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52호 3-5 직무급제는 청년의 미래를 더욱더 암울하게 만든다

한동백 ㅣ 노동전선 회원

얼마 전 청년인 동년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근속기간 때문에 돈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민간 부문으로까지 직무에 따른 임금 체계로의 개편을 정책적으로, 전국적 규모에서 펼치자는 논의가 있던데, 오히려 이것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직무에 따른 임금 체계’란 직무급제를 말한다. 국내에서 직무급제의 발생 기원을 따지자면 박정희 군사파쇼 정권 시기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1960년대 미국은 한국 국영기업체에 차관을 제공하면서 직무급제 도입을 ‘제안’하였다. 이후 1966년 금성사, 1967년 한국전력 등이 직무급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정승국·노광표·김혜진 (2014), 직무급과 한국의 노동, 한국노동연구원, p. 1.) 그러나 그 당시에도 연공급제는 한국 사회에서 주된 임금 체계로 되어있었다.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다시 ‘직무급제 열풍’이 일기는 하였지만, 역시 이 현상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다.(정승국·노광표·김혜진 (2014), p. 2.) 이후 오랫동안 정책적 차원에서 직무급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권이 대대적으로 추진하고자 한 ‘공공기관 임금 체계 개편’에서 직무급제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 ‘개편안’은 호봉 근거하여 급여를 산정하였던 기존의 임금 체계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직무의 차이에 따른 임금 지급 체계를 확립하는 것을 목적한다. 이 임금 체계는 일부 공공기관에서 실제로 적용되었는데, 특히 문재인 정권이 추진한 ‘비정규직 정규직화(무기계약직)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대폭 적용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연공급제에서의 임금보다 낮아진 임금을 받게 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게 되었으며, 심지어 한 청소노동자가 직무급제하에서 사용자의 평가 압박에 시달려 과로하다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주훈, 노동자신문, 준비1호 6면, 2022-11-12.)

본래 직무급제는 임금을 교섭의 영역이 아니라 사용자의 평가 영역에 가두고, 임금을 ‘절약’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부정하면서, “정해진 자금에서 직무와 성과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것일 뿐, 전체 임금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어떠한 기금에서 충당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직무급제는 ‘직무에 따른 임금의 차등화‘만이 아니라, ’호봉과 연차에 따른 임금 차이의 사실상 소멸’까지 염두에 둔 임금 체계이다. 즉, 직무마다 임금이 다르다고 가정했을 때, 임금이 각각의 직무에서 연차에 따라 상승하는 게 아니라, 다시 새롭게 생겨난 노동 형태(이것은 자본가가 자의적으로 설정할 것이다)에 따라 직무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 새롭게 만들어진 직무에 따라 다시 임금이 달라지는 체계이다. 물론 각자 직무 내에서도 근속기간에 따른 임금의 차이가 약소하게나마 나지만,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차이가 매우 낮고, 최고임금의 산정 기준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실상 전체적으로 임금이 하락하게 된다. 이는 이미 문재인 정권이 내놓은 ‘표준임금모델’과 그 이후의 안이 실시된 결과에서 나타난 현상이다.(김미영, 근로복지공단 ‘임금 깎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매일노동뉴스, 2018-09-12.)

그렇다면 직무급제하에서 이른바, ‘동일 직무 내 고임금’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가능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할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의 그 ‘가능함’이다. 가능해지려면 임금노예로서의 기능을 가일층 충실하게 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실업가”인 자본가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공정한’ 자본가들이 과연 적당히 하는 선에서 만족할지, 하지 않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직무급제하에서 ‘사용자 평가’는 현재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이 반(反)노동자적인 직무급제를 공공기관만이 아니라 민간 영역으로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직무급제하에서 임금이 하향하고, 심지어 직무마다 임금의 차별이 극심해지면, 노동대중의 계급적 단결도 무력화하기 쉽고, 심지어 전체적으로 임금이 감소하는 속에서 사측에 대항하는 노동자 측의 요구 임금 인상 수준도 상대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전체적으로 노동운동의 폭도 훨씬 더 좁아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다. 여기서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선에서의 최소치에 해당하는 값만을 ‘소비’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노동대중 일반은 자본가가 생각하는 것만큼, 생활 형편이 녹록지 않다. 결국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대립과 긴장이 전제된 것인데, 이 대립에서 노동자의 대대적인 후퇴는 곧 자본가가 바라는 최소치 임금으로의 수렴을 뜻한다. 노동대중의 물질적 삶의 절대적·상대적 빈곤화는 직무급제 도입을 계기로 훨씬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본가와 그 하수인들의 생존 본능은 천부적으로 강하다. 그만큼 자기의 본능으로부터 비롯되는 욕망에 합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매우 잘 구분한다는 것이다. 직무급제 도입에 대한 극우 글쟁이들의 갈채 소리를 들어보자:

“생산가능인구 감소 위험에 대처하려면 정년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과 같은 과도한 연공급제(호봉제) 아래에선 기업 부담만 늘릴 공산이 크다. 경직된 호봉제 문제를 풀어야 청년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맥을 제대로 짚었다고 볼 수 있다.”(연공서열 폐해 막는 직무급제 도입,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한국경제, 2022-07-17.)

조선일보는 한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실제로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책 ‘불평등의 세대’ 등에서 밝힌 바를 보면 연공서열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86세대로 불리는 지금의 50대에게 부와 권력을 쥐여준 대신, 20~30대 청년에게는 적은 일자리와 그마저도 불안정한 비정규직 고용 형태를 물려줬다. […] 직무급제는 직무, 즉 업무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체계다. 여기에 더해 윤석열 정부에서는 ‘세대상생형 임금체계’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직무와 성과를 반영한 임금체계를 만들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실현하고 소득 격차를 해소하자는 것이다.”(김효정, 尹 정부, 청년들 잡으려면 이 두 가지를 잡아라, 주간조선, 2022-08-26.)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세대 갈등을 기왕에 어떻게든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집중시키려는 가상한 노력까지 녹아 들어가 있는 이 글은 아주 악질적이다. 세대론을 이용한 주간조선의 글은 세대론이 어떻게 하여 노동자 전체를 공격하는 무기로 쓰이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그나저나, 이들 역시 기존 연공급제를 직무급제가 대체하게 되면 임금 총량―이들이 “기업 부담”이라 칭하는―이 감소함을 자연스럽게 전제하고 있다.

“기업 부담”을 줄여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금’를 증가시키고, 그렇게 하여 청년 취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자본의 이데올로그들은 다음과 같이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근속기간이 더 높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하는 작업의 효율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근속기간이 2년에서 4년이 되었다고 하여 작업의 효율이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작업 효율의 증가율은 근속기간의 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한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오히려 그 효율이 감소한다. 따라서 연공급제는 무위도식을 불러오는 임금 체계이다.”

이러한 주장은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즉, 임금은 노동에 대해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며, ‘공정한 사회’라면 마땅히 그렇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면 기업의 이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본가의 ‘성실함’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면, 노동자는 성실하지 않다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성실한데, 자본가의 ’성실함‘이 더 높고, 따라서 자본가의 성실함에 총노동자 수의 성실함을 뺀 값이 이윤이란 것인가? 그런데 그 성실함은 어떻게 계산하는가? 어떠한 방향이든, 임금을 ’노동의 대가‘라고 규정하면, 이윤의 근원을 전혀 설명할 수 없고, 오로지 마법과 같은 ’자본가의 성실성‘, ’자본가의 노력‘, ’자본가의 선견지명‘ 등 따위의 소리에 기댈 수밖에 없을 뿐이다. 이윤의 본질이란 앞서 언급한 “임금이 표하는 가치량의 초과분”이다. 이것이 잉여가치이고 자본가는 착취를 통해 이것을 전유하는 것이다. 즉 임금은 그 어떤 기금에서 충당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받은 임금이 표하는 가치량의 초과분을 자본가에게 제공하고, 그것이 유통 과정에서 가격으로 실현된 후에라야 임금은 지급된다.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를 반영하고,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력이란 자연물이나 생산물에 가치를 부가할 수 있게 해 주는 인간 능력의 총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능력이란, 그것이 육체적이든, 또는 정신적이든, 항상 신체의 전기력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노동력은 인간이 신체적으로 내재한 자연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임금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긴장, 대립, 상호 투쟁 속에서 운동한다. 왜냐하면, 생활 수준에 대한 노동자의 기준은 문화적 양상,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기준이 바뀌는 것만큼,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기마다 바뀌는 재생산 비용이 반영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직무급제는 이 투쟁의 성과를 통해 그나마 얻어낸 임금 상승분을 모조리 무산시키고, 전체 노동자를 최저임금, 또는 그 최저임금에서 거의 차이가 나는 않는 임금에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자. 나에게 직무급제의 ’합리성‘에 관해 말한 동년배는 청년이다. 앞서 언급한 직무급제는 청년의 미래 삶에 어떠한 악영향을 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직무급제는 청년의 절대적·상대적 빈곤화를 심화한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직무급제는 노동자의 임금 투쟁을 약화하는 계기로 된다. 그런데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실질임금의 상승 요인이기도 하며, 또는 실질임금의 감소에서 감소율을 일정 저지하는 상쇄 요인이다. 이를 종합하면, 직무급제의 도입은 전체적으로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직무급제의 가장 실재적인 효과로, 연공급제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청년이 어렵게 취업하여 얻은 직장에서 아무리 시간을 소비한다고 하여도, 임금은 사실상 증가하지 않게 된다. 과거 문재인 정권의 공공기관 직무급제 도입 당시, 직무 내에서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차이는 50% 이하였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청년이 기업에 들어가서 일한 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받는 임금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고작 최저임금의 150%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청년이 그나마 ’현실적 수단‘으로 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바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 속하는 직무군으로 발령이 나게 되는 것, 또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기업체로의 이직이다. 즉, 이제 청년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을 증가시키기 위해 더욱 어려운 방법, 더욱 경쟁이 치열한 방식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노동운동 전반에서 요구하는 기준치가 낮아진 속에서 이른바, 과학기술의 발달이 차츰 일어나게 되어 상대적 과잉인구가 증가하게 될 경우, 경쟁이 심화하여 명목상의 최저임금의 상승분마저 감소하게 된다. 물론 최저임금이 변화하기까지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의 상승분은 상대적 과잉인구의 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직무급제하에서 임금의 산정은 직무에 따르고, 그 기준이 되는 값은 최저임금이 될 수밖에 없기에, 실질임금은 하락하거나, 과거에서 현재로까지의 상승 속도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 직무급제를 도입한 미국에서 극렬하게 나타난 바 있다. 청년을 살려줄 것 같았던 직무급제가 청년을 더욱 낮은 층의 지옥으로 인도하는 꼴이 된 것이다.

우리 청년이 알아야 할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배계급이 말하는 ’공정‘이란 모두 타인을 수렁에 빠뜨려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고안해낸 헛소리라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무작정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착취 강화”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사회악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오랜 기간 주입한 ‘상식’의 범위 내에서 그럴싸하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피착취·피억압계급을 공격한다. 그리고 그 공격의 수단이 ‘공정’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공정’의 실질이다. 여기에 아무리 화려한 색을 칠하더라도, 본질은 그대로이다.

우리 청년은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반노동자적 정책의 본질을 간파하고, 그것들을 비판·배격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이전 글

[전선] 152호 3-4 <노동시장 이중구조 종식의 길2> 한석호의 “충심”을 응원하는 나팔수들

다음 글

[강좌] 레닌주의의기초 4 6장 (이병창 교수)

2 Comments

댓글을 입력하세요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