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후기〉분해된 대중에서 선진노동자계급으로…..

한동백 l 예비노동자

노동자계급의 참된 계급 투쟁은 오로지 착취 사회의 모순에 관한 대자적인 자각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오로지 이에 근거해야만 그 투쟁이 최종적인 승리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현실 정세 인식, 이론적 이해, 제 전략과 전술에 관한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치밀한 학습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노동전선에서 발행하는 ≪현장과 광장≫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학습에 필요한 모든 주제가 정리되어있습니다. 문학적 감성의 풍부화를 위한 문학 작품, 현실 정세에 관한 분석, 현실 정치에 관한 분석, 논의가 집중적으로 되는 분야에 대한 활동가의 분석문, 투쟁에서 제기될 수 있는 논쟁의 분석, 맑스주의 이론의 해석과 그 이론을 통한 현실 문제 분석, 지적 수양에 필요한 도서 소개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장과 광장≫ 4호의 표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입니다. 이는 고 백기완 선생님을 추모하는 의미에서의 표제이지만, 한편으로 남한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는 모든 이들이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혁 투쟁에서 물질기술적 조건이 되지 않는 현실의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언제나 변혁의 노선, 그 이론을 사색합니다. 우리는 사적인 이해관계를 변혁 활동에 투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실천이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것임을 다잡아야 하며, 자신에게 씌워질 무언가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는 변혁을 목표하는 사람이 언제나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대중은 오로지 개별적 존재로서 자기의 지속적인 지양을 통해 분해된 대중에서 대자적인 계급 의식을 갖는 선진 노동자계급으로 될 수 있습니다.

≪현장과 광장≫ 4호의 첫 주제는 〈여는 시〉입니다. 〈여는 시〉에는 베트남의 독립 영웅이자 혁명가인 호찌민의 시, 그리고 시인이신 송경동 선생님의 시, 마지막으로 학생 활동가인 김근성 선생님의 시가 수록되어있습니다. 문학에 대해 말하자면, 형식은 각 분류마다 일정하되, 내용은 천차만별입니다.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문학 작품은 계급 의식을 고취하며, 대자적 의식화를 매개합니다. 이는 변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현장과 광장≫ 4호에 실린 세 시는 바로 이 다리이며, 즉자적 존재로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보편적인 인간으로 될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특히,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 호찌민의 시에서 등장하는 “재앙이 닥칠수록 나는 한층 단련되고, 정신은 더욱 팽팽하게 되살아난다네.”라는 구절은 작금의 시련이 미래의 승리를 위한 단련을 추동한다는 것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접하는 독자들이, 현재의 시련 속에서 올라오는 낙심을, 투쟁과 전진을 위한 기폭제로 전환할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정세 분석〉이며, 고민택 선생님의 〈2021년 정치 정세 전망〉이 실려 있습니다. 이 글은 크게 정치 지형, 코로나 정국, 한반도 정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 지형에서 중점으로 다루는 사안은, 4월 7일 재보궐선거의 결과로부터 추려낼 수 있는, 현 정세에서 정치적 극우 세력의 회복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이 과정에서 진보 운동이 어떠한 시련을 겪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상세히 논합니다. 이 소주제에서 고민택 선생님은 적어도 내년 대선까지는, 진보 운동 세력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라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저 또한 자주 하던 생각입니다. 현재 진보 운동은 개량주의와 대중추수라는 양대 질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진보 운동은 대중추수를 하였지만 ‘진보의 대중화‘를 이끌어내지 못 하였고, 개량주의로 점철되었지만 ‘사회 개량’을 이끌어내지 못 하였습니다. 정책 이론의 기반은 소부르주아 담론에 불과하며, 정책 논의 수준은 단일쟁점에 갇혀 있습니다. 진보 운동 전반이 남한 사회구성에 관한 통일적 시각으로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목적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인 결과가 없을 것이란 점은 자명합니다. 정치 지형에 관한 고민택 선생님의 분석은, 코로나 정국에서의 분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정세에 관한 고민택 선생님의 분석은 문재인 정부의 통일 정책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를 매우 논리적으로 지적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다만, 그 한계에 있어서 문재인 정부의 계급적 성격을 개괄적으로 규명했으면 훨씬 뛰어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민택 선생님은 한반도 정세에 관해 진보 운동 내 부유하는 경향이 갖는 부정적인 성격에 관해 언급합니다. 단, 그 경향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은 약간 아쉬운 점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현장 소식〉입니다. 현장 소식을 통해서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알고 있던, 각 직종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착취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화생명의 보험설계사 선생님들이 겪는 고초는 한화생명 보험설계사 투쟁 현황 및 요구 사항을 통해 역으로 충분히 감지해낼 수 있었으며,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의 방식이 상당히 교활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모순의 극대화는 곧 그 모순을 극복할 동기의 제공을 재촉합니다. 이는 가히 필연에 가깝습니다. 글을 통해 보험설계사 선생님들의, 착취의 사슬을 끊기 위한 집단적인 투쟁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노동자의 단결력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김경엽 선생님이 작성한 〈직업계 고등학교, 어쩌다 이 지경에 내몰렸는가?〉는 직업계 고등학교 기능반의 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을 중점에 둔 글입니다. 이 글은 ≪현장과 광장≫ 4호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큰 자극을 준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폭력이 아닌, 이러한 식의 정신적 폭력을 수반하는 비인간적인 교육은 직업계만이 아니라 인문계 또한 만연하기 때문이며, 저 또한 그런 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대에 고등학교 교육과정 전반을 경험한 저와 같은 세대의 동지들은 이 글을 보고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충분히 상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 글은 직업계 고등학교의 부당한 면의 전부를 드러내는 글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같은 세대의 동지들은 충분히 그 총체적인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계 고등학교, 어쩌다 이 지경에 내몰렸는가?〉에서 다루는 주제는 외양의 측면에서 노동 문제라고 할 수 없으나, 현재 착취 사회의 교육 제도가 어떠한 비인간성을 강요하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입니다. 우리가 글의 이 지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직업계 고등학교의 학생이 그들 나름의 ‘스펙’을 쌓기 위해, 즉 착취 사회에서 상대적 과잉인구에 속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인간적 권리마저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권리의 박탈에 관한 내용은 마치 중세기적 봉건 사회의 계급제도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학생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이른바, ‘기능 대회’는 이 비극의 원인이면서 한편으로 착취 사회의 모순을 매개하는 통로입니다.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교육의 내용은 인간 노동활동의 본연 ― 자연을 대상으로 한 체화된 인지로서, 자연을 다루는 것이 완숙되어가는 과정 ― 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교육 방식은 실제 대회의 방식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의 기술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참된 의미에서 대회가 아니라, 그저 정해진 틀에 맞춰진, 입시를 위한 공부로서, 기술 능력과는 사실상 무관한 ‘경쟁을 위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경엽 선생님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 잔혹한 고문이 결과는, 이준서 학생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썩어빠진 교육에 있었다는 점에서, 착취적 국가 권력에 의한 타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김경엽 선생님은 그 과정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그 전모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단 이러한 문제가 직업계 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전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의 해법은 결코 경제 관계의 환원으로서 정립할 수 없을 겁니다. 글을 읽으면서, 이러한 썩은 교육의 폐기, 그리고 발전된 교육으로의 대체가 노동자계급을 근본적인 변혁으로 이끄는 것 이상으로 매우 힘든 과제란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김경엽 선생님의 글은 더 깊은 고민을 하게 해 주며, 교육 문제가 인간해방의 본질과 맞닿아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해 줍니다.

네 번째 주제는 〈쟁점〉으로, 신재길 선생님의 〈20대 대선에 대하여〉가 실렸습니다. 신재길 선생님은 〈20대 대선에 대하여〉에서 미국의 경제 상황과, 그에 따른 미국 내 정치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을 통해, 다가오는 남한의 20대 대선의 성격 및 다가올 시기에 변혁 운동이 취해야 할 전략과 전술에 대해 분석합니다. 즉 같은 관계의 성격을 가진 문제를 겪는 두 국가 중 이미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고 있는 한 국가의 사례를 통해 미래에 있을 남한의 정치 문제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석점은 대선이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원칙을 내세우면서 선거에 대해 무조건적인 회의적 태도를 갖고 선거에 불참하는 것을 넘어서, 신재길 선생님은 노동자계급이 전략, 전술적 차원에서 대선을 능동적으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합니다. 저는 대선에 대한 능동적인 관점이 선거 참여로만 나타나진 않는다고 보며, 다만, 그 전략, 전술상의 문제는 치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이 러시아 두마에 불참했던 것을 실수라고 했듯이, 선거(그것이 대선이든 총선이든)에 대해 마냥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안일한 것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신재길 선생님은 대선에 대해서, 국가 권력 내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계급 투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이 타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 내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대립’이 어떻게 계급 투쟁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다만, 신재길 선생님의 전체 논거에 따른다면, 그 맥락상 대선은 경제 관계 영역에서 첨예하게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이 투쟁의 영역에서 양자 계급의 유리(有利)와 불리(不利)를 조성한다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선은 계급 투쟁의 다면 중 하나의 관계를 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최근 경제의 위기는 상부 구조의 토대 견인 지위를 급격하게 강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선은 계급 투쟁과 관계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다음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선은 직접적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대립하는 권력 구조의 문제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간의 노동자 내부의 반목 대립을 극복하고 하나의 노동자계급으로 행동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대선에서 몇 경향을 이성적으로 인식한다면 신재길 선생님의 설명한 것처럼 양대 계급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 대립의 성격이 대선에 반영이 되어 있고, 따라서, 대선에서 노동자계급이 할 수 있는 능동적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옳다고 봅니다. 단, 대선은 그러한 대립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직접적이라기보단, 더 본질적인 층위에서 직접적 관계들이 나타나고, 그 직접적 관계의 일면이 대선이라는 영역에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립의 내용을 대선이 그대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선과 관계되는 주제와 노동자 내부의 반목과 대립을 극복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아직 확고한 결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물론 신재길 선생님은 그 구체적 방법을 설명하셨지만, 노동 운동 내 분열의 아주 본질적인 원인으로 하여, 제시한 방법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반목과 대립의 원인은 노동 운동 내 만연한 청산주의와 개량주의입니다. 신재길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이 문제는 단순, 대선에 대한 능동적인 관점으로 극복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재길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는 노동자계급을 해방을 위한다면, 누구나 깊게 해야 할 고민입니다. 다가올 대선 정국에서 노동자계급은, 이에 대해 단순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으며,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재길 선생님의 글에서 긍정적인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신재길 선생님의 여러 글은, 현재의 난점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구상하는 데 방점을 찍습니다. 몇몇 동지들은 새로운 시각이 갖는 오류에 집중하여, 새로운 시각을 내기를 두려워하지만, 정세 현실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수준에서 평행선만 그리게 될 것입니다. 정세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이 능동적인 실천(새로운 시각)을 통해, 그 투쟁 지위상 고지를 선점하려는 노력은 정태적인 관계로 정식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로지 방향성의 형식으로 정식화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변증법이 도식화된 논리학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겁니다.

신재길 선생님의, 노동자계급의 대선에 관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신식민지 사회에서 놓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을 봤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동 운동의 민주주의 변혁으로서 성격입니다. 노동 운동은 이후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다를지라도 민주주의 변혁에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비록 이것마저 부정하고, 타협주의로 나아가는 자들 또한 존재하거나, 사회주의 변혁 성격만 무조건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왜냐하면,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변혁(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빈민 등에 대한)이 완수되지 않은 측면이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이후, 아니 변증법적으로 이미 부르주아 일반은 발전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변혁은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노동자와 각계각층 피압박대중의 연합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노동 운동, 더 나아가 노동자 정치 세력의 민주주의 변혁에 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재길 선생님의 글은 현 정세에서 가치가 충분한 있는 글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사회에 관한 주장〉이며, 김파란 선생님의 〈이 사회는 왜“국가보안법”을 버리지 못하는가!〉가 실렸습니다.

이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은, 국가보안법의 후진성을 단순히 외양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으로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발전을 저해하는, 무지의 고착화를 이유로서 그 후진성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정립한 것에 대해 언제나 반성하는 존재이며, 반성성에 따라 자기 인식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동물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이를 막고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인륜성 탐구를 막는다는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그 외양으로 드러나는 폭력성보다 더 잔혹한 것입니다. 글을 읽고 국가보안법과 그 국가보안법의 고수라는 중세기적 몽매주의의 발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주제는 〈논쟁〉입니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논쟁을 소개하는 글로, 손호만 선생님의 〈계급〉이 실렸습니다.

손호만 선생님은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정의하는 계급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남한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갖는 역할과 지위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 변혁에서 노동자계급의 그 지위를 깨닫는다면 비정규직 노동 운동과 정규직 노동 운동을 통일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셨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노동자계급 내부의 기회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단 손호만 선생님이 드신 전교조 내 분열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노동자계급 내 분열이 심하게 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각 기업노조가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노동 문제에 대해 즉자적인 대응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개 노동자가 이성적 인식을 무조건 갖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러한 이성적 인식에 누구보다 빨리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기에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을 선도할 수 있는 집단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선진성’을 갖고 있음에도 노동자가 그저 즉자적인 존재로 된다면, 사회 발전을 위한 실천에 커다란 해를 남길 수 있음을 항상 사고해야 합니다. 노동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가져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선진 노동자계급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적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즉자적인 게급 의식만 가진 상태에서 맹동한다면, 그저 후진적인, 분해된 대중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됩니다.

현 정세에서 노동 운동이 보여주는 일련의 부정적 방향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직접적인 개별 투쟁은 당연하고, 그 직접적인 투쟁과 함께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동자가 과학적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학습하고, 그러한 과학성으로 무장하는 한, 정규직 노동자/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노조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 노동자가 대자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사회 모순을 총체성의 관점에서 보는 안목을 키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손호만 선생님의 글을 통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주제는 〈연구〉로 이현숙, 이병창, 홍승용, 채만수 선생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부분은 독자인 제가 ≪현장과 광장≫ 제4호 전 부분 중 가장 여러 번 읽었으며, 그만큼 얻은 것이 아주 많았던 부분입니다. 이 연구 주제는 노동자계급이 과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할 수 있는 단초를 직접적으로 제공하며, 그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성립 준거를 증명하고 그것을 재확인하는 성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 주제는 ≪현장과 광장≫ 제4호를 읽는 노동자대중이 아주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구의 첫 문서는 이현숙 선생님의 〈자본주의 기본모순·사회적 생산과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입니다. 이현숙 선생님은 이 글에서 사회적 생산의 사적 부르주아적 전유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는 “타인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소유”(당시 농촌 생산 일반)에 승리를 거두게 된 경제사적 배경을 엥엘스, 레닌의 문헌을 통해 조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실제 영국이 자본의 시초 축적을 농촌 지대와 관련하여 어떻게 감행하였는지, 인클로저 운동의 본질적인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그 적나라한 역사를 안다면 이현숙 선생님의 글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근대 국가가 어떻게 부르주아의 시초 축적을 보조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부르주아는 여전히 개별적 생산의 전유형태를 사회적 생산방식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이 둘은 일정한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그 모순이 중첩되고 곧 대립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을 구성하는 노동의 일반적 성격과 사적 소유로의 전유는 서로에 대해 근본적인 대립하기 때문이며 모순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립 관계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며, 모순의 내용은 주기적인 공황, 실업, 생산자의 궁핍화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소외된 인간으로서 자본가의 의중에 따라 그 모순을 가리려고 여러 방법이 동원됩니다. 하나는 주식회사로의 통합, 그 다음 단계로는 트러스트로의 통합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는 모순을 증폭할 뿐, 모순을 극복할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최종 수단으로 국가 소유로의 통합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성립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진 모순, 그 모순이 갖는 현실적인 양태의 최종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을 사회적 소유에 조응시키는 것 외에는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그저 국가가 총자본의 역할을 대신할 뿐이며, 가치의 사적 소유로의 전유(잉여가치 착취)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순은 극대화되고, 그 대립의 결과로 무산계급의 정부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혁명 정부의 탄생은 대자적인 존재로서 노동자계급만이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현숙 선생님의 글은 부르주아가 생산의 성과를 잉여가치로서 자기에게 전유하는, 즉 사회적 생산과 잉여가치의 사적 소유로의 전유 사이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어떻게든 가리기 위해 발악하는 수많은 과정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방편’은 결국 파산을 맞이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도 그 내재적인 법칙성에 따라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실제 역사를 통해서도 이 과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시 자본의 야만적인 축적의 역사는 자본주의 시초 축적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그 예입니다. 이들은 그 시초 축적 과정의 방식을 인도와 중국(아편전쟁 이후부터 민족해방전쟁의 최종 승리까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했지만, 증폭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로 독점자본으로의 통합을 추구하게 됩니다.(영국, 미국 등) 그러나,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상의 금태환제 폐지(정화준비법)와 불환지폐 증발, 즉 재정정책으로서 양적완화의 일반적 방법론이 최초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초기의 시초 축적 과정에서, 그 기능적 측면을 보면 상부 구조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국가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경제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조직이 되었다는 점 또한 유의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자유 경쟁에 기초한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의 압축적이고도, 간단한 이현숙 선생님의 설명은 노동자계급이 현재의 자본주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제의 두 번째 글은 이병창 명예교수님의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식화〉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데서 저는 이병창 선생님의 글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제가 스피노자, 셸링, 헤겔, 그리고 맑스의 주요 저서를 독해하면서, 제 해석이 올바르게 이어지는 해석인지,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항상 이병창 선생님의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식화〉의 주제는 다른 연구 주제와 확연히 다른 하나의 차이점을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맑스의 당대 사회 분석을 아주 학술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는 것이며, 그 주제의 방점 또한 아주 학술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맑스와 엥엘스, 그리고 레닌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실제 역사, 현실을 분석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병창 선생님의 글은, 맑스주의에 숙련되지 않은 분들이 읽는다면 상당히 난해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맑스의 텍스트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의 역사를 고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상당히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병창 선생님은 맑스의 생산 관계가 기본은 노동 분업 개념에 대한 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합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엥엘스가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어떻게 가죽 떼가 부족 또는 씨족의 공유 재산으로부터 개별적 가장의 소유로 이행했는지에 관해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 생계 획득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다. 생계 획득 수단은 남자가 생산하였고, 남자의 소유였다. 가축 떼는 생계를 위한 새로운 생계 획득 수단이었다. 처음에는 가축 떼를 길들이는 것이, 다음에는 그것을 보살피는 것이 남자의 일이었다.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으며 가축과 교환하여 얻은 상품과 노예들도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생업에 의해 얻은 일체의 잉여는 남자의 것이 되었다. […] 여자는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내의 분업은 남녀간의 재산 분배를 규정하였다.”

≪ME 저작 선집 VI≫, 박종철출판사, p. 179

생산 관계에 대해, 이병창 선생님은 노예제 사회에서까진 그것이 노동 분업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을 넘어서, 노동 분업의 성격으로 전적으로 표시될 수 있기에 양자 구분이 모호하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후의 중세 봉건 사회에서는 봉건 사회의 생산 관계가 노동 분업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게 됩니다. 이병창 선생님은 그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다카하시의 책에 의거하자면 중세 봉건제 생산관계는 3단계로 나누어져, 초기의 노동지대(4-8세기)에서 중기의 생산물지대(9-14세기), 마지막으로 15세기 이후 화폐지대로 분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노동지대(농노 시대)의 시대, 잉여는 생활비 외에는 모조리 수탈되었고, 그 결과 농촌은 가내수공업과 결합된 분할경작의 시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생산물 지대가 도입하면 일부 잉여가 농민에게 축적되면서 농촌의 생산물을 도시의 수공업품과 교환하는 근교 교역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길드와 도시의 발전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15세기 화폐지대를 보자. 이는 식민지에서 유입된 금은과 더불어 인플레가 일어나면서 농민에게 잉여가 막대하게 쌓이게 했으며, 도시에서는 매뉴팩처가 엄청난 이익을 쌓으면서 자본이 귀족과 노동자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중세3단계가 출현했다. 물론 독일 농민전쟁사의 서술에 따르면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런 생산관계의 변화에 성공했으나, 독일은 대외전쟁(항가리, 터키 등의 침략)을 통해 군사 국가화되면서 노동지대로 복귀했다.”

역사적 실례가 보여주듯이, 생산 관계는 노동 분업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한편으로 변화된 노동 분업은 나머지 토대의 두 요소(생산력과 생산 관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합니다. 이에 따라, 이병창 선생님은 상부 구조를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인 물질적 생산에서 기존의 정식인 생산력과 생산 관계라는 두 개 대립이라는 법칙에서, 생산력, 생산관계, 노동 분업이라는 세 개 대립의 법칙으로 정식할 것을 제안합니다.

맑스주의 경제학과 사적 유물론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노동 분업이 갖는 특수한 성격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맑스와 엥엘스는 그것이 생산력과 조우하면서, 생산 관계와 어떻게 관계하는지, 아주 확실한 분석을 가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새 시대의 맑스주의 학습자들은 이 관계를 분명히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창 선생님의 분석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며, ≪현장과 광장≫ 제4호 독자들이 이 부분을 꾸준히 읽고, 그와 관련된 문헌을 독자적으로 검증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길 권장하고 싶습니다.

단, 시도의 긍정성과는 별도로, 이병창 선생님의 ‘세 개 대립의 법칙‘은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볼 때, 토대로부터 그것 자체를 견인하는 상부 구조의 성립은, 물질적 대립이 갖는 본래 성질을 유지하는 일환으로서 변증법적 순환 과정의 일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부 구조는 물질적 관계로부터 의식적 관계로의 전화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전화된 의식 관계가 본래 토대를 견인함으로써, 한편으로, 토대의 본래 성질이 보존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질전화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대립 관계는 하나와, 그 반정립으로서 다른 하나의 상호 대립이라는 양극성(polaritat)이 전제됩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를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내적 대립의 항이 셋이라면, 이 양극성을 위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 분업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대립에 따라 파생된 외적인 대립물이라고 봐야 하며, 상부 구조 형성의 법칙성으로서 내적 대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옳지 않은 견해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제의 세 번째 글은 현대철학사상연구소 소장 홍승용 선생님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입니다.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변혁 운동에서 인간의 지위를 가장 기본적인 지점부터 분석하는 글입니다.

인간이 그저 환경의 산물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그 연쇄 안에서 하릴없이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그 속에서 생겨나는 부조리에 관해 언급하는 것부터 의미가 없을 것이며, 인간해방은 아예 성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열심히 퍼뜨리는 현대 철학의 일반적 경향은 소외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을 인간 본질의 모든 것이라고 간주하며, 세상의 모든 인간 실천을 파편화된 개인의 관점에서의 자기의 조야한 욕구의 실현 과정과 동일시합니다. 그렇게 하여, 존재하는 부조리를 타파할 수 있는 인간의 본연 성격을 거세합니다.

가끔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분들은 맑스주의의 본질이 위와 같은 소박한 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항이었다는 것을 잊습니다. 오로지 경제 관계에서의 투쟁이 맑스주의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경제 관계에서의 투쟁은 맑스와 엥엘스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사색을 빼놓고는 절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에 관한 이 중요한 지점을 모르는 사람은 맑스주의를 한낱 소박한 결정론 정도로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한편으로 자본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학자들은 맑스주의가 인간의 욕구를 무시하는 세계관이라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맑스는 최초로 인간 욕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을 통한 조야한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말한 학자입니다. 조야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즉자적인 행동은 필연적으로, 조야한 욕구를 채울 기회를 극소수에게만 부여하는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조야한 욕구마저 채우지 못하는, 황폐한 존재가 됩니다. 맑스주의는 인간 욕구를 조야한 욕구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 욕구에 대한 사색, 그 욕구를 실현할 방편에 대한 사색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욕구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관입니다.

홍승용 선생님의 글은 외부로부터의 수동적인 태도를 갖는, 소외된 인간의 사물화된 사고방식이 어떻게 총체적 관점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그 방편에 대해 상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변혁 실천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홍승용 선생님은 루카치가 인간 소외의 해소에 있어 화폐에 관한 물신숭배인 물상화의 폐지에만 천착했다는 점을 비판하며, 소외로부터의 벗어나는 경로를 기존 맑스의 원칙에서 찾습니다. 바로 그 방법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착취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본래 모습을 파괴하고,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전체 자연의 조망 속에서 갖고 있는 욕구를 억압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자연에 의해 규정된 성격에 따라, 자연과의 총체성의 관점을 유지해야지만 그 생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외란, 이 총체성의 관점이 사라진, 즉 자연과 있는 그대로 조응하는 인간의 성격이 파괴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소외의 가장 저열한 공간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는 어떻게 하여 자연에 관한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 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홍승용 선생님은, 바로 자연을 개조하는 과정인 생산 활동의 최전선에 있는 존재가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소외 극복의 실마리를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선진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노동자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즉 유적 존재로서, 계급 의식을 갖는 선진 노동자계급이 만들어나가야 할 운동의 방향과 미래를 다섯 가지로 정리합니다.

다섯 가지 정리 중에서는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억압에 맞서는 모든 해방 운동들과 느슨한 연대 수준을 넘어서는 그 운동들의 현실적 비중에 합당한 수준의 유기적 결합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라는 홍승용 선생님의 분석 및 제안이 크게 흥미로웠습니다. 홍승용 선생님의 제안은 현재 남한의 운동 과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몇몇 ‘맑스주의자‘ 꼬리표를 달고 있는 주관주의자들은 계급적 언사를 동원하며, 여성 운동, 빈민 운동, 농민 운동, 장애인 운동 등을 변혁 운동과 동떨어진, 별도의 공간에 속한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분들은 여성, 빈민, 농민, 장애인 운동이 맑스주의와 무관하며, 맑스주의는 오로지 계급적 이해에 기초한 노동자 운동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게 원칙적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비변증법적인, 형식논리학의 정태적인 수준에 갇힌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혁 운동에 나선 선진적인 계급이라면, 각각 떨어져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운동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관점을 노동자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홍승용 선생님의 글은 착취 사회에서 노동자대중이 어떻게 그 착취의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시작점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착취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계급이 노동해방의 길의 가장 처음 단계에서 고민해야 할 지점을 친절하게 제시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의 네 번째 글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채만수 선생님의 〈주택 문제에 관하여〉는 주택 문제 해결은 오로지 사회주의 변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맑스주의 이론에 기초해서 상세히 설명합니다.

착취 사회에서 ‘풍채 근엄한’ 기존 정치꾼들은 저마다 ‘주택 정책’을 통해 주택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리고 그 ‘주택 정책’은 종국에는 사유화에 기초한 주택 공급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감소하니까 공급만 증가시키면 문제는 해결된다.”라는 부르주아의 한계효용 비과학을 철석같이 믿는 즉자적인 대중으로부터 표를 얻기 위한 장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채만수 선생님은 주택 가격은 곧 토지를 겨냥한 투기 자본과 비례하며, 주택의 공급은 역설적으로 건축지로의 투기 자본의 집중, 즉 건축지 지대의 상승을 불러오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주택 가격은 더욱 증가할 것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극우 정치인들의 ‘주택 정책’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기만적인 것에 불과한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채만수 선생님은 기존 ‘진보’ 정치 세력이 추구하는 소부르주아적 해결 방식을 비판합니다. 세율의 인상, 임대료 증가율의 제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 그러한 방식 중 가장 강력한 방식을 채택한다면, 이미 그것은 부르주아 하수인들인 법관들에 의해 ‘사유재산권 침해‘라고 판단될 것이기에, ’진보적’ 정부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정부를 세우는 것, 즉 사회주의 변혁뿐이며, 이 안정된 기반 위에서 토지, 주택의 전면적인 국유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방식이 주택 문제를 해결한 예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이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혁명 정부가 주택 문제를 해결한 역사는 무수히 많습니다.

채만수 선생님의 현실 문제 해석에 관한 글은 원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유연합니다. 채만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맑스주의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현실 분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채만수 선생님의 글은 단순히 정보를 주입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채만수 선생님의 글은 독자 스스로가 학습 의욕을 갖게 만듭니다. 이러한 점에서 채만수 선생님의 글은 변혁을 추구하는 독자가 스스로를 정예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여덟 번째 주제는 〈교육〉으로, 진보교육연구소장 천보선 선생님의 〈마르크스 교육론과 ‘사회변혁 교육’ 문제에 대하여〉가 실렸습니다. 이 글에서 천보선 선생님은 기존 맑스주의 교육이 〈인간 노동과 교육의 결합〉의 측면에서만 해석되었고, ‘의식의 형성과 발달’, ‘인간발달의 역동성’, ‘역사적(집단적) 주체 형성’의 측면에선 조명이 부족했다고 비판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경향은 남한 내 맑스주의 교육에 관한 입장이 아니라, 과거 사회주의권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천보선 선생님이 지적한 한계는 그러한 사회주의권에서의 한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를 공산주의 의식의 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맑스주의 교육 이론에서 생산 활동과 교육의 결합이라는 것에 집중한 것은, 그러한 공산주의 의식의 산출의 한 경로였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정한 연령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생산적 노동을 학업 및 체육과 결합시키게 될 것인데, 이것은 생산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발달한 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라는 맑스의 언급을 통해서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천보선 선생님의 글은 제가 항상 생각한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제들을 짚어주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동시에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의 국가 권력 장악이 선행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실제 대안적인 교육 흐름이 현장에서 실시되고는 있지만 전면적인 효과를 거둔 예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조건들이 산출하는 여러 불가피한 요소가, 교육의 궁극적 목표 실현을 완강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단순히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교육의 장 외부와 내부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진보적인 교육 방식을 채택하더라도, 쉽게 물거품이 될 것은 뻔합니다.

〈마르크스 교육론과 ‘사회변혁 교육’ 문제에 대하여〉의 궁극적인 내용은, 교육의 일반적 지도 방식이 변증법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 시기, 그리고 현재까지 변혁 운동에서 드러나는, 교육에 대한 몇 가지 오류는 변증법적 사고를 기른다는, 맑스주의 교육의 기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궁극적인 목표의 실현 과정 중 극히 일부분에 천착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혁 운동에는 맑스주의 교육을 이해할 때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변증법적 사고를 기르고 공산주의적 인간을 형성한다는 궁극적 내용을 지닌다는 것을 상기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이해해야만 교육을 받는 자와, 교육하는 자 모두가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발전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겁니다.

아홉 번째 주제는 〈장애〉로, 김지심 선생님의 〈장애운동, 여성운동: 탈시설 운동과 돌봄 노동을 중심으로 〉이 실렸습니다.

김지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이론 연구 주제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엄연히 착취 사회인 남한 땅에서, 민주주의 변혁이라는 준거성 아래에 어떻게 장애인 인권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입니다. 확실히 장애인 인권은 사회주의 변혁에서만 독점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아니며, 이전 민주주의의 성격을 통해서도 충분히 진보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은 가사노동의 가치 인정에 관련된 투쟁과 김지심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점 사이의 매개에 관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돌봄 서비스의 획기적인 개선을 현재 남한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는 단순히 변혁의 천착하는 사고를 떠나서 현재 남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하여 부분적인 보완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으로 연결됩니다.

첫 번째 고민에 대해 말하자면, 김지심 선생님의 글에서 충분히 유의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탈시설 운동의 당위성이 대표적입니다. 저는 병역을 사회복무요원으로 하였으며, 아동요양센터와는 다르지만, 근무지는 노인요양센터였습니다. 노인요양센터는 장애 등급 판정을 받은 노인이 입소합니다. 내부 생활을 말해보자면, 흔히 말하는 ‘프라이버시’는 지켜지지 않습니다. 요양센터 생활자는 특정한 허락이 없이 밖에 나갈 수 없으며,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횟수도 일정 통제를 합니다. 요양보호사는 저임금 직종으로 대부분이 경력 단절로 인해 오랫동안 주부였던 여성이 종사합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100명도 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전원이 여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남성 생활자에 대한 샤워도 여성 요양보호사가 수행합니다. 1인 1실은 기대할 수 없으며, 최소로 잡아도 3인 1실입니다. 매우 심한 정신 문제를 지녀서 다른 노인을 공격할 수 있는 노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1인 1실이 되지만, 말 그대로 아주 특수한 경우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히 민주주의적 권리를 침해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실태에 대해서 요양보호사를 비난할 수 없는 동시에, 시설 자체에도 비난을 가할 수 없습니다. 요양보호사의 노동 강도는, 지켜본 결과 매우 높으며, 임금은 경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이 늦은 나이에 요양보호사로 취직하기에 나이에 비해서 임금은 매우 낮으며, 최저 임금 수준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사자의 ‘세심한 배려’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편, 시설에 주어지는 국가보조금은 매우 적습니다. 보통 상대적으로 비영리적 성격을 갖고 있는 요양센터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 많은 노인을 수용하려고 합니다. 제가 근무하던 곳은 남아 있는 방에 최대한 입소시켰다는 것이 아주 명확히 보였을 정도였으며, 대기자는 200명대였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민주주의 발전의 몇 결핍적인 요소로 인해 생겨났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욱 주된 요소는 사실 민주주의 변혁을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착취 사회의 ‘복지 시설’도 개별 자본으로서 기능하며, 개별 자본의 총체인 국가는 그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복지를 일종의 영리적인 사업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비록 ‘비영리’라고 표현해도 본질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것은 효율성이, 그 시설에 주어지는 보조금만큼에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당연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더 나아가, 착취적인 토대의 성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시설 외적인 성격으로서, 대규모 인력으로 세심히 관리될 수 있는 장애인 돌봄은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동자대중의 의식이 성장하면, 자본은 노동력 재생산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이윤을 상당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이 과정으로부터 착취 사회 내에서 장애인 인권의 부분적인 개선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고민은 가사노동의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가치가 생겨나려면 화폐교환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여성의 가사노동은 화폐교환성이 없으니 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사노동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김지심 선생님의 분석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상당 가사노동의 무급성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은 그것 자체로 이미 유용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사노동에 그에 합당한 대가가 지불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가사노동의 가치(유용성의 차원에 상응하게)를 인정하자는 요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몇 주관주의자는 이러한 요구가 비(非)사회주의적이며, 변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력 재생산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은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임이 틀림없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돌봄이 진정, 장애인이 자주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로 기능하고, 종사자 또한 그런 관계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구축되려면 가사노동의 유용성이 전면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주의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이 무급으로서, 평가절하되는 것만큼, 돌봄 서비스가 개별 자본의 한 사업체로서, 그 돌봄 자체가 하나의 소외 노동으로 된다면, 돌봄 서비스는 최소한의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함에서 문제가 없을 정도의 ’ 기능만 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고민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고민의 종합으로서, 현재 남한 사회에서 돌봄 체계의 개선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서술을 통해 사실 그 개선 가능성은 사회주의 변혁의 성격이 없이는 명백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다만, 노동자대중의 의식 성장을 통해, 장애인 인권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정 힘을 지니게 된다면, 자본은 노동력 재생산의 관점에서, 어쩔 수 없이 부분적인 개선을 도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김지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민주주의 권리의 완전한 보장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한 맑스의 말도 역시 이러한 고민의 결과일 것입니다. 김지심 선생님의 글은 장애인과 여성 인권의 항구적 발전이 제반 민주 변혁과 사회주의 변혁의 통일적인 이해에 직접적으로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로, 아주 유익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열 번째 주제는 〈책 소개〉입니다. 나열된 책은 ≪경제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 ≪공산당 선언≫, ≪쿠바식 민주주의≫입니다. ≪공산당 선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읽어 본 적이 없는 책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끈 책은 천연옥 선생님이 추천한 ≪쿠바식 민주주의≫이었습니다. 이 책 소개문을 보면, 해당 서적은 쿠바 정치 제도를 아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쿠바의 발전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 소개문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한반도 이남의 민주주의 발전 지점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쿠바는 선거인 등록의 나이 제한이 남한에 비해 훨씬 진보적인 수준으로, 16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 공직자의 자잘한 특권 폐지, 의원 소환제 등의 내용은 쿠바 민주주의 발전 수준을 체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책 소개의 모든 내용을 다 소화해냈을 때, 쿠바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은 서유럽에 대한 환상에 젖어있는 남한의 ‘진보’가 동경하는 ‘서유럽의 민주주의 제도’보다 훨씬 발전한 것이란 걸 알게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활동가들은 이 저서를 읽고 민주주의 변혁 차원에서, 현재 남한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어떠한 요구를 가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천연옥 선생님의 글은 쿠바 사회주의 제도하 쿠바 여성의 지위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제도의 성과로서 민주주의 발전과 그에 따른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주제는 〈단체 소개〉로 대학 무상화–대학 평준화 추진본부 정책위원장 김학한 선생님의 대학 무상화–대학 평준화 추진본부 소개가 실렸습니다.

이 단체의 취지에 백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 이유는 대학 교육의 무상과 평준화가 꼭 사회주의 변혁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동시에 노동자대중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요구의 사회상은 이미 발전된 서구 국가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스스로가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대학 평준화는 필수적입니다.

물론 착취 사회에서 대학 평준화가 어떤, 새로운 평가,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만들어낼 것이란 것은 환상에 불과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평가의 동기 자체가 임금 노예제의 유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인간적 평가는 오로지 자본의 잔재가 사라진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학의 서열화는 착취 사회에서 학생의 부담을 심히 가중하며, 교육비 폭증의 두 가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됩니다. 더 나아가서 평준화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내실이 있는 평가 기준을 각 기업이 도입하는 것을 강제할 수 있기에, 대학이 평준화된다면 실제 자본은 노동력 재생산의 관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학의 평준화는 사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실시 방법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것은 운동의 일정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로써 ≪헌장과 광장≫ 4호의 서평을 끝마치려고 합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헌장과 광장≫ 4호를 읽으면서 제가 몰랐던 현실 문제를 더 알게 됐으며, 이론적으로 고민해야 할 거리에 대해 일정 방향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큰 만족을 느낍니다. 분명, 이 글은 노동자계급의 실천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저는 서평을 맡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서평이 ≪헌장과 광장≫ 4호를 읽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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