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138호 1-7 내용적 풍부함이 돋보였던 현장과 광장 5호

박한솔 ㅣ 대경 노동전선 회원

‘읽기’ 자체가 고역일 때가 있다. 나름 또래에 견줘 활자를 즐긴다고 자부하는데도 그렇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두 배쯤 빨라지지만 상태가 영 별로인 날에는 문장들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다가 몇 장 읽지도 못하고 그만 책을 덮어버리곤 한다. 문제는 내 컨디션이 호조를 보일 때가 잘 없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만성적 침체에 시달리는 경우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제목이 도발적이라서, 편집디자인이 다채로워서, 주제가 흥미로워서,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거침없이 지갑을 여는 게 버릇이다. 책을 사 모으는 것에 열성인 데 비하여 독파한 책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다분히 낭비적이고 충동적인 소비다.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의 거대한 집적(集積)으로 표현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필자의 독서 습관은 ‘읽지 않은 책’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서가(讀書家)가 되기에 게으름이 심하고 이해력도 부족하지만, 그러면서도 책 자체는 싫어하지 않는 인간을 적독가(積讀家)라고 칭한다고 들었다.

책장 앞에 선 게으른 적독가는 기나긴 숨 고르기 끝에 별안간 『현장과 광장』(이하 『현장』) 5호를 꺼내 들었다. 사실 외부 개입 없이 필자가 주체적으로 고른 것은 아니고, 독자 후기 작성을 권유받은 덕분이다. 300쪽 남짓의 『현장』 5호를 끝까지 읽는 일은 솔직히 간단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하였듯 컨디션이 좋은 날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에 가까운 집중력의 난조 속에서 한줄 한줄 읽어내려간 『현장』 5호는 그간 책장에 꽂아두고 방치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내용적 풍부함이 돋보였다.

첫째로 눈에 띈 것은 양동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민주노총 10.20 총파업투쟁의 의미와 그 정치적 전화」라는 문건이었다. 해당 글은 지난해 연말에 추진된 총파업투쟁의 성격을 ‘불평등체제 타파’로 규정하고, 문재인정권의 반노동 기조와 수구정치세력의 부활, 코로나19를 핑계로 한 노동탄압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양동규 부위원장이 작년 연말의 총파업을 불평등체제 타파의 서막으로 규정한 까닭은, 그것이 올해 대선을 앞두고 노동자계급이 형성하는 “정치적 투쟁 전선”이기 때문이다. 즉 지난해 총파업은 ‘생존권 사수’와 같은 경제주의적 요구로부터 벗어나, 자본주의가 배태한 각종의 불평등, 기후위기, 생태계 파괴에 노동자들이 앞장서 직접 저항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양동규 부위원장은 이러한 의지를 구체화하기 위해 110만 조합원이 참여하는 민중경선과 진보진영의 연합정치로 대선판을 흔들자고 주문하는데, 아쉽게도 이는 진보적 노동자들의 무수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열망은 민중경선이 무산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거대 보수양당이 주도하는 정치는 시효를 다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자본주의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투쟁은 앞으로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어진 글은 대우조선 매각 철회 투쟁을 다룬 강태완 대우조선지회 편집4부장의 글이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투쟁 현황을 중심으로 서술한 보고서에 가까운 글이었지만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꽤 깊은 울림을 주었다. 2020년 3월 17일 공정위 천막농성을 시작으로 천리길 도보행진, 청와대 1인 시위, 산업은행 타격 투쟁, 전 조합원이 참여한 창원 집회, 신태호 수석부지회장의 단식 투쟁에 이르는 299일이 이 짤막한 글에 오롯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보투쟁 중에 많은 도민들이 도보 투쟁단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었다는 대목에서 노동자와 대중 사이의 정서적 유대감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가장 잘 헤아리는 것이 마찬가지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조차 개별화, 파편화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실감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유독 이런 경험담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한편 이번호 ‘쟁점’ 기사로 실린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소장의 「대선과 노동자정치」는 대선 투쟁의 방향과 노동자정치의 독자성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과 실천이 필요한지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홍 소장은 “노동자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본의 무한증식 본성을 근본적으로 제어하고, 이제까지 인류가 역사적으로 이룩해낸 생산력을 자본증식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필요에 부합되게 활용할 수 있는 생산양식을 정착시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윤 중심의 생산, 교환가치 중심의 생산이 아니라 유용성과 사용가치 중심의 생산으로 작금의 착취적인 생산체제를 노동자 민중의 요구에 맞게 변혁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부르주아 국가가 “소수 지배계급의 독점적 이권을 대변하는 형식적 민주국가”라는 기만성 성격을 지닌 것과 달리, 노동자국가는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구현하는 실질적 민주국가”라는 특질이 있다. 자본주의 운동법칙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경제공황, 불평등, 기후위기 등의 파국은 오직 사회주의(홍 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연구’ 기사로는 백철현 노정협 노동자정치신문 편집위원장이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 「‘수정주의 전위’, 유고의 시장사회주의」가 실렸다. 백철현 편집위원장은 쏘련을 위시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지령경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결여’ 등에서 비롯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배격하면서, 오히려 중앙집중적 계획의 약화와 상품관계의 존속, 전위당의 약화 등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과 국가의 경제계획을 ‘민주화’와 ‘노동자 자치’를 구실로 형해화시킨 뒤 ‘노동자자주관리’ 체제를 전격 도입했다. 유고의 노동자자주관리는 1950년 근거법령이 마련된 이후로 1952년 실시되었다. 이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에 입각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당초 유고공산당은 “자치와 분산의 시행으로 인해 민족 간 모순이 줄어들고 기업 내부의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가 증대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계획경제의 파괴와 시장경제의 부활로 이어졌고, 곧 부의 불평등, 물가 상승, 무역수지 적자 급증 등의 심각한 위기로 비화되었다. 국가 내부의 민족적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으며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에 따라 경영되던 기업들 또한 점차 당의 통제를 벗어나 종국엔 유고연방의 해체와 부르주아적 다당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분량상 글에 담지 못한 양질의 자료들이 두루 빛났던 『현장』 5호였다. 이번호의 상징어는 ‘깃발’은 물론 변혁의 깃발을 말한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위기가 격화되고 노동자 민중의 시름이 깊어진 정세 가운데 여전히 ‘체제 전환’이니 ‘내 삶을 위한 사회주의’와 같은 모호한 구호들이 변혁을 사칭하여 나부끼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부터 그 깃발부터 바로 쥐어야 한다. 변혁을 향한 멈추지 않는 발걸음이 현장으로, 광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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