가 미국의 군사방어선 밖에 있다고 말하며 전쟁이 일어나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를 믿은 북조선은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어 전면전을 개시한다. 미국은 UN결의를 통해 전쟁 개시 3일 만에 참전한다. 이후 중국의 개입으로 1년이 지나간 즈음 전선은 원래의 38선에서 정체가 된다. 그러나 휴전조약은 북조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2년을 더 지루하게 끌게 된다. 이 기간 미국은 무수한 폭탄을 북조선 전역에 떨어뜨린다. 휴전 직후 한 미군 장성은 이제 북조선은 구석기시대로 돌아갔다는 말을 한다.”

북조선의 남침만 세뇌된 한국 대중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더 깊숙한 진실을 알게 될 때, 갈라진 땅의 모순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가?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이 말해야 한다. 조 목사님은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알리는 말씀, 즉 ‘요한이 잡힌 후’(마가 1:15)라는 이 구절이 그렇게 분명한 뜻이 있다는 걸 몰랐다. 조 목사님 주해다. “곧 마가는 예수를 부당한 국가 권력을 비판했던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의 정체성이 이렇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명한 정체성을 얼마나 많이 물타기 해 왔나.

변화산상에서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담을 나눈다. 우리는 당연히 질문한다. 왜 모세와 엘리야인가? 라고. 신학교 때 교수도 이런 질문을 했었다. 나는 별 고민없이 각각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장 확실한 이유를 알았다.

조 목사님 주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기까지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또 엘리야가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걸어간 기간이 40일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기도한 날이 40일이다. 변화산상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이 모두 광야 40일 기도와 직접 연계된다.” 맞다. 가장 확실한 공통점이다.

나와 조 목사님 차이가 뭘까? 나는 어설프게 알고 있는데 조 목사님은 분명하게 안다. 그 차이는 말하는 사람의 의식을 전달하는 메시지 전달력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외에도 참 여러 가지 큰 줄기, 작은 줄기에서 몰랐던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조 목사님의 설교에서 확실한 게 보였다. 결코 남들이 하는 이야기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주장을 설득력있게 편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오래 고민하고 더 근접한 답을 찾기 위해 애쓴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사건이다. 긴 글을 압축해서 옮기면, “아브라함은 수메르 제국의 제3왕조인 우르 제국의 후예였다. 아버지 데라가 왕으로 있을 때 신흥 바빌론 제국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자, 그들은 하란 근처에서 제2의 우르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하란까지 쫓아온 바빌론 제국군대에 의해 데라는 하란에서 죽고 아브라함은 다시금 가나안 피난길에 오른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끝없이 반복하는 제국 침략 역사의 모순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포기의 상징이 바로 자신의 뒤를 잇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행위이다. 이는 고대 종교의 인간 희생제물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혈연가족 중심의 침략 제국주의 세계관에서 인류 가족 중심의 평화연대세계관으로 변화하는 아브라함의 깨달음을 설명하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본래 말하고자 하는 ‘복의 근원’의 핵심사상이다.”

어떤가. 기막히지 않은가. 나는 책 여백에 이렇게 썼다. “아브라함, 니가 진짜 평화세상을 원하는구나!”라고.

쓰다 보니 또 길어진다. 조 목사님은 말씀하실 때 목소리 톤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어느 대목에서는 실제 톤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다. 그만큼 한스럽고 절절하다는 뜻이다. 2015년 민족화해주일 설교이다.

“저는 묻습니다. 8.15를 우리는 광복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서로 미워하며 살고 있는데, 빛 광(光)에 돌아온 복(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대체 이 나라에 무슨 빛이 돌아온 것입니까? 자유와 해방과 독립의 빛이요? 무슨 자유? 자살하는 자유? 그래서 세계 자살율 1위 국가가 된 것인가요? 해방? 독립? 그래서 군작전 통제권을 미국군대에 주었습니까? 이제 두 달만 있으면 8.15 광복 70돌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무슨 빛을 되찾았으며 여러분은 지금 무슨 빛을 되찾았나요?” 조 목사님의 통절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서 조 목사님은 광복절을 분단절로 부른다.

끝으로 오늘 갈라진 땅을 사는 조 목사님의 자기고백적 심경을 보자.

2010년 5월 16일.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 기념 전국예수살기 연합 예배 설교이다.

“부족하지만, 제가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은 바로 민중들의 한과 아픔들이 계속 저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학혁명의 자유혼들, 백 년 전 오늘 일제 강제늑약에 죽음으로 맞선 애국지사들, 기미년에 독립 만세를 부르다 죽어간 수많은 학생과 농부들 그리고 장백산, 하얼빈에서 직접 총칼을 들었던 안중근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사, 일본군 강제위안부와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전쟁의 총알받이로 죽어간 무수한 우리의 조상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소의 농간으로 인한 제주 4.3항쟁을 비롯한 수많은 이념의 희생자들, 70년 전 3년간이나 지속된 강대국을 대신한 동족상쟁 그리고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 이름도 요상한 키리졸브 전쟁 연습을 하다 이유 없이 죽어간 천안함 장병들과 이를 돕다가 희생당한 어부들, 죽음 죽음 죽음! 우리 민족 수난의 아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강토의 분단을 통탄해하며 갈라진 땅을 화해와 통일로 극복하기를 절절히 바라는 심정이 조 목사님을 넘어서 이 땅의 모든 목사에게 퍼지기를 진심 고대한다. 그래서 한강토가 갈라진 땅이 아니라 합쳐진 땅이 되는데 기여하기를 진심 바란다.

이렇게 치열한 역사의식을 자신의 설교와 삶에 녹아들게 살아가는 사람과 같은 예수살기 멤버라니 나도 덩달아 뭐가 된 것 마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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