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그곳에 사람이 있었네….

신선식 | 벌교여중 교사

선식이, 세상 구경에 나서다.

2011년 겨울,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이하 전태일 노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전태일노동대학에서는 자본주의 모순과 사회주의 전망에 관하여 공부하였는데, 졸업하면서 자본주의 모순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사회주의 전망이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조그만 섬의 학교에서 대중매체만으로는 세상의 모습을 알 수가 없었다.

2012년 1월, 배낭을 메고 ‘선식이의 세상구경’에 나섰다. 소규모 투쟁현장, 비정규직 투쟁현장, 장기투쟁현장 중 천막농성 중인 곳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가장 힘든 곳에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청소·시설관리노동자들의 투쟁현장

2012년 1월, 첫 번째 방문한 투쟁현장은 광주서구청 청소.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이었다. 서구청 소속이었던 노동자들은 민간위탁되면서 노조 결성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정년을 앞둔 노동자들이 자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투쟁에 나섰다.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하얀 상복에는 ‘해고는 살인이다’, ‘서구청이 책임져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전교조 교사인 나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유럽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노동조합에 대해 가르친다고 들었다. 뒤늦게야 노동조합에 대해 알았고, 늙어서 해 보려니 힘들다. 선생님이니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알 수 있게 가르쳐주면 좋겠다.”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웠던 도로변 천막은 대형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귀가 윙윙거렸다. 다행히 1주일의 방문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승리했다는 반가운 문자를 받았다.

대전에는 롯데백화점 시설관리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상황이 열악하여 천막조차 치지 못하고 인도에 의자를 놓고 투쟁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붙은 현수막에 ‘롯데 백화점’은 지워져 있었다. 법원의 가처분 신청으로 ‘롯데 백화점’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계룡대의 위탁을 받은 민간업체는 시설관리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사 측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서울 법원에 출두했다고 하였다. 법은 약자의 편이라고 하였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자본가들과 권력을 쥔 자들은 법을 통하여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그 이후 많은 투쟁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부평의 지엠대우 한국공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다. 한국 3대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였던 대우는 지엠에 흡수되었다. 새로이 부임한 미국인 사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였다. 정문 위에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정문 밑에서는 얇은 비닐을 덮고 노숙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지원받은 회사는 가장 약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리해고로 답하였다. 이런 경우는 쌍용자동차, 하이디스, 지엠대우 군산공장과 창원공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회사를 살린다는 이름으로 국민혈세를 지원하지만,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외국자본들은 기술 먹튀를 계속하였다. 정부가 살린 것은 노동자들의 일자리인가? 국내외 자본들의 이익인가?

혜화동 인도 위에서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었다. 학습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회사가 조합원들을 탄압하였다. 사회적으로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리되어 법적으로 온전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지금도 화물차 운전기사, 보험모집원, 택배기사, 대리운전 기사, 골프 캐디 등등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특수고용직 노동자이다). 특수고용직은 아니지만, 노조에 대한 탄압은 콜트콜텍, 유성기업, 세종호텔, 아사히, 동양시멘트, KEC 등을 비롯한 수많은 현장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홍익대 청소・시설관리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을 방문했다. 점거 농성 중인 홍익대 건물 안에 붙어있는 ‘우리는 투명인간이었다.’라는 글귀와 그림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청소・시설관리 노동자들을 투명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었다. 한 번도 그들의 노동의 가치와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홍익대 농성장 방문을 계기로 청소・시설관리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중앙대, 연세대, 울산과학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의 청소・시설관리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대학이 직고용했던 청소・시설관리를 민간위탁하면서 해고와 고용 승계 문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지성인의 산실이며 상아탑이라던 대학이 힘없는 청소・시설관리노동자들의 삶을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대학의 민낯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대학도 이윤추구에서는 사기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진중공업 85크레인 고공농성장을 방문하였다.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 김진숙의 모습이 까마득히 보였다.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공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희망버스가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달려갔다. 고공농성은 스타케미칼,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등등으로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고, 단식농성을 하고, 삼보일배하고, 오체투지를 하고……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노동자가 만들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들이건만 노동자들의 안식처는 없었다.

투쟁성금을 모금하다.

2012년 겨울, 투쟁현장을 방문하면서 투쟁성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소규모 장기투쟁사업장들의 여건은 열악하였다. 추운 겨울에 핫팩을 난로 삼아 혼자서 천막잠을 자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2013년 겨울부터는 순천지역의 아는 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70만 원을 모금하여 투쟁현장에 정성으로 전달하였다. 그 후 모금의 범위도 늘어나고, 모금액도 늘어났다. 전교조 참교육실천대회에서도 모금하였다. 2021년 1월의 모금에는 전국 243명의 개인과 13개 단체가 함께하여 1821만 원의 성금을 모아 16개 투쟁현장에 전달하였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투쟁의 현장에 단비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조그마한 힘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금에 함께 해주신 분들의 따뜻한 연대의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같이 하는 동지들이 생겨나다.

2015년부터는 여름방학에도 투쟁현장 방문을 시작하였다. 매년 여름 참여했던 입시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 대신 노동현장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4명의 교사가 거제, 부산, 구미, 삼척, 서울, 군산의 투쟁현장을 방문하였다. 구미에서 삼척을 가는 길은 멀기만 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투쟁현장이 적은 삼척의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려는 의지와 설렘으로 낯선 길을 달렸다. 그 대가로 활기 넘치는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다. 투쟁현장을 연대방문하면 우리가 힘을 전하기보다는 힘을 받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2015년 여름, 특히 힘을 받았던 투쟁현장 중 한 곳이 동양시멘트 농성현장이었다. 함께 했던 동지들이 즉흥적으로 율동을 준비하여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 함께하는 동지들이 꾸준히 늘었다. 지역도 순천과 대전에서, 전북, 서울, 경기로 확산되었다. 교사뿐 아니라 때로는 학생, 시민, 다른 노조원들도 함께하기도 하여 8~16명 정도가 함께 하게 되었다. 참여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투쟁성금 모금의 범위도 확산되고, 모금액도 늘었다. 때로는 빡빡한 일정과 내용으로 힘들었을 텐데도 참고 함께 해주셨던 동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방학을 이용한 교사들의 투쟁현장 방문을 대단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나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는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노동에 대해 깊이 가르치지 않는 교육의 결과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교육활동과 생활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업 준비에 좀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하게 되었다. 투쟁현장의 연대방문은 나에게는 수업 연구이기도 했다.

투쟁현장은 사회 수업의 중요한 기회

학교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 달라던 광주서구청 청소노동자의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하면 자본 중심의 교육과정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흥미 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방학이 끝나면 학생들의 방학 경험을 듣고, 나의 투쟁현장 연대방문의 경험을 나누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상황을 들려주고 싶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화 연결을 하여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학생들이 질문할 수 있게 하였다. 해고노동자들의 상황을 들은 학생들은 분노와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마음으로 학생들은 투쟁현장에 보내는 격려 메시지들을 롤링페이퍼로 만들었다. 방문했던 투쟁현장에서는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라며 벽에 붙여 놓았다.

사회 수업의 학습지에 투쟁현장의 상황을 사례로 제시하고 글쓰기를 하였다. 평가문제에 예문으로 제시하고 노동기본권에 대한 객관식 문제를 출제해 보았다. 서술형 문제의 예시문으로 제시하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활동도 의미가 있었다. 내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직 우리나라의 노동교육은 걸음마 단계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여러 곳에서 시작되고 실천되고 있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더 많은 교육현장에서 노동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어 광주서구청 청소노동자의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투쟁현장 방문을 통하여 남은 기억들

10년째 투쟁현장을 방문하면서 남은 아픈 기억들이 있다. 투쟁이 장기화하면서 투쟁하는 동지들이 점점 소수화되어 간다. 투쟁하는 당사자들도 힘들어지고 연대하는 분들도 줄어든다. ‘지역에서 연대는 잘 오시나요?’라는 속없는 물음에 ‘다들 바쁘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하며 말을 흐리던 노동자의 아픈 모습이 떠오른다. ‘상급단체에 성명서 한 장만 내 달라고 갔더니, 인제 그만 하세요라고 하더라’라고 하시던 청소노동자의 힘없는 말씀이 생각난다.

해당 사업장에는 큰 규모의 정규직노조가 있던 비정규직노조의 천막농성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너무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면서 사 측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정규직 노조에 연대를 요청해 보라는 속없는 말에 ‘우리 하는 대로 지켜봐 주기만 해도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러 곳의 비정규직 투쟁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장기간의 투쟁으로 어렵게 성과를 얻어낸 사업장들이 있다. 그러나 사 측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또 다른 투쟁을 시작해야 하는 곳도 많았다. 이미 얻었던 성과들이 몇 년 만에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다시 기나긴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 측만은 아니었다. 경찰과 검찰뿐 아니라 고용노동부조차도 공정하지 않았다. 사 측에서 동원한 용역들의 폭력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경찰들이 몸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충돌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연행하였다.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자본의 앞잡이’라고 불려 마땅하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고소에 대해서는 번개처럼 기소를 하던 검찰들이 수 천 쪽의 증거를 제출해도 사측에 대한 기소를 몇 년째 미루고 있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도 이행하지 않는 재벌 총수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지 않고 있다. 예부터 얘기하던 ‘유전무죄, 무죄유죄’가 사실이 아닌가? 민주주의, 법치국가라는 대한민국을 학생들에게는 무엇이라 가르쳐야 하는가?

그러나 희망적인 기억들도 많았다. 8년째 투쟁하고 있는 평균 연령 67세의 청소노동자들이 있다. 전기 공급조차 되지 않지만 ‘우리가 옳으니까 언젠가는 승리하지 않겠나?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원칙을 지키면서 싸울 것이다.’라며 오늘도 천막을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투쟁현장의 어느 곳에서든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분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다. 자신의 투쟁도 힘들지만 다른 투쟁현장에 열심히 연대를 다니고 있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자’며 공동투쟁을 하기도 한다. 힘들고 지친 노동자들에게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힘을 보태는 분들이 있다. 누구 한 명 바쁜 일상이 없는 사람이 있으랴. 그러나 더 절박한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경비와 성금을 내면서 연대하는 분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소소한 이야기를 마치며

노동과 자본의 큰 싸움을 통해서 판을 바꾸어 보자는 꿈은 불가능한 것일까? 단위사업장별, 직종별, 지역별 투쟁을 넘어서는 큰 싸움은 불가능한 것일까? 투쟁에 대한 수많은 방법과 이견을 넘어, 정파 간의 다름을 넘어 하나되는 투쟁을 조직할 수 없을까? 그 바탕에서 계급적 투표와 노동자 정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노동착취와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변혁의 큰 꿈도 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집회에 가는 버스 속에서 노래를 시키면 주로 했던 노래, 연대투쟁가의 노랫말을 되새기며 소소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연대의 깃발을 올려라 총진군이다

머리띠 묶어주며 어깨걸고 일어서자

우리는 패배를 모른다 후회도 모른다

강철같은 연대투쟁 전진뿐이다

*그래 너희에게 외세와 자본이 있고

폭력집단 경찰과 군대있지만

우리에겐 신념과 의리로 뭉친

죽음도 함께하는 동지가 있다

**보아라(투쟁) 연대의 깃발

들어라(투쟁) 단결의 함성

너희의 마지막 발악 투쟁으로 화답하리라

노동전선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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