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와 ‘현장과 광장’이 공동주최한 2022 기획 강좌 “기후 ‘위기’가 아니라 재앙이다”에 발표한 내용을 축약해서 노동자신문 11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박한솔 ㅣ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선전홍보부장
탈성장이란
지난 몇 년 사이 이른바 ‘탈성장’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탈성장이란 그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기후위기 문제가 전면화된 지금, 탈성장론은 꽤 급진적인 이념으로 취급되곤 한다. 왜냐하면 이는 ‘성장 없는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장’이란 국내총생산(GDP)의 성장을 말하는 데, 이는 곧 자본주의적 성장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상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제 구조의 ‘끊임없는’ 팽창을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성장을 목표로 하는 반면, 지구의 자연은 물리적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작금의 기후 위기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탈성장론이다.
탈성장론은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인정한다. ‘탈성장’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프랑스의 정체 생태학자 앙드레 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구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 생산에 있어서 무성장, 나아가 탈성장이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있는가?” 사실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의식은 꽤나 중요하다. 이는 ‘자본주의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견해보다 진일보한 것이기도 하다. 작금의 기후위기는 자본의 탐욕과 성장지상주의가 원인임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입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탈성장론이 갖는 한계 또한 바로 여기서 나온다. 탈성장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성장’이라는 목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성장이란 물론 이윤 중심의 생산을 멈추자는 의미이다. 그런 데 이는 자본주의의 존재 근거를 침해한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이 자기 존재 근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무제한적인 생산과 탐욕을 이어가면서 지구와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
성장지상주의의 문제인가?
탈성장론에 의하면, 우리는 대상(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기)을 달리하면 대상의 성격(기후위기를 일으키는 무제한적 생산)마저 바꾸어 낼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불가능한 발
상이고, 몽상이다. 이처럼 “탈 유물론에 기초한 탈성장 논의는 성장주의의 물질적 토대라는 문제를 간과하여 성장주의의 원인을 찾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부차적인 요인”으로 보는데, “그 결과 달성
장 논의는 경제 중심주의, 성장 중독주의의 증상을 여러 측면에서 폭로하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김민정, 〈탈(脫)성장 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진보평론》 80호, 진보평론, 2021) 지금과 같은 ‘무한한 성장’에 대한 신뢰는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나타났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달과 과학기술 혁명의 결과, 이전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단시간 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신’이 주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자연(세계)은 인간에 의해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대상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성과들이 터져 나오면서 ‘무한한 성장’이라는 신화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에서 ‘성장지상주의’만 제거하겠다는 주장은 공상적으로 들린다. 초기의 ‘성장 신화’는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나타났고, 현재는 자본주의를 유지 존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는 이윤의 무제한적 축적, 즉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을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단순히 돌고 도는 구조가 아니다. 상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얻으면, 자본가들은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자본과의 경쟁도 동반된다. 이처럼 이윤에 대한 무한한 추구와 극심한 경쟁이라는 조건은 성장지상주의를 만들어 내는 토대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국가권력에 맞서지 않고 탈성장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탈성장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려는 제법 급진적인 시도로 보이지만, 그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탈성장을 위한 실천과제로 내놓은 것들(생산의 축소/복지제도 확대/화폐와 신용제도의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물질적 힘’, 즉 국가권력과의 투쟁이 반드시 필요하다. ‘복지제도의 확대’와 같이 자본주의 존립 근거를 훼손하지 않는 몇몇 개량적 요구의 경우, 강력하고 조직된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면 국가를 상대로 쟁취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탈성장’은 복지 확대 요구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자본가들에게 이윤에 대한 탐욕, ‘축적을 위한 축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윤에 혈안이 된 자본가들로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요구이다. 그럼에도 탈성장론자들에 따르면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정치는 국가 전복이나 자본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성장 물신주의에 따라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를 근저에서부터 거부”(김민정, 위의 논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다. 탈성장이 기후위기 문제를 ‘정치화’하는 시도의 일환이라면, 마땅히 정치권력의 획득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탈성장론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를 실현하는 폭력기구이다. ‘주권재민’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재벌 총수에게는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반면, 파업 노동자에게는 수백억 규모의 손배가압류를 명령한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비해 대폭 후퇴된 채로 제정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그마저도 정부의 시행령 개악 시도로 무력화할 위기에 처했다. 많은 희생자를 낸 이태원 참사에서도, 정부는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엄청난 양의 경찰력을 투입하지만, 참사 몇 시간 전부터 도움을 요청하던 이태원의 시민들을 위해서는 노동자 집회에 훨씬 못 미치는 극소수의 인원만 보냈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극소수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탈성장 측에서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문제는 회피하면서도, 국가의 공적 기능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가와 자본은 ‘구조적 상호의존 관계’”이며 “(…)국가의 자율성은 국내의 자본축적 요구를 어떻게 수행할지에 관한 제한적 자유‘만’을 허용”할 뿐이다.(김민정, 위의 논문)
결론
자본주의가 기후위기를 만들어 낸 주범임을, 자본주의와 환경은 서로 보폭을 맞출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한들, 이러한 탈성장론의 관점은 좋게 말해서 선의이지만, 당면한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공리공담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후위기는 자본주의 하에서 필연이며,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계급의 국가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