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56호 7.8-5 내가 가난을 말하는 것은…가장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파란 ㅣ 농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익의 증대는 곧 공익이고 ‘선’이라는 믿음은 이미 널리 공유되어온 관념이다. 자본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눈에 땅은 사람들의 치열하고 복잡한 일상이 얽힌 삶의 터가 아닌, 법을 최대한 이용한 투기의 대상일 뿐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선량한 사람이란 언제나 법제도 내에 속한 사람이다. 법의 틈새에 끼어서 고통받거나 권리 밖으로 내몰린 사람은 범법자일 따름이다. 이런 법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쓸어 담는 것이 자본과 권력이며 그 모든 행위가 적법한 것이 됐다. 다만 그것에 약간의 제동을 걸었던 것이 ‘도덕’을 바탕으로 한 양심이었다. 해서 부자들은 선량한 얼굴로 이런 말들을 한다.-

가난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야 – 위만 보지마- 너 보다 힘든 사람도 많아- 잘 사는 사람들이 법을 어긴 건 아니야,합법적으로 열심히 살았을 뿐이야…..

이렇게 가난은 개인의 능력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이 사회의 합법과 불법의 기준이 자본과 권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숱한 법. 제도 변화가 있었다. 몫 가진 자들이 손쉽게 바꾼 법에 의해 많은 사람이 쫓겨나고 죽고 저항했다. 개발지역 세입자에 대한 최소한의 피해보상과 주거생존권이 법제화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몫 없는 자들이 지독히도 죽고 사라지고 지워지고 나서야 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즉 부자들이 죽고 살아지는 시람들의 몫을 다 쓸어 담고 나서 최소한의 법이 마련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산참사였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 삶에 법이 너무 뒤늦게 따라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이 사회의 모든 상층부는 ‘법’을 ‘정의”라고 말하면서 법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기계에 깔려 죽고, 고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처참함에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다. 나는 이 불행과 슬픔 앞에서 고통을 느꼈다. 이 고통이 내 가난을 말하게 하고 처참한 현실에 강력한 증오와 혐오를 느끼게 했으며 이런 현실을 가장 뛰어난 언어적 재능을 가진 문학가들이 외면하는 것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그 까닭은 가난은 관념이 아닌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악한 지옥에 살고 있으면서 문학이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며 내 고통과 증오를 다독이게 만들고 페북에서 사람들에게 고전이나 문학 읽기의 즐거움이나 말하면서 듣기에 좋은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졌다. 내게 문학은 희망이자 환각제였기에…해서 내가 읽은 활자들이 화석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내 가난을 말하게 됐다.

가난의 현실의 문제다. 죽거나, 사라지거나, 지워지고 있는 자들의 몫을 쓸어 담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권리 목록을 쓴 것이 ‘ 법’ 이다. 이 잔혹한 착취의 세계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가난이라는 것을 주어진 몫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뺏앗긴 권리의 목록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가난의 문제만큼 객관적인 것은 없다. 즉 가난은 가장 정치적인 문제다.

이 가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 ‘좌파’다.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고 부당하게 대접받고 현상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으로 권리를 가지는 것 같지만 실은 구조적으로 착취 받는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불러야 한다. 좌우는 없어지고 위 아래는 확실한 신분사회가 오는 것이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에서 조차 살 수 없어 철탑으로 굴뚝으로 공장 옥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먼 정의를 부르짓는 사람들을 ‘좌파’로 부르면서 권력과 자원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는 이 사회가 문제라는 말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에 대한 증오가 생긴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신성한 것은 예술이나 그것이 만들어 낸 문화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슬픔과 함께 공감의 증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무엇 때문에 배부른 자들은 이 사회의 모든 좋은 것을 차지하고 ‘좋은 삶’을 말하는 것이 미덕이면서 배고픈 자들은 이렇게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사회가 된 것일까? 왜 당신들은 이런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를 묻는 것이 내가 페북에서 글을 쓰는 전부다. 지지난해 ‘자유주의’에 대한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 선생님이 말하는 맑스나 레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론은 결코 신성한 것이 없는 가설에 불과한 것이며 그 이론이 내가 경험한 가난의 고통과 증오를 함께 하고 있기에 맑스나 레닌이 내게는 ‘우리’가 될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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