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46호 9-2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극복할 수 있다. – 세계노동운동사를 읽고 –

박한솔 l 노동전선 회원

자본주의의 ‘역사적 소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후의 생산물’로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전제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을 만드는가? 자본주의가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급속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했으며,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유례없이 강화시켰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체제였으며, 봉건적 생산양식과 구습에 대한 지양으로서 탄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신흥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이윤 창출을 방해하던 기존의 봉건제를 서서히 혹은 급진적으로 파괴해나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치적으로는 봉건왕정을 타도하였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성립하였다. 봉건귀족과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각종의 특권들이 노동자, 농민 등 근로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진보적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시민’을 위한 ‘자유’로 제도화되기 시작하였고, 인민들을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민’화 하였다. 또한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교회의 권력도 약화시켰는데, 특히 교권의 약화는 종교적 세계관에 가로막혀 정체되었던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덩달아 근대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도화된 생산력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더욱 원만히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성립은 그러한 관점에서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은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비인간적인 수탈과 착취, 억압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전제로 유지되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이다. 특히 농민을 토지로부터 폭력적으로 축출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시킨 역사는, 부르주아 계급이 인민에게 약속한 자유, 이성이 위선과 기만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폭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제적 농업을 위한 기반을 정복하고, 토지를 자본에 종속시켜 도시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공급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소수 자본가의 수중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게는 자유를 선사하였지만 졸지에 무산자로 전락한 노동자계급에게는 봉건시대보다 끔찍한 빈궁으로 엄습하고 말았다.

이처럼 지난 시대의 역사는 큰 틀에서 근로인민에 대한 착취의 역사로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은, 지배계급이 의도하지 않았던 ‘조직된 노동자계급’을 창출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역사 발전의 새로운 국면을 조성했다. 한쪽에서 막대한 부가 축적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참기 어려운 빈궁과 착취가 도사리는 극심한 불평등 속에서,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필연이었다. 사유재산의 발생 이후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었던 계급투쟁은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도 마침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W. Z. 포스터의 《세계노동운동사》(1986, 백산서당, 총2권)는 ‘생존’이라는 요구가 노동자계급에 의해 제기된 이래로, 그들이 자본과 정권의 숱한 탄압과 파시즘의 발흥, 기회주의자들에 의한 운동의 와해, 제국주의 전쟁 등 여러 악조건 조건 속에서 성장시켜 온 노동운동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세계노동운동사I》서문에서 “노동운동사는 노동조합의 진화를 단순한 기원에서 현재 고도의 발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기술될 수 없다”(5p)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노동운동 진화의 주요내용으로는 노동조합운동이 세계적인 성장과 확대, 그 구조·조직·전설·일상업무의 끊임없는 변화, 그것의 발전하고 성숙하는 이데올로기 등이 포함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노동조합운동은 18세기 후반의 지방적 동직조합(craft union)에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성장과 더불어 현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전개되는 등 양적 성장이 두드러지고, 아울러 임금 인상을 목표로 한 경제투쟁이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으로 고양되는 등 질적 성장도 일어났다. 저자는 특히 노동조합운동이 부르주아적 경향과 기타 혼란스러운 사상들을 거쳐 결국 그 지도이념으로서 맑스레닌주의를 수용한 것이 “지난한 투쟁 과정에서 이룩한 전진”(6p)이라고 평가했다.

책은 18세기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민주주의 국가 등지에서 전개된 노동운동을 세계자본주의의 발전과 결부지어 서술하고 있다. 책은 제1부에서 중상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발생한 자본주의를 설명하고(제1장), 뒤이어 수공업자와 농민 등 근로인민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임금노동자로 전화되었는지 그 계급적 기원(제2장)을 밝히며 노동조합운동의 기초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를 조명한다. 이후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로의 전화, 양차 세계대전 속에서 노동조합 운동, 사회주의 세계체제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간의 대결 등을 총 4부, 61장에 걸쳐 개괄한다.

해당 서적은 세계노동운동에 관한 몹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 서평에서는 《세계노동운동사》 I권과 II권을 바탕으로 지난 시기 노동운동에서 현재까지 쟁점화되고 있는 부분들을 추려, 과거의 경험이 현시기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통일전선과 노동조합의 통일을 위한 투쟁

첫째로 살펴볼 내용은 통일전선과 노동조합의 통일을 위한 투쟁(《세계노동운동사II》 제33장 85p)이다. 1919년부터 1926년 사이에 전개된 통일전선전술의 양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통일전선의 기원과 내용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 ‘통일전선’은 레닌의《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1920)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레닌은 이 저작을 통해 블랑키주의자를 비롯한 독일 좌익들의 ‘모 아니면 도’ 식의 비타협적 운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적들 사이의 이해 대립 (비록 일시적이나마)의 이용, 가능성 있는 동맹자들(비록 이들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여 유동적이고 제한된 동맹자들이지만)과의 협조나 타협을 미리 거부해버리는 것, 이것은 정말로 웃기는 일이 아닌가?” 레닌는 이에 더해 몇몇 ‘반동적’ 노동자들, 그리고 독점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소부르주아들을 적대시하며 배격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혁명성, 싸워 이길 능력 등의 전반적인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기 위하여 이러한 전술들을 적용할 알아야만”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키우고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19년부터 1926년 사이에 노동조합의 분열상은 제법 심각한 것이었다. 국제노동운동의 지도부는 4개의 각이한 인터내셔널로 나뉘어 있었던 반면,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사소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불문에 부치고 단일한 조직으로 결집해 있었다.

노동조합의 분열의 원인은 다양했다. 여성 노동자, 미숙련공에 대한 차별은 동업조합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분열상을 상징했다. 그러나 당시 정세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문제는 사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분열이었다. 두 진영의 분열은 정치적으로는 기회주의적 경향의 제2인터내셔널과, 혁명적 코민테른의 존재로 표현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마찬가지로 기회주의적인) 국제노동조합연맹과 프로핀테른(공산주의 노동조합)의 분열로 나타났다. 그밖에 무정부 생디칼리스트가 주도한 노동조합, 기독교계열 노조들이 난립해있었다. 심지어는 자본에 의해 조직된 노동조합이 1800년대 후반 미국에서 최초로 발생하더니 190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했다. 자본이 만든 어용노조는 1930년대 노동자들이 주도한 거대한 조직화 흐름 속에서 점차 격퇴되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앞선 노동조합의 분열로 인해 노동운동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노동조합의 통일과 통일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조직은 1921년 결성된 프로핀테른이었다. 프로핀테른은 노조의 행동과 조직의 통일을 위해 적극적이고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저자에 따르면 “노동조합을 분열시키는 것은 노동운동 내부의 부르주아적 영향의 기본적 표현”이었다. 노동조합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프로핀테른은 특히 “한 국가에 하나의 전국적 노동조합 중앙부를 수립하는 것을 강령의 중요항목으로 삼았다.”(89p)

그러나 프로핀테른은 ‘닥치고 통일’ 식의 추상적인 투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투쟁능력과 정책 강화를 전제한 통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계급협조를 내세우는 사민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다만 이 과정은 사민주의 진영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레닌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통일은 노동자계급이 기회주의적 지도와 계급협조 정책을 자신의 조직에서 철저히 일소하는 것을 포함”(89p)한다. 그러나 프로핀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의 결집을 위해, 자본의 경제적 공격과 파쇼적 반동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국제노동운동의 통일을 목표로 근로대중 사이에서 광범한 운동을 전개”(90p)하고자 했다. 프로핀테른은 ‘통일 속의 투쟁’이라는 레닌주의의 원칙을 지지했다. 이를 위해 프로핀테른은 직장, 지역, 나아가 전국적, 국제적 규모에서의 통일전선을 쟁취하는 투쟁을 이어갔다. 이는 직장위원회, 파업위원회의 확대를 통한 대규모 조직운동을 하는 한편, 노동조합 통일투쟁을 대중의 힘에 입각하여 비공식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반파시즘, 반전투쟁에 나선 노동조합

프로핀테른이 주도한 노동조합 통일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등지에서 파시즘 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발생한 ‘대공황’이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파시즘 반동독재 수립에 강한 충동을 주던 중,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전세계의 파쇼화 야망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시즘은 코민테른에 의해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며, 배외주의적이며, 또한 가장 제국주의적인 공공연한 폭력적 독재”(115p)로 규정됐다. 파시즘은 자본가계급이 스스로 처한 위기를 기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이나 방법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장한 인민의 자유, 노동자정당, 노동조합 등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면서 그들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표현이다. 이러한 파시즘 체제는 1922년 이탈리아, 1931년 일본, 1933년 독일에서 성립한 뒤로 전세계를 파쇼적으로 예속하려 하였다. 노동계급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와 침탈에 기초한 파시즘 체제로 인해, 국제노동운동은 ‘반파쇼’ 기치 아래 단결하여 파쇼를 격퇴해야만 했다. 이에 맑스레닌주의 진영은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을 통해 반전, 반파쇼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했다. 하지만 사민주의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를 전제한 개량에 매달렸고, 심지어는 이를 위해 동부, 중부유럽의 파쇼적 정부에 참가했다. 이러한 사민주의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추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독일의 파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는,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대공황은 독일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대가로 막대한 전쟁배상 책임을 지게 된 독일 자본가계급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다. 독일의 경제공황은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와 약탈을 강화하고, 그들의 삶을 파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위기적 정세가 조성될 조짐을 보이자, 독일 독점자본가들은 마침내 파시즘이라는 출구 전략을 택한 것이었다. 독일 파시즘은 “노동운동의 폭력적 억압, 반동적 독재의 수립, 철저한 제국주의전쟁 공세”(116p)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독일 파시즘은 독점자본가들에 의해 야기되었으나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다름 아닌 사민주의 진영이었다. 계급협조라는 분위기에 휩싸인 사민주의자들은 반동 독재 수립을 향해 질주하는 파시스트들을 격려하였다. 사민주의가 파시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1918년 독일 혁명이 사민주의자들의 배반으로 인해 실패했을 때부터, 파시즘의 맹아는 독일 사회에 뿌리내렸다. 사민주의자들이 혁명을 배반한 까닭은 그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독일 사민당은 ‘계급협조’와 ‘개량’의 미명에 휩싸여 저물어가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사민당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파시즘 체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1932년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승리한 이듬해, 바이마르 정권은 붕괴되었다. 기회주의적 노동조합은 히틀러의 집권을 환영했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사민주의자들은 독일 독점자본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당했다. 사만당은 해체되었고, 사민주의 노조 지도자가 체포되었으며, 노동조합 활동은 불법화되었고 노조의 재산은 파쇼 정권에 몰수되었다.

독일 내외의 반동적 흐름에 대처한 유일한 노동자들은 맑스레닌주의 진영에 속했다. 에른스트 텔만을 선두로 한 공산당과 프로핀테른은 사민당 및 그들의 기회주의적 노동조합의 계급협조 정책을 비판하면서 ‘반파쇼’ 강령을 토대로 하여 모든 노동자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의 구축을 거듭 호소하였다. 그러나 사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제안한 통일전선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주아 정치인 중 ‘비교적 덜 사악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미온적인 방침을 내놨다. 사민주의자들이 지지한 ‘덜 사악한’ 후보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붕괴 직전이었던 바이마르 정부는 빠른 속도로 당세를 확장하던 나치당에 대적할 수 없었다. 파시스트들의 강압으로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했고, 그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파쇼독재체제인 나치 독일로 대체됐다. “부르조아지와 협력하여 좌익을 몰아낸다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책이 파시스트 독일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낳고 말았다.”(119p)

사회주의하 노동조합의 지위와 역할

제27장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조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다룬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레닌과 공산당의 지도 하에 제국주의 전선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러시아를 타격함으로써 혁명을 성공시켰다. 러시아혁명의 성공 배경엔 반봉건적 성격이 짙었던 20세기 초반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사정과 함께, 계급투쟁의 전선에서 열성적으로 투쟁한 혁명적 노동조합들이 있었다. 1917년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같은 해 11월 사회주의 혁명이 수행되기까지 9개월 간의 기간은 가장 첨예한 계급투쟁의 시기 중 하나였다. 노동자들은 직접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건설하였고,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을 격퇴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위의 시기에 노동자들은 많은 파업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자는 무력을 통해 점점 공장을 점거하고 그들의 조업을 계속하려고 했다.”(26p) 특히 노동자계급의 승리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기업의 폐쇄, 생산의 중단은 단지 혁명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며, 반면에 이 폐쇄를 방지하는 것은 혁명과 그 승리의 보존을 의미했다”(26p)고 로조프스키는 지적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계급투쟁의 선봉에 섰던 노동조합은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이후 점차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즉 자본주의하 노동조합은 적대적인 자본가계급에 맞서 노동자들의 일상적 이익을 보호,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작된 이후 노동조합은 더 이상 파업 투쟁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정부에 대한 파업이 노동자들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금방 인식했다.”(27p) 두 차례의 혁명과 적백내전,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위협이 도사리던 ‘혁명 러시아’에서는 이전의 계급사회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 파업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곧 혁명의 파괴를 의미했다.

이에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성에 근거하던 노동조합의 투쟁전술은 점차 “관료제적 무관심으로부터 생겨난 사소한 불만 같은 것들을 해결하는 회의나 협상의 기술을 발전”(28p)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에서 파업을 결코 금지된 적이 없었다. 1920년에는 43회의 파업이 발생했다. 하지만 “파업은 사회주의체제에서는 불필요한 것”(28p)이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반영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였다. “1917년 7월 제3차 노동조합 국가회의에서 대표들은 “공장위원회는 조합의 지역기구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지었다.”(29p)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조합이 적대계급과의 투쟁에서 어떻게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할 것인가가 문제되었다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소비에트와 노조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을 수많은 국가기구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레닌은 이러한 “관료제적 사고방식”(30p)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관료제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관료제적 왜곡에 대항하는 투쟁은 국가기관을 통하거나 노동자들 자신의 직접적인 압력(이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그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관료제와의 싸움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을 통하는 두 가지 노선을 취한다.”(30p)

소련 탄생 이후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 점차 국가기관으로 통합되면서 형해화되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앞서 노동조합 활동가와 그 구성원들 상당수가 정부, 산업, 군, 기타 국가기관에 진출하여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사회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형태의 노동조합은 과거와 같은 위상을 가질 근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노동조합은 “사회보장법, 공장입법, 그리고 노동자 건강보호의 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을 관장하게 되었다.”(31p) 한편으로는 공장평의회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산업생산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무정부 생디칼리즘적 경향도 존재했는데, 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레닌에 따르면 “산업은 직접적으로는 국가의 경제기구가 이끄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당이 이끄는 것”(31p)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에 있어 중요하고도 주도적인 기능들을 확보하고 발전시켰다. 고스플랜(Gosplan)을 비롯한 국가경제기구에는 노동조합 대표가 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노조는 경제기구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28년 코민테른이 발표한 다음의 내용은 사회주의하 노동조합의 역할을 잘 요약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가 되어 생산의 사회주의적 경영작업 속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끌어들인다. 또한 국가기관의 모든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조직으로 변형되어 그 작업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며,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이익을 지속적으로 보장하고 국가기구 내에서 관료제에 대항해 투쟁한다.”(32p, 밑줄은 인용자)

변혁적 노동운동의 통일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세계노동운동사는 국제노동운동의 통일과 더불어 운동의 양적, 질적 비약을 도모해 온 역사다. 특히 프로핀테른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이 ‘파시즘’이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아나키스트부터 소부르주아에 이르는 광범한 대중들을 하나의 전선에 묶어 세우기 위해 투쟁했던 모습은 현재의 좌파들에게 있어서도 귀감이 되어준다. 이는 지난 문재인 정권 시기 노동운동계 내부에 기승을 부렸던 사회적 합의주의 경향에 대해 변혁적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준거이기도 하다. 변혁운동 진영은, 자본과 정권이 종용하는 사회적 합의에 덜컥 손을 뻗는 노동운동 내부의 기회주의 조류에 대항하여 그러한 사회적 합의주의가 노동운동의 변혁적 발전을 가로막고 계급협조를 부추기는 반동적 조치라는 점을 폭로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기회주의적 경향을 격퇴하며 그들을 변혁운동 진영으로 끌어오도록 하는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만 했던 것이다. 운동사회 내부의 오류에 대한 지적과 기세 좋은 비판은 결국 변혁운동의 전반적인 발전과 연관시켜 총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다.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기에 민주주의적 제세력이 연합한 반파쇼 인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마침내 파시스트와의 전쟁을 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로 이끌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회주의 진영은 제진보세력의 통일과 그 내부에서의 좌우익 기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투쟁을 형이상학적으로 분리시키지 않았다. 오직 ‘공통의 적에 맞선 모든 근로인민의 단결’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단결하면서 투쟁하고, 투쟁하면서 단결한다는 기풍을 세웠다. 이는 노동(변혁)운동의 전반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정파 간의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상대 정파에 대한 막연한 적대와 불신에 기초한 소모적인 경쟁에 매몰된 작금의 한국 노동운동계가 깊이 반성하고 과거의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쇄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정권 출범 이후 한반도와 세계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에서도 덩달아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고, 세계적 경제공황은 노동자들의 삶을 더한 궁핍으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혼란상은 극복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객관적인 정세는 분명 사회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적절한 전략전술을 수립할 주체 역량이 미진하다. 소위 진보정당은 4개로 갈라져 각자의 ‘집권플랜’을 되뇌일뿐, 거시적인 전망의 부재 속에서 변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 얼마 전 민주노총 대의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치의식 설문 조사에서, 대의원 10명 중 4명이 민주당에 표를 주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노동운동 내부의 기회주의적 조류가 곳곳에 잠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진보진영이 노동운동 지도자들 사이에서조차 소구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내외의 정세는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노동운동의 단결과 통일을 촉구하던 시기와 제법 닮아있다. 노동운동의 통일, 기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가 현재에도 제출되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투쟁 경험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1)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75p, 돌베개, 1992. (밑줄은 인용자).

2) 위의 책, 80p.

3) 러시아의 정치가·노동조합운동지도자. 러시아 혁명 이후 프로핀테른의 창립에 참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 극동관계 담당 외무인민위원 대리, 소련연방정보국 총재를 역임하였다 (네이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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